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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80]세계유산 구리 동구릉과 태조의 건원릉 지면기사
공민왕릉 영향… 곡장·석물 변화봉분등 후대왕들과 차이 '과도기'건립당시 원형 잘 간직한 신도비미술사적·학술적인 가치 뛰어나세계유산 조선 왕릉 40기 중에서 31기가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9기는 구리 동구릉 내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동구릉은 조선 왕릉을 대표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동구릉에는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 5대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현릉(顯陵), 14대 선조와 의인왕후(懿仁王后)·인목왕후(仁穆王后)의 능인 목릉(穆陵), 21대 영조와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능인 원릉(元陵) 등을 포함한 능 9기가 있고, 그곳에는 17위(位)의 왕과 후비가 영면하고 있다. 이렇듯 동구릉에는 조선 전기, 중기, 후기를 대표하는 왕릉들이 있어 조선 왕릉의 변천사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조선 왕릉의 규범이 된 건원릉이 있어 명실상부 조선 왕릉의 대표격이다. 건원릉의 조영을 담당한 사람은 박자청인데, 그는 공민왕릉과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을 만들었던 김사행의 제자였다. 이런 사실은 건원릉이 고려 왕릉 중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공민왕릉의 양식을 본받아 축조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런 한편 왕릉의 예법과 절차를 규정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1474년(성종 5)에 완성된 사실을 감안하면, 건원릉은 고려왕릉의 양식에서 조선왕릉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처럼 건원릉은 고려 왕릉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거기에 새로운 요소가 더해졌다. 구체적으로 건원릉은 병풍석의 무늬나 문인석·무인석 등의 양식에서 고려 공민왕릉의 영향이 보이지만, 봉분 주위로 곡장을 새롭게 돌린 점, 석호와 석양의 배치에 변화를 준 점, 장명등 등 석물의 양식과 문양에 새로운 요소가 가미된 점 등이다. 한편 건원릉은 이후 다른 왕릉과 비교할 때, 혼유석의 고석(鼓石)이 5개인 점, 석양과 석호가 다른 왕릉과 달리 배와 다리 사이가 메워져 있지 않는 점, 건원릉 정자각 위 오른쪽에는 다른 능과 달리 배위가 자리하고 있는 점, 신도비가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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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9]시흥 능곡동 신석기 마을유적과 빗살무늬토기 지면기사
경기문화재연구원, 2007년 발굴서울 암사동 뒤잇는 '중기' 추정토기 7점 예술적·기술적 큰의미공원조성후 방치·상주인력 필요10년 전인 2007년까지 우리나라 중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신석기시대 마을유적은 서울 암사동 유적이었다. 그런데 이 암사동유적은 마을 전체가 발굴된 것도 아니었고, 시기도 기원전 4,000~3,500년 사이의 신석기시대 전기에 국한되어,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신석기문화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한계는 암사동 유적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진 1970년대 초반 이후 최근까지 줄곧 이어져 왔다.이런 학술적 한계를 극복하고 경기도의 신석기문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 유적이 오늘 소개할 시흥 능곡동 유적이다. 이 유적은 2007년 시흥시 능곡동 일원에 택지개발사업지구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경기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한 것으로, 과거 해안선에 인접했던 해발 30m의 작은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유구로는 말각방형의 주거지 24기가 정형성을 보이면서 확인되었고, 유물은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망치돌, 갈돌, 갈판, 화살촉, 굴지구 등과 같은 석기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리고 유적의 연대는 집자리 규모와 형태, 토기의 형식 등에 의거하여 신석기시대 중기(기원전 3,600~2,500년)로 추정되었다.이 유적의 발굴로 신석기 전기에서 중기에 이르게 되면 취락의 입지가 하천변의 충적대지에서 해안가의 구릉 지대로 옮겨간 사실, 당시 마을의 구조는 중앙의 공터를 중심으로 20~30호의 가옥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던 사실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 출토유물 중에 어망추와 낚시 같은 어로도구가 전혀 출토되지 않은 반면에, 갈돌과 갈판 그리고 땅을 파기 위한 굴지구(掘地具)가 출토되어 농경이 생업경제였고 어로는 보조적이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유물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형태 복원이 가능한 7점의 빗살무늬토기였다. 몸통 전체에 단일의 문양만을 넣은 동일계 문양과 함께, 입술·몸통·바닥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문양을 넣은 구분계 문양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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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8]안양 석수동 마애종과 김중업박물관 지면기사
고려전기 범종연구 학술적 가치스님도 새겨… 국내 유일 마애종공장터에서 '안양사지'도 발굴돼김중업 작품건물 '박물관화' 독특우리나라 지정문화재 가운데 불교문화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60%를 넘는다. 이들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빼어난 것도 있지만, 일반인이 볼 때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하는 것들도 적지 않다. 예컨대 석탑의 경우 특별한 양식을 갖춘 것을 제외하고는 그저 그런 것들이 흔하다. 경기도 지정문화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라는 명분론을 빼고는 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다소 미흡한 것들도 있다.그에 비해 국가문화재로 승격해도 손색이 없는 것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오늘 소개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안양 석수동 마애종(安養 石水洞 磨崖鐘)'이다. 안양예술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는데, 넓적한 바위에 종과 종각, 그리고 종치는 스님을 새겼다. 구체적으로 종은 사각형의 목조 결구에 쇠사슬로 매달아져 있으며, 윗부분에는 용의 몸체와 머리를 형상화한 용뉴와 중국종에는 없는 음향조절 기능의 음통(音筒)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몸통에는 사방구천(四方九天,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유곽과 종유, 연화문 당좌, 종 아래 부분의 하대(下帶) 등이 치밀하게 새겨져 있다. 한편, 종각의 기둥 위에는 화반(花盤)과 구름무늬를 중앙과 좌우에 새겨 단조로움을 피했다.이 마애종의 압권은 종매(타종 막대)를 잡고 종을 치려는 스님의 모습이 있는 점이다. 발까지 내려온 법의와 오른쪽 어깨에 걸쳐 입은 가사를 아주 섬세하게 표현했으며, 종각 속의 종과 일체가 되어 생동감을 더한다. 이 마애종은 고려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스님의 조각으로 당대 법의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 종매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점 등에서 특별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이 유적은 현존하는 마애종으로는 국내 유일의 것이다. 그만큼 희소성이 빼어나다. 또 종의 세부 표현이 치밀하여 고려시대 범종 연구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있는 풍경'이기에 정감이 간다.해질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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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7]오산 수청동 유적, 우리나라 최대 백제고분군 지면기사
'매홀 = 수원' 정설 뒤흔드는 발굴한성백제시대 무덤 500여기 분포출토 유물중 1500여점 국가 귀속오산시 박물관 추진 반가운 행보백제시대 경기도 서남부 지역, 특히 수원·화성·평택·안산 등지의 행정 거점은 어디였을까? 또 삼국 시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있던 5세기 말엽에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때까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매홀(買忽)'은 과연 어디인가? 이런 물음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대부분의 백과사전류에서는 지금의 수원을 '매홀'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정설은 오산 수청동 유적(烏山 水淸洞 遺蹟)이 발굴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오산 수청동 유적은 세교신도시를 개발하면서 발굴된 유적으로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지난 2005년 11월에 착수하여 2008년 12월에 완료했다. 발굴 결과 한성백제시대의 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 지하에 움을 파서 무덤칸을 만들고 무덤 주변에 도랑을 돌린 토광묘의 한 형식)가 330여 기 확인되었는데, 이미 파괴된 무덤과 공원지역으로 지정돼 조사가 이뤄진 무덤들을 합해 총 500여 기의 무덤이 약 9만9천㎡의 범위 내에 밀집 분포하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이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아 국가에 귀속된 것만 해도 1천567점이었는데,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후반까지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또 167기의 무덤에서 총 7만 6천여 점의 구슬이 출토돼 "마한 사람들은 구슬을 보배로 삼았는데 옥구슬로 옷을 치장 하거나 목걸이와 귀걸이를 사용했으며, 금·은·비단은 보물로 여기지 않았다"고 기술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입증해 줬다. 이외에도 경기지역의 백제 무덤에서는 아주 드물게 출토되는 갑옷과 마구가 함께 출토됐으며, 백제의 무기 체제를 밝힐 수 있는 대도, 철모, 화살촉 등의 무기류가 다량으로 수습됐다. 특히, 중국 동진(東晋)에서 제작된 청자반구호와 금동제 화살통이 발견돼 이 수청동 유적의 정치적 위상을 가늠케 해줬다.오산 수청동 유적은 우리나라 최대의 백제고분군이다. 또 그 조성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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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6]명승 제10호 삼각산과 북한산성 지면기사
백운대·인수봉·만경대 '세개의 뿔'국립공원 지정 후 북한산으로 불려개국의 영산 빼어난 자연경관 간직북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 당위성북한산성이 자리한 삼각산의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가 명승 제10호인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지정 명칭은 '삼각산', 분류는 자연유산 중 자연명승, 지정구역은 27만4천143㎡이고 지정일은 2003년 10월 31일이다.삼각산은 빼어난 산세를 지니고 있고 지리적으로는 한양 도성의 진산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대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국가제사의 대상이었다. 또한 삼각산은 한북정맥의 마지막 정점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풍수적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 도선, 신경준, 김정호 등 역대 걸출한 역사지리학자들에 의하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당으로 손꼽혔다.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정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제사를 지낸 후 진흥왕순수비를 세운 곳도 이 삼각산이다. 아울러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왕사 무학대사가 만경봉에 올라 나라를 다스릴 도읍터를 정했다는 속설도 있다. 어쨌든 삼각산이 '개국의 영산'임은 분명하며, 삼각산의 등정은 중원을 장악했다는 선언이기도 했다.현재 명승 삼각산의 지정 구역은 백운대·인수봉·만경대만을 포함하지만, 원래 삼각산은 현재 북한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곳, 더 나아가서는 북한산국립공원 지구 중에서 도봉산 지구를 제외한 우이령 남쪽의 산괴를 말한다.이 북한산성이 자리한 곳을 지금은 북한산으로 부르고 있으나 고려시대와 조선전기에는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렀다. 고려시대 개경에서 바라볼 때 백운대·만경대·인수봉이 세 개의 뿔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북한산성이 축성된 이후, 산성을 가리킬 때에는 북한산으로, 명산대천의 하나로 국가제사의 대상이 될 때에는 삼각산이라 했다. 또 자연자원이 중심 주제일 때에는 삼각산으로, 인문자원을 서술할 때에는 북한산 혹은 북산(北山)이라 말했다.이렇듯 원래 삼각산이었으나 북한산성의 축조 이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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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5]안성 양성향교·덕봉서원·정무공 오정방고택 지면기사
조선시대 유교이념 전파 중심도시화 진행 안돼 '원형' 간직한적한 전원 풍경 '힐링 답사'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인의예지로 대표되는 유교 이념을 백성에게 교화, 전파하고자 공립교육기관인 향교를 '1읍 1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현에 배치하였다. 한편 조선의 정치 운영은 향촌사회에 기반을 둔 여러 붕당(朋黨)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이들 붕당은 서원을 매개로 한 학연과 지연에 기초했다. 이런 까닭에 조선시대 읍치(邑治)가 있던 곳에는 대부분 향교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명현을 배출한 지역에는 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참고로 향교는 공립기관인 까닭에 지금의 시·군·읍·면 소재지에 주로 위치하며, 서원은 향촌을 기반으로 한 사립기관인 까닭에 비교적 경관이 빼어난 한적한 장소에 자리하고 있다.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선현의 제사를 지내면서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는 곳이고, 서원은 선현을 봉사(奉祀)하고 학문을 추구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이런 목적에 맞게 서원과 향교에는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중심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나즈막한 야산의 경사면을 따라 전면의 낮은 곳에 명륜당이, 배후의 높은 곳에 대성전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가 기본적인 배치였다.건축사적으로 볼 때, 명륜당은 정면 5칸 규모의 팔작지붕이 일반적이고, 대성전은 정면 3칸의 맛배지붕이 기본인데 죽은자가 머무는 곳이기에 정면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을 창호가 없이 벽체로 조성한 점이 특징적이다. 한편 향교의 경우 제향공간 내에 서원에는 없는 동무와 서무가 대성전의 좌우에 배치되어 공자의 제자를 비롯한 현인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향교와 서원에는 어김없이 은행나무가 있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속설이 있다.경기도는 명유현사(名儒賢士)와 고관대작이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한 조선유학의 중심지였고 그런 이유로 서원과 향교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향교와 서원들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한국전쟁, 그리고 최근의 도시화 등으로 인하여 제자리를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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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4]맹사성의 묘 지면기사
강남·분당과 가까운 광주에 위치고위관료에 엄격 청렴한 성품 탓벼슬자리 절반이상이 좌천·유배무덤도 소박 고관대작 석물 없어이 어수선한 시국과 일그러진 권력자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다. 청백리의 대명사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역사적 인물이 죽으면 그의 생애와 치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글 즉 졸기(卒記)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맹사성의 졸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목된다.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이 79세로 죽었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낮은 자리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 맞이하고 방으로 모시고 윗자리에 앉혔다.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구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배웅하되,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이처럼 아랫사람에게까지 관대한 그였지만 절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고위관료에게는 엄격했다. 그는 조선의 군왕 중에서 가장 무자비했던 태종 치하에서 26년 4개월간 벼슬자리를 하였는데, 그 절반인 13년 2개월 동안 좌천·파직·유배를 당하였다. 태종의 처남인 민공생을 공격하다가 공주목사로 좌천된 적도 있었다. '태종실록'의 편찬이 완료된 후, 세종이 한번 보자고 하자,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 태종의 사위인 조대림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무고로 처리되자 그 잘못을 끝까지 지적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참형에 처할 뻔 했던 일도 있었다. 성석린·하륜 등 태종 측근들의 구명운동으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100대의 곤장을 맞고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그는 세상이 인정하는 청백리였다. 정승이 된 후에도 그의 집은 늘 가난하고 협소하였다. 다음의 일화는 그의 청빈을 잘 대변해 준다. 하루는 병조판서가 공적인 일을 보고하러 그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집안 곳곳에 물이 새서 의관이 모두 젖게 되었다. 병조판서가 집에 돌아와 "정승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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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3]오성과 한음 이야기와 용연서원 지면기사
전래되는 이야기 23건중 7건 배경'한음' 학문수양 '오성' 고이잠든곳 道문화재돌봄단, 미화·보수관리 시민관심 부족 답사프로그램 제안오성과 한음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그러던 중 오성이 약혼을 하였다. 옛날 양반들은 약혼하고도 부인될 사람을 못 만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성도 약혼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하루는 한음이 오성에게 말하기를 "네 부인될 사람에게 말을 시키면 내가 한턱을 내고, 말을 못 시키면 네가 한턱을 내라"고 해서, 오성이 "그러마" 하고 둘은 내기를 했다. 오성은 "그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작대기를 들고 날 때려죽인다고 쫓아만 오너라" 하니, 한음이 작대기를 들고 "이놈, 때려죽인다"고 쫓아갔다. 오성은 계속 쫓기다가 자기 처갓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대청 마루에 서 있던 자기 약혼녀의 치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부인 나 좀 살려주쇼!" 하니, 약혼녀가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여보시오. 약혼을 했으면 겉만 봐야지 속까지 볼랍니까?"라고 말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오성은 한음과의 내기에서 이겼다고 한다.어릴 적 동화책으로 읽었던 오성과 한음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이들 모두 포천에 연고가 있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그의 외가가 포천 자작리에 있어서 어릴 때부터 자주 왕래했고 포천을 대표하는 인물인 양사언과 교유했다. 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인 용연서원(龍淵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이 포천에 자리하고 있다. 오성(鰲城)으로 더 알려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한음보다 포천과 더 인연이 깊은데,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포천에 정착하여 살았고, 그의 무덤(경기도 기념물 제24호)과 배향서원인 화산서원(花山書院, 경기도 기념물 제46호)이 현재 포천에 있다. 이외에도 경기지역에 전해지는 오성과 한음 이야기 23건 중에서 7건이 포천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사실도 그들이 포천과 인연이 깊다는 점을 뒷받침해 준다.오성과 한음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을 극복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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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2]포천 인평대군 묘와 신도비, 그리고 치제문비 지면기사
기와얹은 곡장 전형적 사대부 무덤경기도 신도비중 으뜸가는 조형미치제문비는 조선후기 문화 잘반영원형보존도 잘돼 '사적' 승격 필요2016년 현재, 경기도기념물은 전체 183건 중에서 무덤이 91건으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또 전국 신도비의 70% 정도는 경기도에 분포하고 있다. 이렇듯 경기도는 조선시대 묘제의 중심지이고, 고관대작의 묘는 경기도에 더욱 밀집해 있다. 이런 현상은 조선시대 고위관료들이 현실적인 여건상 주로 경기 지역에 그들의 터전을 정한 데에 있다고 판단된다.문화재 지정은 크게 역사성, 희소성, 예술성, 학술적 가치 등을 기준으로 한다. 이런 기준으로, 경기도에서 지정한 묘와 신도비를 평가해 볼 때, 인조의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묘와 신도비(神道碑, 경기도 기념물 제130호), 치제문비(致祭文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5호)를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인평대군 묘는 기와를 얹은 곡장(曲墻)으로 둘러싸여 있다. 복천부부인(福川府夫人) 오씨(吳氏)와 합장된 단분(單墳)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장명등을 두었으며, 좌우로 동자석·망주석·문인석 한 쌍씩 배치하였다. 묘역 뒤 오른쪽에 산신제를 지내는 석물과 묘역 오른쪽 아래에 판석을 깔았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의 일반적인 규범을 잘 보여주고 있다.신도비는 1658년(효종 9)에 건립한 것으로, 조각 수법이 정교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웅장·화려하여 경기도 소재 신도비 중에서 가장 빼어난 조형미를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치제문비는 효종·숙종·영조·정조가 제문을 직접 짓고 쓴 어제어필 비문으로 모두 2기인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네 분 임금의 글과 글씨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이런 인평대군 묘역의 문화재를 문화재 지정 기준에 따라 가치를 평가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예술성: 인평대군은 효종이 매우 아끼던 동생이다. 그런 그가 효종의 재위 기간에 돌아갔으니 효종이 인평대군의 묘와 신도비의 조성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지원했을 가능성이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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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1]경기소리 긴잡가 보유자 임정란 명창 지면기사
12개 노래로 구성된 민속 성악곡이창배 사사·묵계월 선생 뒤이어1999년 도무형문화재 지정·활동대중화 위해 경기창극단 설립 꿈예로부터 경기지방에서 부르던 노래들을 일컬어 경기소리라 한다. 이 경기소리 중에서 민중들이 애창하던 노래를 경기민요, 전문소리꾼이 불렀던 것을 경기잡가라 부른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잡가(雜歌)란, 가곡·가사와 같은 긴 사설에 노랫가락을 실어 부르는 민속적인 성악곡을 말한다. 이런 잡가는 일제의 강제 병탄으로 유입된 신파음악과 트로트가 들어오기 이전,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고 그들의 감정을 표현한 대중음악이었던 바, 가사의 내용도 다양하고 표현도 직설적이며 발성도 굵고 힘찬 편이다. 잡가는 지역을 기준으로 서도잡가, 남도잡가, 경기잡가로 나뉘고, 성격에 따라 12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긴잡가와 휘몰이잡가로 구분된다. 이중 긴잡가는 경기 12잡가로도 불리며, 앉아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경기좌창(京畿坐唱)이라 일컫기도 한다. 음악적으로 볼 때, 경기잡가는 맑고 청아하며 아주 담백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6박 장단의 반복으로 경쾌하고 힘찬 기운이 있다. 그리고 목을 잔잔히 떨면서 부르는 것이 특징이고, 누르는 목·끊는 목·조이는 목을 적재적소에 구사할 수 있어야 하기에 뛰어난 기량을 갖추어야만 노래의 참맛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경기 12잡가의 전통과 예술혼을 잇고 있는 명창이 오늘 소개할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긴잡가 보유자 임정란(본명 임정자, 1943년생)이다. 과천의 '광대집안'에서 태어나, 1964년 우리나라 잡가의 정통맥을 이은 이창배 명창에게서 사사받으면서 국악의 길로 들어섰다. 1975년부터 경기민요(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의 보유자인 묵계월 선생의 지도를 받아 그의 첫 전수장학생이 되었으며 이수자, 전수조교를 거쳐 1990년에 보유자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1998년 경기도립국악단 악장이 되어 고향인 경기도와 다시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99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으로 경기소리를 경기도 땅에 전승·보급하는 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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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0]경기도의 선정비와 매국노 민영준의 영세불망비 지면기사
퇴임 지방관 공과 무관하게 건립관아 중심으로 '비석 거리' 형성조선후기 사회명암 반영된 유적조선시대는 수령의 인품과 치적을 새겨 기린 선정비(善政碑)를 만들어 세우는 것이 널리 유행했다. 선정은 정치를 잘했다는 것으로 불망비(不忘碑), 애민비(愛民碑), 청덕비(淸德碑), 청백비(淸白碑), 공덕비(頌德碑) 등으로 호칭했는데, 칭송의 의미를 담은 두 개 이상의 단어를 합쳐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로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지방행정의 중심인 관아 주변에 세웠고, 선정 여부를 불문하고 지방관을 지낸 인물을 대상으로 세우는 것이 관례화된 만큼 그 수량이 수십여 기를 넘기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선정비가 세워진 곳은 이른바 '비석 거리'가 되었다.조선시대 선정비는 처음에는 백성을 아끼고 선정을 베푼 지방관을 대상으로 건립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례화되어 명예를 위하여 거짓으로 비를 세우거나 아랫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비를 세우게 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선정비 자체가 가렴주구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선정비를 분석한 논문을 보면 선정비에 기록된 수령 중에서 선정비에 걸맞은 이력을 가진 인물은 20%에 불과하다는 결과가 있다.구체적으로 북한산성의 선정비 28기를 두고 보더라도, 주인공의 행적이 밝혀진 7명 중에서 신명순(申命淳)과 이규원(李奎遠)은 선정비에 어울리는 인품과 치적을 지녔으나, 북한산성 내 승병대장이었던 성능(聖能)을 비롯하여 김병기(金炳冀), 김문근(金汶根), 민겸호(閔謙鎬), 민영준(閔泳駿), 이유수(李惟秀) 등은 비리에 연루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예로는 북한산성의 경리사(經理使)를 맡았던 민영준(閔泳駿, 1852~1935)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를 들 수 있다. 그는 1891년에 북한산성 책임자로 임명돼 성곽을 보수한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했는데, 동학농민전쟁 당시에는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주역이었다. 황현(黃玹)이 지은 '매천야록'에는 민영준을 "정권을 훔쳐 농간을 부리며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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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9]북한산성의 승영사찰과 부왕사지 지면기사
불교조직 동원 축성·운영 도와350여 승군 주둔하며 소문 지켜병영·사찰 공존 희소가치 높아조선 숙종은 1674년 즉위하자마자 북한산성을 축성코자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와 같이 군왕이 도성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입장에서, 북한산과 같은 천연의 요새에 산성을 쌓아서 도성 방어를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북한산성의 축조에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종묘와 사직이 있는 도성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북한산성의 축성과 같은 대역사를 벌이면 민생을 피폐하게 한다는 것을 반대의 이유로 들었다. 또 병자호란 이후 청과 맺은 정축약조(丁丑約條) 즉 성곽을 쌓지 않겠다는 항복 조건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민심의 동요를 막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북한산성의 신축보다는 도성을 수축하는 것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이런 갑론을박이 37년간이나 이어져,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 37)이 되어서야 축성에 들어가게 된다. 축성은 중앙군단인 삼군문(三軍門) 즉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분담하여 실시됐는데, 이들과 함께 전국의 승려들이 동원돼 건축물의 조영과 성벽의 축조를 도왔다. 또 축성이 완료된 이후에는 승군의 병영인 북한치영(北漢緇營)을 두어 정규군을 보조, 북한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돕도록 했다. 어쨌든 임진왜란 이후 조선정부는 부족한 정규군의 숫자를 승병으로 보충하고, 또 탄탄한 불교 조직과 그들의 숙련된 기술을 산성의 축조와 운영에 적절히 이용했는데, 북한산성은 그런 의승(義僧) 제도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북한치영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승영사찰(僧營寺刹, 승군이 주둔하는 사찰) 13개가 소속되어 있었고, 이를 중흥사에 주석한 팔도도총섭이 통솔하게 하였다. 조직은 도총섭 아래에 중군(中軍), 좌우별장(左右別將), 천총(千摠), 파총(把摠), 좌우병방(左右兵房) 각 1명, 교련관(敎鍊官), 기패관(旗牌官), 중군병방(中軍兵房) 각 2명 등을 두었는데 군대 조직과 별 차이가 없었다. 승군은 350명이었는데 초기에는 각 도의 승려들 가운데 차출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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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8]경기만서 모습 드러낸 영흥선(靈興船) 지면기사
2010년 옹진군 인근 해역서 발견수중 발굴 전용인양선 최초 투입품질 높은 도료 '황칠' 발굴 눈길매장문화재 발견 신고 가치 확인지난 2007년 한 어부가 주꾸미를 낚아 올렸는데, 흥미롭게도 주꾸미의 빨판에 청자대접이 붙어 올라왔다. 이에 어부는 관련기관에 문화재 발견 신고를 했고, 다음 해인 2008년 고려청자가 인양된 충청남도 태안 마도 및 대섬 일대에 대한 수중발굴이 이루어졌다.조사결과 나주, 해남, 장흥 등지에서 거둔 곡물과 강진의 청자를 싣고 가다 1208년에 난파된 배의 잔해와 함께, 청자·도기류·목간·곡물·젓갈·닻돌 등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는 청자매병을 비롯한 최상품의 청자들도 다수 있었다.당시 문화재보호법에서는 매장문화재 발견신고자에 대한 보상은 직접 발견한 유물에 대해서만 지급되었다. 만약 홍길동이 자기 밭에서 신라시대 토기 5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계기로 그 주변에 발굴이 이루어져 다른 유물이 500점 출토되었다 해도 홍길동은 신고한 5점에 대해서만 보상을 받아야 했고, 그 상한액도 2천만원으로 한정됐다.이런 규정 때문에 '주꾸미가 걷어올린 고려청자'를 신고했던 어부에게 문화재청이 줄 수 있는 포상금은 2천만 원을 넘을 수 없었다. 그의 신고로 인해 고려청자가 1만여 점이나 출토되었고, 그 값어치가 200억~300억원 정도인 데에 비하면 너무나 약소했다. 이에 국회 문화관광위 국정감사에서 이를 지적했고, 그 결과 문화재청은 관련 법률을 개정하여 발견신고품에 대한 보상금 이외에 일종의 보너스격인 포상금을 지급키로 했으며, 지급 최고 한도액을 2천만 원에서 1억 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그래서 그 어부는 국가로부터 1억 원의 보상을 받았다.몇 년이 흘러 2010년, 옹진군 영흥면 섬업벌 인근 해역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던 두 사람이 청자대접 4점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중 윤모씨는 카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고객 중에 고고학자가 있어서 그에게 발견 유물의 처리 문제를 의논했다. 유물을 처음 접한 고고학자는 4점의 청자가 포개진 상태였다는 이야기들 듣고서는 바로 난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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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7] 하남 미사리 유적과 여자형 주거 지면기사
석기시대부터 고고학 자료 풍성온돌·식기, 동북·중국 문물 수용한강 따라 분포 '지역 특성' 대변서울 근교 라이브 카페촌과 조정경기장으로 유명한 하남 미사동에는 하남 미사리 유적(국가사적 제269호)이 자리하고 있다. 유적은 한강 중상류의 남북 4㎞, 동서 1.5㎞의 타원형 섬인 미사리(지금은 미사동)의 강변 쪽을 따라 발달한 자연 제방을 중심으로 분포해 있다. 유적에 대한 조사는 서쪽 지류에 올림픽 조정경기장을 만들면서 동쪽 본류의 수량이 늘어나자 섬의 동쪽 일부를 잘라 강폭을 넓히는 한강 유역 종합개발사업이 계획되면서 1988~1993년에 걸쳐 실시됐다.조사 결과, 신석기시대부터 한성백제시기까지의 마을유적이 차례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 마을 내부에서는 움집 형태의 집터, 창고 기능으로 추정되는 고상식(高床式) 건물지, 저장 등의 목적으로 사용한 구덩이, 불을 피워 조리를 했던 화덕자리 등이 발굴되었고, 그 숫자는 466기에 달했다. 이와 함께 백제시대 문화층에서는 상하로 중복된 밭 유구가 상층 4천700여 평, 하층 1천700여 평 규모로 발굴되었다. 이렇듯 미사리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한성백제시기까지의 유구가 시간 순으로 광범위한 범위에서 확인되어 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기전(畿甸) 지역의 마을이 발전해 온 양상을 살필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를 제공하였고, 그런 까닭에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마을유적으로 자리매김하였다.미사리유적에서 가장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구는 여자형(呂字形) 주거지이다. 이 주거지는 장방형 집자리의 전면(全面)에 지금의 현관에 비유될 수 있는 소규모의 출입시설이 있는 것으로, 대체적으로 평면형태가 한자 '여(呂)'자와 유사하다.(사진 왼쪽) 구조상 지하를 파서 주거공간을 만들고 지표면에 출입 공간을 조성하였다. 대형의 경우 규모는 약 90㎡(약 27평) 정도로 청동기시대의 대형 주거지 60㎡와 비교할 때 규모에서의 현저한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내부에는 벽체를 따라 'ㄱ'자 모양의 온돌을 꺾어서 설치했고, 집자리의 중앙에는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노지(爐址)를 마련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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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6]하남 이성산성(二聖山城, 사적 제422호) 지면기사
신라의 경기도 일대 진출과 함께 축성한 '둘레 1.9㎞' 성곽13회 발굴조사… 목간발견으로 지방관직제·문서행정 확인나무·천 등 유물 썩지않고 출토… 문화재적 가치 조명 필요신라는 6세기 중반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정복지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군사적·행정적 거점에 견고한 산성을 새롭게 쌓았다. 오늘 소개할 이성산성도 신라의 경기도 일대 진출과 함께 축성된 산성 18곳 중 하나로, 신주의 행정소재지 즉 치소(治所)에 쌓은 둘레 1.9km의 성곽이다. 지금에 비유하자면, 삼국후기부터 통일신라말기까지 경기도청이 자리했던 곳이 하남의 이성산성인 셈이다.이성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지금까지 13차례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6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쌓았고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 사이에 걸쳐 대대적인 수축(修築)이 이루어졌던 사실, 성문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성 내부의 조사에서 정면 17칸의 대형건물지, 8각·9각·12각 등 특수 건물지를 비롯한 20여 곳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한 대형 저수지가 2곳 발굴되어 군현(郡縣) 단위에 쌓은 산성보다는 위상이 높은 성곽임이 드러났다.유물은 토기, 철기, 기와, 목기 등 3천500여 점 이상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저수지에서 다른 목간 37점과 함께 출토된 '무진년' 목간('戊辰年' 木簡)이다. 이 목간에는 무진년(608년) 정월 12일 새벽에 남한성(南漢城) 도사(道使)가 수성(須城)의 도사와 촌주(村主)에게 내린 행정 명령이 묵서(墨書)로 적혀 있었다. 이 목간의 발견으로 이성산성이 당시에 남한성으로 불렸던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며, 신라의 지방관직 제도뿐만 아니라 문서행정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또한 성 내부에서 벼루 30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성산성 출토품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벼루가 90여 점에 불과하고, 그중에서 경주에서 출토된 것이 54점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성산성에서 문서행위가 매우 활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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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5] 연천 전곡리유적과 주먹도끼 지면기사
좌우대칭·일정한 가로세로 비율체계화된 공정있어야 제작 가능동아시아 구석기 문화의 '단편' 존재 자체만으로도 예술성 지녀연천 전곡리 유적(사적 제268호)은 1978년 미군 병사 그렉 보웬(Greg Bowen)이 처음 발견한 이후 10차례 이상 발굴 조사된 구석기유적이다. 유물은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진 현무암 대지 위에 형성된 깊이 약 3~8m 정도의 퇴적층에서 발견되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에서 채집된 석기는 4천점 이상인데, 그중에서도 주먹도끼가 단연 돋보인다. 유적의 연대는 약 30만년 전후에 현무암 대지가 형성된 사실과 퇴적층이 만들어지는 데에 걸린 시간을 감안하여 20만년 전후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어 대부분의 교과서와 교양도서에서는 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한국고고학회가 펴낸 '한국고고학 강의'라는 개론서에서는 여러 가지 과학적인 분석을 근거로 들어 10만년 이전으로 소급될 수 없다는 주장을 소개하면서 유적의 정확한 편년 설정을 유보하고 있는 입장이다. 어쨌든 이 유적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의 석기는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세계 전기구석기문화가 유럽·아프리카의 아슐리안 문화전통과 동아시아 지역의 찍개문화전통으로 나누어진다는 기존의 H.모비우스 학설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이상이 전곡리 유적과 그곳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유물인 주먹도끼에 대한 일반적인 사전적 설명이다. 주먹도끼는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고 크기가 크든 작든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일정하다. 그 결과 어느 정도 정형성을 띠고 있으며 규격화되어 있다. 이런 주먹도끼를 만들기 위해서는 돌감의 선택, 기본적인 형태 만들기, 세부적인 잔손질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전 공정이 머릿속에 체계적으로 프로그램화 되어 있어야 만족스러운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즉 마음 속에 설계도가 있어야 하고, 그런 설계도에 따라 정교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손놀림이 있어야 제작이 가능하다. 아동심리발달 단계에서 12세 정도가 되면 '형식적 조작기'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런 '형식적 조작기' 수준의 인지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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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4]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과 흔암리식 토기 지면기사
두만강·연해주 토기·주거 특징 경흥대로·발해만 등 통해 유입경기도에서 다시 남부로 '전파'선사시대부터 '허브' 역할 수행고고학에서 유적이나 유물의 이름을 지을 때 처음 발견된 곳이나 가장 대표적인 장소를 본 따서 명명하기도 한다. 청동기시대의 가락동식 주거지, 역삼동식 토기 등이 그것이다. 오늘 소개할 흔암리식 토기도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경기도기념물 제155호)에서 확인되어 붙여진 이름이다.흔암리식 토기는 겹아가리에 구멍무늬와 빗금 장식이 있는 청동기시대 전기(기원전 15세기~기원전 6세기)의 토기 양식을 말하며, 분포는 금강 중상류를 제외한 남한 전역은 물론 제주도까지 이른다. 여기서 토기의 아가리 부분 즉 입술 주변을 돌아가며 구멍을 뚫은 스타일은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방의 토기 양식이므로, 흔암리식 토기의 속성 중의 일부는 동북지방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한강유역 신석기 문화에 동북지방의 영향이 크게 확인되지 않는 점과 흔암리식 토기의 시작이 청동기시대 전기인 사실을 연결할 때, 양 지역 사이의 문화 교류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성백제기 경기도를 대표하는 집자리로 여(呂)자형·철(凸)자형 주거지가 있다. 구조적으로 네모난 주거지의 입구를 돌출시켜 출입시설이나 부속실을 마련한 것이 특징적이며, 주거 내부에는 난방과 조리를 위한 터널형 노지(爐址)를 갖추고 있다. 이들 주거지도 중국 길림성 동부지방과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 내부에서 출토되는 토기들도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역의 토기 스타일과 연결되고 있다. 이렇듯 경기 문화의 형성에는 두만강 유역과 연해주의 문화적 요소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런 문화의 전파는 조선시대 실학자 신경준이 구획한 6대로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경흥대로(慶興大路, 한양에서 함경도 경흥까지의 대로)와 엇비슷했을 듯하다. 그 이유는 근대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에 한강유역에서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북상하여 철령을 넘어서 동해안을 끼고 두만강 유역으로 가는 길이 인마(人馬)와 물자(物資)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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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3] 안성 도기동 유적과 파주 덕진산성 지면기사
관방유적 위주 가장 많이 분포돼한반도서 가장 중요한 지역 증명파주~안성, 출발점과 종착점 의미두 곳 모두 '국가사적 지정' 신청고구려는 475년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지역을 차지한다. 현재까지 세종 남성골 산성과 대전 월평동 산성에서 발굴된 고구려 군사시설은 고구려가 금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음을 입증해 준다.또 충주의 중원고구려비는 남한강 유역도 고구려가 지배하였던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그리고 고구려는 551년 신라와 백제의 동맹군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668년 멸망 때까지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신라와 대치했던 것으로 역사는 전하고 있다.이처럼 고구려는 경기도 지역을 거의 200년 동안 지배했고, 남한지역에서 고구려유적이 가장 집중해 있는 곳도 경기도이다. 경기도 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은 국경 방비를 위해 설치한 군사시설인 관방유적(關防遺蹟)이 절대적이다.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와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성곽이 대표적이다. 현재 이들 모두는 발굴이 이루어져 학술적 가치가 인정된 상태이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안성 도기동 유적은 2015년 9월에 발굴로 확인된 목책성(木柵城)으로, 목책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나무 울타리인 목책을 설치했던 흔적인 구덩이가 일정한 열을 맞추어 발굴되었다. 구조는 흙을 쌓아 올린 둔덕인 토루(土壘)를 중심으로 안쪽에 1열, 바깥쪽에 2열로 목책을 설치했는데, 안팎 목책의 간격은 4.5∼5m로 드러났다. 발굴조사단은 토루의 주변에서 짧은목 항아리, 사발, 뚜껑과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등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고, 세종시 부강면에 있는 남성골 고구려 산성과 축조 방법이 흡사한 점을 들어, 이 도기동 유적을 고구려 목책성으로 최종 판단했다. 그리고 학계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금강 일대까지 진출한 증거로 보았다. 더 나아가 일부 학자는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시킨 뒤 군사를 주둔하지 않고 돌아가 백제가 계속 한강 일대를 점유했다는 학설이나, 백제가 웅진 천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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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2] 용인 구성 할미산성과 보정동 고분군 지면기사
고구려와 달리 점령지 직접 지배주요 거점 산성·고분군 발굴 의미집수시설 등 장기항전 준비 확인매장문화재 발굴 인식 개선 필요신라는 551년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상류를 차지하고, 553년에는 백제가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한강 하류까지도 차지하는데, 고구려와는 달리 영토와 백성에 대한 직접지배 방식을 취했다. 즉 그들은 새로운 정복지역의 행정적·군사적 요충지에 산성을 쌓아 점령지 지배를 굳건하게 했으며, 신라의 정복활동으로 복속한 가야인과 기존의 신라인들을 한강 유역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다. 아울러 북한산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워 신라가 한강유역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사실을 천하에 공포했다.이런 신라의 정복지에 대한 직접지배 방식은 고고학적 증거로 잘 남아있는데, 경기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신라의 산성과 고분군이 그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하남 이성산성, 이천 설봉산성, 양주 대모산성, 포천 반월산성, 고양 고봉산성, 파주 봉서산성, 교하 오두산성, 여주 파사성, 안산 성태산성, 오산 독산성 등을 포함한 18개의 신라산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신라고분군으로는 신라산성과 인접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현재까지 파주 성동리 고분군, 용인 보정동 고분군, 화성 백곡리 고분군, 여주 매룡리 고분군 등이 발굴되어 알려져 있다.신라 산성과 고분군은 경기도의 주요 행정거점과 군사요충지에 축성되었는데, 이들이 자리했던 지점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경기도 행정중심지의 위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경기도 통치체제의 기본적인 틀이 마련된 시점이 신라후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경기지역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잘 반영해주고 있는 유적이 용인시 구성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용인 할미산성(경기도 기념물 제215호)과 용인 보정동 고분군(사적 제500호)이다. 할미산성은 전체 둘레가 651m 정도에 불과한 작은 산성이지만 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물을 모아두기 위한 대형의 집수(集水)시설, 제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팔각형 건물지의 존재를 보여주는 초석 등이 발굴됐으며, 전형적인 신라양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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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61] 경기도 근·현대 산업문화유산 '금성 텔레비전 VD-191' 지면기사
영상매체시대 진입 '첫 흑백TV'요즘 화폐가치로 200만원 '고가''전자통신 발달 중요 역할' 이유2013년 8월, 문화재로 이름올려일반인들의 상식선 안에서 문화유산은 '문화재보호법' 제2조 제1항에서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국가적·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련한 모든 것을 문화유산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으며, 당초 근대 건조물의 보존을 위해 만들어진 등록문화재 제도의 범위도 넓어져 왔다.1999년 은밀하게 진행된 국도극장 철거 공사를 시발점으로 사회 각계에서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보존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이에 2001년 7월 등록 제도가 도입되었고, 이 당시에는 그 대상이 근대 건조물에 한정되었다. 어찌되었건 등록문화재제도의 도입을 통해 '근대 건조물=식민잔재'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어느 정도 탈피하게 된다. 2005년 7월 문화재청은 '문화재보호법' 개정을 통해 등록문화재의 대상을 건조물과 시설물 중심에서 지정문화재로 보호하기 어려운 동산문화재(動産文化財)까지 확장한다. 하지만 이 당시까지는 현대 산업사의 산물을 문화재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3년 8월 LG 인화원(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해월리 소재)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성 텔레비전 VD-191'이 당당하게 등록문화재 제561-1호로 등록된다.이 텔레비전은 1966년 금성사에서 제조한 우리나라 최초의 흑백 텔레비전이다. 화면 크기는 19인치이며, 12개의 진공관으로 능동회로를 구성하여 증폭·검파·동기분리·음성 및 영상신호 증폭 등의 기능을 가졌다. 수동으로 채널을 선택하는 기계식 튜너를 사용하였고, 콘크라스트 조정 단자와 볼륨 조정 단자가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다. 또한, 제품에 따라 받침다리를 설치하여 고급 가구의 이미지를 부여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초호화 가전제품이었다.금성사(현재 LG 전자)가 1968년 11월 동아일보에 낸 광고에 따르면 텔레비전 VD-191을 5개월 혹은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