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동호의 시인정조… 수원화성·26·끝] 지지대에서 한없이 머무르다 지면기사
환궁길 망설이는 심경도 담겨져최후 예감한 듯 ‘마지막 자작시’1800년 경신년 1월 1일 원자를 왕세자로 삼은 정조는 보름날 아버지 사도세자가 잠든 현륭원에 나가 이를 고하고 화성 행궁의 봉수당에 유숙한 다음 1795년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사용한 운자를 빌어 다음 시를 썼다. 이를 장락궁 동쪽 문미에 제한 것은 음 17일이다. 정조는 지병이 악화되고 있었던 상황이라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에 왕세자를 정해 후대를 잇는 조치가 가장 중요했으며, 이를 조상에게 고하는 기쁨을 말한 것이 이 시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시가 정조의 마지막 시가 됐다는 점이다. 결구에서 지지대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주나라 삼선과 한나라 중리를 겸해 / 周家三善漢重离마침내 생민과 하무의 시를 얻었구나 / 遂續生民下武詩현륭원에서 큰 명 받들어 예를 행하고 / 禮廟殿宮承駿命천만억년 큰 복 경사스럽게도 받았으니 / 慶千萬億受鴻祺이번 행차는 한없는 기쁨 말씀올림이니 / 今行欲報无疆喜이날은 숙박 없이 돌아오기 어려웠어라 / 此日難爲不洎思새벽녘 화성 떠나 고개 돌려 바라보매 / 明發華城回首遠지지대에서 또 오래 머무르며 망설이네 / 遲遲臺上又遲遲위의 시에서 삼선(三善)은 세자가 국학에 들어 가 부자(夫子)·군신(君臣)·장유(長幼)의 세 가지 도리를 알게 된다는 말이며, 중리(重离)는 광명이 이어진다는 뜻으로 역시 세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문면으로 보아 세자로 책봉된 원자가 정조와 함께 동반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생민(生民)과 하무(下武) 모두 시경에 나오는 고사로 주나라 시조 후직(后稷)과 한나라 무왕의 성덕(聖德)을 찬양한 노래를 지칭한다.세자를 책봉하고 그와 함께 이를 선조에게 고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루를 유숙하고 나서도 지지대에서 환궁하지 못하고 한 없이 망설이는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것이 이 작품이다. 아마 정조는 여기서 그의 최후를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제왕도 죽음 앞에서 어쩔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 정조의 면모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정조는 이 시를
-
[최동호의 시인정조… 수원화성·25] 술잔을 올리며 어머님 만수를 비는 악장(후창) 지면기사
백성이 축복한 요임금 고사 빌어해·달처럼 어머니 칭송마음 담아‘관화장’ 4구씩 5장 장중한 느낌선창 ‘장락장’에 이어 술을 올린 뒤 후창 ‘관화장’을 불렀다. 후창은 5장으로 장마다 4구이며 각 장은 궁상각치우 다섯 음에 따라 불렀으니, 선창에 비해 더욱 장중한 느낌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정조는 연회를 간소하게 치를 것을 사전에 명했다. 실제 연회에는 서울에서 내려간 악인들이 많긴 했지만, 화성부에서도 기녀 계섬을 비롯해 노래와 춤을 담당한 연희자 15명이 참가했다. 윤이월 11일 총연습을 했는데 이때 정조는 친히 그 과정을 지켜봤다고 한다.인자하신 덕 지순하기도 해라 / 慈德之純크나큰 포용 말하기 힘들어 / 厚載難名인자한 마음 말없이 움직여서 / 默運弘慈태평성대를 열도록 하였구나 / 佑啓太平온갖 복록이 한데 모이어 / 百祿是逎사방에서 냇물처럼 흐르니 / 其至如川자손들은 모두 뛰어나고 / 子孫振振길한 일 해마다 일어나네 / 吉慶年年북두성 같이 빛나고 / 如斗之邵숭산과 같이 높도다 / 如嵩之高요책에 상서로움 적고 / 瑤冊紀瑞춘주는 나이 따라 나누네 / 春酒燕毛아름다워라 인자하신 덕은 / 於休慈德이 꽃 같은 화갑을 맞아 / 撫玆花甲때마침 화 땅을 관찰하시니 / 時觀于華경물의 빛이 사방에 떨치네 / 物采匝匼수원 화성 백성들 좋아하고 / 樂此新邑태평가 소리 날로 높아지니 / 謠頌戶增억 천만 년이 다 지나가도록 / 維萬維億돋는 해 둥근 달과 빛나리 / 日月恒升정조의 ‘관화장’은 화 땅에 간 요임금에게 백성들이 수·부·다남자 세 가지를 들어 축복했다는 고사를 빌어 수원화성의 백성들이 하늘의 해와 달처럼 어머니를 축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억천만년이 지나도록 태평성대가 계속되길 바란 것이다.수원화성문화제에서 재현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경인일보 DB
-
[최동호의 시인정조… 수원화성·24] 술잔을 올리며 어머님 만수를 비는 악장 지면기사
스스로 악장 지은 조선 최초의 왕궁·상·각·치·우 다섯음 장수 기원1795년 윤 2월 18일 오전 8시 45분께 화성행궁에서 거행한 어머니의 회갑연을 위해 정조는 스스로 악장을 지었다. 악장은 조선조 초부터 궁중의 여러 행사를 위해 창작된 악곡 형식이며 어머니의 회갑을 위해 왕이 친히 악장에 붙이는 시를 쓴 것은 정조가 처음일 것이다. 정조가 지은 악장은 선창과 후창으로 구분돼 선창은 ‘장락’ 5장으로, 후창은 ‘관화’ 5장으로 구성돼 각각 궁·상·각·치·우 다섯 음으로 불렀다.#궁(宮)즐거운 잔치에 태평성대가 연이었으니 / 嘉會屬昇平태평성대를 나타내는 상징이 있었구나 / 昇平今有象그 상징이 어떠한 것인가 물어보나니 / 厥象問如何노인성이 중천에서 빛나고 있다고 하오 / 老人中天朗#상(商)사탕을 머금은 나는 장락궁의 봄이 길고 / 含飴駐我長樂春성수를 비는 여인은 화봉인을 오게 했네 / 祝聖徠女華封人#각(角)길고 긴 장락궁의 봄에 술잔치를 열고 / 春長長樂酌斗화봉인은 어머님께 세 가지 축복하네 / 華祝至三壽母#치(徵)아들과 손자에게 끼친 공 얼마나 높은가 / 翼子詒孫功何巍그 많은 복록으로 광휘가 넘치고 있도다 / 穰穰福祿光輝#우(羽)함지의 북과 운문의 거문고 연주하며 / 咸池鼓雲門琴신선의 좋은 술 해마다 올려바치리 / 玉漿瓊液年年斟이상이 ‘장락(長樂)’ 5장(章)이니, 제1장은 4구(句)이고, 나머지 4장은 장마다 2구(句)로 구성돼 있다. 모두가 어머니의 장수를 축복하는 노래다. 이날 진찬에서 혜경궁 홍씨가 받은 잔은 모두 7잔이었으며, 정조가 처음 두 잔을 올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선창을 하고 한잔을 올린 뒤, 후창을 하고 다시 한 잔을 올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에서 화봉인은 수원화성 사람들을 지칭한다. ‘화’땅의 사람들이 요 임금에게 ‘수(壽), 부(富), 다남자(多男子)’ 등으로 축복했는데, 이는 후사를 걱정하는 모든 제왕의 소망이기도 하며 요순시절과 같은 태평시대가 수원화성에 열렸음을 뜻한다. 제1장의 ‘노인성’은 장수와 태평을 상징하는 도교의 별이다. 마지막 구절에서도 도가의 신선사상
-
[최동호의 시인정조… 수원화성·23] 팔달문루에 올라 (2) 지면기사
“행정 처리 민심을 따라 행하라”여러 신하들에 전한 ‘애민사상’1960년 겨울, 수원 남창초등학교 6학년이던 우리들은 6·25동란으로 성곽이 부서지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팔달문을 청소했다. 뚜렷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팔달문 돌계단에 앉아 동급생들과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그 때 청소 후 손가락에 초겨울 햇살을 가득 담아보려 했던 기억이 새롭다. 1975년부터 당국은 팔달문 보수를 거듭, 옹성을 비롯해 여러 문루를 복원했는데 돌계단이 필자의 기억 속에는 역사의 잔해처럼 남아 있다. 삼도 제일의 명승지에 팔달문을 세우고 팔도 각지의 인재들을 불러 모아 새 세상을 펼치는 것이 정조의 꿈이었다.수원은 삼도 제일의 명승지로 꼽히고 / 三都推第一팔달문으로 애써 만방을 불러 모으네 / 八達務懷來잠시 경륜의 솜씨를 시험해 보다가 / 試經綸手이내 변방의 장재를 널리 구하노라 / 旋求鎖 才누각은 하늘에 의지하여 높이 빛나고 / 樓依天宇성벽은 들의 문을 돌아 안고 있으며 / 城抱野門廻일 처리는 민심 따라 그대로 행하고 / 料理自深淺관청의 동이에서 술 익는 소리가 크다 / 官樽聽醱채제공의 ‘팔달문루(八達門樓)’의 시운을 사용한 이 시의 핵심은 마지막 두 구절이다. 행정 처리가 민심을 그대로 행하는 것은 우선 백성과 하나 되려는 정조의 마음의 표현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일을 직접 다루는 채제공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이다. 결구의 ‘관청엔 술동이 익는 소리가 크다’가 바로 그러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1794년 8월 25일, 이명식(李命植)이 쓴 상량문에서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 / 땅의 신령이 몰래 붙들어 주고 / 하늘의 아름다움 많이 이르게 하소서 / 산과 시내의 안과 밖은 / 큰 나라 당겨서 빛이 있게 하고 / 기둥과 서까래는 둥그렇게 높이 솟아 / 오래오래 내려가서 견고하게 되소서’ (수정 국역 화성성역의궤 권3, 경기문화재단, 2001년, 참조)라고 기원한 것도 동일한 소망이다.오늘날에도 그 화려하고 장중한 위용을 자랑하는 팔달문을 바라보며 오늘의 시정 당국자들
-
[최동호의 시인정조… 수원화성·22] 팔달문루에 올라 (1) 지면기사
문루위에 서서 남북의 산하 관조사통팔달의 지세 호연지기 노래수원 화성의 중심부에는 팔달산이 있으며, 그 이름을 따서 남문을 팔달문이라 명명했다. 팔달산은 원래 탑산으로 알려졌지만 탑산의 그림을 보고 이태조가 “역시 아름답고 사통팔달한 산”이라고 해 팔달산이라는 명칭이 유래됐다고도 전해진다. 1796년 성곽을 쌓으면서 건립한 팔달문은 서울의 남대문과 유사한 규모로 수원의 성문 중에서 장안문과 함께 가장 장대하고 화려하게 지어졌다.옹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남대문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발달된 성문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다.정조는 팔달문에 관한 두 편의 시를 남겼는데 하나는 ‘칠언절구’이며 다른 하나는 ‘오언율시’이다. 특별히 두 편의 시를 썼다는 것은 그만큼 감회가 깊었다는 뜻이기도 하다.쾌청한 날에 가고 소리는 운제를 타 오르고 / 乘晴鼓上雲梯남북의 여러 산들이 난간 밑에 들어오는구나 / 南北山入檻低높은 루에 올라 처음 천 리 먼 곳 바라보니 / 高處始窮千里眼가을 연기 아홉 점이 청제가 아닌가 묻노라 / 秋烟九點問靑齊1행에서 가고 소리가 구름사다리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고 했다. 가고는 피리와 북의 합성어인데 이것을 하나의 악기로 봐야 할지 서로 다른 두 개의 악기로 보아야 할지 분명하지는 않다. 어떻든 북소리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것 같은 상승의 기분을 느끼게 한 첫 행의 시작은 매우 유연하게 하늘로 오르는 시적 상상을 자연스럽게 나타내고 있다. 2행에서 팔달문 아래 난간으로 모여드는 남북의 산들은 조선 천하를 하나로 모여들게 하는 사통팔달의 자리에 팔달문이 서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3행에서는 남북의 산들이 모두 난간 밑으로 모여들었으니 높은 루가 됐고 그 곳에서 천리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이다. 화자의 웅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욱 확장돼 마지막 4행에서 여기가 청제(靑齊)가 아닌가라는 의문형으로 나아간다. 청제는 산동성(山東省)의 청주(靑州)와 제주(齊州)를 합한 명칭이며 중국 전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중국의 구주(九州)가 마치
-
[최동호의 시인정조… 수원화성·21] 만년제에서 풍년을 기리다 지면기사
음 이월 추정, 농가 모습 잘 그려백성과 하나 된 기쁨 직접적 표현1795년 북쪽 지역에 만석거를 건설한 정조는 1798년 현륭원과 가까운 남쪽 지역에 만년제를 축조했다. 만년제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둑을 쌓고, 그 위에 버드나무와 소나무를 심거나 떼를 입혔다. 은구(隱溝)를 설치했으며, 비용은 내하전(內下錢) 6천 냥으로 충당했다. 신읍의 경영을 위해 정조는 경제적 기반의 확보와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목적으로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관개용수를 위한 제방을 쌓았으며 상권을 조성하고 식림사업(植林事業) 등을 전개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한 것은 지극한 효심의 발로이기는 하지만 이와 함께 그 지역의 일반 백성들의 생활도 풍요롭게 하는 정책적인 배려를 했다는 사실은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만년제의 길목 위에 서 있으니 / 萬年堤上路기나긴 날 들리는 수레 방울 소리 / 遲日駐鑾聲경사로워라 금쪽같은 곡물 나르고 / 吉慶輸金粟풍년에는 옥 같은 벼 마주 하겠네 / 豐穰對玉秔빈풍엔 새참을 내어다 함께 먹고 / 豳風來午饁주나라 군대엔 새 백성을 보노라 / 周旅聽新氓두 동이 술에 봄눈 녹듯 풀리어 / 朋酒如春解솜씨 다투어 덩실덩실 춤을 추네 / 爭將舞袖呈위의 시는 채제공의 ‘만년제에서 농사를 구경하다’의 시운을 차용한 작품이며, 백성들과 함께 풍년을 고대하는 정조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제 5행에 보이는 ‘빈풍’은 ‘시경’ 속 ‘빈풍’ 중 ‘7월’장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주공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작품이며 이 장에 수록된 시편들은 농사를 권장하는 노래다. 특히 백성들과 하나가 된 제왕의 기쁨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위의 시 후반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은 시의 문면으로 보아 아마도 해가 길어지고 농사일로 수레 방울 소리가 요란해질 무렵인 음 이월로 추정된다. 농사일이 시작돼 두 동이 술로 고된 노동을 녹이고, 힘써 일해 앞으로 다가올 풍년의 기쁨을 맞이할 그날을 연상하며 쓴 것이라 해석된다. 마지막 7·8행의 구절에서 우리는 농사를 대본으로 하던 시대 백성들과 하나가 되어 춤추고 노
-
[최동호의 시인정조… 수원화성·20] 동장대에서 보름달을 구경하다 지면기사
달빛·소나무 예사롭지 않은 묘사성역 완성무렵 호궤행사전 쓴 듯일반적으로 조선의 산성에는 대체로 동서남북 네 군데에 장대(將臺)가 있었으며, 장수들은 각 장대에서 자기 휘하의 군사들을 지휘했다.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연을 하고 서장대에서 병사들의 훈련을 사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동장대(東將臺)는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됐으며 오늘날 연무대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 수원의 연무대, 즉 동장대는 사직공원의 황학정(黃鶴亭), 남산의 석호정(石虎亭), 전주의 천양정(穿楊亭)과 더불어 200년전부터 유명한 활터다. 동장대는 사방이 트여 있어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 전체를 살펴보기 좋은 요충지이며, 지금도 확 트인 시야로 사람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주는 곳이다.화려한 망루와 성벽은 의기가 넘치노라 / 櫓粉城意氣誇여기에는 항상 오색구름 펼쳐져 있구나 / 此中常見五雲遮높은 누각은 곧게 솟아 가을빛과 다투고 / 高樓直聳爭秋色맑고 밝은 달빛에 모든 만물은 떠 있나니 / 萬象俱明泛月華유독 오늘 밤에는 풍경이 더 아름다워라 / 景物偏從今夜好산천은 원래 계절마다 아름다움이 다르고 / 山川元有四時佳정원의 소나무는 더디 커야 오래 가리니 / 庭松不妨遲遲長공 집에 대보름달 지지 않게 매어놓으리 / 長繫淸輪相國家이 시는 채제공의 ‘동장대에서 중추(中秋)의 달을 구경하다’는 시운을 사용해 쓴 시다. 이 시의 문면으로 보면 채제공의 집은 동장대 부근 어디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4행 ‘맑고 밝은 달빛에 모든 만물은 떠 있나니’나 7행의 ‘정원의 소나무는 더디 커야 오래 가리니’와 같은 표현은 범상한 시인은 흉내 내기 어려운 뛰어난 구절이라고 하겠다. 마지막 구절에서 말한 공은 채제공을 가리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특히 공의 공로를 칭찬하는 솜씨가 우회적이며 아주 고차적이다. 정원의 소나무와 대보름 달빛을 함께 표현해 하나의 풍경 그림을 보여주는 것도, 시인으로서 정조의 남다른 이미지 구사 능력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정조는 화성 공사를 하면서 11번의 호궤 행사를 했는데 그 중 6번을 동장대에서 행했으며,
-
[최동호의 시인정조… 수원화성·19] 노래당(老來堂)에서 읊다 지면기사
왕위 물러난 이후 노년 행복 축원증축 4년만에 승하 안타까운 천명노래당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를 한가하게 지내고 싶다는 뜻에서 건립한 건물이다. 화성행궁의 오른 쪽에 있다. ‘노래당’의 명칭은 ‘초(楚)나라 노래자(老來子)는 70이 넘어서도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렸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물론 노래(老來)란 말이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1794년(정조 18년) 행궁을 증축할 때 5량·7칸의 규모로 새로 지었으며, 채제공(蔡濟恭)이 쓴 편액(扁額)은 전하지 않지만 정조가 당대 제일의 문장이라 칭하던 정범조(丁範祖,1723~1801)가 병진년(1796) 11월에 명령을 받들어 지은 상량문은 전한다.노래당 안에선 흥취 일어 얼굴이 환하도다 / 老來堂裏好開顔원사를 중수하니 늙지도 않았지만 한가롭다 / 苑사重扁未老閒평소에 함부로 늙었다고 말할 수가 없으나 / 恒居不敢言稱老삼가 색동옷을 숭상하던 내옹에 비하노라 / 竊比萊翁尙衣斑이 시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말하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자신의 노년을 생각하는 정조의 소망도 내포돼 있다. 노래당 동쪽의 담장 한 가운데에 벽돌로 문을 내 ‘난로문(難老門)’이라고 명명했는데, 이 이름은 제대로 늙기조차 어려운 정조의 고민을 말해 준다. 내옹은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효자였던 ‘노래자’다. 정범조는 상량문에서 ‘엎드려 생각하건대 /아름다운 기운이 세운 건물을 호위하여 빽빽하니 /옷 입고 관 쓰고 달마다 오시는 의식이 엄격하네 /호화로운 집이 새가 날 듯 높이 솟으니 /새해에 부모님 생각이 나는구나 /오직 초궁(楚宮)의 해 그림자 재는 제도를 헤아리니/ 순임금이 평생 어버이 생각하는 정성이로구나’라며 정조의 효심을 순임금에 비기어 기렸다.또한 후반에서는 ‘화려한 현판을 특별히 걸고 노래당(老來堂)이라 하셨네 / 임금님의 나이 아직 한창인 때에 / 오히려 때마다 이곳에 오시려 하였고 / 아주 늙어서 힘들고 조심
-
[최동호의 시인정조… 수원화성·18] 지지대에서 화성을 바라보다 지면기사
아버지 그리워 고갯길 걸음 멈춰길에 노송 심고 백성 풍요를 빌어현재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에 있는 지지대고개는 정조의 고사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지지’란 공자가 노(魯)나라를 떠날 때 ‘지지오행야’(遲遲吾行也)라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모국을 떠나는 공자처럼 차마 발걸음을 떼기 어렵다는 뜻이다. 현릉원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정조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정조를 위해 수원부민들이 대를 만들어 그 마음을 위로했다는 말도 전한다. 채제공의 ‘병진축(1796, 丙辰軸)의 시운(詩韻)에 화답’한 시 중에서 ‘지지대(遲遲臺)에서 화성을 바라보다’에 화답한 시다.지지대 앞길에 말고삐를 멈추고 / 駐轡臺前路멀리 있는 화성 북쪽을 바라보니 / 迢迢望華陰푸른 논은 일천 이랑을 출렁이고 / 稻秔千畝闢뽕나무 아래 일만 가호가 깊도다 / 桑柘萬家深철벽처럼 굳건한 성은 이미 보았고 / 已見城爲鐵재물을 사양하는 풍속을 들으니 / 思聞俗讓金선왕께서 풍족하게 하라는 가르침 / 先王富敎意옛 훈풍금 한 곡조를 생각하노라 / 一曲想薰琴정조가 지지대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화성을 바라보니 만물은 푸르게 자라고 있고, 백성들은 재물을 다투지 아니하고, 성벽은 철벽과 같으니 순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남풍시’를 지어 백성들의 풍요를 빈 것처럼 자신도 그러한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싶다는 뜻을 담은 것이 위의 시다. 정조는 1789년 4월 현릉원의 식목관에게 돈 천 냥을 줘 지지대 고개를 비롯해 자신이 지나는 길에 소나무 500그루와 능수버들 40그루를 심게 했다. 1794년부터 1797년 사이에는 수원읍 내외에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단풍 1섬, 솔씨 2섬, 뽕나무 2.5섬, 밤 2섬, 상수리 42.13섬, 탱자 1섬을 비롯해 자두, 복숭아, 살구 등 기타 과수와 꽃나무 묘목 등을 파종했다고 한다.오늘날 수원의 명물 노송지대는 이 때 식목된 나무들에 의한 것이라고 하니 멀리 내다보는 정조의 식견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 중국의 제왕 중 가장 이상적으로 삼은 순임금을 떠올리며 화성의 건설은 물론 치수 식목사업
-
[최동호의 시인정조… 수원화성·17] 방화수류정에서 활을 쏘다 지면기사
경치 가장 빼어난 곳에 정자 세워풍류 조망·회갑연·군사지휘 용도‘화살촉이 꽃과 같다’ 신선한 표현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정조 18년(1794) 동북쪽의 군사지휘소로 만들어진 정자로, 중국 송나라 시인 정명도(程明道)의 시 구절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온 것이다. 동북각루라는 명칭보다 한결 운치가 있는 이름이 ‘방화수류정’이다. 정명도의 시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수류정은 화홍문에서 흘러내리는 수원천을 바라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원의 동북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위치에 세워졌다. 따라서 이에 걸맞게 시적 풍류를 즐길 수 있는 낭만적인 명칭도 부여되었을 것이다. 정조는 이듬해 회갑연 때도 이곳을 시찰했고, 1797년 음 1월 29일에는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하고 화성 성역 공사의 노고를 치하하기도 했다. 이 시의 표현으로 보아 이른 봄 버드나무 잎이 돋아나기 시작할 무렵이었을 것이다.춘성을 편력하고도 해가 기울지 않았으니 / 歷遍春城日未斜수류정의 풍경은 한층 더 맑고 뛰어나다 / 小亭雲物轉晴佳난기가 삼련이 연이어 명중함을 보고하니 / 鑾旂慣報參連妙버드나무 숲의 그늘에 화살촉이 꽃과 같다 / 萬柳陰中簇似花첫 행에서 아직 기울지 않은 봄날의 해에 비치는 정자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 다음, 표적에 명중한 활쏘기로 마무리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핵심은 마지막 구절에 있다. 마지막 결구는 풍경과 이미지가 아울러 표현된 참신한 시각적 이미지이며,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 보아도 절묘하다. 삼련(參連)은 화살 하나를 먼저 쏘고 그 후 화살 셋을 연이어 쏘는 방법을 말하는데, 이는 ‘주례(周禮)’에 나오는 것으로 다섯 가지 활쏘기인 오사(五射) 가운데 하나다. 연이어 쏘는 화살이 버드나무 숲을 향해 날아가 꽂히는 순간을 ‘화살촉이 꽃과 같다’고 한 구절은 역동적이며 신선한 이미지이다.정조는 학문도 뛰어났지만, 이 시에서 알 수 있듯 백발백중의 명궁수였다. 문무를 겸비한 그는 국가의 지도자로서 뛰어난 품성을 지닌 군왕이었다. 신하들과 백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