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 목숨 끊거나 외적과 싸우다 죽은 29명
강화 충렬사에 위패 모셔놓고 매년 제사 지내
이름 안 알려진 순절인·자결하는 열부도 부지기수
‘잊혀진 義’ 되새기고자 학교·학습공동체 발걸음

강화 함락 소식을 접한 강화 선비는 “몸을 바쳐 의리에 죽는 것은 신하의 법도”라며, 강화 여성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자결했다. 전국적으로 강화와 같이 순절한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강화에서는 고위 관료뿐만 아니라 민초(民草)와 여성까지 집단으로 목숨을 끊었다.
인조가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삼전도의 굴욕’으로 대표되는 병자호란. 당시 자신이 믿는 가치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강화사람들 덕에 병자호란이 부끄러운 패전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
김우철 동해대학교 교수는 신편강화사에서 “병자호란이 부끄러운 패전으로만 기억되지 않는 것은 충의를 지키려다 장렬하게 죽어간 많은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강화에 고립되었던 이들은 항복하여 구차한 삶을 살기보다는 절의를 지키며 떳떳하게 죽는 길을 택했다”고 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충(忠)이라는 가치를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한다. 돈 앞에 의리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의리는 TV광고 등에서 희화화하는 대상이 됐다. 정절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웃음거리가 된다. 강화사람들이 목숨을 내놓고 지키려고 했던 가치가 천대 당하는 오늘날, 강화순절인이 갖는 의미가 더욱 크다.
강화순절인 29명의 위패가 있는 강화충렬사는 잊혀진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지금도 학교 등에서 현장학습지로 충렬사를 찾고 있다. 하지만 강화충렬사가 갖는 의미는 강화 내부에서 점점 더 저평가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준다.
지난 4일 이른바 강화순절인으로 불리는 인물들의 위패가 있는 강화 충렬사를 찾았다. 이곳에는 외적에 강화가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외적과 싸우다 숨을 거둔 29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충렬사 중심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가 함락되자 자결한 김상용에 맞춰져 있다.
충렬사는 김상용의 집이 있던 곳에 건립됐다고 전해진다. 이곳에는 주벽, 좌벽, 우벽으로 나눠 위패가 모셔져 있다. 김상용의 위패는 충렬사 중앙이라 할 수 있는 주벽(主壁)에 홀로 있었다.
연려실기술은 강화지 등을 인용해 김상용이 시종에게 담뱃불을 가져오도록 지시하자 자결하려는 사실을 알고 가져오지 않으려 했다고 전한다.

김상용의 의로운 행동은 후대에 여러 사람이 기리고 있다. 화남 고재형도 1906년 강화도의 각 마을을 직접 방문하면서 남긴 ‘심도기행’에 김상용을 기리는 글을 썼다. 인조실록 등에는 우승지 홍명형도 김상용을 따라 남문루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권순장의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 딸과 두 아들을 먼저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화남 고재형은 심도기행에 이상길, 심현, 윤전, 홍익항, 윤계·윤집, 황일호, 이시직, 송시영, 강위빙, 이돈오·이돈서, 황선신, 구원일, 강흥업, 김수남, 민성 등 충렬사에 제향된 인물들을 기리는 글을 썼다. 이들은 스스로 분신을 하기도 했고, 강이나 바다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이들이 자결한 모습은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등에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는데, 지금 읽어도 참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민성은 강화 전등사에서 집안 13명이 함께 자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강화 충렬사는 1641년(인조 19)에 건립해 현렬사(顯烈祠)라 부르다가 1658년(효종 9)에 강화 유수 허휘가 충렬사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공식 안내문에 나와 있다. 화남 고재형 선생은 1906년 쓴 심도기행에서 이곳에 21명을 모셨다고 했는데 현재는 이곳에 29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어떻게 8명이 늘어나게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충렬사 제사를 관장하고 있는 강화충렬사유림회에 따르면 후손의 상소 등으로 충신이 확인됐고, 이들을 추가로 충렬사에 배향하게 됐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어재연, 어재순 등이 추가돼 현재 29명에 이르게 됐다고 강화충렬사유림회 도유사(都有司) 김민중(59)씨는 설명했다.
어재연은 신미양요(1871)가 일어나자 진무중군으로 광성진 수비를 맡아 미국군과 교전하다 전사했다. 어재연의 아우 어재순도 이때 함께 전사했다. 김민중씨는 “강화 순절인으로 같이 충렬사에 모시자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추가로 모시게 됐을 것이다”고 했다.
강화순절인 집안의 후손, 강화사람들로 구성된 유림회는 매년 음력 10월 중정(中丁)날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예전 전쟁터에서 먹었던 것과 같이 익히지 않은 음식을 제사에 올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제사 규모는 크게 줄었다.

예전에는 소작을 주면 제사에 필요한 경비를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소작농을 부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종합토지세 도입으로 위토에 세금 70만~80만원이 매겨진 것을 내지 못해 4년 동안 위토를 압류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왕이 제사관을 따로 보내던 풍습이 사라져 이제는 유림회에서 자체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데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강화군에서 일부 보조금을 주지만 제사를 지내기에는 부족한 수준이라고 했다. 제사 때 소 한 마리를 잡던 것이 돼지 한 마리로 축소됐고, 지금은 소머리만 사다가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주변의 관심도 적어져 강화군수나 지역구 국회의원 등도 참석하지 않고, 수백명이 제사에 참여하던 것이 지금은 100명도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강화충렬사가 상징하는 가치를 찾으려는 방문객들의 발길은 이어지고 있다. 방명록에서도 학교나 학습공동체 등에서 충렬사를 찾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화는 충렬사에 모셔진 인물을 제외하고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많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한 지역에서 같은 기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강화처럼 많았던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가 함락되자 강화에 있던 여성 가운데도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연려실기술은 “부인들이 절개를 위하여 죽은 것은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었으며, 천인(賤人)의 아내와 첩도 자결한 사람이 많았다. 적에게 사로잡혀 적진에 이르러 욕을 보지 않고 죽은 자와 바위나 숲 속에 숨었다가 적에게 핍박을 당하여 물에 떨어져 죽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또한 “머리 수건이 물에 떠 있는 것이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고 했다. 한 선비의 아내는 적이 죽은 사람을 보면 옷을 모두 벗겨 간다며 적의 손이 가까이하지 않도록 자신이 자결한 뒤 시체에 불을 태워 달라고 요구했다고 연려실기술에 기록돼 있다.
정절을 지키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강화 여성들을 기려 화남 고재형은 심도기행에 “정축 2월 난리 통에 모든 고을 비었으니, 열부들이 다투어 물과 불에 몸 던졌네. 오랑캐도 놀라서 서로 보고 말하기를, 조선의 풍속은 중국과는 다르구나”고 했다.
/글 = 홍현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