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안전지대·학문적 자유로운 섬 ‘장점’
1700년대 하곡 정제두의 이주로 뿌리 내려
국내 유일한 지명이름 ‘강화학파’로 이어져

규범·이치 대신 ‘지식·행동 일치’ 덕목 발전
탐관오리 척결·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활약
암행어사 이건창·의인 황현, 후대들 ‘기억’


‘이건승은 어리석고 미련해서 구차하게 살아 있을 뿐입니다. 나라는 망했는데 아직 살아있으니, 사람이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살아있는 것은 다 정상적인 도리가 아닙니다.’

을사늑약(1905)이 체결된 뒤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1858∼1924)이 매천(梅泉) 황현(黃玹·1856~1910)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이건승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하며 ‘마땅히 죽어야한다’고 했다. 이건승은 이후 죽음이 아닌 독립운동의 길을 택했다.

1910년 대한민국이 일제에 강제로 병합되자 이건승 등 양명학자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길에 올랐다. 죽음을 택한 이도 있었다. 황현은 “나라가 망했는데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슬프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건승과 황현은 모두 양명학자였다. 실천을 중요시한 양명학을 공부한 이들은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나라를 구하기 위한 실천으로 ‘독립운동’과 ‘자결’ 등을 택한 것이다. 강화도는 양명학의 사상적 토대가 마련된 곳이다. 이 때문에 양명학자들에게는 ‘강화학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의 양명학이 강화도에서 계승·발전되었기 때문이다. 강화학파가 민족운동에 나섰던 것은 강화학파의 주장, 그리고 태생과 깊은 연관이 있다. 양명학은 사람의 마음과 주체, 개성을 강조했으며, 지식과 행동의 통일, 실천을 중요시 했다는 것이 학계의 이야기다.

영남대 교수인 한국양명학회 최재목 회장은 “당시 주류였던 주자학이 불변하는 이치나 규범 등을 강조했던 것과 달리 양명학에서는 모든 것은 자신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며 “개인의 양심과 판단, 실천을 중요시한 것이 양명학과 강화학파”라고 설명했다.

성균관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서경숙 박사는 ‘강화학파의 원류’란 글에서 “강화학은 허식과 가식을 배격하고 스스로 성실하고 진실되기를 희구하는 학문”이라며 “실천성과 현실성을 중시해 양명학의 본지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했다.

강화학파의 역사는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에서 시작한다. 정제두는 국내에서 양명학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제두는 만 60세가 되던 해에 강화도로 이주했고 이는 강화학파의 태동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정제두가 강화도로 이주하자, 정제두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많은 인물이 강화도를 찾았다.

정제두의 제자가 되고자 이광명과 이광사·신대우 등이 강화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정제두를 스승으로 모셨고, 정제두 가족과 혼인 등으로 연을 맺었다. 양명학이 강화도라는 지역에서 혈연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최재목 회장은 “섬이라는 지역은 고립되면서 열려 있다. 정치적으로 안전지역이라는 부분도 있고, 학문적으로는 자유롭다는 측면도 있다”며 “정제두가 강화도로 이주하면서 정치적인 거리는 멀어졌고, 학문적으로는 깊은 연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강화도는 양명학의 중심지가 됐다. 많은 인물이 강화도에서 배출됐다. 그리고 정제두가 강화도로 이주한 지 250여년이 지나서 강화도에서 계승·발전된 양명학과 양명학 연구자들에게 강화학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강화학파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3~?)의 제자 민영규는 “강화도라는 지역을 구심점으로 하고, 학문적으로는 하곡 철학을 기본으로 한 다양한 전개와 인맥으로는 하곡 정제두로부터 시작해 위당 정인보까지 혈연과 학연으로 이어지는 하곡의 제자들을 강화학파라고 한다”고 정의했다.

양명학을 공부한 이들에게 실천은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실천은 각각의 상황에서 현실의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한 행동으로 나타났다. 암행어사로서 탐관오리를 척결했으며, 병인양요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나라를 잃게 되는 상황이 오자 독립운동을 펼쳤다.

강화도엔 지금도 강화학파의 흔적들이 배어 있다. 또한 강화학파가 가진 의미와 가치 등을 되새기고 발전시키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지난 22일 강화도 곳곳에 있는 강화학파의 유적을 찾았다.

강화학파의 적자로 불리는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1852~1898)의 생가가 강화에 남아있다.

이건창은 15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했으며, 이후 충청우도암행어사와 경기도 암행어사 등을 지내며, 탐관오리 등을 척결하는 데 힘썼다.그의 생가는 정제두의 제자인 이광명부터 이건창까지 6대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화학파의 산실이기도 한 이건창 생가엔 강화학파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집 마당에서 보이는 ‘명미당(明美堂)’이라고 적혀 있는 현판이 그것이다. 1910년에 대한민국과 일본이 강제로 합방되자, 자결한 매천 황현이 쓴 현판이다. 이 현판을 쓴 구체적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황현과 이건창의 관계가 돈독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황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죽기 전에 한번 더 이건창의 묘를 보기 위해 강화도를 찾았다. 황현은 강화도 이건창의 묘에서 “죽어서 외롭다고 서러워 말 것이, 그대는 살아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라는 말을 남겼다. 양명학자로 외롭게 살아온 그의 삶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건창에 대한 일화는 1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주민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날 만난 주민 정순택(91)씨는 “높은 사람이 말을 타고 와서 지나가다가도 이건창의 집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야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며 “그 만큼 이건창이 암행어사로서 위세를 떨쳤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제두의 묘는 진강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서영규는 1987년에 쓴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서 “진강산 기슭에 자리잡은 두 분묘는 왕가의 원묘를 방불케하는 규모”라며 “이십 수 년전 내가 마지막으로 그 일대를 탐방했을 때, 기와로 올린 재실과 거기에 딸린 몇 채의 초가가 남아있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날 찾는 정제두의 묘에는 재실과 초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표지판과 비석 등이 정제두의 묘임을 알리고 있었다.

강화도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지명이 학파의 이름이 된 곳이다. 강화학인들은 암행어사로 탐관오리를 척결하기도 했고, 병인양요 때는 강화도가 함락되자 자결(이시영)하기도 했다.

후에 일제에 강제합병되자 민족운동에 나섰다. 2004년부터 매년 강화도에서 ‘강화양명학 국제학술대회’가 열리는 등 현재에도 강화와 양명학의 가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최재목 회장은 “강화도는 섬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한 두 명이 아닌, 학파라는 학문의 흐름이 형성됐다고 하는 측면에서 유일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며 “양명학에 대한 연구는 90년대 이후 활성화됐으며, 강화지역의 특수성 및 양명학과 연관된 연구가 활성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최근 들어서는 생태와 자연 등 현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와 연관시켜 정제두 등의 사상을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말했다.

/글 = 정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