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민 모두가 만세운동 '뜨거웠던 화성의 봄'

    주민 모두가 만세운동 '뜨거웠던 화성의 봄' 지면기사

    100년 전의 수원과 화성은 한 지역이었다. '수원군'으로 통칭했고 동향의 정을 나누는 한동네 주민이다. 100년 전 가장 뜨거웠던 그 봄, 수원과 화성의 주민은 한마음, 한뜻이었다. 오직 대한의 독립을 열망했고 양반, 농민,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주민 전체가 만세운동에 뛰어들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특히 화성지역의 만세운동은 열기가 더 뜨거웠다. 주민 모두가 '주동자'라 할 만큼 자주적인 독립운동의 양상을 띤다. 우정과 장안면 등 2개 면에 불과한 일부 지역에서만 2천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했다.이들의 성과도 눈부시다. 일제 수탈의 본거지였던 면사무소 2개와 일본 순사가 상주하는 주재소 1개를 파괴하고, 총을 쏘는 일본 순사에게 달려들어 처단했다. 나라 잃은 민족의 굳건한 독립의지를 여실히 드러낸 역사의 명장면이다.이 때문에 3·1만세운동 뿐 아니라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수원·화성의 만세운동이 갖는 역사적 가치는 재평가돼야 한다. 민중이 중심이 된, 가장 자주적이면서 공격적인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알려지며 확산세를 보였고, 겁을 먹은 일제가 제암리 학살사건을 자행했다. 이후 일제는 문화통치로 지배방식을 바꾸기도 했다. 이뿐인가. 향토 학계에서는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임시정부 설립은 물론 무장독립투쟁의 단초가 됐다는 점을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6·끝)]화성지역의 만세운동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6·끝)]화성지역의 만세운동 지면기사

    4월3일 2천여명 시위, 3·1운동사 가장 격렬수촌교회 집결 면사무소 불태우고 독립선언무자비한 탄압… 제암리·고주리 학살 자행횃불이 피어올랐다.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피어오른 하나의 횃불은 곧 마을의 산등성이마다 이어졌다. 해가 뜨는 낮 동안엔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무언의 약속이 피어오른 것이다. 화성지역은 우리 3·1 만세운동사(史)를 통틀어 가장 격렬했던 현장이다. 마을 주민 모두가 '주동자'였고, 의지는 강렬했으며 행동은 거침없었다. 송산, 발안에서 발화한 화성 지역의 독립운동은 수촌, 우정, 장안에서 정점에 치달았고 제암, 고주리에서 처참하게 끝이 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영화'같았던 하루가 있다. 그 날의 만세길을 따라 걸어본다.# 1919년 4월 3일, 가장 뜨거웠던 그 날1919년 3월 1일 이후 당시 '수원군'이었던 수원·화성 지역 역시 자주독립의 열망이 거세졌다. 사람이 모이는 장날마다 알음알음 이야기들이 퍼져갔고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마음들이 이어졌다. 첫 신호탄은 송산, 발안지역에 장터가 열리는 날, '대한독립만세'가 울려퍼진 일이다. 총을 맞고 쓰러진 마을의 어른을 보고는, 지켜만 보던 이들조차 모두 돌멩이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이후 총칼을 앞세운 일제 경찰이 주민들을 무참히 짓밟았다는 소식이 다른 마을로 전해지자, 어스름한 새벽 마을 산등성이마다 횃불이 피어올랐다. 그 날의 약속이 소리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1919년 4월 3일,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 차회식의 집에 주곡리 주민 30~40명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곧장 이 마을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차병혁과 이들 시위대가 만났다고 전해진다. 이들 무리는 수촌리에 있는 수촌교회로 이동했다. 수촌리는 장안·우정면 만세운동에 가장 많은 수의 주민들이 참여했다. 그 날, 수촌교회에 집결한 이들은 대한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을 결의했다. 그리고 장안면사무소로 쳐들어갔다. 장안면장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 뒤 면사무소를 불태웠다. 식민지배의 상징이자, 수탈의 근원인 면사무소를 불태우면서

  •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5)]민중이 이끈 수원의 3·1만세운동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5)]민중이 이끈 수원의 3·1만세운동 지면기사

    1919년 3월16일 '화성 제일 봉우리' 만세지식인·지도층 중심서 시민 확산 변곡점소작농 전락 농민 가세·상인들 철시투쟁김향화 열사 등 기생 33명 봉수당서 시위바람이 차갑다. 옷깃을 여미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경기도청 후문에서 출발해 천천히 언덕을 걸어 올랐다.지금처럼 잘 닦인 아스팔트 길도 아니었을텐데, 그 날 수백명의 선조들은 흙으로 뒤덮인 언덕길을 힘차게 올랐을 것이다. 겨울바람만큼 매서운 현실에 분노하면서, 함부로 내뱉지 못한 울분을 토하기 위해 맨주먹을 불끈 쥐었을 테다. # 민중의 힘으로 이어진 수원의 3·1운동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의 제일 봉우리, '서장대'에 도착했다. 수원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풍광만큼 이 곳은 그 옛날 수원의 중심이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같은 날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에서도 울려 퍼졌는데 수원의 지식인과 학생이 주축이 돼 수원면 화성 인근에 살던 지역민들과 함께 3·1 운동이 일어났다.이때의 시위로 교사 김노적이 주도자로 검거됐고 일제의 지독한 고문으로 머리 한쪽이 함몰되고 왼쪽 손목이 으깨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로부터 15일이 지난 3월 16일은 수원 종로거리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인다는 '장날'이었다. 수원화성 서장대로 사람들이 몰렸다. 잔인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3월 1일보다 더 많은 민중이 모여들었다. 3월 16일의 시위는 3월 1일과 분명 달랐다. 1일의 시위가 지식인과 학생이 중심이었다면, 16일의 시위는 일반 민중이 더 많았다. 서장대를 중심으로 연무대 등지에서 일제히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고 수백의 민중들이 수원 종로거리로 쏟아졌다. 이 날의 시위 역시 일제 경찰과 헌병 등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가 검거됐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종로의 시장상인들은 생업을 포기한 채 가게 문을 닫고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철시투쟁을 벌였다고 전해진다.서장대를 내려와 반대편으로 조금 걸어가면, '3·1독립운동 기념탑'이 있다. 1969년 3월

  •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4)]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4)]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지면기사

    연해주 이주 조선인 19세기말 2만명 넘어일제의 강제합병후 국권회복 지사들 몰려1911~1937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융성홍범도·이범윤·안중근 등 무력투쟁 전개거부 최재형, 사재 쏟아 독립운동 지원에이상설 "조국 독립 못봤으니 제사도 말라"한민족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건 조선시대 말 착취와 기근 때문이다. 러시아 공식 문서에 한민족 관련 내용이 나오는 건 1864년이다. 이해 9월 남우수리스크 포시에트지구 노브고로드 경비대장인 레자노프가 상급 지휘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함경도 무산 출신 최운보와 경흥 출신 양응범이 이끄는 14가구 65명이 이주해 포시에트의 지신허(地新墟·치진헤) 마을을 개척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 1869년에는 조선 북부 지방에 홍수로 인한 '기사흉년'이 발생해 함경도 농민 5천500여 명이 연해주로 대거 이주했다. 이후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연해주 지역 한인 숫자는 2만6천여 명이 넘어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합병을 하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우국지사들이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항일 운동의 요람 연해주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워 항일지사를 길러내던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의 임무를 마친 뒤 연해주에서 권업회와 동지회를 결성하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는 등 애국혼을 불살랐다. 이동휘와 이동녕은 북간도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국권 회복을 꾀하다가 연해주로 옮겨 이상설 등과 독립투쟁을 이끌었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는 연해주와 만주를 넘나들며 일본군을 괴롭혔다. 러시아 이민 초기 연해주에 정착해 사업을 벌인 최재형은 모은 돈과 구축한 네트워크로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간도관리사를 지내다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과 싸우던 이범윤은 러일전쟁 직후 연해주로 옮겨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고, 안중근도 그와 함께 전투를 펼치다가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세워 거사에 성공했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연해주 한인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동휘를 비롯한 민족주의적

  • 조선 유학생들, 도쿄서 외친 '2·8 독립선언'

    조선 유학생들, 도쿄서 외친 '2·8 독립선언' 지면기사

    뉴욕에서 전해진 독립의 열망(1월 10일자 15면보도)은 식민 본거지인 일본 동경(도쿄)에까지 급속히 전파됐다. 소약속국동맹회의에서 제기된 '조선과 일본의 합방은 무효'라는 주장에 힘입어 동경의 혈기왕성한 조선 유학생들은 궐기하기 시작했다. 1919년 2월 8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처음 열린 유학생대회는 곧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명칭을 바꾸고 본색을 드러냈다. 그 곳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하고 '독립선언서'도 낭독됐다. 이것이 '2·8독립선언'의 전말이다. 이는 곧 조선독립운동의 신호탄이 됐던 3·1 만세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하지만 오늘날 다시 찾은 도쿄는 2·8독립선언의 자취를 찾을수 없었다. 2·8 독립선언을 이끈 학생 상당수가 와세다 대학 출신인데, 그 중 '신간회 도쿄지회'가 와세다 대학 스코트홀에서 창립됐다. 그러나 현재 와세다 교회건물로 사용되는 스코트홀을 방문했을 땐 신간회 창립과 관련한 어떠한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도쿄 히비야 공원도 마찬가지다. 2·8독립선언이 발표된 4일 후 재일 유학생 100여 명이 히비야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다시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비슷한 시기 같은 장소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가 배포되고 시위운동이 일어났지만 오늘날 히비야 공원에는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기억해야 하는 것을 기억하지 않은 땅에서 3·1만세운동 100년의 의미를 되새긴다.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3)도쿄서 울려퍼진 2·8독립선언] '민족자결' 고무된 조선 유학생… '적국의 심장'에 꽂아넣은 일침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3)도쿄서 울려퍼진 2·8독립선언] '민족자결' 고무된 조선 유학생… '적국의 심장'에 꽂아넣은 일침 지면기사

    1919년 2월8일 '조선독립청년단대회'서 일제규탄 선언서12·23일 히비야공원서 또 시위… 훗날 신간회 지회 창립헌정기념관엔 이토 저격 안중근 탄환… 역사적 설명 없어침략 반성 흔적 없는 도쿄, 사죄공간 마련 베를린과 대조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도쿄에 한반도의 독립을 꿈꾸는 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마음이 일렁였다. 같은해 12월 아사히신문 등을 통해 재미동포들의 독립운동과 뉴욕에서 열린 소약속국동맹회의 2차 연례총회에서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 독립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소식도 전해 들었다.1919년 2월8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의 결산 총회가 있다는 명목 아래 유학생 대회가 열렸고 개회가 선언된 후 대회의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꿨다. 그리고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했고, 곧이어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독립선언서는 일제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조선 병합이 한민족의 의사를 무시한채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는 내용이 담겼다. 3·1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이 역사적인 사건을 '2·8독립선언'이라고 한다.# 기억해야 하는 것과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도쿄에서 100년 전 2·8독립선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역사의 현장인 도쿄YMCA를 찾았다. 입구에는 2·8독립선언의 의의를 오랫동안 알리기 위해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와 함께 조성한 '1919.2.8 조선독립선언기념비'가 서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이 있다. 기념자료실은 재일본한국YMCA 창립100주년기념 사업의 하나로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기념자료실의 각종 자료들은 2·8독립선언이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시킨 3·1운동의 시작점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당시 도쿄로 유학온 조선 유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어떤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여실히 드러나 있다. 도쿄YMCA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

  •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2)]뉴욕의 '소약속국동맹회의'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2)]뉴욕의 '소약속국동맹회의' 지면기사

    1차대전후 약소국들 민족자결 주장 동맹 결성'맥알핀 호텔'서 1917·1918년, 조선독립 천명3·1운동 자극받은 한인 필라델피아 시내 행진우두커니 도시 한복판에 멈춰 섰다. 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오가는, 세계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 곳, 뉴욕에서 100여 년 전 독립을 열망했던 선조의 발자취를 따라 떠나왔는데, 흔적은 온데간데 없고 그 사실을 아는 이조차 드물다. 이역만리에 조선이 '독립 국가'임을 알리고자 험한 뱃길을 마다치 않았을 텐데, 망망대해보다 더한 대도시에서 얼마나 막막했을지, 이 도시의 비정함에 선조들이 겪었을 약소국의 설움이 고스란히 다가왔다.제일 먼저 '맥알핀 호텔'을 찾았다. 지금은 뉴욕 시민들이 거주하는 고급주상복합건물로 변한 맥알핀 호텔은 1917년과 1918년 두 번에 걸쳐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천명한 '소약속국동맹회의'가 열린 곳이다. 다행히 건물의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지만, 내부엔 옛 흔적이 없다. 건물 관리인에게 건물에 얽힌 우리의 사연을 이야기했더니, 꼭대기 층에 있는 관리사무실로 인도했다. 호텔 시절에 사용했던 물건과 사진 일부를 모아두었지만, 어디서도 그 날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분명 그 날의 회의는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었는데, 힘없는 민족의 운명이 이토록 초라한 것인가, 절감한 순간이다.이 회의는 핍박받는 약소국들이 절박한 마음을 담아 민족 자결을 주장하며 동맹을 결성하고자 모였다. 1917년에 열린 1차 동맹회의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파견된 박용만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개최될 평화회의 및 각종 국제 회의에서 약소국들이 의견을 제시할 권한을 획득하는 것을 결의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열린 1918년 제 2차 동맹회의에는 뉴욕신한회가 총회를 통해 '독립결의서'를 채택한 뒤 미 국무부와 하원외교위원장에게 수교하는 동시에 김헌식을 이 회의에 참석시켰다. 한국을 비롯해 레토니아, 스코틀랜드, 우크라이나, 그리스, 인도, 아일랜드 등 당시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약소국가들이 대거 참석한 회의

  • 100년 전 그 날 '뉴욕서 휘날린 태극기'

    100년 전 그 날 '뉴욕서 휘날린 태극기' 지면기사

    세계의 심장, 뉴욕에 태극기가 펄럭인다. 100년 전 그 날에도 커다란 태극기가 휘날렸다. 3·1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때, 수천의 조선인들이 대한의 독립을 외치며 뉴욕 거리를 활보했다. 그래서 한인 유학생의 허브였던 컬럼비아대학교 인터내셔널 하우스에는 여전히 성조기 옆에 태극기가 당당히 펄럭인다. 뉴욕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3·1 만세운동 유적지가 살아 숨쉬는 땅이다. 3·1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동경 2·8 학생독립선언'은 뉴욕 맥알핀 호텔에서 열린 '소약속국동맹회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 회의에서 일본과 조선 합병 무효를 주장하는 결의문이 채택됐고 이 소식이 적국의 땅, 동경(도쿄)에 전해지며 유학생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뉴욕에서의 외침이 도화선이 된 3·1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조선 팔도를 뒤덮었고, 다시 바다를 건너 미국 뉴욕 한복판에서 한인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국내 3·1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상하이, 연해주, 만주 등 해외 지역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됐고, 미국 내에서도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특히 뉴욕은 한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문화회' 등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한 문화독립운동을 전개했고 3·1운동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독립정신을 구현한다는 취지로 1928년 6월 뉴욕 최초의 한글신문인 '3·1 신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1)프롤로그]들불처럼 일어난 외침 "대한독립 만세"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1)프롤로그]들불처럼 일어난 외침 "대한독립 만세" 지면기사

    무력 식민통치 전분야 개인의 권리 침해기미년 1월22일 고종 승하, 반일감정 증폭美 대통령 윌슨 '민족자결주의' 기폭제로100년 전 전국적으로 거센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은 민주주의, 평화와 비폭력의 정신이 빛난 독립운동이다.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일본 제국주의의 무력 식민 통치가 고조되고 있었고 한국인에게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박탈했다. 종교와 기업의 자유를 구속했으며 행정·사법·경찰 등 모든 통치기관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했다. 이런 상황 속에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국의 처리에 대한 문제를 논의한 파리 강화회의에서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는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 윌슨 대통령의 주장은 강대국에 의해 고통을 받던 약소국들에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키워주는 기폭제가 됐다. 또 1919년 1월22일 고종 황제가 갑자기 승하(죽음)하자 일본인들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했다.10여일이 지난 2월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유학생들은 '한일합방이 한국민의 뜻에 반하는 것인만큼 일본은 한국을 독립 시킬 것,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합병을 솔선 승인한 죄가 있으므로 속죄의 의무를 질 것,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우리 민족이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 등을 선언했다. 2·8독립선언이라고 불려지는 이 사건이 국내의 민족지도자와 학생들에게 알려졌고, 3·1운동이 벌어지는 한 계기가 됐다.3월1일 새벽 '독립선언서' 배포 시작 알려3월 하순~4월 초순 전국 각지 시위 절정인구 10%·200만명 참여, 2만3천명 사상# 한반도를 뜨겁게 달군 3·1운동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는 이른 새벽에 학생들이 시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작됐다. 정오 무렵부터 학교를 빠져나온 학생들은 속속 탑골공원에 집결했고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였다.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갖고 경찰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