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조정, 정보 독점 백성불안 키워
정치 네거티브·장사꾼 상술등 현대와 판박이

노래로 지어진 소문, 나이·신분 상관없이 전파
지식인들 ‘사회체제 불만’ 익명서 활용해 공유


삼가 보건대 중외(中外·나라 안팎)의 크고 작은 문서를 긴요하고 중대하지 않은 것까지 대부분 비밀히 출납하므로 밖에서 보기에 단서를 알지 못해 더욱 스스로 의혹하게 하니 민심이 동요되는 것이 반드시 이에 말미암지 않는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선조실록>

처음에는 도성 안의 나무꾼이 노래 부르다가 어느새 관서지방의 기생들 노래가 되어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전파하게 되니, 듣기에 놀랍고 미혹스러우며, 온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조롱을 받게 됩니다. <숙종실록>

유언비어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늘 등장했다. 오늘날 ‘인터넷 괴담’이니 ‘찌라시’니 하는 것들은 예전에도 풍문(風聞), 흉언(凶言), 와언(訛言), 난언(亂言)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유언비어는 전쟁과 역병, 재해, 정권 다툼 등 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기마다 생겨났다.

# 불통은 유언비어를 만든다

임진왜란(선조 25~31년·1592~1598년) 중반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있을 무렵 백성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온다거나 선조가 중국으로 도망가려 한다는 소문 등 백성들을 불안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백성의 어지러운 풍속을 바로잡는 기관이었던 사헌부(司憲府)는 임진왜란 당시 유언비어의 원인을 ‘정보의 부재’로 진단했다.

“삼가 보건대 중외(中外·나라 안팎)의 크고 작은 문서를 긴요하고 중대하지 않은 것까지 대부분 비밀히 출납하므로 밖에서 보기에 단서를 알지 못해 더욱 스스로 의혹하게 하니 민심이 동요되는 것이 반드시 이에 말미암지 않는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선조실록 52권 선조 27년 6월 29일)

사헌부가 선조에게 했던 조언은 2015년 여전히 유효하다. 임진왜란 시기 백성들은 조정이 일본과 어떤 협상을 벌이는지, 명나라는 원군을 얼마나 보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천안함 피폭, 세월호 침몰, 메르스 등 대형 재난과 각종 사건·사고를 옆에서 지켜보던 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가 독점하고 있는 ‘정보’를 알지 못했기에 소문은 더욱 그럴듯했다. 소위 ‘음모론’, ‘괴담’이라 하는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때론 유언비어라고 했던 것들이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었기에 나라(정부)가 뒤늦게 진실을 밝히더라도 민심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돌아선 뒤였다.

결국 나라(정부)의 입장에서 유언비어는 늘 골칫거리였다. 정권의 안정을 위협했고, 백성들은 불안한 마음에 생업에 제대로 종사하지 못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유언비어가 떠도는 원인을 짚어보기는커녕 최초 유포자를 ‘발본색원’하기에 급급했다.

# 괴담 뒤에 웃는 자

헛소문은 누군가의 배를 불리는 수단인 경우도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증권가에서 떠도는 ‘찌라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찌라시는 연예계, 정치권, 재계의 뒷이야기 등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정보들로 구성됐다.

선조10년(1577) 1월 말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 나가던 때였다. 이때 “보리밥을 지어먹으면 병을 피해간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보릿값이 쌀값을 웃도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양곡을 쌓아뒀던 누군가는 덕분에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지금도 ‘메르스’ 공포심리를 이용한 얄팍한 상술이 판치고 있다. 장사꾼의 상술도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더 잘 통했다.

정권 다툼과 유언비어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조선후기 괴담은 정치적 목적을 보인 경우가 많았는데, 영조4년(1728년) 무신난이 일어나기 직전 왕을 헐뜯는 내용의 괴담이 잇따랐다고 한다. 반란 주동자들이 왕과 관련된 유언비어를 퍼트려 민심을 돌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영조는 괴문서가 발견되는 즉시 불태워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근래에 들어 선거 때만 되면 상대방 후보를 비방하기 위해 확인되지 않는 소문을 퍼트리는 ‘네거티브’ 전술이 당시에도 먹혔나보다.

# 소문은 노래를 타고

과거 유언비어의 전파 경로는 인터넷 중심인 지금과 조금 달랐는데, 노래를 지어 퍼트리는 방식은 특히 전파력이 컸다.

“처음에는 도성 안의 나무꾼이 노래 부르다가 어느새 관서지방의 기생들 노래가 되어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전파하게 되니, 듣기에 놀랍고 미혹스러우며, 온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조롱을 받게 됩니다.”(숙종실록 24권 숙종 18년 11월 16일)

백제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의 마음을 사기 위해 어린아이들에게 퍼트렸다는 ‘서동요’도 노래로 퍼진 대표적인 사례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과 달리 글로 전해지는 ‘익명서’도 있었다. 화살에 글을 매달아 이곳 저곳에 쏘는 사시(射矢), 벽에 글을 붙이는 첩방(貼榜)등이다.

첩방은 오늘날 대학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자보의 형식과 같았다. 익명서는 사회 체제에 불만을 품은 지식인들이 주로 사용했는데, 특히 언로가 막혔던 시절에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소통의 부재’가 이 같은 유언비어를 양산했던 것이다.

# 막걸리 보안법

차라리 꾸며낸 이야기를 퍼트렸다가 처벌을 받았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진실을 말해도, 혹은 단순히 정부에 불만을 품거나 의혹만 제기해도 처벌을 받던 서슬 퍼렇던 시기가 불과 30~40년 전 있었다.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정부에 쓴소리를 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간다는 이른바 ‘막걸리 보안법’이다.

실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2007년 보고서를 보면 1974년 오모씨가 버스에서 만난 여고생에게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구속당한 사례가 있었다. 정부 비판에 대한 입막음은 도리어 수많은 유언비어를 양산했고, 보도통제는 언론마저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때 유언비어는 ‘대안언론’의 기능까지 했다. ‘학생 전원구조’라는 세월호 보도 참사 이후 언론을 믿지 못하는 시민들이 스스로 정보를 찾아 다니고 이를 인터넷을 통해 전파하는 오늘날 소통방식과 비슷한 구조다.

오제연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괴담을 합리화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괴담이 ‘왜’ 돌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며 “정보차단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이 근본 원인이기 때문에 단순히 헛소문에 책임을 지우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