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기술은 애초에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먹고살기 위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그 기술들이 위협적인 것이 되면서 그녀는 괴물이 된다. 그녀가 괴물이 되었기 때문에 기술들이 위험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괴물이거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웃기다. 그리고 잔혹하다. 희극적 유쾌함과 비극적 참혹함 사이 어디쯤 우리네 삶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미안해요. 그러니까 이해해 주세요”라며 테이블에 칼을 꽂는 수남(이정현)은 재미 삼아 잠자리의 날개를 뜯는 아이들의 순진무구함과도 닮았고 사냥한 짐승에게 감사와 사죄의 기도를 올리는 인디언 전사와도 닮았다. 그러나 아이들의 일도 아니고 수 세기 전 북미의 일도 아니다. 21세기 자본주의 대한민국의 일이다.
수남의 행동이 분명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카메라와 함께 그녀가 들려주는 삶의 궤적들을 좇다 보면, 희망을 잃고 먹고 살기 위해 성실함을 버리고 괴물이 되어야 했던 절박함과 마주치게 된다. 생계형 괴물의 탄생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는 강요에 가깝다.
우리 사회의 급속한 변모와 물질중심주의가 토끼의 꼬리처럼 그녀를 이상한 괴물들의 나라로 끌어들인 것이다. 재개발이 가져다줄 이익 앞에서 난무하는 권모와 술수, 광기는 적나라하게 발가벗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 중 누가 괴물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영화 속 우스꽝스러움에 비실비실 웃다 보면 뒤늦게 그 속에 들어있는 날 선 칼끝이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안국진 감독의 신인답지 않은 연출력과 탄탄한 시나리오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부문 대상 수상작이라는 이력이 허투루가 아님을 증명한다. 특히 수남 역의 이정현은 독특한 인물 해석으로 빼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독립영화의 영역 안에서 드물게 B급의 정서를 지닌 활달한 작품의 탄생이 반갑다.
/이대연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