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 진격지연 유엔군재편 성공
유해·유품 발굴 행적 추모 절실
그들의 공적 기리는게 국가의무
戰爭, 폭력이나 무력을 동반한 행위, 태고 적부터 있어왔다. 까닭이 무엇이고 명분이 어떻든 간에 그 양상은 참혹하고 결과는 깊은 상흔을 남긴다. 아프다.
65년 전, 우리 땅은 그 참화를 겪었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땅은 나뉘어 갈라졌고 가족은 흩어져 이산가족이 되었다. 내 뜻이 아닌데 가족이 헤어지는 아픔, 그보다 더한 고통 쉬이 있으랴.
남의 전쟁을 도우려 참전했던 이들이 있다.
‘1951. 4. 22~25일 사이에 영국군이 설마리 계곡에서 공산군의 포위 속에서 자유 수호를 위하여 싸우다 전사한 글로스터셔연대의 제1대대와 제170경 박격포대 소대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영웅적 공적을 찬양하고 기리 전하기 위해 이비를 건립.’
파주 설마리에 서있는 기념비가 그들을 오늘에 전한다. 그 나흘간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51년 4월22일 따뜻한 봄 날씨. 이날 임진강 격전은 시작되었다. 대대는 10배의 적군과 싸우다 설마리 계곡으로 후퇴해, 기념비가 솟은 고지 위에서 적군에 포위되었다.
4월25일 적의 포위를 뚫고 67명이 탈출에 성공했고 59명이 전사했다. 526명은 포로로 잡혀 3년간 수용소에서 지냈고 이들 중엔 부상병 180명도 포함됐다. 이중 34명이 수용소에서 죽었다.
이 격전에서 글로스터 연대는 2명이 최고무공훈장을 받았고 장병들의 희생은 세계 전사에 빛나고 있다. 이들의 격전은 당시 중공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유엔군의 재편성을 가능케 했다. 결과적으로 중공군의 서울 침공을 저지했다.’
전적비 앞 안내판이 그날로 안내한다. 그날에도 주위엔 봄꽃이 피었겠고 참호 속에서도 봄기운에 감겨, 두고 온 가족을 떠올리며 눈감은 이 수두룩하였으리라. 이역만리 남의 땅, 그 전쟁의 명분에 공감하고 싸움의 까닭을 이해하며 죽어간 젊음은 몇이나 되었을까.
그렇게 죽어 간 남의 나라 장병들이 여기에 있다. 그 죽음을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으려나.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설마리 전적지에 대한 발굴을 제안한다. 한국전쟁은 한국군만이 치른 것이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우방의 지원으로 버틸 수 있었고 반쪽 난 땅이나마 지킬 수 있었다. 구구한 말들이 있겠으나 전쟁의 전말은 일단 접어두자.
우리를 위해 이역만리에 와서 죽어간 사람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일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적지를 발굴하여 유해와 유품을 찾아 그 후손들에게 돌려주고, ‘발굴유물’이라는 현물로서 그들을 기려야 한다.
실체를 보여주면서 그들을 추모하고 감사케 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그들의 죽음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더 나아가 국가적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외교 전략이 될 수도 있다.
여태껏 우리는 무심했고 실리에도 둔감했다. 실리 외교에 문화유산이 한 몫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파주 설마리 영국군 전적지에서 입증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