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때 연백군 주민들 3만명 피란
휴전선에 가로막힌 귀향길 가슴 먹먹
하나 둘 떠나고 이젠 100명도 안남아
“북쪽 가까이 묻어달라” 애절한 향수

강화 교동은 실향의 아픔이 새겨진 곳이다. 지난해 교동대교가 개통돼 자동차로도 갈 수 있게 된 이 섬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강화도 본도보다는 황해도 연백군과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1945년 일제에 의한 지배가 끝난 뒤 한반도는 38선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이 때에도 교동과 연백군은 모두 38선 이남에 위치해 있어 왕래가 자유로웠다. 하지만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교동과 연백군을 갈라놓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곡창지대였던 연백군은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연백군 주민 대다수가 교동으로 피란했다. 이 때 교동으로 피란 온 연백군 주민들의 수가 3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최봉열(84)씨는 이 때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연백군에 살았었는데 전쟁이 났다는 소식에 지역 사람들이 모두 교동으로 내려왔다”며 “이날 교동으로 오는 배에는 모두 연백군 주민들이 타고 있었고 배마다 사람이 가득했다”고 말했다.

또 “그 때만 해도 잠시만 지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휴전선이 교동과 연백을 갈라놓을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쟁은 3년간 이어졌다. 전쟁 기간에 교동에 왔던 연백 주민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주민들이 교동에서 전쟁이 끝나길 기다렸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휴전선은 교동과 연백군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 때에도 1만명 이상의 연백군 주민들이 교동과 강화도에서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과 함께 교동에 머무른 경우도 있지만 가족이 고향인 연백군에 있는 경우도 많았다.

가족과 갈라진 이들은 60여 년간 고향 땅을 밟을 날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대부분은 타 지역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교동에 남아있는 이산가족도 많다. 현재까지 교동에 남아있는 실향민의 수는 100명이 채 안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민주평화통일위원회 강화군협의회는 지난 2008년 실향민의 증언을 담은 ‘격강천리라더니’를 발간했다. 이 책에는 고향 땅을 밟고 싶은 실향민의 마음, 가족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아픔 등이 담겨 있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님과 형님 가족들은 무사하실까. 내 나이 이미 80이 넘었으니 부모님과 큰형님 내외는 이미 돌아가셨으리라. 그러나 꿈에도 잊지 못할 북에 두고 온 내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들! 내 아들은 어딘가 살아있겠지! 내 팔에 안겨 편안히 잠들었던 네살배기 아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팔에 안아 잠재우고 아랫목에 가만히 뉘어놓고는 “곧 돌아올테니 며칠만 할머니하고 잘 지내거라”하고 떠나왔는데….’(격강천리라더니 중 김시완 씨 증언)

‘격강천리라더니’ 발간 당시 민주평통 강화군협의회장이었던 김영애 (사)새 우리누리 평화운동 대표는 “실향민 대부분은 이 곳에 정착하기 위해서 왔다기 보다는 잠시 머무르기 위해 온 것”이라며 “지금까지 이 곳에서 사는 이유는 통일이 되거나 왕래가 자유로워지면 바로 고향땅으로 가기 위해서다”고 말했다.

이어 “실향민들은 고향땅을 밟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곳에서 살고 계실 것”이라고 말했다.

휴전 이후 연백군의 많은 주민이 교동도에 살게 되면서 주민들은 이 곳서 삶터를 일궜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교동면 대룡리에 있는 대룡시장이다. 1960년대 모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이 시장의 상점 대부분은 실향민이 운영하던 것이다.

교동의 실향민들은 하루라도 더 빨리 고향땅을 밟고 싶다는 마음에 이 곳에 터를 잡았다.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지석리의 야트막한 언덕에는 실향민들이 제를 올리는 망향대가 건립돼 있다. 망향대 너머로 보이는 황해도 연백군은 배를 타면 10분이면 갈 수 있다고 한다.

교동 앞바다에는 철조망이 설치돼 있었다. 실향민들은 철조망이 걷히고 고향으로 갈 수 있을 날을 기다리며 매년 추석을 앞두고 제를 지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망향대에서 제를 올릴 땐 출신 지역별로 모여 제를 지냈다고 한다. 한 때는 100~200명이 한꺼번에 제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향민들 중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주민이 늘어만 갔다. 대룡시장에서도 문을 닫는 상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연백군 마을 모임은 지금까지 열리고 있다. 교동에 살고 있는 연백군 연안읍 미산리 출신 주민들은 매년 1~2차례 ‘동네 모임’을 갖는다.

최봉열씨는 “예전에는 30명 넘게 모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10명이 채 모이지 않는다. 모임도 이제는 곧 없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김영애 대표는 “많은 분들이 고향에 가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며 “휴전 직후 1만명이 넘는 실향민들이 이 곳에 있었지만, 타 지역으로 가신 분들도 많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아 이제는 100명도 채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교동에 많은 실향민이 정착하면서, 남한에 사는 이산가족들이 교동에서 상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개성 출신의 류득호(85)씨도 자신의 친형을 교동에서 상봉했다.

류씨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쪽으로 피란을 왔다. 피란생활을 하면서 그는 가족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막연하게 북쪽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그는 20여년만인 1970년대 중반 극적으로 자신의 형을 만날 수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가족의 소식을 묻던 중 형님이 교동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교동에서 형을 만나 함께 살게 됐다. 비록 형님은 수년 전 돌아가셨지만 류씨는 아직 교동에 남아있다.

류씨는 “형 때문에 이 곳에 들어오게 됐지만, 이 곳 인심이 좋고 같은 아픔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며 “아직도 고향땅을 밟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이뤄질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올해로 휴전선이 그어진 지 62년이 지났다.

청년이던 실향민들은 대부분은 80대를 훌쩍 넘겼다. 노환 등으로 생을 마감한 실향민도 많다.

강화군청 앞에서 법무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이북도민회 연백군민회 김은중 회장은 “강화도의 실향민을 대상으로 매년 모임을 열고 있는 데 해마다 사람이 줄고 있다”며 “살아있더라도 거동이 불편한 분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알고 싶어하지만, 그마저도 모르고 돌아가신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최봉열씨는 “요즘에는 같은 실향민들을 만나면 ‘최대한 북쪽에 가까운 곳에 묻어달라’, ‘유골을 북쪽 바다에 뿌려달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며 “살아 생전에 고향 땅을 밟을 수 없다는 생각에 죽어서라도 고향땅에 가고 싶은 마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