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시대상 연구 활용 보존가치 높아
강화도내 총 70기 유네스코 유산 등재
전라도 지역과 달리 대부분이 탁자식

伊 피사의 사탑 같은 ‘강화 부근리 지석묘’
관광객 “ 특별한 건축 기술 있나” 묻기도
무덤·제단에 이용… 돌칼 등 부장품 출토


강화도에는 선사시대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지역 곳곳에 남아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수천년 전 청동기 시대 유적인 고인돌이다.

지난 2000년 12월 2일 강화를 비롯한 전북 고창과 전남 화순지역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공식 등재됐다. 강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리며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세계유산 등재는 강화 고인돌이 한국 청동기시대의 사회구조는 물론, 동북아시아 선사시대 문화교류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산임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고인돌은 전 세계에 6만기가 있는데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4만기 정도가 한반도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강화 고인돌의 연구·보존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문화상과 정치체제, 사회구조 등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역사연구의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강화의 고인돌

세계에서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된 고인돌은 강화·고창·화순의 고인돌이 유일하다.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린 고인돌은 강화군의 고인돌 70기, 전라북도 고창군 447기, 전남 화순군 306기 등이다. 한 지역에 수백 기 이상의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곳은 한반도가 유일하다고 한다.

다른 지역의 고인돌이 평지와 낮은 구릉에 있는 것과 달리 강화군의 고인돌은 산지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산을 중심으로 부근리·삼거리·오상리·고천리에 고인돌군이 위치하며 북단에 교산리 고인돌군이 있다.

고인돌은 그 모양에 따라 탁자식(두 개의 돌 위에 넓은 덮개돌을 올려놓은 고인돌)과 바둑판식(땅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놓은 뒤 큰 덮개돌을 올린 고인돌), 개석식(땅속 무덤방에 받침돌 없이 덮개돌을 올린 고인돌) 등이 있다.

강화 고인돌은 바둑판식과 개석식이 주류를 이루는 전라도 지역과 달리 주로 탁자식 고인돌이 많이 남아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이영문 동북아지석묘연구소장(목포대 교수)은 “한강 유역을 포함한 이북 지역에 탁자식이 주로 분포하고 한강 이남으로 내려올수록 바둑판식과 개석식 고인돌이 분포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러한 특성들은 청동기 문화의 이동·전파 과정과 한반도 고인돌의 변천사 등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설명했다.

#직접 찾아간 강화 고인돌

지난 13일 오전 강화역사박물관 앞에 위치한 사적 137호 ‘강화 부근리 지석묘’를 찾았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는 남한에서 가장 큰 탁자식 고인돌로 유명하다. 지석묘(支石墓)는 고인돌이라는 한글 명칭이 일반화되기 이전에 사용된 일본식 표기법이다.

이날 찾은 강화 부근리 지석묘는 커다란 뚜껑처럼 생긴 덮개돌을 지탱하는 받침돌이 기울어져 있어 마치 ‘피사의 사탑’을 보는 것 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보였다.

동행한 한성희(49) ‘고인돌사랑회’ 부대표는 “이렇게 기울어진 모습은 강화에 있는 대부분 탁자식 고인돌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라며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이스터 섬의 거석상처럼 강화 고인돌에도 특별한 숨은 건축기술이 있었냐고 묻는 관광객도 많다”고 말했다.

차를 타고 강화군 내가면의 ‘부근리 점골 고인돌’로 이동했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와 달리 반듯하게 서 있는 받침돌이 오히려 어색해 보였다.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가 이뤄지기 전에는 받침돌이 쓰러져 있었지만, 2010년 9월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하점면 삼거리(三巨里) 고려산 서북쪽 5부 능선쯤에 자리한 ‘강화 삼거리고인돌군’은 비교적 높은 산지에 있어 ‘강화 부근리 지석묘’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고인돌을 보기까지 10여분간 산행을 해야 했는데, 하천이나 해안가가 아닌 산지에서도 발견되는 것이 강화 고인돌의 특징이다. 이곳 고인돌군과 10여m 떨어진 곳에서는 고인돌을 만드는 바위를 캤을 것으로 보이는, 채석장소로 추정되는 흔적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가면 오상리에 있는 ‘강화 오상리고인돌군’을 찾아갔다. 고려산 서쪽 봉우리인 낙조봉 끝자락에 있는 이 고인돌군에는 ‘내가고인돌’을 비롯한 작은 고인돌 10여기가 3~4m 간격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남한 최대 탁자식 고인돌인 ‘강화 부근리 지석묘’를 보고 당시 지배계급의 규모와 휘둘렀던 권력의 크기를 떠올렸다면, 이 곳 고인돌군에서는 고인돌 축조당시 지배 계급의 권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50㎝ 높이도 안 되는 받침돌의 높이와 어른 3~4명이 들어 올릴 수 있어 보이는 덮개돌을 보면 정겹기까지 하다.

한 부대표는 “강화의 고인돌은 각각 다양한 모습과 특성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아직도 상당수 관광객들은 ‘강화 부근리 지석묘’가 강화 고인돌의 전부로 착각하고 발길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며 “강화도는 여러 형태의 고인돌군을 볼 수 있는 최고의 역사 교육 장소”라고 했다.

#고인돌에 대한 여러 가지 궁금증

강화의 고인돌을 보면 이 거대한 고인돌의 용도가 뭐였고 어떻게 옮겨졌느냐 하는 것들이 자연스레 궁금해 진다.

고인돌은 무덤과 제단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인돌 하부에는 시신을 넣어두는 관과 같은 모양의 무덤방이 나타나기도 하고 돌칼·화살촉 등 부장품이 출토되기도 한다. 제단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구릉 정상부나 높은 산 위에 단독으로 있고 주변의 평지가 내려다 보이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곳에 있는 고인돌은 제단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고인돌을 만들려면 수십 톤에 이르는 돌덩이를 캐내고 이를 옮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고인돌이 있다는 것은 일정한 지역에서 정착생활을 하는 제법 큰 규모의 부족이 존재했다는 흔적이다. 이동생활을 하는 유목민집단에서는 대규모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인돌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마을 어귀나 산자락에 수천년 간 자리잡아 온 고인돌은 돌의 형태와 모양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논밭 같은 곳에 큰 바위가 있으면 독배기나 바우배기 등으로 불렀다. 방언으로 거석(巨石)을 독이나 바우라고 하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인돌의 덮개돌이 넓적하게 생겨 마당바우나 떡바우라 부르기도 하고 돌이 고여 있다 해서 괸돌·괸바우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돌의 모양에 따라서 거북바우·두꺼비바우·개구리바우 등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고인돌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의 경우 중국 천자의 명을 받은 ‘마고할멈’이 천자의 두통을 없애기 위해 고려산의 기운을 누르려고 돌을 나르다 떨어뜨려 생겨났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영문 동북아지석묘연구소장은 “고인돌은 신성하고 영험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고 때로는 생활 속에서 장독대나 고추 등을 말리는 용도로도 사용돼 왔다”며 “우리 가까이에 있으면서 삶의 일부가 돼온 고인돌에 대한 보존과 관리 연구가 앞으로도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 = 김성호기자 ·일러스트/박성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