만의 입구 좁고 수심 얕아… 간척하기에 좋은 천혜 환경
고려 천도 이후 인구 갑자기 늘자 '자급자족' 위해 시작
강화주민 "전란때 곡식 일궈 조정 먹여 살렸다" 자부심
권력층에 수탈의 아픔… '내부 응집력 키웠다 '분석도

강화도는 우리나라 섬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강화도 곳곳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진 넓은 평야는 국내 다른 섬에서 보기 힘든 풍광을 만들어낸다.

강화평야의 비밀은 간척에 있다. 강화평야 대부분은 사람이 제방을 쌓아 만들어낸 땅이다. 현재 평야가 있는 자리에 바다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강화도 간척분야를 연구해 온 고려대 최영준 명예교수는 이야기한다.

최 교수가 간척지성 토양을 조사한 결과, 강화에 여의도 면적(2.95㎢)의 44배에 달하는 130㎢의 간척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강화도 전체 면적(424㎢)의 30%에 해당하는데, 국내에서 한 지역에 이 처럼 넓은 간척지가 있는 곳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간척으로 복잡했던 강화도 해안선은 현재의 단조로운 모습을 갖추게 됐다.

강화도에서 간척으로 섬과 섬이 연결되기도 했다. 청구도, 동요도 등 오래된 지도를 보면 강화의 부속섬인 석모도가 원래 4개의 섬으로 나눠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송가도(松家島), 석모도, 매음도(煤音島), 어유정도(魚遊井島) 4개 섬이 합쳐지면서 지금의 석모도(席毛島)의 모습이 갖춰졌다.

4개 섬 사이에 제방이 놓이고, 그 사이에 평야가 생긴 것이다. 이 평야는 송가도의 이름을 따 송가평이라 불리는데, 그 넓이는 약 660만㎡에 달한다.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도 본래 강화와 떨어진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에 속해 있었다.

강화도와 고가도 사이에 선두포언(堰)과 가릉언이라는 방조제가 놓이면서 선두평(坪), 가릉평이 생겼고, 마니산은 강화 강화본토와 합쳐졌다.

# 강화 간척의 역사

강화도에서 대규모 간척이 이뤄졌다는 기록은 800여년 전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개개인이 조금씩 강화에서 간척을 한 역사는 약 1천년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간척이 이뤄진 이유는 '전쟁' 때문이었다. 고려의 최씨 정권은 1232년 7월 몽골군의 공격을 피해 수도를 개경에서 인천 강화도로 옮겼다. 당시 개경의 10만호가 대부분 강화도로 이주해 왔고, 연백, 해주, 파주 등에 있던 주민들도 강화로 피난을 왔다.

지금 인구수도 7만명에 불과한 강화에 십수만명이 살게 됐으니 심각한 식량난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몽골군을 피해 백성들이 농토를 버리고 대피하면서 거둬들일 수 있는 세금이 줄어들었고, 조운(漕運)까지 막히게 되면서 강화에서 자급자족할 방안을 찾아야 했다. 그 결과 대규모 간척이 시작된 것이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800여년 전인 고려 고종 43년(1256년)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군사 요지에 설치한 토지를 일컫는 둔전(屯田)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이 둔전 위치는 현재 강화도 송해면, 선원면, 불은면 우측 해안 일원이다.

고려사절요에는 '제포(梯浦)와 와포(瓦浦)를 방축하여 좌둔전(左屯田)을 만들고, 이포(狸浦)와 초포(草浦)를 방축하여 우둔전(右屯田)을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강화에서 간척이 이뤄졌다. 특히 여러 차례 전란(戰亂)을 겪으면서 임금이나 조정이 피신할 수 있는 보장지처(保藏之處)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후 있을 난에 대비하기 위해 강화도에 간척지 규모를 늘리게 된 것이다.

강화도에서 가장 큰 간척지인 망월평(望月坪)이 생긴 것도 여몽항쟁 이후 고려 공민왕대다. 이 때는 갯골을 토석으로 막아 제방을 쌓고 조수의 출입을 차단하는 축제한수 공법이 가능해지면서 깊은 갯골까지 막을 수 있게 됐고, 둔전의 확대가 촉진됐다고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망월돈대 주변 현재 강화군 망월리 구하리 일원이 망월평이다. 고려 말 쌓았던 제방을 주민들은 지금도 '만리장성둑' 혹은 '성둑'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이 끝난 뒤 강화에서 대규모 간척사업이 시작됐다. 조선 개국 후 200여년간 평화로웠던 시기에 강화에서 간척이 이뤄지지 않다가 전란이 있자 조정에서 나서 간척을 시작한 것이다.

청국의 포로가 되었다가 귀국해 즉위한 효종은 강화도 굴곶(屈串)평과 장(長)평에 둔전을 설치했다고 문헌에 기록돼 있다.

강화도 해안선을 보면 만(灣)의 입구는 좁고 안쪽은 수심이 얕은데다 넓은 갯벌이 발달한 곳이 많아 간척하기 좋은 천혜의 환경을 갖고 있다.

고려대 최영준 교수는 "20세기 초 일본인들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에서 간척공사를 했을 때 드는 비용이 같은 면적의 우리나라 서해안을 간척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의 7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이런 강화의 자연환경과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더해져 조선 후기에는 무려 11만명이 동원된 제방 선두포언(船頭浦堰) 공사가 추진됐다. 1707년 완공된 선두포언은 조선후기 간척공사를 대표하는 것으로 당시 이용 가능한 모든 기술과 장비가 동원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두포언 공사 당시 강화유수 민진원이 세운 선두포축언시말비(船頭浦築堰始末碑)는 현재 강화도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데 구체적인 간척공법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이곳엔 이렇게 적혀 있다.

'강희46년 정해년(1707) 5월 어느 날 병술년(1706) 9월5일 왕의 허락을 받아 18일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5월25일 완료하였다. 둑의 길이는 410보로 토석으로 축조하였다. 넓이는 47파(把), 높이는 10파, 포구의 수심은 7파이고, 동쪽 수문의 넓이는 15척(尺), 길이는 20척, 서쪽 수문의 넓이는 13척, 길이는 18척이다….(중략)

들어간 물력은 역량미 2천석, 모군의 역가목 50동(同), 신철 7천근, 니탄 800석, 생갈 3천사리 등이다.'
여기서는 '생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생갈은 싸리, 덩쿨의 일종을 일컫는데 당시 여러 개 돌을 하나로 묶는데 사용됐다는 것이다.

돌 여러 개를 묶어서 제방을 쌓다보니 큰 파도에도 쉽게 휩쓸려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철사로 돌망태를 만들어 떠내려보내 만드는 현대 간척공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조선 말 강화에서 현대 수준의 간척공법이 사용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선두포언 공사를 지휘했던 강화유수 민진원은 상소가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갯벌에 판자를 깐 후 돌을 운반했다고 적혀 있다.

# 간척, 강화의 자부심과 아픔

800여년에 걸친 간척은 강화사람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강화사람들이 갖는 자부심의 원천도 간척에서 찾을 수 있다.

강화사람들은 1232년 몽골군의 공격을 피해 강화도로 피신한 고종과 1627년 정묘호란으로 피신한 인조, 2명의 임금을 모셨는데 이 때 직접 만든 땅에서 곡식을 일궈 조정을 먹여 살렸다.

강화가 없었다면 임금과 조정이 전란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강화 사람들이 지금도 나라를 구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지난 21일 강화도 최대 간척평야인 망월평에서 만난 조경진(75·강화군 화점면 망월3리 노인회장)씨는 "우리 부락이 직접 이 평야를 만들었다. 누가 준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며 "선조들이 땅을 만들어 왔고, 나 역시도 젊었을 때 지게로 돌과 흙을 나르며 우리 땅을 만들었다. 우리가 땅을 일구지 않았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현대에도 쉽지 않은 작업인 간척을 강화 사람들은 고려 말부터 행해왔다. 이 때문에 억척스러운 강화사람들의 모습이 만들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강화를 연구한 사람들은 화문석이나 왕골을 팔러 육지에 나가 음식값과 숙박비를 아끼려 남의 집 툇마루에 앉아 배가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던 억척스러운 주부의 모습을 강화도 여성의 이미지로 그렸다.

최영준 교수는 "강화도에 시집온 여자들은 자신들이 돈을 벌어 간척에 들어가는 비용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억척스러웠다. 그 때문에 강화 여자가 뻔뻔하다는 이미지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강화사람들이 외부에 배타적이고 내부 응집력이 강한 특성을 갖게 된 배경도 간척에 있다는 분석이 있다.
갖은 고생을 하며 만든 땅을 외부에 빼앗긴 역사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봐도 외지에서 온 권력층이 강화 사람들의 간척지를 빼앗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숙종32년(1706)에는 강화 유수 민진원이 송가도 간척지에 세를 거두려는 내관(內官)을 벌주라며 상소하는 내용이 나온다.

간척지 수탈의 역사는 근현대에도 반복됐다. 강화 사람들은 밀가루를 받으며 간척 부역을 하고, 실제 이익은 외지사람이 챙겨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힘들게 만들어 놓은 간척지가 외지인이 조성한 대규모 간척지에 흡수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강화군 길상면과 화도면 사기리 일원의 선두평도 70년대 확장돼 광활한 간척지 '길화지구'가 만들어졌는데, 이 땅은 당시 최고 권력층의 친척이 와서 만들고 지금도 이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길상면 선두4리 정찬열(62) 이장은 "72년도 간척이 진행됐는데 간척 규모가 360정보(町步 )다.

1정보가 3천평이니 100만평(33만㎡)이 넘는 넓은 땅이다"며 "군사정권 시절에 당시 권력층의 조카 사위인가 하는 사람이 간척을 한다고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지금은 회사 형태로 이곳에서 경작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화도는 800여년 동안 간척이 이뤄진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와 관련한 공법이나 간척이 육지, 해양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등을 연구하는 최적지라 할 수 있다. 관광 등의 측면에서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친환경적' 간척을 연구할 수 있는 지역이 강화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강화 간척과 관련된 역사 유적은 전혀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망월평에 만리장성둑은 농지정리로 유실됐고, 강화 최대 방조제인 선두포언도 그 위에 도로가 놓여 그 흔적이 유실됐다.

조선 후기 강화 간척과 관련한 구체적 공법이나 재료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선두포축언시말비도 어느 집 마당에 굴러다니던 것을 고려대 최영준 교수가 발견했다고 한다. 관련 문헌이나 주민들의 전언을 통해서만 강화도 간척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글 = 홍현기기자·사진 = 조재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