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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아는 만큼 보인다·6]삽화가로서의 성과 지면기사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계속되는 '피카소 고향으로부터의 방문'전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도예가, 판화가, 삽화가, 시인으로서의 피카소를 부각시키며 피카소의 무한한 호기심, 경계를 넘나드는 창의력과 표현력을 여실히 드러낸다.피카소는 삽화 부문에 있어서도 '역시! 피카소'라는 감탄이 나올 만큼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피카소는 다른 어떤 화가보다 시인과 문인들이 각별히 좋아하던 화가였다.피카소는 파리에 정착한 날부터 생애 마지막 날까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들 막스 자콥, 기욤 아폴리네르, 장 콕토, 폴 엘뤼아르,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피에르 르베르디 등과 끊임없이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그리고, 당시의 편집자들이나 문학가들이 천재의 그림이 들어간 책을 출판하고 싶어 피카소를 조르고는 했단다.피카소는 마감 시간을 지켜야 하는 등의 이유로 매우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삽화 작업에 참여했는데, 이는 피카소가 대단한 장서가로 책을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대의 지식인들과 맺은 긴밀한 교우 관계와 친분 때문이기도 했다.피카소는 24세였던 1905년 안드레 살몽의 시집을 시작으로 1974년 피카소 사후에 출간된 피에르 앙드레 브누아의 시 '그래서'까지 무려 156편의 작품에 삽화를 그렸다.피카소는 당대 문학가들의 작품뿐 아니라, 출판인들의 권유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나 뷔퐁의 '자연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등 고전문학을 위한 삽화를 제작하기도 했다.'변신이야기'는 이번 전시의 중요 섹션을 차지하고 있으며, 톨스토이의 초상도 전시에서 직접 살펴볼 수 있다.그간 삽화가로서의 피카소는 미술사가와 비평가에게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나마 연구가 있었더라도 다른 분야와의 비교 정도에 그쳤다.그러나 역사적, 예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결코 삽화의 중요성이 낮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피카소의 널리 알려진 작품들과 나란히 발전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또한, 피카소는 삽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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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아는 만큼 보인다·5]평화의 비둘기 지면기사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살펴보면, 신의 계시로 대홍수가 나고 한참 뒤 노아는 방주 밖으로 비둘기를 날려 보낸다.비둘기는 며칠 뒤 올리브 잎을 입에 물고 돌아왔고, 이를 보고 노아는 어디선가 물이 빠져 육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때의 비둘기는 올리브 잎과 함께 희망을 물고 왔던 것이다.이렇게 오랫동안 비둘기는 인간에게 고마운 존재였고 상서로운 동물이었다. 편지를 전달하던 비둘기, 전서구도 인간에게는 매우 유용했다.특히 서양 미술의 도상학에서는 비둘기가 후광과 함께 그려지면 성삼위일체에서 '성령'을 의미한다.대천사 가브리엘이 처녀인 마리아에게 그리스도를 회임할 것임을 알리는 회화 '수태고지'에는 빛줄기 사이로 비둘기가 어김없이 날아든다. '성령으로 잉태하사…'를 표현하기 위한 도상학적 수단이다.오랫동안 꽤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비둘기의 상징성, 특히 '평화의 새' 비둘기라는 인식은 20세기에 들어 피카소에 의해 다시 한번 확고하게 자리잡는다.피카소는 1944년 10월부터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공산당에 입당한다는 것은 사유재산을 부정한다는 의미보다는 반나치 투쟁에 능동적으로 입장을 취한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리고 1949년 1월, 공산당은 피카소에게 그해 파리에서 개최되는 세계평화회의의 홍보 포스터 제작을 의뢰했고, 피카소는 비둘기를 주요 모티프로 선택했다.어린 시절 말라가의 광장에서 보았던 나뭇가지 위의 비둘기들과 같은 것이었다. 이리하여 1949년 유럽 모든 도시의 담벼락에는 피카소의 비둘기가 나붙게 되었다.물론 이 때 제작된 비둘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일부에서는 비둘기가 사회주의와 걸맞지 않는 부르주아 감성이라고 비난했고, 미술평론가 존 버거는 피카소의 비둘기가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표면적이고 일차적으로 그려졌다며, 공산당이 피카소의 명성을 이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이번 주 7월 6일에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개막하는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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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아는 만큼 보인다·4]그의 여인들 지면기사
일곱번의 사랑 두번의 결혼그녀를 보면 그의 작품 보여사랑할땐 부드러운 장밋빛 화풍불화땐 작품에 발작증상 나타나피카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것은 피카소의 여자 관계다. 특히 말년에 나이 어린 여자들과 함께 살았다는 것에 남자들은 부러움을 표현하고, 여자들은 눈살을 찌푸린다.하긴 피카소만큼 여성 편력으로 세간의 관심을 많이 끈 예술가도 드물다. 피카소는 7명의 여인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두 번 결혼하였고, 아이는 4명을 낳았다.이들 여인은 모두 피카소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예술 세계에 영향을 주지 않은 여인들까지 더하면 피카소와 관계한 여인은 10여명이나 된다.피카소는 파리에서 매우 가난하게 지내던 시기에 스무살 동갑내기였던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 Olivier)를 만나 8년을 함께 했다.페르낭드와 헤어진 후에는 폴란드 화가 루이스 마르쿠시의 약혼녀였던 에바 구엘(Eva Gouel)을 만나 깊이 사랑하였으나, 그녀는 1차 대전 중이던 1915년에 결핵에 걸려 세상을 등지고 만다.에바가 죽은 뒤 2년 후, 피카소는 장 콕토의 부탁으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공연의 무대 장식과 의상을 제작하게 되며, 이를 계기로 러시아 장교의 딸이었던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Olga Khokhlova)를 만난다.둘은 1918년에 결혼하여 아들 파올로를 낳았고, 1935년에 헤어지게 되지만 올가의 반대로 이혼을 하지는 않았다.피카소는 올가와 결혼생활 중이던 1927년에 마리테레즈 발터(Maire-Therese Walter)를 만났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17살, 피카소는 46살이었고 둘은 몇 년간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했다. 1935년 올가가 피카소를 떠나던 해에 둘 사이에 딸 마야(Maya)가 태어났다.피카소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에는 폴 엘뤼아르의 소개로 사진가이자 지식인이었으며, '게르니카'에 얼굴이 등장하는 도라 마르(Dora Maar)를 만나게 된다. 도라는 스페인어에 유창했고 미술에 대한 이해가 깊어 피카소와 깊게 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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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아는 만큼 보인다·3]동시대의 거장 '야수파 창시한 마티스' 지면기사
피카소를 설명하는 수식어들은 참으로 많다. '현대미술의 아버지', '20세기 미술의 창시자', '20세기 예술을 지배한 작가', '20세기 미술의 혁명가' 등으로 불리는 피카소는 미술의 새로운 시대를 연 독보적인 인물로 추앙받는다.일찍이 부와 명성을 얻은 피카소는 자신의 이러한 지위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피카소가 자신의 경쟁자로 인정한 유일한 화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야수파(포비즘)의 창시자인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이다.피카소는 형태의 해방을 가져온 입체파의 창시자로, 마티스는 색채의 해방을 가져온 야수파의 창시자로 서로 매우 대조적인 듯하다.하지만 둘은 관심사를 공유하고 각자의 작업에 존경을 보내거나 때로는 질투심을 드러내며,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우정을 지속해 나갔다.피카소는 현대미술을 주제로 토론을 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마티스가 있다오"라고 말하곤 했으며, 말년에 마티스의 작품 10점을 구입하여 소장하기도 한다.당시 평단도 당대의 위대한 지침으로서 두 예술가를 인정했다. 동시대 시인이자 미술비평가로 '초현실주의'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는 이 두 예술가에게서 현대(아방가르드) 미술의 미래를 보았다고 평가하며, 1차 대전이 한창인 1918년 파리의 폴기욤 화랑에서 '마티스-피카소'전을 직접 개최하기도 하였다.오는 7월 6일부터 3개월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피카소-고향으로부터의 방문'展에는 이 두 거장의 관계를 보여주는 소박하지만 유의미한 작품이 있다. 피카소의 '의자 옆의 누드'는 A4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석판화 작품이다.작품 속 여자는 옆으로 서서 의자를 짚고 있다. 배는 불룩하고 다리는 짧아서 귀여운 맛이 있다. 옆으로 돌아선 자세의 신체는 반으로 나뉘어 왼쪽은 연두색으로 오른쪽은 하늘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곱슬거리는 머리와 암시적으로 표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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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아는 만큼 보인다·2]고향 말라가 지면기사
앞으로 한 달 뒤, 피카소의 작품들이 인천을 찾는다. 전시의 제목은 '피카소, 고향으로부터의 방문'으로, 전시되는 작품 전체가 피카소의 고향인 스페인 말라가(Malaga) 시(市)에서 왔기 때문에 붙여진 제목이다.전시는 말라가 시에서 운영하는 '피카소 재단-생가 박물관(Fundacion Picasso_Museo Casa Natal)'의 소장품으로 구성된다.말라가는 스페인 남쪽 끝 안달루시아 지방에 속해 있으며,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마주보고 있는, 인구 55만명의 작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항구도시이다. 축구팬들에게는 현재 프리메라 리가에서 6위를 차지하며 선전하고 있는 말라가CF의 연고지로 알려져 있을 것이다.말라가는 711년부터 1487년까지 아랍계 무어인의 지배를 받았다. 그 흔적을 보여주는 이슬람 유적 알카사바 성채가 고대 로마 유적인 극장, 가톨릭 대성당과 조화롭게 인접해 있다.매우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있는 모습에서 항구 도시 특유의 넉넉한 개방성과 관용이 드러난다. 모로코식 민트티와 스페인 정통 추러스가 멋지게 어우러지는 곳, 태양의 해변 '코스타 델 솔'이 시작되는 아름다운 휴양지가 바로 말라가이다.피카소는 바로 이 곳 말라가 메르세드 광장 36번지의 5층 건물에서 1881년 10월 25일 태어났다.1861년에 건축된 피카소 생가 건물은 150년이 넘은 지금까지 예쁘고 견고한 녹색 창을 유지한 채 보존되고 있으며, 메르세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도 여전히 광장의 중앙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등 피카소 출생 당시의 도시 경관은 여태껏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현재 피카소의 생가 건물은 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말라가 시 산하 기관인 '피카소 재단'에서 소장품 관리와 박물관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재단은 20세기 미술을 지배한 피카소라는 인물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강화하고, 피카소 생가를 통해 도시의 문화, 관광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프로모션하고 있다.7월에 인천에서 개최되는 한국 전시 또한 피카소와 말라가의 관계를 세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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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아는 만큼 보인다·프롤로그·1]인간으로서의 삶과 예술세계 지면기사
나치대학살고발등 반전 외쳐비둘기에 '평화' 의미 부여도원시부족미술·X-레이필름다양한곳서 영감·소재 얻어'피카소가 우리에게로 온다!'아시아 최초 전시회로 관심을 끌고 있는 한국·스페인 도시간 교류전, '피카소의 절대미-고향으로부터의 방문전(展)'이 1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인천시내에는 지난 주말부터 피카소 전시회를 알리는 배너가 나붙기 시작했다. 인천시-스페인 말라가시 특별 교류전 형식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 시민들의 관심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은 '피카소'란 이름 때문이다.피카소에대해 세계적 미술가 정도로는 알고 있지만 정작 그의 예술세계가 어떤지,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한국과 관련한 그림을 남겼다는데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가 막막하다.또한 피카소가 수많은 여성들과 사귀고 동거했다는 얘기도 얼핏 듣기는 한 것 같은데 막상 말하려니 자신이 없다.■ 피카소와 한국피카소는 반전·평화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하게 된 것도 피카소에서 비롯됐다고 할 정도다.피카소는 한국과 관련해서도 아주 유명한 대작을 남겼다. 6·25 전쟁이 한창일 때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작품이다.1951년 10월, 미군의 북진 과정에서 빚어진 황해도 신천의 양민 대학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아기를 안은 여성, 임신부, 소녀, 어린이 등이 벌거벗은 채 한 데 몰려 거대한 악마의 모습을 한 무리들로부터 총격받기 직전에 있는 장면을 그렸다.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 또한 나치의 대학살을 고발한 작품이다.피카소의 작품 중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게 있다. 1954년에 그린 '평화여 영원하라'(Love Live Peace)란 것인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바로 강강술래다.들판에서 나무 한 그루를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빙 둘러 손을 잡고 춤을 추면서 오른쪽 방향으로 돌고 있다. 강아지도 두 발을 들고 같이 돈다. 그 가운데 비둘기가 난다.흰색 바탕에 검은색깔 붓터치로 대상을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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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아는 만큼 보인다·프롤로그·1]인간으로서의 삶과 예술세계(관련) 지면기사
→ 1면서 계속피카소의 작품 중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게 있다. 1954년에 그린 '평화여 영원하라'(Love Live Peace)란 것인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바로 강강술래다. 들판에서 나무 한 그루를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빙 둘러 손을 잡고 춤을 추면서 오른쪽 방향으로 돌고 있다. 강아지도 두 발을 들고 같이 돈다. 그 가운데 비둘기가 난다.흰색 바탕에 검은색깔 붓터치로 대상을 단순화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평화에 대한 갈망을 담은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프랑스 사람들은 한국전쟁 내내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누구보다 부지런했던 르 피가로나 AFP 등의 종군기자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을 통해 피카소는 한국전의 피해상황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전쟁 반대'를 외쳤던 것이다.■ 피카소의 예술세계1881년에 태어나 1973년 아흔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피카소는 끊임없이 변신했다. 그는 모방의 귀재였는데, 그에게 모방은 곧 창의성의 시발점이었다. 그의 주변에 있기만 하면 모든 게 예술이 되었다.아프리카 원시 부족 미술품도, 사랑하는 연인의 X-레이 촬영 필름도, 장난감 자동차도 그에게는 예술적 영감이자 작품의 재료가 됐다.구상적이면서도 추상적인 화가이자, 조각가이고, 도예가이며, 판화가였다. 또한 연극과 발레의 무대 디자이너이면서 의상 디자이너였다. 시인이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사진작가가 되기도 했다.그는 연극, 무용, 음악, 문학(시), 마술, 주술, 신화, 종교의식 등을 두루 종합해 작품에 소화했다. 그는 조각을 위해 용접기술을 따로 배우기도 했다. 피카소 예술에는 경계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피카소는 1973년 숨을 거두기 직전에 파리에서 156점의 최근작 판화전을 개최했다. 죽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분야가 바로 판화라는 얘기다. 이번 판화전이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이번 피카소 한국전시회는 그 판화의 작품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내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