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형 이방원에 피살 운명갈려
세종대왕의 명으로 새롭게 조성
대군 추봉 불구 후손 끊겨 ‘쓸쓸’


이방석은 1392년 태조 이성계의 총애로 여덟 아들 중에서 막내였지만 세자에 책봉됨으로써 조선의 2대왕이 될 수 있었으나, 1398년 이복형 이방원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다.

그렇게 둘의 운명은 뒤바뀌었고 이방석의 무덤(경기도기념물 166호)은 남한산 자락의 외진 곳에 초라하게 자리한 반면, 서울시 서초구에 위치한 태종 이방원의 무덤인 헌릉은 국가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고려말기 고급관료들은 고향에는 향처(鄕妻), 서울에는 경처(京妻)를 두었다. 경처는 권력에 접근한 후 얻게 되는 부인으로 명문집안 출신이 많았다.

태조 이성계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방원의 생모 신의왕후 한씨는 향처, 이방석의 어머니 신덕왕후 강씨는 경처.

강씨는 후처지만 첩은 아니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첩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따라서 이방석은 서자가 아니었다. 8형제 중에서 막내이기에 당당하지는 않지만 왕위계승권에서 완전히 배제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세자책봉에 수틀린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성계와 생모 강씨, 그리고 정도전 등의 뜻이었지만 권력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방석의 묘역은 한참이나 방치되었다가 1448년(세종 30년) 부인 심씨가 돌아가자 세종의 명으로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조선전기 묘제를 따르고 있다.

이에 봉분의 형태가 방형이고 묘비에는 연잎 모양의 장식이 더해져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무덤에서 부인은 남편 무덤의 왼쪽에 주로 자리한다.

이승이 아닌 저승에서는 음양이 거꾸로 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이방석의 무덤은 아주 이례적으로 부인 심씨 무덤의 바로 뒤에 있고 그것도 바싹 붙어있어 무척이나 답답하다.

이방석은 1680년(숙종 6년) 의안대군으로 추봉되나, 그의 무덤은 사대부 무덤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대군으로 추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능원(陵園)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고 최근까지 관심 밖에 있었다.

그리고 후손이 끊겨 돌보는 이 없어 쓸쓸하다. 조선시대 능묘는 거의 대부분 승자의 것들로 영광의 표상이다.

그러나 이방석의 무덤은 패자의 것이고 권력무상의 씁쓸함을 드러낸다.

부와 권력이 한쪽으로 집중되는 세상, 대개 승자보다 패자이기가 쉽잖은가. 권력욕에 심취된 이, 패배의 아픔을 겪은 이, ‘권력’을 떠올리며 이방석의 무덤에 들름도 좋을 듯하다. 천천히 거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