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개 무인도 포함 도서지역
北 옹진반도가 지명의 모태
수차례 개편 후 7개 면 구성
독특한 풍습과 문화 매력적


인천 앞바다에 뿌려진 100개의 보석을 품은 옹진. 항아리 옹(甕)에 나루 진(津)을 한자로 쓰는 옹진군은 사람이 살고 있는 25개의 섬과 75개의 무인도 등 온전히 섬으로만 이뤄진 도서(島嶼) 지역이다. 육지면적은 172㎢에 불과하지만, 해양면적은 1만5천260㎢에 달해 인천이 해양도시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고 있다.

옹진군은 이름 자체만으로 남북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원래 옹진이라는 지명의 모태가 된 곳은 현재 북한 황해남도 남서부지역에 있는 옹진반도다. 지금 황해남도에도 옹진군이라는 행정구역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1945년 8월 해방과 1953년 7월 한국전쟁 휴전협정을 거치면서 기존의 옹진군이 남·북 2개로 나눠졌고,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 등이 남한의 경기도 옹진군에 속하게 됐다.

이후 북도·영종·용유·덕적·영흥·대부면의 옹진군 편입(1973년), 영종·용유면의 인천시 편입(1989년), 대부면의 안산시 편입(1994년), 옹진군의 인천시 편입(1995년) 등 여러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의 옹진군은 남구 용현동에 있는 옹진군청을 기준으로 반 시계 방향으로 북도면·연평면·백령면·대청면·덕적면·자월면·영흥면 등 7개 면으로 구성됐다. ‘강화’에서 시작해 ‘옹진’으로 이어지는 경인일보 연중기획 ‘강화·옹진 인천 20년 보석을 다듬자’의 하반기 여정은 바로 이 7개 섬 지역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옹진 섬의 역사와 자연환경, 특성은 섬의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현재 인천에서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섬은 북도면 4개 섬이다. 신도·시도·모도·장봉도 등으로 구성된 북도면은 중구 영종도에서 배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된다. 강화도 남쪽에 위치한 북도면의 섬들은 강화와 연관된 지명 유래가 전해진다.

지난달 27일 오전 영종해안북로에 있는 삼목선착장에서 장봉도로 가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장봉도를 가는 뱃길에서 인천서 가장 가까운 옹진 섬인 신·시·모도를 만날 수 있다.

이중 시도(矢島)는 글자 그대로 ‘화살 섬’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강화 마니산에서 화살을 쏠 때 이 섬이 목표지점이어서 ‘살섬’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고려 말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 강화도 남쪽에 있는 시도를 목표로 훈련을 시켰다는 것인데, 거리가 수 ㎞에 달해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이밖에 섬 주위에 갯골이 많아 예로부터 물고기를 잡는 도구 ‘살’을 많이 설치했기 때문에 이 같은 지명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살’이라는 이름이 한자로 바뀔 때 잘못 전해져 ‘화살(矢)’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장봉도(長峰島)는 섬의 모양처럼 ‘긴 봉우리’라는 뜻이다. 장봉도 옹암선착장에 다다르기 전 마주하는 장봉도의 모습이 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국사봉(해발 149m)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어 있는 섬에는 높고 낮은 봉우리가 줄지어 있다.

하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장봉도의 ‘봉’자가 봉우리가 아닌 봉화(烽)로 표기된 것을 고려하면 봉화와 관련된 이름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북도면 4개의 섬 중 장봉도가 가장 서쪽에 있어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가장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장봉도에서 만난 토박이 홍순일(74)씨는 “예전에 통신수단이 없어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불을 지펴 봉화대가 장봉도에 있었다”며 “장봉도는 고려 몽고 침입시기 강화로 수도를 옮겼을 때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지도를 펼쳐놓고 북도면을 지나 서북쪽으로 가다보면 북한 포격의 상처를 안고 있는 연평도(延坪島)를 만난다. 과거 조기파시로도 유명했던 연평도는 ‘땅의 모양이 평평하다’고 해 지어진 이름이다.

옛 문헌을 보면 들 평(坪)과 평평할 평(平)을 같이 쓰고 있다. 섬에 산줄기가 있지만 봉우리가 이어지는 모습 또한 평평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던 것도 같다.

지금의 연평도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로 나뉘어 있지만, 예전에는 대연평도를 그냥 연평도로 부르고 소연평도를 ‘산연평도’ ‘쇠연평’ ‘새연평’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돌이 쇠처럼 무겁고 단단해 쇠연평이라고 불렀다는 설과 억새 같은 쇠풀만 잔뜩 있다고 해서다.

우리나라 서해 최북단에 위치한 백령도(白翎島)는 고려 이전까지 곡도(鵠島)라고 불렀다. 여기서 ‘곡’은 고니새를 말하는데, 백령도에 철새들이 많이 오갔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고니의 하얀 날갯짓이 온 섬을 뒤덮으면서 이를 ‘흰 깃털(白翎) 섬’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다. 철새들의 보금자리 백령도는 지금도 겨울 철새 두루미가 머물다 가는 곳이기도 하다.

대청도(大靑島)와 소청도(小靑島)는 말 그대로 ‘푸른 섬’이라는 뜻이다. 대청도는 과거 중국을 왕래하는 해상 교통로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섬에 나무가 많아 유난히 푸르게 보였다고 한다.

고려 인종(1123년)때 중국 송나라 사신은 대청도를 보고 “대청도는 멀리서 바라보면 산림이 울창한 모습이 마치 눈썹을 그리는 검푸른 먹과 같다고 해서 고려인이 그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소청도는 대청도와 모양이 같은데 다만 산이 약간 작고 초석(암초)이 많을 뿐이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덕적도(德積島)는 삼국사기에 ‘덕물도(德物島)’ 또는 ‘득물도(得物島)’라고 나와 있고, 덕적도라는 이름은 고려 말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덕물·득물은 모두 ‘큰물’이라는 우리 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에 불과한데, 깊은 바다가 있는 큰 섬 정도로 해석하는 게 일반적이다.

덕적군도의 섬은 섬의 모양을 빗대어 이름을 지은 경우가 많다. 굴업도(堀業島)는 ‘오리가 물 위에 떠서 몸을 구부리고 있는 모양’이라는 ‘굴압도(堀鴨島)’ 이름에서 유래됐다.

백아도(白牙島)는 섬의 형태가 흰 상어의 이빨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문갑도(文甲島)는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섬 모양이 문갑(文匣)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름지어졌다.

‘자줏빛 달의 섬’ 자월도(紫月島)의 지명유래와 관련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섬에 세금을 걷으러 왔던 관리가 육지로 돌아가는 길에 풍랑을 만났는데, ‘검붉은 달’만 보였다고 해서 자월도라고 불렀다는 이야기, 조선시대 억울하게 귀향살이를 한 관리가 신세를 한탄하며 하늘을 봤는데 마치 자기의 억울함을 알아주듯 달이 붉게 빛났다 하여 자월도라고 불렀다는 이야기 등이 내려오고 있다.

자월면의 섬 대이작(大伊作)·소이작(小伊作)은 세곡선(稅穀船)을 약탈하던 오랑캐 해적 ‘이적(夷賊)’이 자주 나타나 생긴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지막 7번째 섬 지역 영흥도(靈興島)는 옹진의 섬 중 유일하게 다리가 놓여 배를 타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이다. 정설은 아니지만 “고려 왕족 익령군(翼靈君) 왕기라는 사람이 고려 왕조가 망할 무렵 숨어지내다가 이 섬으로 미리 몸을 피한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해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실제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영흥면 내리에 있는 국사봉(國思峰)은 피난 온 고려 왕족들이 산꼭대기에서 망한 나라를 생각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옹진군 섬은 저마다 이야기를 품고 있고, 인천 바다에는 100가지 이야기가 존재한다. 섬이기 때문에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풍습과 문화, 자연환경이 매력이다. 특히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서해 5도는 존재 자체로 안보상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앞으로 옹진을 배경으로 펼쳐질 ‘보물찾기’를 통해 인천 섬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인천에서 옹진 섬이 차지하는 위상을 재정립할 계획이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옹진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