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서세동점 시기, 프랑스·미국의 잇단 침략
강화, 한강 향하는 길목… 수도 한양 방어 요충지
재래식 무기들로 ‘결사항전’ 펼쳤지만 끝내 함락
무능한 조정 탓 세계 열강과 첫 충돌 ‘아픈 수모’


서양 오랑캐 400~500명이 광성진에 침입했다 // 이양선에서 쏘아대는 대포알은 비 오듯 날아왔고, 육지의 적들이 쏘는 조총알은 우박 쏟아지듯 마구 떨어졌다 // 좌우로 적들이 달려들어 선두에 선 우리 군사들이 곧 패했고, 뒤따라 온 부대도 패하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8년 4월24일자 (광성보 전투)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고 했다. 오늘날 견고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전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바로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다. 우리 역사에서 미국과 벌인 유일한 전쟁, 그 격전의 현장은 다름 아닌 인천 ‘강화도’였다.

강화도는 이 전쟁에 앞서 1866년(고종 3년) 프랑스로부터도 침략을 받았다. 조선과 서구 열강이 벌인 첫 전쟁, 병인양요였다. 그해 초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신도들이 처형된 일을 구실로 삼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한 사건이었다.

‘서세동점’의 시기였던 19세기. 강화도는 병인·신미양요, 그렇게 두 전쟁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강화도는 수도 한양을 방어하는 최전선의 군사 요충지였다. 또 강화도와 경기도 김포 사이로 흐르는 물길인 ‘염하’는 당시 전국 각지의 세곡(稅穀)을 한양으로 운반하는 뱃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제국주의 서구 열강들은 당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강화도를 어떻게든 손아귀에 넣고자 했다. 강화도를 차지하고 보급로인 뱃길을 쥐고 있으면 굳이 한양까지 쳐들어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조정을 향해 압박을 가할 수 있던 것이다.

서구 열강의 침탈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던 강화도, 그것은 숙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화도에는 ‘진’(鎭)이라는 5개의 주요 군사 주둔지가 있었다. 반드시 사수해야 했던 염하였기에 5개의 진이 모두 김포를 마주 보는 염하 뱃길을 따라 자리했나 보다. ‘진’보다 규모가 작은 군사 시설인 ‘보’(堡)와 그 아래 여러 개의 ‘돈대’(墩臺)들도 강화도 동쪽 해안가를 중심으로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 강화도가 피로 물들다

1871년(고종 8년) 음력 4월 14일. 미 해군 제독인 로저스가 이끄는 미 함대가 광성보 앞바다로 들이닥쳤다. 광성보에 진을 치고 있던 어재연 장군은 적의 군함이 나타나자 포격 명령을 내렸다. 광성보와 인근 덕포진 포대에서는 일제히 사격을 실시한다.

하지만 조선군이 보유한 포는 보잘 것이 없었다. 포탄이 날아가는 거리도 짧았을 뿐더러, 포탄도 그저 커다란 쇠 구슬에 불과했다. 조선군은 미 함대의 화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조정은 안일했다. 미 함대는 교전 도중 군함 한 척이 암초에 부딪혀 피해를 입자 작약도로 퇴각했다. 조정에선 미 함대가 겁을 먹고 도망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미국과 벌인 그 날의 첫 교전은 강화도가 피로 물드는 신미양요의 서막에 불과했다.

미군은 열흘 뒤 강화도 상륙작전을 펼친다. 미 군함에선 함포사격을 가했다. 초지진에 이어 덕진진이 맥없이 무너졌다. 어재연 장군이 지키고 있던 광성보도 육탄전까지 벌어진 극렬한 전투 끝에 결국 적의 손아귀에 내주고 말았다.

미 함대가 5월 16일 자진 철수한 뒤 조정에서 파악한 아군 피해자는 전사자가 53명, 부상자는 24명에 달했다. 강화도를 점령한 미군은 민가에 불을 지르는 등 온갖 만행을 일삼았다.

미군이 당시 빼앗아 간 전리품 중에는 광성보에 걸려 있던 수자기(帥字旗, 대장의 군기)가 있었다.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있던 이 깃발은 지난 2007년 임대 형태로 돌아와 현재 ‘강화전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 결사항전의 광성보, 그리고 한미 동맹

입춘이던 지난 7일 오전 초지대교를 건너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의 ‘광성보’로 향했다. 신미양요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숲길을 따라 광성보 안을 걷다 보면 어재연 장군 형제를 추모하는 ‘쌍충비’와 이름없는 병사들의 무덤인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신원 미확인 시신들을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이 나온다.

쌍충비 옆에는 1978년 9월 세웠다는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강화도를 방문했을 때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전사한 병사들을 애석하게 여겨 이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강화도 등 전국의 호국 관련 유적에 대한 복원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고 한다.

깨알 같이 새겨진 비문을 유심히 읽다가 박 전 대통령의 이름 석 자가 날카로운 무언가에 의해 훼손된 것을 발견했다. 비문을 세우도록 한 대통령을 칭송하는 구절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문 초반부에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흠집이 난 글자가 있었다.

조선군의 결사적 항전이 훗날 평화적인 한미 교섭을 이끌어내고 오늘날까지 호혜 평등의 우호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밑바탕이었다는 내용의 구절에서, ‘호혜’라는 두 글자였다. 비문을 훼손한 이는 도대체 무슨 의도였을까.

광성보의 외곽 초소 겸 포대인 용두돈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선 조선군과 미 함대의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손돌목’ 해역이 한눈에 펼쳐진다. 광성보 앞바다는 물살이 거세고 암초가 많기로 유명하다.

고려 시대 뱃사공인 손돌이 강화도로 피난을 오는 임금을 배에 태우고 바다를 건너가다 거센 물살 때문에 임금을 위태롭게 했다는 오해를 사 원통하게 죽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용두돈대에서 내려다본 광성보 앞바다는 잔잔한 듯 보였지만 배를 타고 물살을 가를 때처럼 소리가 거칠고 매서웠다.

# 끝나지 않은 두 전쟁

신미양요는 조선 조정의 무능함을 드러낸 전쟁이었다. 불과 5년 전 조선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며 서구 열강이 보유한 근대화된 무기 체계의 위력을 실감하고도 훗날을 적절히 대비하지 못했다. 조선군의 한참 뒤처진 재래식 무기로는 큰 화를 면키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강화도는 프랑스군에 이어 또 다시 미군의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혔다.

1866년(고종 3년) 9월, 프랑스 함대는 한강 상류로 진입해 조선을 정탐하던 중 불과 얼마 전 대동강에서 서양 선박 1척이 불에 타 침몰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5년 뒤 신미양요의 발단이 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였다.

조선 조정은 10월 14일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상륙한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다. 프랑스군은 15일 강화성을 점령해 방화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지난 2011년 임대 방식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도서도 당시 빼앗긴 것이다.

이날 마지막 답사로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삼랑성)을 찾아가 봤다. 프랑스군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전세를 일순간에 뒤 바꾸는 일대 사건, 양헌수 장군이 지휘한 ‘정족산성 전투’의 흔적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정족산성은 지세가 험준해 난공불락 천혜의 요새라 할 만했다.

산줄기 성벽을 따라 오르면 아래로 깎아지는 기슭이 아찔해 보일 정도였다. 전등사를 지나 정족산성 동문으로 향하다 보니 양헌수 장군의 승전을 기리는 비를 찾을 수 있었다. 양헌수 장군은 김포 덕포진에서 강화도 덕진진으로 건너와 정족산성에 진을 친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군은 산성으로 진입하려다가 매복해 있던 조선군의 기습 공격을 당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한다. 프랑스군은 이후 11월 10일 강화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김형우(안양대 교수) 강화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제국주의란 거대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조선이 그동안 보지 못한 세계 열강의 문명을 처음 접하고 충돌하는 지점이 바로 강화도였다”며 “서구 열강이 당시 약탈해간 우리의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하는 과제가 아직 남아있다”고 말했다.

두 양요는 나라에 힘이 없고 정부가 무능하면 언제든지 전 세계 열강들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조선은 불행하게도 신미양요를 겪은 이후 또 5년이 지난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의 강압에 의해 불평등 조약을 맺는 수모를 당한다.

/글 = 임승재기자 · 사진 = 조재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