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을 주워들고 주저 없이 개를 내려친다. 짐승의 외마디 비명이 유리조각처럼 날카롭다. 놀란 소녀에게 여자가 말한다. “왜 도와주지는 않고 보고만 있니?”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덧붙인다. “쓸모 없어지면 너도 죽일 거야.”
‘차이나타운’은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다. 차이나타운이 극의 맥락 속에서 배경으로 큰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내에 존재하는 이방인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실제의 차이나타운이라기보다는 다른 차원의 윤리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거주지다.
그들의 윤리는 제도적 장치의 보호 속에 있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윤리와 다르다. 자비가 아니라 냉정함이, 가족이 아니라 기능이 그들의 윤리인 것이다. ‘그래도 식구인데 이렇게까지 해야겠냐’는 곤의 말에 ‘너는 식구냐?’고 되묻는 엄마의 말은 고통에 힘겨워하는 개를 내려치는 그녀의 자비와 맞닿아 있다.
그러면서도 ‘엄마’라는 인물을 통해 모성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남성적 냉혹함에서 비켜서려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엄마’(김혜수)와 ‘일영’(김고은)이라는 두 인물의 애증은 ‘달콤한 인생’(2005) 강 사장과 선우, ‘신세계’(2012)의 정청과 이자성을 연상시킨다. 기존 남성 느와르의 관습적 코드 속에 인물을 여성으로만 바꿔놓은 셈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묘하게 뒤틀린다.
결말 부에서 보이는 엄마와 일영의 모습은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야기(달콤한 인생)와도 다르며, 브라더십으로 모든 것을 감싸는 이야기(신세계)와도 다르다.
자식들 각자의 욕망을 끌어안은 괴물 같은 모성을 그려냄으로써 그간 한국 갱스터 느와르가 보여줬던 ‘가족-거짓가족’이라는 이원적 대립각의 강박을 벗어나려 시도하고 있다.
차이나타운은 느슨한 구성이나 다소 거친 편집 등에서 아쉬운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통적 장르코드를 비틀며 새롭게 변모하는 한국 갱스터 느와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하나의 시도임이 분명하다.
/이대연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