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만7천여명 동원 두달여 작업
최근 발굴조사로 드러난 규모
정조의 기록과 꼭 맞아 ‘감탄’
조선은 ‘민본(民本)’의 나라였다. 백성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고 농업이 기간산업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은 나라의 슬로건이었고, 농업생산력을 높이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전통농법의 성패는 ‘물 관리’에 달렸고, 수리시설의 확장과 관리는 그 성패의 가늠자였다.
조선 후기, 현군(賢君) 정조는 문예 진흥에 박차를 가하는데, 그중 우선은 출판 사업이고, 그중에서도 기록화 사업은 그가 이룬 문화적 치적의 백미이다. 이는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케 한 일등공신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와 조선 후기 빼어난 출판기술을 보여주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가 잘 말해 준다.
화성 만년제(경기도 기념물 제161호)는 치수를 통해 민본정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자 정조 시대 기록문화를 현물(現物)로써 입증하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아울러 조선 시대의 풍수사상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수리시설이기도 하다.
18세기 말 정조는 화성을 축성하면서 백성들의 논과 밭을 관개하는 데 도움을 줄 제방을 화성 밖 사방에 축조하였는데, 동쪽(수원 지동)에 축조한 것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서쪽에는 축만제(祝萬堤)가, 북쪽에는 만석거(萬石渠)가, 남쪽에는 만년제(萬年堤)가 남아있다.
이중 만년제는 1798년 2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두 달여에 걸쳐 군정(軍丁)·모군(募軍)·승군(僧軍) 등 3만7천920명을 동원해 대대적인 굴착과 준설 작업으로 이룩한 조선 후기 대표적인 수리시설이다.
만년제의 시설 중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의 형국과 연관하여 드러나는 풍수적 결과물로 괴성(塊星)을 들 수 있다. 괴성은 만년제 가운데에 축조한 동그란 섬이다. 석재로 쌓은 12층은 일 년 12달을 상징하고, 둘레의 81보는 천자의 숫자인 9×9에 합치시킨 것으로 풀이된다.
그 의도야 어떻든 작은 시설물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자연 만물과의 조화를 도모한 선조들의 멋과 운치가 기막히다.
만년제는 최근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통해 그 전모가 밝혀졌는데, ‘일성록(日省錄)’에 기록돼 있는 괴성과 제방 등의 규모와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유적의 크기가 잘 맞아떨어지고 있어 그 기록의 철저함과 정확성에 감탄할 지경이다.
또 화성 일대에 수리시설을 두어 민생의 안정을 도모코자 했던 정조의 진정성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물관리’에도 정조와 같은 깊은 철학적·과학적 사유의 결과가 실려야 할 것이다. 문화유산과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