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조선시대 임경업 장군 설화 유명
대규모 제례 전통 수년전부터 자취 감춰
백령도 주민 대부분 기독교·천주교 신자
영흥도만이 수협 중심 매년 대보름 진행
“마을화합 위한 문화로 명맥 이어갔으면”


뱃사람들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작은 배에 올라 끝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바다로 나가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뱃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만선의 꿈을 이뤄줄 초월적인 존재가 필요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타난 것이 풍어제다.

풍어제는 섬이나 해안가에서 선원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를 일컫는다.

풍어제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다. 삼국시대 때부터 바다와 물을 관장하는 신에게 비는 제의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삼국시대나 그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는 “군산도 일봉산에 오룡묘가 있는데 그 입벽에 오신상을 그려 놓고 선원들이 용왕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1771년(영조 47) 조선 후기의 문신인 서명응(徐命膺)은 ‘고사신서(攷事新書)’에서 “동해의 양양, 남해 나주(전라도), 서해 풍천(황해도). 북해 경성(함경도)에서 중사(中祀)인 해신제를 지냈다”고 썼다.

풍어제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사해제(四海祭), 사독제(四瀆祭), 사해사독제(四海四瀆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나, 신에게 어민들의 안전, 풍어를 기원했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한다.

섬으로 이뤄진 옹진군에서도 매년 풍어제가 열렸다. 옹진군에서 전해 내려오는 풍어제와 관련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연평도 임경업 설화다. 조선시대 임경업 장군이 병사들을 이끌고 연평도 해역을 지날 때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한다.

임 장군이 병사에게 나무를 산에서 꺾어 오게 한 뒤 이를 세워놓고 축문을 써 읊으니 수 많은 조기가 잡혔다고 한다. 이후 서해의 각 섬에서는 임 장군을 신으로 모시게 됐다. 지금도 옹진군 연평도에는 임경업 장군 사당이 남아있다.

바닷가에서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로 이어져 내려왔으나, 최근 들어 그 명맥이 약해지고 있다. 서낭당 등 제의를 올렸던 흔적은 남아 있지만 기독교와 천주교 등의 유입으로 풍어제에서 진행되는 ‘굿’을 미신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과거와 달리 과학기술의 발달로 기상예보와 선박의 안전도가 높아지면서 풍어제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임경업 장군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연평도는 197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최대 조기어장이었으며, 어선 수천 척이 몰렸다. 선주와 선원들은 조기잡이철이 시작될 무렵인 4월 말 대규모 풍어제를 열었다.

이들은 연평도 조기잡이의 시초라고 여기는 임경업 장군을 신으로 모시고 만선을 기원했다. 이러한 풍어제는 수년 전까지만 해도 열렸으나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

연평도 주민 김상순(83·여) 씨는 “한국전쟁 직후 빈곤했던 시절 열렸던 풍어제는 선원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의 축제였다”며 “풍어제가 열렸던 날만큼은 먹을 게 풍족했다”고 말했다.

연평도 풍어제는 조기 파시가 막을 내린 1970년대 초까지 대규모로 열렸으나, 이후 급격하게 축소됐다고 한다. 1990년대 꽃게잡이가 시작되면서 어촌계 주도로 명맥을 유지했지만, 지난해부터는 기독교·천주교·불교 등의 종교가 함께 참여하는 ‘한마음 기원제’로 바뀌었다.

박태원(55) 연평어촌계장은 “다른 종교들이 풍어제를 무속행사라고 생각해 반대가 있었다”며 “예전처럼 성대하게 열리지도 않아서 종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행사로 바꿨다”고 말했다.

주민 강향원(86·여) 씨는 “풍어제 때 어르신들이 뱃노래를 가르쳐 주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요즘 연평도 젊은이들은 그럴 기회가 없다. 전통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쉽다”고 말했다.

백령도에서 풍어제가 사라진 것은 더 오래됐다. 20~30년 전에 마을 주민 다수가 참여하는 풍어제는 자취를 감췄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무당이 살면서 당집에서 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이마저도 자취를 감췄다. 백령도는 섬 주민의 대부분이 기독교와 천주교 신자다. 이 때문에 제의를 미신이라고 믿는 풍조가 강해져, 풍어제 등이 사라졌다.

백령도 주민 김순열(84·여)씨는 “예전 아버지는 당집에서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소를 잡아서 제를 지냈다. 그 동네는 당산이라고 부르며, 주변 나뭇가지 하나도 못 꺾게 했다”며 “지금은 그런 풍습이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백령도에서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박창옥씨는 “만신집에 무당이 살고 있었으나, 최근 육지로 나가면서 백령도에서는 무당이 굿을 하는 전통은 끊어졌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섬에서는 풍어제가 축소되거나 자취를 감추고 있는 상황에서 영흥도는 10여 년 전부터 영흥수산업협동조합 주관으로 풍어제를 진행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연안부두와 북성포구, 월미도 등 뭍 지역에서는 매년 풍어제가 진행되고 있지만, 옹진군 섬 지역에서 풍어제가 진행되는 곳은 영흥도가 유일하다.

영흥수협 관계자는 “10여 년 전에 마을에서 풍물과 함께 마을 잔치가 진행되던 것을 풍어제를 포함해 진행하고 있다”며 “어민들의 만선과 안전을 기원하는 풍어제가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으로서 앞으로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매년 풍어제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매년 정월 대보름, 영흥도의 풍어제가 열릴 때면 전날부터 마을이 들썩인다. 부녀회 회원들은 음식준비에 한창이다. 다른 주민들도 다음 날 열릴 풍어제를 준비한다.

풍어제 당일 새벽엔 무당이 영흥도의 산인 국사봉 정상에 올라가 그 곳에 있는 나무 앞에서 제를 올리며 당신을 모시고 내려 오는 행사를 연다.

국사봉에서 내려온 뒤 오전 10시부터 본격적인 풍어제가 수협공판장 앞에서 열린다. 10시께 시작한 풍어제는 오후 6시까지 진행된다. 공판장 앞에는 마을주민 등 300여 명이 풍어제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들며, 12가지 굿이 차례로 진행된다.

공판장에서 굿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무당들은 인근에 위치한 직판장을 돌며 장사가 잘되게 해달라며 기원하는 굿을 하기도 하며, 배를 타고 나가 선상 굿을 진행한다. 바다의 신께 술과 음식을 드리며 선원들의 안전과 풍어를 비는 것이다.

풍어제가 끝날 때면 모인 마을 주민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며 잔치를 벌인다.

매년 영흥도에서 풍어제를 진행하는 꽃맞이굿 보존회의 김선희 전수자는 “풍어제를 마을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하나의 전통문화로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며 “아직 영흥도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이 풍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참여가 소극적인 편”이라고 했다.

그는 “풍어제는 아니더라도 어민들은 새로운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갈 때는 술을 뿌린다거나 고사를 지내는 등 각각의 방식으로 전통의 풍습을 따르고 있다”며 “풍어제도 마을 공동체의 화합과 풍어를 기원하는 차원에서 계승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다른 많은 지역에서 축소되거나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강조했다.

인천시 동구 화수부두와 연안부두 등 뭍에서도 ‘서해안풍어제 보존회’의 풍어제가 열리고 있다. 서해안풍어제 등은 무형문화재로도 지정돼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로서 계승·발전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풍어제를 진행하고 있는 무당들은 점점 명맥을 잇기 힘들어 진다고 했다.

무당이나 굿에 대해 ‘미신’이라고 터부시 하는 경향과 함께 풍어제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적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풍어제가 활발했던 옹진군 섬 대부분에서 풍어제가 사라졌으며,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영흥도의 경우도 마을 수협이 주도적으로 기획하면서 열리게 됐다.

매년 화수부두에서 풍어제를 열고 있는서해안풍어제 김혜경 전수자는 “섬 지역의 풍어제는 거의 자취를 감췄으며, 일부에서는 반발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면서 “기독교 등 종교의 유입으로 인한 영향이 크다. 또한 예전보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가 적어지고, 경제적으로도 풍어제를 준비할 만큼 여력이 안되다 보니 풍어제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