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조때 이조판서 겸 대제학
병자호란시절 청 칭송 비문 짓고
‘환향녀’ 보호등 실리·인륜 추구
무덤에 두개 신도비 ‘엇갈린 평가’


19일은 세계인도주의의 날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모두를 평등한 인격체로 대하자는 것이 인도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성리학이 국시였던 조선시대에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했고, 가문을 위한 희생을 강요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조선의 인조는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어 항복했고, 청나라는 전승의 대가로 무려 60만 명에 달하는 백성을 청국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 중 일부는 몸값을 치르고 조선으로 귀환했다.

사대부들은 이렇게 돌아온 아녀자들을 ‘환향녀(還鄕女, 화냥년)’로 멸시하면서 죽음을 강요하고,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재가(再嫁)한 여성의 자식들처럼 취급해 관직에 등용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포로로 끌려가서 당한 일은 재가(再嫁)와는 다른 경우라고 임금을 설득해 그들을 지켜준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다.

그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흔히들 삼전도비(三田渡碑, 사적 제101호)를 지은 인물로 더 유명하다.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가 산성에서 내려와 청태종의 막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하며 항복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당시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의 실천 윤리는 명분과 의리가 핵심이었기에 임진왜란 때 우리를 구해준 명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 청나라를 숭배한다는 것은 국가적 치욕으로 치부됐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 황제를 칭송하는 삼전도비문을 짓는다는 것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이 곤혹스러운 일을 맡았던 사람이 당시 이조판서이자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었던 이경석이다. 그는 말년에 주전파들의 극심한 질타를 받았고 그의 서거 후 신도비의 비문이 지워져 땅속에 묻힌 채 300여 년이 흘렀다.

그의 무덤(경기도 기념물 제84호)은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에 자리하고 있는데, 무덤에 이르는 길목에는 그의 신구(新舊) 신도비가 각각 서 있다. 하나의 무덤에 두 개의 신도비를 세운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 평가에서 시대상에 따라 옳고 그름의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역사 인식’의 한계가 드러난 단적인 사례에 속한다.

구(舊) 신도비는 비문이 지워진 채 땅에 묻혀 있었던 것을 최근 다시 복구해 세웠다. 비문의 훼손은 그가 삼전도비를 찬술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시대 철학인 명분과 절개보다는 현실적 실리와 보편적 가치를 택한 인물이다.

이경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현실을 망각한 명분보다 인륜을 택해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코자 노력했던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념과 가치를 넘어 가장 존중받아야 할 덕목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상대에 대한 진심 어린 배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