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택구간 조선 명문가 집성촌 위치
항일운동 투신 ‘노블레스 오블리주’
6형제중 이시영 선생만 광복맞아
도보여행을 즐긴다면 광복 70주년을 맞은 올해 8월에는 경기옛길 삼남길 ‘진위고을 길’을 걸어보는 것을 권한다.
삼남길은 경기옛길 중 한양에서 충청도를 거쳐 호남지역을 오가던 길로서 과천부터 안양·의왕·수원·화성·오산·평택에 걸친 길 중 평택구간에 진위고을이 있다.
무봉산 서쪽 자락에 있는 진위면 가곡1리는 산과 골짜기(谷)가 아름답다(佳)고 해서 ‘가곡리’라 이름 붙은 곳으로 삼남길은 이 마을을 가로 지른다. 마을과 인근 지역은 조선 후기 경주 이씨의 집성촌으로 백사 이항복 이후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의 세거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위태롭자 당시 조선 최고 명문가 경주이씨 집안의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6형제는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다. 국권이 강탈되자 1910년 12월 6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 형제는 평택 진위면 일대의 토지를 비롯해 전 재산(현재 600억원 상당)을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해 항일운동기관을 세우는 데 사용했다. 또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직접 치열한 항일투쟁에 나섰다. 6형제는 풍찬노숙을 마다치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낯선 이국에서 모진 세월을 보내며 6형제는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셋째 이철영 선생의 1925년 병사를 시작으로, 둘째 이석영 선생은 굶주림으로 아사했다. 넷째 이회영 선생은 ‘아나키스트’로서 독립운동 중에 일제에 검거돼 모진 고문으로, 이호영 선생 일가는 만주에서 일제의 흉탄에 의해 사망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을 때, 6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고국 땅을 밟은 사람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뿐이다. 한때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로서 전도양양한 학자이자 관료였던 그가 일제강점기를 버텨내고 광복을 맞았을 때의 나이는 일흔여덟.
당시 대다수의 권문세가와 지배계급은 일제에 굴욕적인 자세로 임한 것과 달리 경주이씨 6형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가곡리 마을 입구에는 과거 이곳이 경주 이씨들의 집성촌이자 소유지였음을 알리는 화강암 표석(慶州李氏阡)이 남아 있다. 또 집안의 이야기를 담은 안내판을 볼 수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가진 모든 것을 나라를 위해 던질 수 있는 지도자를 얼마나 꼽아 볼 수 있는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지 새삼 돌이켜볼 수 있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