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 1천여년간 20명 넘게 강화로 유배
수도와 가까워 감시 쉽고 ‘왕의 영향권’ 위치
연산·광해군 등 철저한 통제 속 비참한 생활


조선시대 왕 중 조(祖)·종(宗)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군(君)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왕은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 두 명 뿐이다. 연산군은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일으켜 100여 명을 사형시키는 등 폭군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반면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친인척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했지만, 실용주의와 중립외교를 펼친 뛰어난 왕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 때문일까. ‘광해-왕이 된 남자’, ‘왕의 얼굴’, ‘화정’ 등 광해군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잇따라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반정(反正)에 의해 폐위된 뒤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광해군은 최근 재조명받기 시작했지만 강화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연산군이 유배 생활을 했던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에는 ‘연산군잠저지(燕山君潛邸地)’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읍내리 일대에는 ‘연산골’이란 지명도 남아 있어 그나마 유배 흔적을 찾을 수 있다.

# 강화, 왕족의 유배지

강화지역에서 유배생활을 한 왕과 왕족은 연산·광해군 뿐이 아니다. 강화도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1천여년 동안 왕족의 유배지로 활용됐다. 연산군, 광해군,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군, 경안군 등 조선시대에만 10명이 넘는 왕과 왕족이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고려시대에는 21대왕인 희종, 23대 왕인 고종, 우왕, 창왕 등이 강화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강화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왕과 왕족만 모두 20명이 넘는다.

유배지로서의 강화도 특징은 이처럼 대부분이 왕과 왕족의 혈통을 갖고 있는 인물이란 것이다. 유배지로서 활용된 곳은 전국에 많지만 강화만큼 왕과 왕족이 많이 찾은 유배지는 없다고 한다.

이처럼 강화도가 왕족만의 유배지로 활용된 이유는 도서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에 수도인 서울·개경과 가깝다는 정치적 이유가 더해졌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수도와 가깝다는 것은 감시와 통제가 상대적으로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 수도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왕의 영향력은 커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왕래가 쉽지 않은 섬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강화는 왕족의 유배지로 활용됐다.

수 많은 왕족들이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했지만 그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왕족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철저히 유배생활이 통제됐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과의 만남도 제한됐을 뿐 아니라 글을 쓰는 것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던 것이 왕족의 유배생활이었다.

이 때문에 강화에서 유배생활을 한 왕족들은 유배생활에 대한 기록을 전혀 남기지 못했다. 다만 왕조실록 등에 간략히 기록돼 있을 뿐이다.

# 폭군 연산과 강화도

지난 11일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를 찾았다. 이 곳에는 ‘연산군잠저지’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연산군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이 곳은 강화향토유적 28호로 지정돼 있다.

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가장 잔인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산군은 재위기간(1495~1506) 무오사화(1498년·戊午史禍)와 갑자사화(1506년·甲子士禍) 등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사형에 처해진 이들만 100명을 넘는다. 연산군은 사화를 통해 높아진 권력을 악용했다. 주색에 빠져 연회를 즐겼다. 그 결과 국가재정은 어려워졌고, 신하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결국 연산군은 반대세력이 일으킨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폐위됐으며, 조선 최초로 반정으로 폐위된 인물이 됐다.

두달간의 유배생활이었지만, 교동에는 연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연산군잠저지’라고 쓰여 있는 비석 인근에는 연산군과 부인 신씨로 추정되는 초상화가 걸려있는 ‘부근당(扶芹堂)’이 있다.

이날 찾은 부근당 입구에는 배추와 무 등 채소와 술 등이 놓여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 지역 주민들은 부근당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교동면 고구리 화개산 인근은 ‘연산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에서는 겨울에 부는 바람을 ‘연산작풍(燕山作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날 만난 주민 한기출씨는“지금은 그런 사람이 거의 없지만, 30~40년 전 제 아버지만 해도 겨울에 바람이 불면 ‘연산이 화가 났나보다’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 광해군 그 파란만장한 삶

광해군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살아있을 때도 그렇지만 죽고 나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인 공빈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자인 임해군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고, 광해군은 즉위한 뒤 임해군을 유배보냈다. 신하 중 일부는 전라남도 진도로, 일부는 교동으로 유배를 주장했다. 결국 광해군은 교동으로 임해군을 유배보낸다.

이는 자신의 형이기도 한 임해군을 가까운 곳에 보내려는 배려와 함께 감시의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역사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광해군이 임해군을 유배보낸 뒤, 명나라는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조사관을 보냈다.

이에 광해군은 외척인 김예직을 임해군에게 보내 명에서 온 조사관을 만났을 때 답할 말을 일러주었다. 결국 임해군은 “나는 일찍이 왜적에게 붙잡힌 적이 있어서 정신을 잃고 못된 행동을 하였다. 또한 중풍에 걸려서 손발을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명은 광해군의 즉위와 관련한 의심을 거뒀다.

광해군은 이 외에도 능창군(綾昌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도 역모에 관련됐다며 유배보내는 등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왕족들을 숙청했다. 하지만 결국 서인세력이 주축이 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 왕족의 유배생활

왕족의 유배생활은 일반 사대부나 관리의 유배생활과는 달랐다. 사람과의 만남과 서신교류 등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유배형이 죽음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왕족에게 강화는 ‘유배지 또는 죽음’이라는 의미로 다가왔을 수 있다.

광해군은 반역을 모의한 자들이 능창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능창군을 위리안치의 형을 내리고 교동으로 유배 보낸다. 바깥과의 출입이 금해졌기 때문에 능창군은 수장이 주는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수장은 모래와 흙이 섞인 밥을 능창군에게 주었다.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참기 힘들었던 걸까. 결국 능창군은 유배생활을 한 지 6일째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조선시대 안평대군은 유배형에 처해진 뒤 교동에 도착한 해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으며, 영창대군은 8세의 나이에 유배지인 강화에서 죽임을 당했다.

고려시대 희종을 강화로 유배보낸 최충헌은 강화를 다녀온 신하가 희종의 궁핍한 생활을 보고하자, 살아있는 것만도 감사히 여겨야 된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왕위에서 쫓겨나 교동에서 유배생활을 한 연산군은 2달여만에 병으로 죽었다.

광해군은 강화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가 제주도로 가는 배에서 쓴 시 한 편이 아직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는 강화에서 유배생활을 한 왕이 남긴 유일한 시다.

바람에 비가 날려 성 위에 뿌리는데/ 백 길 높은 다락 후텁지근 바다 음기./ 푸른 바다 노한 파도 날은 저물고/ 푸른 산 슬픈 빛은 가을빛을 띠었네./ 고향 생각에 왕손의 풀은 신물이 나고/ 객지의 꿈은 왕도의 물가에서 자주 깨네/ 고국의 흥망은 조식조차 끊기었기에/ 안개 낀 강 외로운 배에 누워 있노라.

글 = 정운기자
사진 = 조재현기자
일러스트 = 박성현기자 /아이클릭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