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힘껏 뛰었지만, 뜀틀을 넘지 못했다. 아이들이 웃는다. 새로운 일도 아니다. 소녀는 예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다. 운동도 못 하고 집도 가난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기에 뜀틀 정도는 넘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설상가상 갑작스레 비가 내린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뜀틀에서 내려오는 소녀의 머리에서 검은 물이 흘러내린다. 잉크로 염색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요전 날 염색을 했다는 이유로 손바닥을 맞았다. 본래 갈색 머리지만 선생은 인정하지 않았다. 염색약을 살 돈 따위는 없었다. 얼굴과 옷이 검게 젖는다. 마치 그녀의 인생을 예고하듯 손바닥 위에 검은 물이 떨어진다.

‘가족 시네마: 순환선’으로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카날플러스상을 수상한 신수원 감독의 신작 ‘마돈나’는 순진무구했던 한 소녀가 어떻게 사창가로 향했는지, 종국에는 부유한 회장에게 장기이식을 위해 심장을 내줘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는지를 또 다른 여인의 시선으로 찬찬히 그려냈다.

언제나 최선을 다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자본, 그리고 남성에 의한 폭력과 착취 뿐이었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영혼에 난 커다란 구멍 뿐이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존재의 공백인 것이다.

‘마돈나(Madonna)’는 성모마리아를 지칭하거나 그녀의 형상을 일컫는다. 그만큼 구원·모성·생명을 상징한다. 끊임없이 추락하는 삶을 살아온 ‘미나’의 별명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가 마돈나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는 한 가지다. 가슴이 크기 때문이다.

성적 의미로서의 마돈나는 동명의 여가수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녀의 삶은 가수 마돈나의 저항적 퍼포먼스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었던 그녀의 삶을 텅 빈 구멍만이 대변해주는 것이다.

영화는 말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미나와 혜림이라는 두 여인의 공감과 소통으로 이어진다. 그녀들을 이어준 것 역시 존재에 난 구멍이다. 구멍은 마치 고리처럼 두 여인을 강하게 결속시킨다. 영혼에 구멍을 지닌 자들의 연대. 그녀들의 연대는 젊은 의사에게로 확대된다.

그리고 마침내 한 생명을 탄생시킨다. 클로즈업된 신생아의 얼굴, 웃는 듯 꿈꾸는 듯한 그 얼굴이야말로 연대의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마돈나’는 지난 칸 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상영되며 호평을 받았다. ‘마돈나’의 설정은 자극적이며 표현 또한 거칠다. 정형화된 플롯과 고전적 전개는 다소 눈에 거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과 한국의 관객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생명을 향한 연대의 미덕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이 시대를 견뎌낼 수 있는 대안일지도 모른다.

/이대연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