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사 법당 후불화 ‘포용적 상징’ 그려
한국 최초 한옥양식 도입 성공회 성당
정원 불교 보리수·유교 회화나무 심어
융화 위해 건축재료도 국경 넘어 조달

한반도에 처음 불교가 전파된 것이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이었다. 보문사는 649년 석가모니와 미륵보살 등 22명의 석상을 바다에서 건져 올려 석굴 법당에 모신 ‘나한전 조성 일화’ 등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강원도 양양 낙산사, 경상남도 금산 보리암과 함께 3대 해상 관음기도 도량으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강화는 세계기록문화유산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팔만대장경)과 관계가 있는 선원사의 흔적도 남아있다.
강화에는 자신보다 먼저 어머니를 세례받게 한 아들의 사연으로 ‘어머니 교회’라는 별명을 갖게 된 감리교 교산교회가 있다. 단군을 숭상하는 대종교의 성지인 참성단이 강화 마니산에 있다. 강화 갑곶성지는 천주교 순교의 성지로 불리는 곳이다.
여러 종교의 성지로 불리는 강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종교간 조화가 추구됐다는 점이다. 600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에서 종교, 이념 등의 문제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중동에서는 IS(이슬람국가)가 종교를 이유로 민간인 학살 등을 자행해 전 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고, 종교의 이름으로 중동에서는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갈등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사회갈등지수가 2008년도 이후 최고치로 조사됐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조화를 추구한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강화는 오늘날 조화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수 있는 곳이다.
# 함허와 정수사

함허는 고려 말, 조선 초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떠오르던 시대, 유교와 불교가 하나로 통한다는 이론을 내놨다. 그는 유교와 불교가 그 도의 선상에서 보면 서로 유사하다고 역설했다.
함허는 유교와 불교에 모두 풍부한 식견을 갖추고 있었기에 이 같은 이론을 논리적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함허는 성균관에서 유학을 배우다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뒤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21살의 나이에 출가하게 됐다고 한다.
특이한 이력 덕에 함허는 유교와 불교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게 됐고, 유·불에 대한 풍부한 이해는 그를 ‘유불조화론’으로 이끌었다. 그는 자신에게 유교 경전을 배우던 한 스님의 질문으로 처음 불교를 접하게 됐다고 한다. 함허가 강화에 온 것은 1420년대로 추정된다.
정수사 안내문에는 1426년(세종 8년) 그가 절의 이름을 정수사(淨水寺)로 정한 것으로 나온다. 함허는 1431년(세종13) 문경 봉암사를 중건하고 법을 펴다가 1433년(세종15)에 입적(入寂)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수사는 함허가 새로 이름을 짓고 중창(重創)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수사 이름은 함허가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1426년 절의 이름을 정수사(精修寺)에서 정수사(淨水寺)로 변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마니산 기슭에 함허동천 야영장 길을 따라 마니산을 오르면 함허가 수도했다는 함허동천(涵虛洞天)을 찾을 수 있다. 계곡 바위에 함허동천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를 함허가 직접 새겼다고 한다. 정수사에서는 함허 이외에도 유불의 조화를 추구한 사람들이 많았다.

정수사 법당 후불화도 유·불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이 불화는 1878년 이건창 가족의 시주로 그려 모셔졌다.
조선말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이건창과 그의 부모, 자신의 부인, 두 동생 등 시주자의 이름을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건창 가족은 당대 최고 명문 사대부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유교와 불교를 모두 포용한 것이다.
김형우(안양대 교수) 강화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양명학을 기본 소양으로 삼았던 강화학파 학자들의 개방된 학문 풍토에서 가능한 일이었다”며 “이건창은 몸은 유교에 담고 있으면서도 포용적인 모습이고, 유학자이면서도 승려로 활동한 김시습의 글에서도 유불의 조화를 볼 수 있다”고 했다.
#한국문화와 서양종교의 조화
한국 최초로 한옥양식을 도입한 성당인 강화읍의 성공회 성당(이하 강화성당)은 서양종교와 한국문화의 조화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한옥양식의 성당 자체도 어우러짐을 보여주는데, 성당 곳곳에 세심한 부분에서도 서양종교가 한국문화, 다른 종교와 조화로움을 추구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태극무늬가 들어가 있는 성당의 정문에서도 종교·문화간 어울림을 추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태극무늬는 흔히 ‘천, 지, 인’ 도교의 상징으로 불리는 데 이 무늬를 과감히 중앙문 중심에 넣었다. 그리고 태극무늬 속에 십자가 모양을 새겼다.
종을 보관하는 ‘종각’의 기능도 하는 내삼문에 있는 종은 사찰에 있는 범종의 모습이다. 사찰의 범종과 다른 점은 연꽃무늬 대신 십자가 무늬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성경 말씀을 쓴 기둥에도 불교의 상징인 연꽃문양을 넣었다. 지붕의 서까래에서도 연꽃문양을 볼 수 있다.성당 정원에 있는 나무조차도 타 종교와 어우러진다.

성공회 성당 측에 따르면 성당에 있던 회화나무는 지난 2012년 태풍 볼라벤으로 인해 쓰러졌고, 신자들은 이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장애인학교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전국적으로 오래된 성공회 성당 가운데 한옥성당이 여러 곳 있지만, 강화 성당은 한국문화나 다른 종교와의 조화를 극대화했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강화 성당을 건립하는 데 들어간 재료도 국경을 넘어 여러 곳에서 조달했다는 것이다. 목재는 백두산의 적송을 뗏목으로 강화까지 운반한 것이다.
유리나 벽돌은 일본, 중국 등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성당의 4개 출입문은 영국에서 가져온 참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강화산 화강암은 재단이나 세례대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한옥이면서도 ‘노아의 방주’ 의미를 담은 배 모양의 성당 외관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강종훈(59) 신도회장은 “성당의 건축 자체도 특이한 점이 있다. 바실리카 양식 건물을 한옥으로 지은 것이다. 건물을 지을 당시 정확한 설계도서 없이 서양 교회의 그림을 보고 한옥으로 건물을 지었다”며 “이 때문에 성당으로 건축을 공부하러 많이들 온다. 바실리카 양식의 한옥 건물의 특이한 점 때문이다”라고 했다.
김형우 강화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1890년대부터 1910년까지 매달 성공회교에서 간행한 잡지를 봤는데, 성공회교에서 의료, 교육사업을 하면서 조선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사업을 진솔하게 했던 것 같다”며 “그런 점에서 다른 종교와 전통문화를 배려하면서 서로 공통점을 찾으려고 했던 흔적이 보인다”라고 했다.
/글 = 홍현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