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내가 벤치에 앉아있다. 그들은 변호사다. 초조함 뒤에 홀가분함이 묻어 있다. 얼마 뒤면 배심원들의 평결이 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이 재판에 많은 것을 걸었다. 특별히 정의롭기 때문이 아니다.

한 사람은 많은 수임료를 받고 범죄자를 무죄로 만들어주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한때 학생운동에 열성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에 안주한 386세대이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기자는 특종을 욕심내고 시민단체의 사무국장은 스스럼없이 거짓증언을 자처한다. 피고는 소송을 포기하고 국회의원은 정치적으로 활용한다.

이들이 하나의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움직인다.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정의’라는 추상적 가치가 최소화된 법정신의 실현이자 진실의 발견이다.

손아람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김성제 감독의 ‘소수의견’은 법정드라마다. 불의한 검사와 그 불의에 맞서는 변호사가 나오고 치열한 법정 공방이 오가는 일정한 패턴을 따른다. 이러한 패턴은 정의라는 현실화되지 못한 가치에 대한 환상을 제공한다.

이 영화의 결론은 할리우드의 일반적 법정 드라마처럼 완벽한 승리를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피고에 대한 배심원의 무죄 평결과는 다르게 판사는 유죄를 선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판타지임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은 그것보다 더 시궁창이기 때문이다.

김성제 감독을 비롯한 ‘소수의견’ 관계자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이 영화가 특정한 사건, 사실과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영화 초반에 자막으로 제시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영화는 기본적으로 픽션이다. 허구인 영화에 대해 허구임을 강조할 때 이러한 강조는 역설적으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지시한다.

다섯 명의 농성자가 죽고 한 명의 경찰특공대대원이 희생된 용산 참사 말이다. 현실에서 국민참여재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300여 쪽에 달하는 수사기록은 사라졌다. 증거수집영상은 삭제됐다.

영화의 서사는 법정드라마라는 정형화된 테두리 안으로 파고들려 하고 영화의 외피는 사회정의라는 포괄적 주제를 향해 뻗어 나가려는 묘한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소수의견’은 대중성을 의식한 나머지 정형화된 인물을 내세워 법정 드라마의 공식에 집착하는 우를 범했다.

그러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대신하려고 하지 않는다. 때로는 어떤 미흡함이 더 사랑스러울 때가 있다.

/이대연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