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란대비 ‘국가행사 기록 의궤·역사 실록’ 외규장각 보관
정조, 통치체제 정비 후 왕실자료 옮겨 체계적인 서적 관리
“조선왕조실록 원본 전해졌던 ‘정족산 사고’ 재조명 필요”
강화도는 외규장각과 정족산 사고 등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중요 국가 기록물을 보관한 전국의 몇 안되는 장소였다. 조선 시대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논의, 구체적인 절차 등을 정리해 기록한 문서인 ‘의궤’와 왕의 통치 역사를 기록한 실록 등 중요한 국가 기록 유산이 모두 강화의 외규장각과 정족산 사고 등에 보관돼 있었다.
조선의 의궤와 실록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수준 높은 기록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출판물인데, 이 중요한 출판물을 보관하고 관리했던 곳이 바로 강화였던 것이다.
# 외규장각의궤 145년 만의 귀환
2011년 5월 27일 오전 10시께 외규장각 의궤 4차분을 실은 대한항공 화물기(KE502편)가 인천국제공항 화물청사에 도착했다. 화물기 B747-400F의 전면부 화물 출입구인 ‘노즈 도어’(Nose door)가 열리며 특수 용기에 담긴 의궤가 밖으로 나왔다.
강화도를 떠난 외규장각 의궤가 145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조선을 침범한 프랑스가 약탈해 보관하던 외규장각 의궤 297권이, 2011년 4월 14일 1차분 귀환으로 시작해 이날 마지막 4차분을 끝으로 모두 한국땅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강화도의 외규장각에서 의궤를 비롯한 조선왕실 귀중품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없앴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외규장각이나 이곳에서 약탈당한 도서에 대해서 국내에 알려진 바가 별로 없었다.
늦게나마 한국에 강화도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당시 프랑스에 있던 역사학자 박병선(1929~2011) 박사의 노력 덕이었다.
프랑스에서 국립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 신부인 달레(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이 있는 행궁 등 주요시설에 불을 지르고 은괴와 의궤를 비롯한 도서들을 본국으로 우송했다’는 내용을 단서로 끈질긴 추적을 이어오다 1783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분관에 있는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냈다.
프랑스에 의해 빼앗긴 외규장각 의궤가 고국에 돌아온 것은 지난 1993년 9월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上)책을 돌려준 것이 시작이었다. 고속철도 사업권을 놓고 일본, 독일과 경쟁을 벌이던 프랑스는 외규장각 약탈도서 중 한 권을 들고 협상에 임했다.
상하 2책으로 만들어진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는 1822년에 숨을 거둔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인 휘경원 조성사업을 기록한 책인데, 이 책의 나머지 한 권이 돌아오기까지의 역사는 이렇게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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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외규장각 의궤 이봉행사. |
의궤란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이란 말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국왕의 즉위식, 왕실의 결혼식, 장례식, 궁궐 건축 등 모든 왕실에서 하는 행사에 대한 논의와 구체적인 절차, 이를 위한 준비 과정 등을 빠짐없이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이 바로 ‘의궤’다.
의궤는 보통 6~7권을 만들었는데 그중 4권은 전국 4대 사고에 하나씩 보내고 1~2권은 관련 관청에 비치됐다. 특히 국왕만 볼 수 있는 어람용 의궤는 임금이 열람한 후 규장각에 보관하다 1782년 외규장각이 설치되면서부터는 강화도로 보내져 특별히 관리됐다. 따라서 병인양요 이전에 제작된 어람용 의궤는 모두 외규장각에 있었다.
외규장각 의궤의 가치는 바로 왕이 직접 열람한 어람용 의궤라는 점이다. 특히 외규장각 의궤 중에는 단 한 점밖에 없는 유일본 30권이 있어 중요성이 더 크다.
왕이 직접 열람하는 어람용(御覽用) 의궤와 사고, 관청 등에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分上用) 의궤는 큰 차이가 있는데 우선 겉표지만 하더라도 어람용은 의궤는 비단으로 장정해 삼베를 표지로 사용한 분상용에 비해 매우 호화롭다.
책을 묶는 장정에 있어서도 어람용 화려한 문양의 놋쇠 물림에 국화 모양의 정을 박았는데, 분상용에는 무쇠 물림을 했다. 종이 또한 어람용은 최고급 종이인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한 반면 분상용은 초주지 보다 질이 낮은 저주지(楮注紙)를 사용했다.
내용물을 기록하는데 있어서도 어람용은 도화서(圖畵署·그림을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 )의 최고 실력을 가진 화원(畵員)이 그림을 그린 반면, 분상용 의궤의 그림은 그렇지 않아 그 정교함에서 큰 차이가 난다. 특히 어람용 의궤는 글씨를 쓰기 위해 그은 줄인 인찰선의 주홍색이 눈에 띄는데, 분상용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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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고려궁지 유적 내에 복원된 외규장각 전경.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강화도가 보장지처로 주목 받고 왕실 기록물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1782년(정조 6)에 세워졌다. /임순석기자 |
18세기 영·정조 시대가 조선 최대의 문화전성기를 누린 배경에는 탕평책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왕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1776년 조선의 22대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파싸움의 결과로 이해했던 터라 즉위 초부터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정조는 왕권 강화 차원에서 왕위에 오른 첫 해에 왕실 도서관 규장각을 국가기관으로 발족시켰다. 규장각은 조선 왕조의 왕실 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으로 출발해 출판은 물론 정책 연구의 기능까지 도맡은 특별한 통치 기구의 역할을 했다. 규장각에서 정조는 젊은 신하들이 정책을 개발토록 해 이들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키웠다.
또 국왕 자신의 상징물을 보관하고 국내외의 수 많은 서적들을 망라해 정책을 수립하고 결정했는데, 규장각은 강화된 왕권의 상징이자 정조시대 핵심 권력기관이었다.
통치체제를 정비한 정조가 강화도 행궁에 외규장각을 완공한 것은 1782년으로 왕실의 중요한 자료들을 별도로 옮겨서 보다 체계적이고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한 것이다. 규장각에 보관하던 임금이 본 어람용 의궤가 모두 강화도로 옮겨진 것도 이때다.
이로써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게 돼 규장외각 또는 외규장각으로 불리게 됐다. 기록에 따르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강화도 행궁의 동쪽에 자리 잡았다. 정조 사망 이후 규장각은 그 역할이 축소돼지만 강화 외규장각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됐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강문식 학예연구관은 “규장각은 정조의 정치 철학에 동의하고 뒷받침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역할을 하며 정치적 친위세력을 구축해 왕권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며 “소중한 왕실 기록물을 왜적의 침입 등에 대비해 더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비교적 안전한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조선 시대 사고(史庫)가 있던 정족산 사고 또한 강화가 주요 기록물을 보관한 장소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다.
‘사고’(史庫)는 말 그대로 역사책을 보관하는 창고다. 역대 왕의 실록과 그 밖의 귀중한 서적을 보관하던 곳으로써 일명 사각(史閣)이라고도 한다.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에는 서울 궁궐 내 사고인 춘추관(春秋館)과 충청도의 충주, 전라도의 전주, 경상도의 성주 등 4개 지역에 사고를 설치해 실록을 보관했다.
이들 사고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화재 등으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전주 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의 서책은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다.
왜란이 끝나고 조선 정부는 전주 사고본을 토대로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을 다시 출판한다. 전주 사고에 있던 804권의 실록은 총 5부씩 인쇄됐다.
전등사 주지인 범우 스님은 “강화 정족산 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의 원본이 전해 내려온 사고로서의 가치가 있지만 지금은 그 중요한 기록물들이 모두 강화를 떠나있다”며 “강화의 이러한 소중한 가치를 재조명하고 주목받을 수 있는 다양한 노력 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 = 김성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