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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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을 관통한 잊혀진 방어선, 대전차 방호벽 '용치'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 프롤로그] 지면기사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 프롤로그] 반백년 전 한국전쟁 재발 방지 목적 건설 이제는 기억하는 이 찾아보기 드물어져다양한 문화유산 보존하려는 의식 증가급속한 도시개발 영향 나날이 소실위험경인일보, 道·경기역사문화원과 협력비지정 문화재 발굴·보존 등 꾸준히 노력경기북부와 접한 강원도, 북한과 경계를 맞댄 이곳 논 위로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경기도와 강원도를 가로질러 끝없이 펼쳐진 벽의 정체는 지도엔 나타나지 않았다. 군사시설이기 때문이다.촬영을 하거나 위치를 발설해선 안 되는 군사시설은 구글에 접속해 이 지역 항공사진을 보자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차방호벽이었다. 벽은 시군 경계를 넘어 논과 밭 위로 주욱 뻗어 있었다. 누군가 지도 위에 연필로 그어 놓은듯, 주변 지형지물을 무시하고 산과 강과 들판에 벽이 도열했다.반백년 전에 지어진 대전차방호벽의 정체를 기억하는 주민은 많지 않다. 대전차방호벽은 용의 이빨을 닮아 '용치'라고 불린 콘크리트 구조물, 전쟁 시 폭파해 도로를 막는 용도인 낙석과 더불어 대전차방어선을 구축한다.1970년대 만들어진 대전차방어선은 파주, 연천, 양주, 의정부, 고양, 포천, 동두천 등에 구축됐고 임진강까지 확장해 수도권방어선으로 기획됐다. 강원도 고성, 인제, 양구에서도 관찰되며 멀리는 서해안 강화까지 뻗어 있다. 강원도에서 경기도까지 수십킬로로 연결된 대전차방어벽의 모습은 가히 38도선, 휴전선과 더불어 제3의 휴전선이라고 할만하다.한국전쟁의 경험으로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지만 50여년 이상 단 한 번도 쓰인 적은 없었다. 쓰임을 다하지 못한 대전차장애물은 2000년대 도시개발이 활발해지며 이해관계에 따라 하나 둘 철거되고 있다.지난해 연중 게재된 '전쟁과 분단의 기억'은 바로 이 대전차방어선을 구축하는 대전차장애물 '용치'를 시작으로 근현대 시기에 만들어져 경기도에 소재한 여러 건조물의 현재를 확인했다.용치를 보존해야 하는가, 없애야 하는가. 기사는 이 물음에서 시작했다. 도시의 흉물이며 냉전의 상징이지만 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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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21·끝)] 되짚어 본 전쟁 문화 유산·(下) 지면기사
'역사의 흔적 있어… 기억이 안 난다' 무관심속에 사라져 가는 유산들… 폐허로나마 남아줘 가슴에 간직 파주 장파리에 있던 미군 클럽 럭키바자갈밭으로 이뤄진 주차장만 덩그러니경기도 내 건조물들 열악한 환경 방치불에 그을리고 흉물 상태로 멸실 위기아름답지 않아 잊고 싶은 상처라 해도우리가 기억 안하면 영영 사라질 것들전쟁과 분단의 유산은 사라지고 있다. 지난 8월 찾아간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 348-8. 미군 클럽 럭키바가 있어야 할 자리엔 자갈밭으로 이뤄진 주차장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1960년대 만들어져 근처의 DMZ홀, 라스트찬스와 함께 당시를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지만, 무관심 속에 사라진 날짜도 특정할 수 없게 어느 사이엔가 허물어진 것이다.럭키바, DMZ홀, 라스트찬스는 파주 장파리 미군 클럽의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다. 1960년대 서울 번화가보다 번영했다는 장파리는 미군에 기대어 성장한 당시 미군 기지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한국 대중음악사의 기원이 되는 장소다.사라짐은 비단 럭키바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채 50~70년 가량 시간이 지나면서 경기도 곳곳의 건조물들이 사람들 뇌리에서 잊혔고 지금도 열악한 보존 상태 속에 멸실 위기를 맞았다.이런 상황은 전쟁 문화유산이 대체로 북한과 가까운 접경 지역,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지역에 자리잡았다는 사정과 맞닿아 있다. 피난민의 안식처인 '파주 장곡리 움집', 옛 미군거리 쉼터 '동두천 샬롬하우스', 캠프 스탠리 옛 기지촌 '의정부 뺏벌마을'이 모두 그렇다.1950년대에 움집이라니. 신석기나 구석기 시대가 아니라 피난민들이 전쟁 물자로 얼기설기 엮은 움집 마을이 아직 파주 접경 지역 장곡리에 자리 잡고 있다. 2020년대에 이르러 여전히 그곳에 사람이 산다. 6채 가옥은 50년대 당시 피난 시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다. 동두천 샬롬하우스는 2019년 화재 이후 방치돼 있지만 건물 외관은 온전하다. 화마가 할퀸 실내는 불에 그을린 채로 말이다. 미군들이 버리고 간 고아와 클럽에서 일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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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20)] 되짚어 본 전쟁 문화 유산·(上) 지면기사
지난 2월 연재를 시작한 '전쟁과 분단의 기억'은 매월 2차례씩 19번에 걸쳐 경기도 전역의 미등록 전쟁 문화유산을 찾았다. 정전 70주년, 여전히 분단 상태인 한반도에서 북한과 경계를 접한 경기도엔 한국전쟁의 상흔인 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道-문화재연구원 실태조사… 조사목록 154건 올라소재 파악 어렵거나 이미 소멸된 건조물 44건 달해보도에 앞서 경기도와 경기도문화재연구원은 분단 상황과 관련한 유산을 목록화하는 실태조사를 벌였다. 모두 154건의 유산이 조사목록에 올랐는데 건조물(건축물)이 100건이었고 전쟁과 분단의 기억이 첫 번째로 찾아간 유산, '용치'가 54건이었다. 목록에는 올랐지만 사라진 유산도 여럿이었다. 미군 부대 안에 소재해 일반인 접근이 불가능하거나 이미 사라진 건조물들이 44건에 달했다. 사라짐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지난해 여름 실태조사에선 건재했던 '파주 럭키바'가 올해 들어 사라졌다는 사실(8월 22일자 11면 보도=[전쟁과 분단의 기억·(15)] 파주 옛 미군 위락시설 '럭키바·DMZ홀·문화극장')도 취재 과정에서 확인됐다.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전쟁 문화 유산을 등한시 한다면 또 다른 유산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질지 모른다. 우리 곁 유산을 발견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보전하는데 이르기까지 인식 변화를 촉구하며 연간 진행된 보도를 통해 다시금 전쟁 문화 유산의 현실을 되짚는다. '용치' 한탄강 바라보던 주민 제보로 세상에 드러나장갑차·전차 차단용 콘크리트 구조물… 도내 32곳대북 경계심 고조 1970년대 추정… 최소높이 1.5m전쟁 문화 유산 '용치'와 노르웨이 야전병원 '노르매시'는 우연히 발견됐다. 용치는 어느 날 집 밖의 한탄강을 바라보던 한 주민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대전차 장애물 용치 설치는 정확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용의 이빨(Dragon's Teeth)을 닮았다 해서 지어진 '용치(龍齒)'는 장갑차나 전차가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통로에 설치된 콘크리트 구조물로 경기도엔 32개소(고양 2, 양주 1, 연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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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9)] 동두천 보산동 구시가지 지면기사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 번쩍이는 신호등 /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동두천1·김명인)보산역에서 멎은 기차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떠난 기차를 뒤로하고 역사를 내려가자 기둥에 색색으로 이방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기다랗게 늘어선 좌판 매점은 일률적으로 문을 닫았고 이스탄불이라 쓰인 케밥 집에 아랍계가 모여 마작을 친다.미2사단 캠프 케이시 앞 '보산동관광특구'에 도착했다. 캠프 케이시는 한강 이북에서 가장 큰 미군 주둔지다. 한국전쟁으로 1951년 7월부터 미군이 주둔했는데 1990년대엔 1만2천명 수준에 달했다고 한다. 미군 주둔으로 사라진 '보안리'와 '축산부락'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 보산동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미군 주둔으로 사라진 보안리·축산부락 이름에서 딴 '보산'미2사단 캠프 케이시 앞 무질서하게 건물 들어섰던 60년대2007년 보산역 들어서고 광역교통망 개발로 유동인구 감소주둔병력 나날이 줄고 기지들 폐쇄·반환 잇따라 상권 축소1981년 동두천이 시로 승격했고 1997년 1월 보산동을 중심으로 중앙동, 소요동 일대가 보산동관광특구로 지정됐다. 동두천시 30년사는 "그 이전부터 미 2사단 정문 맞은 편에 위치, 미군 상대 나이트클럽·주점·상가 등의 영업. 내국인보다는 미국이나 외국인 상대. 1960년대부터 무질서하게 들어선 건물로 낙후되어 도시미관 정화와 지역경제, 도시 이미지 제고를 위해 관광특구 지정 개발 시작"이라고 설명한다.1997년 시작한 보산관광특구의 역사는 10년 뒤인 2007년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전철 개통이다. 2007년 지상 3층 규모의 선하역사로 보산역이 들어서면서 일대의 미군들이 이태원이나 용산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광역교통망 개발로 유동인구가 도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전형적인 빨대효과가 나타난 것이다.지난 29일 찾아간 보산동은 쇠락한 흔적이 역력했다. 보산동 구시가지를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3번국도(평화로)변과 신천 동측 구역으로 범위를 한정해 돌아봤다. 보산역 역사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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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8)] 교인들이 힘모아 세운 '수원교회' 본당 지면기사
수원시 팔달구 교동 2-7의 수원교회 본당이 조성된 건 1954년이다. 교회는 1946년 11월 27일 수원의 장로교 신도 12명이 가정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린 것에서 출발했다. 16일 교회 측 관계자는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중심으로 수원에 장로교 교회가 없다는 걸 아쉽게 생각한 교인들이 모인 것이 교회의 시작이었다"고 설명했다. 1956년 미군의 물자 도움으로 준공장로교 교회 필요, 신도들 직접 지어콘크리트 건물 외부 벽돌 감싼 구조1980년대 시국모임 등 거점 활용돼 인근에 '수원시 가족여성회관' 건물"행궁 하천 자재 가져다 썼다" 증언준공년도·육면체 화강암 외벽 비슷수원교회도 하천 돌들 사용 가능성 가족여성회관, 국가등록문화재 지정'뜨거운 역사' 수원교회도 가치 충분이들은 남창동 소재 일본인 불교사원을 빌려 예배처소로 사용해오다 1954년 1월 미 제5공군으로부터 2층의 건물 신축 물자를 받아 1956년 11월 교회를 준공했다. 미 제5공군으로부터 불하받은 건물이지만 미군이 교회 건축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신도가 직접 교회 건축에 참여했다는데 의의가 있다.북측으로 팔달산과 팔달공원과 붙어 있고 수원향교에 인접한 수원교회는 중동사거리·교동사거리 인근 수원 화성 팔달문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수원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교 교회인 수원교회(본관)는 장방향의 평면에 2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장변은 7칸으로 나눠 세로 돌출띠가 보이고 방형의 돌을 조적조(벽돌을 차례로 쌓아 올리는 방식)로 올렸다. 콘크리트 건물에 외부가 조적조 형태로 마감된 것인데 외벽 공사는 교인들이 손수 작업했다. 이런 마감 방식은 이천 양정교회, 화성 남양고등학교 건물과 유사하다.이천 관고동 양정교회(4월 18일자 11면 보도=[전쟁과 분단의 기억·(6)] 폐허 위 쌓아올린 신앙 '오산감리교회·이천 양정교회')도 수원교회와 마찬가지로 1956년 지어졌고 조적조 형태를 하고 있다. 외벽을 돌로 마감해 언뜻 보기에도 수원교회와 많이 닮았다. 수원교회가 교인들이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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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7)] 김포 애기봉평화생태공원 지면기사
'사십년 반평생을 나는 나비로 살았다…'. 시인 신경림이 쓴 '나비의 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비의 꿈에는 '철원에서'란 부제가 달렸다. 각주엔 '철원에는 통일이 되면 남 먼저 돌아가겠다고 주저물러앉아 사는 실향민들이 많다'고 썼다.호접지몽(胡蝶之夢)에서 따왔을 꿈 이야기는 이렇다. '훨훨 철조망을 날아 넘어가 / 어머니 밤늦도록 바느질하는 / 뒷방 문앞에서 서성거리기도 하고 / 누이한테 매달려 사방치기하던 / 마당가 빨랫줄에 앉아 쉬기도 했다'.'철조망'이 나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것이 헛된 꿈임을 안다. 38선이라 부르든 휴전선이라 하든 저 철조망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꿈도 과거형이다. 꿈이자 회상이다. '두엄 썩는 냄새 코 찌르는 / 학교 뒷문으로 날아들어가면 / 2학년 아이들 제각기 소리내어 / 국어책 읽는 소리 / 벌소리처럼 잉잉댔다'.어머니와 누이, 마당가와 학교를 앗아간 전쟁은 영영 고향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없는 철조망을 남겼다.'문득 생각하는 날이 많다 /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 나비인 내가 / 사십 반평생을 좌판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 군고구마나 팔고 있는 /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한낮 철원 거리 좌판 행상이 꾸벅 졸며 꾸는 꿈의 모습은 강력한 최루탄이다. 최루가스는 내 뜻과 무관하게 고향과 가족을 앗아간 전쟁, 상처를 봉합하지 못한 정치, 오랜 기간 공전하는 외교를 동력으로 삼는다. 그리고 사십 반평생이라고 표현한 세월이 이젠 칠십 년을 넘겼다는데서 서글픔은 현재 진행형이다(신경림은 시 '나비의 꿈'을 1991년 펴낸 시집 '길'에 담았다).한강·임진강 만나는 '한국전쟁 154고지'1954년 치열한 전투현장에 소나무 트리박정희, 조선 기생 이름 따와 비석 건립끝내 만나지 못한 설화, 이산가족 닮아1971년 등탑 설치… 남북관계따라 점멸2014년 안전문제 철거… 평화공원으로고향 못 가는 실향민 위한 망배단 설치이산가족 상봉, 2018년 8월 이후 중단그 뒤로 신청자 1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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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6)] 파주·의정부 '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 건물 지면기사
파주 장파리 '럭키바'(8월 22일자 11면 보도)처럼 '블루문홀', '메트로홀' 역시 장파리에서 자취를 감춘 문화유산이다.블루문홀(파평면 장파리 370-94)과 메트로홀(파평면 장파리 437-5)은 미군 주둔이 시작된 1950년대 조성돼 특정할 수 없는 시기에 사라져 현재는 멸실 상태다. 미군 기지촌 장파리의 이야기, 그곳에 종사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도 사라진 문화재와 함께 대부분 소멸했다.장파리 '장마루 극장' 현재는 사라져1959년 흥행 '장마루촌 이발사' 촬영당시 번영했던 일대의 분위기 보여줘블루문홀, 메트로홀 인근 장파리 349-4 일대에는 '장마루극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장마루극장 역시 1950년대 들어선 것으로 알려졌는데 파주 지역에서 두 번째로 생긴 극장으로 추정된다. 장마루극장도 멸실 상태지만, 장마루극장에서 촬영된 '장마루촌의 이발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장마루촌 마을 청년 동순은 여대생 순영과 사랑하는 사이인데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게 잡혀간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군에 입대했지만 전쟁 중 성 불구가 되고 만다. 순영은 그런 동순을 이해하고 함께 장마루촌의 재건을 돕는다는 줄거리를 가진 영화다.한국영상자료원에 따르면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1959년 9만5천82명의 관객을 동원해 그 해 흥행 7위를 기록했다. 큰 인기를 끈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10년 뒤인 1969년 신성일·김지미 주연으로 리메이크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파리 일대가 번영했던 시기로 미군 주둔 파주지역이 당대에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지역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주한미군 한국인노동조합 파주지부'1958년 '자유노조'란 이름으로 결성한국노총의 출범보다 2년이나 앞서파주서 미군철수뒤 사무실 방치 상태 장파리의 미군 클럽이 주둔 미군, 종사 여성, 관련 상인들이 얽힌 장소라면 미군과 관련한 노동을 한 사람들의 흔적이 남겨진 유산이 근처에 있다. '전국주한미군 한국인노동조합 파주지부'다.전국주한미군 한국인노동조합 파주지부는 1958년 자유노조라는 이름으로 창립됐다. 이듬해인 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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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5)] 파주 옛 미군 위락시설 '럭키바·DMZ홀·문화극장' 지면기사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 348-8. 미군 클럽 '럭키바'가 사라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있었던 럭키바는 철거됐고 자갈 바닥의 주차장만 남았다. 1960년대 조성돼 미군부대 향락시설로 널리 알려진 럭키바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파주 파평면 장파리는 7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유동인구가 3만명에 달할 정도로 성황이었다고 한다. 임진강 너머 미군 때문에 형성된 상권이었다. "동네 강아지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 정도로 번창했던 장파리 일대는 지금 고요하다.장마루로와 장마루8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동쪽으로 50m 가량 들어가면 골목에 '럭키바'가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3동의 건물 중 상부가 무너진 채 방치된 1동을 제외하곤 대체로 외형이 온전했다고 한다. 건물은 지상 2층에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구조인데 정면에 2개 창문이 있고 우측에 출입구가 났었다. 지난해에도 오랜 기간 방치된 건물 내부로 진입할 순 없었다고 한다. 다만 창문을 통해 넓은 공간을 확인할 수 있었고, 클럽 홀 하우스로 쓰였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확인됐다.모든 건 과거형이다. 지난해 어느 시점 건물주가 럭키바를 철거했기 때문이다. 럭키바가 있었던 자리 앞쪽에 거주하는 파평면 주민은 "작년에 철거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래 방치한 건물이니까 허물었을 것"이라고 전했다.연면적 550㎡, 지상 3층으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미군과 접객원으로 붐볐던 럭키바는 없어졌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등록 문화재를 발굴해 보존하자는 취지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사이 또 하나의 기억 장소가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럭키바는 장파리 내 가장 규모가 큰 미군 클럽이었다.1970년대만 해도 하루 유동인구 3만당시 최대 규모 '럭키바' 지난해 철거인근 'DMZ홀' 무명 조용필 무대도 장파리 내 또 다른 미군클럽 'DMZ홀'은 다행히도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럭키바에서 도보로 5분 내외 장파리 377-12에 위치한 DMZ홀은 장마루로와 장마루 14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동쪽으로 40m 가량 들어간 골목 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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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4)] 평화통일의 염원 모인 '파주 임진각' 지면기사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1972년 7월 4일 남북한은 3가지 원칙에 합의한 성명을 발표한다. 냉전이 완화되는 데탕트 시기에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남북한이 처음으로 정치적 대화 통로를 마련한 7·4 남북공동성명은 훗날 평화의 상징이 될 장소를 경기도에 남겼다.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후 개발 시작인근 민통선 해제·국도 1호선 개통 영향1985년 망배단… 2000년대 종합관광지로2018년 337만 방문… 연간 수백만명 발길'경의선 철교' 도라산역 등 신설되며 복구동측 상행선 교각만 남아… 120년간 부침포로 교환 '자유의 다리' 道기념물 지정시기별 다양한 시설… 분단 경험 최적지 국도 1호선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임진각'은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개발되기 시작했다. 최초에 7천500여평 대지에 8천만원 공사비가 들었는데 이를 해태제과가 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7·4 남북공동성명으로 파주 문산까지였던 민간인통제선이 임진강까지 해제됐고, 국도 1호선(통일로)이 개통한 게 임진각 조성에 영향을 미쳤다.1972년 12월 23일 개관식을 한 임진각은 그 후로 1985년 망배단을 조성했고, 1991년 남북고위급회담으로 자유로 건설·국민 관광지 지정의 효과를 맛봤고, 2005년 평화누리·2017년 6·25전쟁 납북자기념관·2018년 평화누리 캠핑장·2020년 곤돌라·2022년 한반도 생태평화 종합관광센터 등이 연이어 들어서며 각종 시설을 갖춘 종합 관광지로 개발됐다.임진각 주변엔 임진강에 면해 서측으로 경의선 철로가 지나고, 동측으론 임진강을 건너는 통일대교가 있다. 그 사이 넓은 부지에 임진각이 위치한다. 주변은 대부분 군사시설구역과 농촌지역이다. 통일로와 자유로 끝에 임진각은 자리하고 있다.통계청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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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3)] 잊히는 용사들의 쉼터, 이천시 창전동 '보훈회관' 지면기사
195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천시 창전동 보훈회관에는 4개 보훈단체가 사무실을 두고 있다. 광복회 이천시지회와 6·25참전 국가유공자회는 1층, 고엽제전우회 경기지부 이천시지회와 월남전 참전자회 이천시지회는 2층을 사용한다. 1945년 광복(광복회), 1950년 한국전쟁(6·25 참전 국가유공자회), 1964~1973년 베트남전(고엽제전우회 경기지부 이천시지회·월남전참전자회 이천시지회)까지 1940~1960년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사건과 얽힌 사람들이 이천시 창전동 보훈회관에 모여든다.1950년대 건축·1970년대 2층 증축 추정여러차례 수선 거쳐 사용… 역사적 가치중앙로 시내 위치… 전역자들 찾기 쉬워참전유공자, 고령화로 빠르게 감소 추세3명중 1명 장애… 공적연금 미가입 39.9%유튜브 빠진 '극우 이미지' 사회와 유리삶 만족도 평가 '5.5'… 삶의 가치는 '5.8'사회 참여 감소… 그들 이야기 들어줘야 창전동 보훈회관은 과거 문화원·여성회관으로 쓰인 이력이 있다. 대지면적 347㎡에 건물면적 392㎡의 지상 2층 건물이다. 사무실과 회의실로 쓰이는 방이 있고 단체별 사무실 면적은 20㎡로 협소한 편이다.1950년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지만 1973년 건축됐다는 기록도 있다. 건물 현관 입구에 경비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1950년~60년대 사이 지어진 건축물에서 관찰되는 특징이다. 1층 본건물 서측에 계단실을 만들어 2층을 증축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문에 일부 기록에 1973년 건축이라고 표기됐을 가능성이 있다.2층을 올리며 계단면 입사면 파사드와 본건물 파사드 사이에 단차가 발생했다. 이 밖에도 활용을 위해 여러 차례 수선한 건물이지만 과거부터 지금까지 활용돼 왔다는 점에서 건물에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보훈회관 기준으로 남측 200m 거리에 이천 중앙로 문화의 거리가 위치한다. 창전동 행정복지센터와 근접지며 시내와 가까워 전역자들이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보인다. 다만, 지난 20일 오전 찾은 창전동 보훈회관에선 건물에서 활동하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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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2)] 경원선 끝자락, 연천 신망리·대광리·신탄리역 지면기사
피난민 정착지 'New Hope Town''신망리역' 명칭 기원… 1956년부터 운영마을내 '구호주택' 2018년까지 존재1912년 문 연 '대광리역' 과거모습 간직일대 한때 연천 이북 역중 가장 번화콘크리트 건물의 역사, 건설 연도 미상백마고지역 이전 철도종단점 '신탄리역''철마는 달리고 싶다' 명소로 각광도남북관계 경색… 경원선 복원 기약 없어■ 상리 131-1 '신망리역'수원시 효원로 299 경인일보 본사에서 120㎞를 달려 연천군 경원선 신망리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고작 20㎞를 더 북쪽으로 가면 북한이다. 달려온 길의 6분의 1만 가면 도달할 수 있는 고지를 목전에 두고 경원선 열차는 백마고지역에서 멈춘다.경기도를 지나는 경원선 열차의 최북단인 연천 신망리역·대광리역·신탄리역을 차례로 훑었다. 1910년대 완공된 경원선은 서울에서 연천·철원을 지나 원산까지 닿았다. 2000년대 들어 남북한이 평화 대화에 나서며 복원이 논의됐으나 남북관계 경색으로 중단됐다.역 이름으로 붙은 신망리(新望里)라는 명칭이 재밌다. 신망리는 마을 자체가 미군이 만든 정착지다. 1954년 5월 미군 제7사단이 피난민을 위해 조성했는데 새로운 희망을 품으라는 의미, 즉 'New Hope Town'이라는 뜻에서 신망리가 됐다.처음엔 100호 정도 선착순으로 피난민이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신망리란 이름이 붙기 전 '웃골'이라고 불렸고 일제강점기엔 이를 한자어로 읽어 '상리'라고 불렀다. 웃골, 상리, 신망리에는 지금 중국음식점과 부동산과 같은 몇 개의 상점만 존재한다. 1956년 8월 21일 역무역을 두지 않는 무인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는데, 1면 1선로로 승강장과 역사가 좁다는 특징을 보인다. 간이역이기에 정식역인 대광리·신탄리역에 비해 좁은 것이다.뉴 호프 타운 신망리의 역사는 신망리역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신망리역사 안으로 들어가니 과거 처음 지붕을 지었던 자재가 전시돼 있다. 전시된 나무 널빤지엔 영어와 숫자가 어지럽게 적혀 있다. 신망리역은 주민들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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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1)] 포성 잦아든 화성 매향리 '쿠니사격장·매향교회' 지면기사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앞바다 농섬에 고장을 일으킨 미공군 전폭기가 예정에 없던 포탄 6발을 일시에 투하, 인근 가옥 160여채에 금이 가고 주민 7명이 부상을 당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지난 8일 오전 8시30분께 비행중인 미 공군소속 A-10전폭기 3대중 한대가 엔진고장을 일으키면서 탑재 중이던 500파운드짜리 포탄 6발을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앞바다 농섬(일명 쿠니 사격장)에 일제히 투하했다.이날 6발의 포탄이 떨어지면서 발생한 진동과 폭발음으로 우정면 매향1~5리 등 5개 부락 162채 가옥의 벽과 지붕 등에 금이 가고 유리창이 부서졌으며 이에놀라 대피하던 오일선씨(여·76·매향1리)와 최계월씨(여·55·매향1리) 등 7명이 넘어지면서 부상을 당해 우정면 조암리 소재 성모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사고는 3대로 편성된 미 공군 A-10전폭기 1개편대가 각각 포탄 6발씩(500파운드 짜리)을 싣고 군산 앞바다에 있는 모 사격장으로 비행하던 중 3번기가 갑자기 엔진고장을 일으키자 포탄을 쿠니사격장에 투하하라는 미공군 작전처의 긴급조치로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미군, 1951년 농섬에 포격장 조성굉음·난청·가축 유산 등 수십년 피해1956년 불발탄에 어린이 사망 기록도2000년엔 오폭 사고로 주민들 부상2002년 '국가 배상' 판결 대법 확정2005년 8월 폐쇄… 道 건축자산 등록일부 보존… 평화생태공원 탈바꿈2000년 5월 11일 경인일보에는 화성 매향리 오폭 사건이 실렸다. 쿠니사격장에 투하됐어야 할 포탄이 전투기 기재고장으로 인해 마을 주변에 떨어진 것이다. 오랜 기간 포탄 투하 공포를 겪어온 매향리의 실체가 드러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매향리 쿠니사격장은 1951년 미군이 매향리 해상의 농섬을 포격장으로 만들고 사격 연습을 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1955년 2월 미군 공식 사격장으로 지정됐다. 1968년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 및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은 농섬을 포함해 2천277만㎡를 해상 사격장으로, 육지사격장 면적은 125만㎡로 정했다. 이에 따라 총면적 2천40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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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0)] 새 운명 기다리는 파주 미군반환공여지 지면기사
접경지 경기도, 휴전후 곳곳에 기지50여년 지나 캠프 통폐합, 철수 시작핵심 주둔지 평택행, 용산은 공원화2006년 '공여구역 특별법' 제정에도적은 국비 보조… 도내 활용안 부진일제시대 농장 자리에 '캠프 하우즈'20여개 건물 역사적 가치 판단 필요다른 캠프서 볼수 없는 건축 양식도민통선 반환 공여지 '캠프 그리브스'퀸셋막사 일부, 아카이브 공간 활용'전쟁문화유산 보전' 우수사례 평가타 캠프도 보존·개발 '투트랙' 필요 ■ 미군반환공여지들 엇갈린 운명한국전쟁을 기점으로 경기도는 미군의 주요 거점이 됐다. 북한과 맞닿은 북방 경계였기에 휴전에 돌입하며 당연한 수순처럼 미군 캠프가 설치됐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미군 2사단이 동두천에 주둔하며 미군 캠프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경기도 미군 캠프는 1954년 집중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한다.미군 캠프가 철수된 건 반세기가 지나서다. 주한 미군 캠프를 통폐합하고 재편성하는 연합토지관리계획(2002년·LPP)과 이어진 용산기지이전협정(2004년·YRP)이 계기가 됐다. 미군이 떠나며 돌려받은 주한미군 공여구역의 전국 면적은 242.07㎢ 인데 그 중 경기도에 210.61㎢가 있다. 한때 도시 전체 면적의 40% 이상을 미군 캠프로 내줬던 동두천이 대표적인 예다.협정에 따라 미군 핵심 주둔지가 평택으로 이전했고, 한국 미군의 대표적 상징이었던 용산기지도 공원으로 탈바꿈을 앞두고 있다. 미군 캠프가 떠나고 남은 경기도 미군반환공여지의 운명은 지역별로 엇갈렸다.미군 캠프 철수 사업은 핵심 주둔지인 용산, 이전 대상지인 평택, 이전 대상인 경기도 미군캠프의 3개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우선 이전 대상지인 평택은 2004년 제정된 '평택지원 특별법'에 따라 발전계획의 80%·기반시설의 100%를 국비로 보조해 새로운 미군 캠프 조성을 뒷받침했다. 용산을 대상으론 2007년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이 제정됐다. 공원조성비의 100%를 국비로 지원해 국가 책임 아래 공원을 조성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이전 대상인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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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9)] 갈등과 평화 사이 '공동경비구역 JSA' 지면기사
'전쟁과 분단의 기억'은 존재하나 잊힌 유산을 다뤘다. 용치, 폐철교, 노르매시 야전병원, 가평·남양·고양고, 파주 장곡리 움집, 오산감리교회·이천양정교회, 동두천 샬롬하우스, 의정부 뺏벌마을은 기억해야 할 유산이다.아홉 번째로 찾은 유산은 너무나도 유명해 기억할 수밖에 없는,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기억의 장소다. 바로 공동경비구역 JSA다. 1980년대생인 기자에게 공동경비구역 JSA의 기억은 동명 영화로 각인됐다. 2000년 개봉한 영화감독 박찬욱의 출세작이자 이병헌, 송강호, 이영애, 신하균이라는 걸출한 배우의 열연으로도 주목을 모은 작품이다.1963년생인 박 감독에겐 1976년 일어난 '판문점 도끼 만행'이 잊을 수 없는 기억일 것이다. 예술가의 유년기에 깊게 박힌 경험은 30여년 세월 후에 반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회자될 영화로 탄생했다. 또래가 2000년대에 입대한 우리 세대에게 JSA 근무는 좋은 안줏거리가 됐다.JSA에서 군 생활을 한 동기가 휴가를 나오면 삼삼오오 모여 정말 영화처럼 남북한 군인이 마주 보고 경계 근무를 하는지 이야기도 하고 침도 뱉고 그런 게 정말 가능한지 묻는 게 이야깃거리였다. 1960년대생에게 JSA가 판문점 도끼 만행으로, 1980년대생에겐 동명 영화로 기억된다면 2000년대생에게 JSA는 2018년 남북정상회담이 아닐까.동서 800m·남북 400m… 1953년 정전협정후 형성남측 지휘통제권 유엔사 보유… 경비 임무는 국군서울 기점 남쪽 목포·북쪽 의주 잇는 '의주로' 선상'역사적 사건' 주무대… 1976년 북한군 '도끼만행'2000년 '박찬욱 영화' 흥행… 2017년 인민군 귀순2018년 남북 정상 만남… 이듬해 트럼프 포함 회동 2018년 4월 27일 대통령 문재인과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JSA, 그러니까 판문점에서 만날 때 기자는 고양 일산 킨텍스 프레스센터에 있었다. 이날 회담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이뤄졌는데 평소엔 전시회가 열리던 거대한 공간을 3천명 가량 취재진이 가득 채웠다.공식 기록으론 내신 176개사 2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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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8)] 캠프 스탠리 옛 기지촌 '의정부 뺏벌마을' 지면기사
뺏벌마을을 이렇게 설명해보면 어떨까. '빼뻘은 주름이다', '빼뻘 마을 산은 도봉산보다 좋다', '빼뻘 마을은 사람과 사이에 풋풋한 정이 있는 곳', '처음처럼 왔다가 빼뻘처럼 가는 거지'.15일 의정부시 고산동 508-75번지 뺏벌마을을 찾았다. 실은 저 문구는 뺏벌마을에 만들어진 예술가와 주민의 공간 '빼뻘보관소' 창문에 적힌 글귀들이다. 하나하나 차근히 설명해보자.의정부시 고산동 일대 6만7천여㎡에 걸쳐 건물 130여채, 490여명의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이 뺏벌마을이다. 미군 캠프 스탠리 후문을 기점으로 형성된 기지촌인데 부대가 산 위에 있어 가파른 언덕배기에 좁다란 길목을 따라 상점들이 죽 늘어서 있다.한때 이태원 방불… 미군 떠나며 쇠락고산동 일대 130여채·490여명 거주중토지의 대부분 '전주 이씨 문중' 소유주민들 땅값 치를 형편 안돼 세입자로 예술가들과 연대, 마을 기록하고 지켜다양한 삶의 흔적 SNS 'ㅃㅃ보관소'에'처음처럼 왔다가 빼뻘처럼 가는 거지'이들의 노력에도 위태로운 기억·역사1960년대부터 형성됐는데 2006년 평택기지 건설이 결정된 이후 미군 대다수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뺏벌마을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송산로 남쪽에 위치한 마을은 동서방향으로 긴 형태에 마을 서쪽 끝엔 캠프 스탠리로 이어지는 문이 있다.좁은 골목·작은 상점은 서울의 이태원이나 해방촌을 떠올리게 한다. 구릉에 자리 잡은 마을은 수락산 도정봉과도 이어진다. 영어로 표기된 상점의 간판과 메뉴를 보건데 평소 미군 이외에 마을을 찾는 외지인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미군기지 이전 이후 급격한 쇠락기를 겪고 있는 마을은 마을 턱 밑까지 밀고 들어온 고산지구의 고층 아파트와 대비된다. 마을 능선에서 바라본 풍경이 초현실적이다. 60년대 풍경을 간직한 골목 사이로 비친 브랜드 아파트들은 서로 다른 2개의 사진을 합성한 것 같은 착각을 부른다.뺏벌의 유래는 배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설과 한 번 들어오면 발을 못 뺀다는 두 가지 뜻으로 전해지는데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뺏벌마을은 '빼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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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7)] 옛 미군 거리의 쉼터 '동두천 샬롬하우스' 지면기사
"DDC&ME, 아직 슬픔에 잠겨있는 거리. DDC&ME 밤마다 뛰쳐나왔던 길거리. 힘들게 자랐어 동두천이 뿌리"(폴로다레드·DDC&ME/Going Up)래퍼 폴로다레드는 동두천 출신이다. 그래서 랩에 동두천을 주제로 한 가사가 많다. DDC로 약칭한 동두천은 생활에 쪼들렸던 어린 시절을 상징하면서 래퍼로 성공가도를 달려 이제는 벗어난 고향, 높은 곳으로 향하는(Going Up) 출발점이다. 높은 곳과 반대인 낮은 지점, 밑바닥으로 DDC가 등장하면 묘한 설득력을 지닌다. 왜일까. 동두천 형성과 역사에 미군을 빼놓을 수 없다. 미군 주둔 시점은 현대 한국사에 가장 초라한 장면이다. 고향 마을에 밀려 들어온 이방인,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지촌, 음식과 복식으로 낯선 외래문화가 퍼져가는 현상. 뉴욕에 브롱스가 있다면 서울엔 이태원과 해방촌, 경기도엔 동두천이 있는 것이다. 이들 지역은 유사한 문화 상징 자본을 공유한다.정한아 소설 '리틀 시카고' 배경 장소한국전후 미군 주둔… 1969년 지어져선교·영어교육… 2019년 화재로 폐허미군이 평택으로 떠나며 일대 '유령화'인적 끊기고 기지 환경정화 문제 남아50년간 이곳 아이들 아픈 꿈 꾸었을 것 문학에서도 동두천은 같은 상징으로 쓰인다. 정한아의 소설 '리틀 시카고'(문학동네·2012년)는 미군이 드나드는 동두천 골목의 레스토랑·클럽·세탁소·교회·양복점·슈퍼 그리고 '샬롬하우스'를 다룬다. 그렇다. 샬롬하우스는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배경이 아니라 실재했던 장소다.샬롬하우스는 동두천시 생연동 510-2번지에 1969년 4월 10일 지어졌다. 동두천에는 한국전쟁 휴전 무렵부터 미군이 주둔했다. 그들이 평택으로 대량 이주하기 전까지 동두천은 말 그대로 미군도시였다. 실존하는 건물 샬롬하우스와 소설 '리틀 시카고'는 모두 미군이 만든 동두천과 미군이 떠난 동두천을 보여준다.샬롬하우스는 선교와 영어교육을 하는 기관으로 쓰였다. 붉은 벽돌 조적조로 4층짜리 건물인데 증·개축이 이어지며 2층과 4층 건물이 이어진 구조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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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6)] 폐허 위 쌓아올린 신앙 '오산감리교회·이천 양정교회' 지면기사
오산감리교회가 들어선 건 1904년 일이다. 미국 선교사 노블 밀러 목사가 수원지역을 순회하며 당시 오산리 442-2번 일대에 1904년부터 1905년에 걸쳐 교회를 개척했다고 전해진다.한국감리교회 초기 역사에 노블 밀러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선교사는 없다고 한다. 노블·밀러 선교사를 묶어 지칭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윌리엄 아더 노블과 룰라 아델리아 밀러는 19세기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했다. 노블 목사의 부인인 매티 윌콕스 노블 여사는 배재학당에서 서양음악을 가르친 최초 여교사라고 한다. 노블 목사는 현재 오산·화성·수원을 엮은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던 수원지역에서 활동하며 선교와 교육활동에 매진했다. 노블 부부는 조선에서 두 아들을 이질로 잃었다.룰라 밀러 선교사는 1907년 수원삼일여학교 교장을 지냈다. 삼일여학교는 현재의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구 매향여상)다. 수원시 매향동에 지어진 삼일여학교는 1902년 기독교 이념으로 건립됐다.1904년 초가로 지어진 '오산감리교회'일제시대 적벽돌로… 한국전쟁때 폭격1·4후퇴뒤 인민군 본부로 '기구한 운명'원조로 복구…현재도 오색시장 중심에노블·밀러 선교사에 의해 개척된 오산 최고(最古) 교회인 오산감리교회는 초기엔 초가(草家)로 지어졌다. 1907년 5월 3일의 일이다. 벽돌건물로 교회가 다시 건립된 건 1934년이다. 99㎡(30평) 가량 규모에 적벽돌로 지어진 교회는 한국전쟁 때까지 살아남았다. 1951년 1·4 후퇴 이후 인민군이 일대를 점령한 뒤론 인민군 본부로 쓰였다.교회에서 인민군 본부로 변한 기구한 운명에 적벽돌 건물은 폭격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후 1954년 7월 22일 오산리 844-7번지 일대에 198㎡(60평) 규모 현재의 돌예배당을 지었다. 조영행·조광현·이주찬·황달용이 대지를 기부했고 미군 물자와 복구비로 건립됐다고 전해진다.오산감리교회 돌예배당은 오산오색시장 한복판에 있다. 오색시장이라고 쓰인 정면 간판을 지나 20m 남짓 시장으로 이동하면 왼편에 예배당이 나타난다. 시장길은 아케이드 지붕으로 덮여 있고 교회 쪽은 지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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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5)] 피난민 안식처 '파주 장곡리 움집' 지면기사
제조공장이 늘어선 2차선 도로에서 고작 몇 십m 들어갔을까. 경차 한 대 지나가기 버거운 흙길 비탈에 위태롭게 집 한 채가 서 있다. 석회를 바른 벽 사이가 터져 나무와 흙으로 만든 내용물이 노출된 집. 슬레이트 지붕에 나무 기둥, 흙벽으로 구성된 오래된 목조 주택이었다. 70년을 살아남은 이 집은 '장곡리 움집'으로 불린다. '가옥'이 아닌 '움집'이라 명명한 데는 이유가 있다.얼핏 봐선 60년대 이후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슬레이트 지붕 가옥 같지만 가까이서 본 실상은 말 그대로 '움집'이었다. 선사시대 얼기설기 엮어 겨우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만 지어진 움집처럼 한국전쟁 피난민들은 수수깡, 아카시아 나무 등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겨우 지붕을 삼았다.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진 건 수십 년이 지난 뒤다.한때 140채 가량 존재했지만… 현재 6채만 남아 방치최근까지도 거주 흔적… 형체 알기 힘들정도로 훼손미군,이북서 내려온 사람들 파주 일대에 수용소 조성남쪽으로 가지 못한 피난민들 원조물품 활용해 지어마을 70년전 참상 간직… 인근에는 현대식 건물 즐비피난을 위한 움집이었지만 원형이나 장방형으로 구들까지 깔아 제법 가옥의 모습도 갖췄고, 뒤뜰엔 좁지만 마당까지 있다. 움집에 거주했던 이들은 대부분 인근 파주 장단면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라고 전해진다.북녘과 가까운 파주시 조리읍 장곡리에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이 직접 만들어 사용한 집이 아직까지 보존돼 있다는 건 신기한 사실이다. 실은 보존이 아닌 방치지만 말이다.140채 가량 존재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남아 있는 건 6채뿐. 그나마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 고작 1채에 불과하고 나머지 움집은 형체를 알기 힘들 정도로 훼손이 심했다. 모습을 유지한 움집에는 LPG 가스통이 설치돼 있어 근래까지 누군가 거주한 흔적이 보였다. 물론 지금은 허물어진 벽 파편과 비가 와 쓸려왔을 흙이며 나무가 쌓여 사람이 살기 적합해 보이진 않았다.장단면보다 남쪽지역인 장곡리로 피신한 피난민들은 미군이 원조한 나무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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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4)] 전쟁 속 피어난 희망, 가평고·남양고·고양고 지면기사
포격이 쏟아지는 한국전쟁, 그들은 내일을 준비했다. 학교가 문을 닫고 건물이 무너졌어도 천막 안에 옹기종기 모여 글을 배우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이를 본 주민들이, 군인들이 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탰고 그곳에서 희망이 시작됐다.美 40사단 장병 2불씩 모아 '가평 가이사 중·고'가평고로 이름 바꿔 현재까지… '역사관' 조성지금도 졸업식 참석·장학금 전달 등 교류 지속마을 사람들 흙·벽돌 날라 세운 '화성 남양고'옛 건물 행정동으로 사용… 곳곳에 과거 흔적보존은 잘 됐지만 설명 표지판 등 부재 아쉬움학생들 돌 나르고 美 공병대가 토대 '고양고'세월 지나 대강당만 남아… 市상징물로 지정"한국전 이후 교육시설 상황 확인 가치 높아" ■ '2달러의 기적', 가평고박상예 가평고 교장은 1980년대 가평중, 가평고를 졸업했다. 지난해 자신이 졸업한 모교의 교장으로 부임했는데, 신입생이 들어오면 꼭 '역사관'을 데려간다. "과거를 알아야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 박 교장의 철학이기 때문이다.한반도 정중앙에 위치해 한국전쟁 당시 가평군은 전략적 요충지로 꼽혔다. 그런 곳에 있던 가평중학원은 전쟁이 발발하자 무기한 휴교를 택했다. 그렇게 4년이 흐르고 가평중학원은 피난 천막 4개를 빌려 다시 문을 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학생들은 공부를 놓지 않았고 이를 본 미 40사단 조셉 프링글 크릴랜드는 학교를 세우겠다고 결정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 40사단 군인들이 2달러씩 모았고 그렇게 '가평 가이사 중학교, 고등학교'가 세워졌다. 건립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 40사단 장병 중 최초 전사자였던 케네스 카이사 주니어의 이름을 딴 것이다.지금은 이름 또한 가평고로 바뀌고 당시 세워졌던 건물 대신 다른 건물이 세워졌지만, 이 같은 역사를 가평고 '역사관'은 담고 있다. 가평고 설립 당시 사진부터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는 미 40사단과의 인연이 쌓여 있으며 한 졸업생은 최초 전사자였던 케네스 카이사 주니어 사진에 '당신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영원히 사랑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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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3)] 노르웨이 야전병원 '노르매시' 지면기사
2010년 동두천의 한 육군 부대로 전입한 한 군 관계자는 관할 훈련지 내에 방치된 한 '목조시설'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분명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시설처럼 보였지만, 무성히 자란 잡초에 둘러싸인 채 어떠한 문패도 없이 관리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발견한 시설이 6·25전쟁 당시 노르웨이 참전용사들과 파견 의료진들이 3년 동안 사용했던 야전병원 '노르매시'(NORMASH)라는 사실을 주민들을 통해 알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지구 반대편 노르웨이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달려온 이방인들의 피와 땀이 뒤섞인 유산이 어찌 이리 수십 년 동안 방치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당혹스러웠다. 곧장 그는 동두천시에 시설 관리와 보수, 문화재 지정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시는 당장 투입할 예산과 인력이 없다는 이유로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내놓았다. 이대로 노르매시가 지닌 역사·문화적 가치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결국 군인 본분을 이어가면서 틈틈이 직접 보존에 나서기 시작했다. 2010년, 훈련지 내 방치된 건물 발견당시 동두천시 관리 어렵다 답변에 나서홀로 전기공급·주소등록 등 보존 노력'노르매시' 1951년 민간 의료진이 개원전쟁상황서 군·일반인 포함 9만명 진료전후 남아 '국립중앙의료원' 건립 지원2월 노르웨이 국회의장단 등 현장 방문양국 우호 상징… '문패'마저 도둑맞아 "역사 담긴 문화유산 누군가는 지켜야" ■ '문패'도 도둑맞았던 노르매시, 한 군인에 의해 재탄생하다동두천시 하봉암동에 위치한 노르매시를 찾았다. '군사시설'이라 적힌 표지판과 철책선에 둘러싸인 노르매시 앞은 이날도 군 관계자가 지키고 있었다. 노르매시는 군 훈련장 안에 위치해 원래는 민간인의 출입이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군사 지역과 분리되도록 제작된 철제 울타리와 노르매시만 왕래 가능한 쪽문을 직접 만들면서 사람들이 보다 손쉽게 시설 견학을 할 수 있게 됐다. 13년 전 노르매시는 국가기관과 지자체에 방치돼 건물만 달랑 있었지만, 시설 청소부터 전기 공급, 주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