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추천하는 인천책

  •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6·끝)] 이설야 시인-문계봉 시집 '너무 늦은 연서'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6·끝)] 이설야 시인-문계봉 시집 '너무 늦은 연서' 지면기사

    내가 문계봉 시인의 시를 처음 만난 건, 인하대 뒷골목 지하 술집 솟대였다. 벽에 낙서처럼 시 몇 줄 쓰여 있었는데 함께 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문계봉 시인의 시라고 했다. 풍문으로만 듣던 시인의 시를 처음 보았는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슬프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시였다. 한참 후 1995년 제2회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시인이 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늘 바빴고 드문드문 발표한 시들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또 한참 후, 2017년 등단 22년 만에 출간한 첫 시집 '너무 늦은 연서'를 받아볼 수 있었다.너무 늦게 도착한 그의 연서(戀書)인, 첫 시집에는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상처들이 빼곡하게 들어 있다. 그는 우리가 통과해 온 거대 담론의 시대를 '그때 내 맘에도 / 많은 빛들이 살았'다고, '끝끝내 지키고 싶은'(너무 늦은 연서) 빛이자 빛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모두에게 잊힌 한 혁명가'를 생각하며 '무엇이 끝났고 또 / 무엇이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다시 잠 못 드는 밤에)지 묻고 있다. 첫 시는 '자화상-家系'로 시작한다. '소 힘줄 같은 고집과 / 힘줄의 탄력만큼이나 질긴 / 가난한 내력'은 그를 '삶의 게릴라', '운명과의 싸움꾼'으로 만들었다.2017년 등단후 22년만에 첫 시집고교 다니며 도시적 감수성 생겨문청시절 시인·평론가와 어울려 그는 1963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지만 돌 전에 인천으로 올라왔다. 줄곧 서구 석남동에서 살았는데 당시 그곳은 시골 마을이었다. 그가 도시적 감수성을 갖게 된 것은 제물포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다. 학교 담장을 넘으면 자유공원이 목전에 있었고, 비둘기집 아래로 인천항이 보였다. 차이나타운과 홍예문을 넘나들며 각국 조계지의 이국적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학교 주변에 펼쳐진 도시의 그림자와 이국 정서는 그의 내면으로 스며들었고, 시인 특유의 감수성을 만들어주었다. 그는 학교보다는 학교 밖을 배회하면서 성장통을 겪은 듯하다.정거장은 어김없이 차를 세웠다. 62번 버스는 재빠르게 나를 뱉어 냈고 나의 발은 자유공원

  •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5)] 왕지윤 인천보건고 교사-강화길 소설 '대불호텔의 유령'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5)] 왕지윤 인천보건고 교사-강화길 소설 '대불호텔의 유령' 지면기사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대불호텔 프런트직원으로 일하는 스무살 여성 고연주는, 지배인 차오에게 월세 오천환을 내며 자신을 두고 떠난 선교사들의 나라 미국으로 떠나려 한다. 월미도 폭격으로 가족을 잃고 당숙모와 지내던 지영현은, 자신이 부역자의 딸임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면서 대불호텔에 묵을 손님을 데려와 동갑내기 고연주를 돕는다. 사생아로 태어난 화교 청년 뢰이한은, 다른 곳에서 중화루를 이어갈 계획을 품고 냉대와 차별을 참아가며 중화루의 관리인 역할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오래된 저택에 대한 글을 준비하던 소설가 셜리 잭슨은 투숙객으로 대불호텔을 방문하고, 원한과 악의에 찬 보이지 않는 '존재'가 이 호텔을 사로잡고 있다며 두려움에 떤다. 1888년 세워진 최초의 호텔 배경'나'가 '박지운'에 듣는 액자 구성 강화길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대불호텔의 유령'은 2019년 '문학웹' 플랫폼에서 연재되었다가, 2021년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정식 출간되었다. 자신을 억누르고 짓밟아왔던 목소리로 인해 새로운 글을 쓰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소설가 '나'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박지운'으로부터 듣게 되는 대불호텔의 이야기가 액자 소설의 형태로 담겨져 있다. 대불호텔은 제물포항이라 불리던 개항장에 1888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었으나, 1899년 경인선 개통으로 쇠락해간다. 1918년에 청인들에게 매각되어 '중화루'라는 유명 요릿집으로 변모하였지만, 결국 1978년에 철거된 근대 건축물로 소설의 주요 공간적 배경을 이룬다. 책 속의 이야기들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으나 대부분 창작된 것이며 허구성이 강하다.역사소설의 외형을 지니면서도 유령이라는 존재를 위화감 없이 녹여낼 수 있었던 건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서술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보고 듣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혼란스럽게 묘사된다. 수많은 이야기를 창작하는 직업이나 정작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소설가 '나'는, 유년의 고향인 이리에서 자신을 고종 황제의 딸 '문용 옹주

  •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4)] 김윤환 서울연구원 연구원-'노동 환경 서민금융을 통한 살림공동체'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4)] 김윤환 서울연구원 연구원-'노동 환경 서민금융을 통한 살림공동체' 지면기사

    간혹 인터넷 커뮤니티를 살피다 보면, 90년대 아파트 단지에서의 삶을 추억하는 사진을 접할 때가 있다.이를테면, 다들 현관문을 열어둔 복도식 아파트, 가족들이 각기 외출하면 엘리베이터 출입구마다 한 분씩 계시는 경비아저씨에게 집 열쇠를 맡겨두는 풍경, 주차장의 차 사이에서 축구를 하는-당연히 주차한 차들이 공에 맞는 일이 비일비재한-초등학생들, 하교 후에 비어있는 나의 집 대신 친구 집에서 저녁까지 놀다가 친구 어머니에게 저녁밥을 얻어먹는 장면 등. 게시글 밑으로는 어떤 이들은 과거를 추억하고, 어떤 이들은 현재의 도시에서 상상하기 힘든 모습들에 놀라는 댓글들이 달리곤 한다.도시, 수십년새 빨라지고 넓어져수많은 사람·직업 '경쟁' 명목 도태이해득실 넘은 '당위의 세계' 눈길 도시의 삶은 수십 년 사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넓어졌다. 도시에서 접하는 콘텐츠와 서비스, 상품의 지리적인 범위의 한계가 없어졌고, 시간적 한계 또한 마찬가지다. 수십년 전 '세계화'는 수출할 수 있는 국가가 늘어나고 해외 기업의 간판을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정도의 감각이었다면, 현재의 '글로벌'은 나의 삶의 모든 시간을 항상 세계 어딘가에 연결시킬 수 있는 정도로 진화했다.개인이 글로벌과 직접 연결될수록 지역공동체는 사라지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지역공동체의 역할이 줄어들면, 글로벌 사회구조가 지역에 부여한 역할에 부합하지 않는 수많은 직업과 사람들이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때로는 이것을 '경쟁력 강화'라고 부르며 옹호한다. 1998년 이후, 우리는 인천에서도 노동과 개발 현장에서 수없이 많은 배제를 겪어왔음에도 때로는 '첨단'과 '미래'를 표상하는 슬로건 속에서, 때로는 앙등하는 아파트 가격을 바라보며 이 배제를 묵인했고, 때로는 배제되는 이들이 미래에 적합지 못해 도태되고 있다고 격하해왔다.국민국가와 공공이 시민 하나하나를 보듬는데 소홀했을 때, 때로는 신자유주의에 앞장서서 시민을 경제구조에서 밀어내는 데 동조했을 때, 종교는 비효율적일 수도 있는 방

  •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3)] 양진채 소설가-황석영 소설 '철도원 삼대'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3)] 양진채 소설가-황석영 소설 '철도원 삼대' 지면기사

    황석영 소설가의 '철도원 삼대'는 철도 노동을 전면으로 다룬 소설이다. 현재 고공농성 중인 이진오를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에 철도 정비소에서 일한 증조부 이백만, 역시 일제 강점기 철도학교를 졸업하고 철도 기관사가 된 조부 이일철, 해방 후 철도 기관사 교육을 받고 철도청에서 철도 기관사로 일한 이진오의 아버지 이지산까지 3대에 걸친 철도 노동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황석영 소설가'하면 떠올릴 수 있는 선 굵은 이야기의 힘과 인간 군상이 펼치는 다채로운 삶이 6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 속에도 녹아 있다. 이 삶은 묵직하게 노동운동의 흐름과 궤를 같이하며 흘러간다.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하지만 소설 속 어느 한 인물, 한 장면도 허투루 읽히지 않는다. 민중의 삶,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삶은 역사 한가운데에 이름 없이 묵묵하다.고공농성 이진오 중심으로 풀어다채로운 삶 600쪽 분량에 녹여 소설 속 주요 무대는 영등포와 인천이다. 이진오의 증조부인 이백만이 열세 살에 인천으로 일하러 왔고, 결혼한 아내는 주안댁으로 불린다. 인천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던 김삼용이 김근식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박헌영, 이재유, 김형선, 김단야 등 사회주의 운동가도 나온다. 그 당시의 중요 공간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소설을 읽다가 익숙한 지명이나 짐작 가는 곳을 만날 때마다 와락 반갑기도 하다.인천을 노동의 도시라고 말한다. 개항 이후 부두 노동자, 해안가 매립으로 조성된 공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사람, 80년대 퇴근 시간이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주안공단과 부평공단의 노동자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인천으로 왔다. 일은 고되고 임금은 열악했다. 공단 게시판에 나붙던 '○○사원 수시모집' 공고가 그걸 증명했다.쌀을 정미하던 정미공의 파업부터 한국 최초 여성지부장을 탄생시켰던 동일방직의 싸움, 뜨거운 80년대의 민주노조 건설의 열기 등 노동자들은 주체적 삶을 살기 위해 주먹을 높이 들기도 했다.소설의 시작도 이진오의 고공농성이다. 아파트 16층 높이의 굴뚝 위, 이

  •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2)] 이설야 시인-이가림 시집 '바람개비 별'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2)] 이설야 시인-이가림 시집 '바람개비 별' 지면기사

    이가림 시인의 마지막 시집 '바람개비 별'을 보다가 시 '아담 옷수선 가게'의 마지막 연에 마음이 멈췄다.그런데 오늘은하늘색 페인트칠 벗겨진 문짝에누런 자물쇠 하나입을 꼭 다문 채매달려 있다"당분간 문을 닫습니다"검은 리본의은박 종이에 싼 국화꽃 한 송이문고리에 비스듬히 꽂혀 있다오래전, 이가림 시인은 동네 수선집 앞에서 '검은 리본'과 '국화꽃 한 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뜻밖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슬픔은 그 깊이를 잴 수가 없다. 조문과 애도는 죽은 자와 산 자 모두를 위한 것이다. 조문과 애도를 표현하는 두 가지 상징은 검은 리본과 국화꽃 한 송이다. 그 두 단어 앞에서 나는 잠시 당혹스러웠다. 얼마 전 일어난 믿을 수 없는 10·29 참사 때문이다. 엄청난 인재에 정부는 책임지지도 반성하지도 않았고 희생자는 사망자가 되었으며 애도할 이름과 영정사진과 위패는 보이지 않았다. 더 해괴한 일은 검은 리본을 거꾸로 달라하고, 애도 기간마저 정해준 사실이다. 그 많은 혼령은 이름과 얼굴이 사라진 채 지금 어디에서 헤맬까. 세월호 참사를 겪은 청소년이 청년이 되어 다시 이태원 참사를 겪게 된, 이 반복된 비극에 대해 왜 언론은 진실의 자물쇠인 언어의 '입을 꼭 다문 채' 리본을 거꾸로 매달고 있는가. 왜 정부는 국민을 구조할 시간에 사라졌는가. 지금 국가는 있는가. 우리의 안녕을 묻고 또 물어도 대책 없이 위험한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가림 시인의 유고 시집 제목처럼 '잊혀질 권리'가 고인에게도 있겠지만, 억울한 죽음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입선인하대 조교수 되면서 인천 정착투병전 6번째 시집 '우현예술상' 이가림(1943~2015) 시인은 만주 열하(熱河)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주고등학교 시절 신석정, 김해강, 백양촌 선생의 영향을 받아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돌의 언어'로 가작에 입선했고,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빙하기'가 당선됐다. 첫 시집 '빙하기' 이후 \

  •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1)] 왕지윤 인천보건고 교사-김진초 外 '인천, 소설을 낳다'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1)] 왕지윤 인천보건고 교사-김진초 外 '인천, 소설을 낳다' 지면기사

    거처를 밝히지 않는 형의 흔적을 좇아 인천항에 내린 '나'는 인천항 갑문 코스라는 노선에 이끌려 시티투어버스에 오른다. 형과 함께 조합주택에 살게 된 어린 시절, 아버지는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던 노동자였다. 고무링으로 바지 밑단을 조이고 내복 바지를 껴입은 그는 그 속에 설탕을 숨겨 와 가족 앞에서 쏟아내곤 했다.형은 더럽다고 먹지 않았지만 '나'는 설탕의 단맛을 거부하지 못한다. '검은 설탕의 시간'의 '나'는 아버지와 형에 대한 기억들을 소환하며, 재개발로 인해 부두 기능을 상실한 옛 동네의 변모를 차창 너머로 목격한다. 12년을 넘게 살았던 곳이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떠나게 된 고향의 끈적거리는 기억들은, 형과 함께 살갗이 붉어지도록 마른 목욕을 하는 꿈처럼 씻겨지지 않는다.2015년 '세계 책의 수도' 선정 기념아홉 편의 단편이 실렸던 소설집여우재길 등 친숙한 공간 무대로다양한 인생 여정·애환 등 담아 '인천, 소설을 낳다'는 인천을 테마로 김진초, 이목연, 양진채, 구자인혜, 신미송, 정이수 등 6인의 여성 작가가 쓴 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유네스코는 매년 세계를 5개 권역으로 나누어 지역 도시 한 곳을 '세계 책의 수도'로 선정하고 있는데, 지난 2015년에 인천이 책의 도시로 선정된 것을 기념하고, 문화도시로서의 인천을 알리는 일환으로 발간됐다. 당시 책의 발문을 쓴 김윤식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는 여러 해 전 여성 작가들이 결성한 소설 모임 이름이 '소주 한 병'이었다는 후일담을 전하며, 그녀들의 '작명 센스'에 묻어나는 재치와 열정에 감동했음을 고백한다.책에 실린 작품 중 '검은 설탕의 시간', '2번 종점', '은합을 열다' 등 세 편이 개인 단행본 소설집의 표제작이 되었으니 각별한 애정이 담긴 작품들이라 보아도 좋겠다.오랫동안 머물러 친숙했지만, 이제는 낯설어진 곳으로 찾아오는 주인공들의 귀향(歸鄕)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장소와 그들이 만났던 누군가에게로 귀속된다. '너의 중력'의 주인공 현주는 지구에서 600㎞ 떨

  •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0)] 김윤환 서울연구원 연구원-인천민주화운동사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0)] 김윤환 서울연구원 연구원-인천민주화운동사 지면기사

    모든 단어는 시간이 흐르면서 의미가 변한다고 한다. 사전적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진다. '민주(民主)' 또한 그런 단어 중에 하나 아닐까 싶다.'민주'는 한때 권위주의적 독재와 군 출신 정권에 맞서는 정의의 표징이었으나, 지난 수년 사이 이 단어는 일부로부터 철 지난 단어로 인식되거나, 때로는 기성세대의 유연하지 못함을 비꼬는 단어로 전용되기도 하였다. 이런 변화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단어의 의미와 가치를 회복하는 일은 어렵다. 시간이 지날수록 단어의 의미를 체험한 사람들은 그 숫자도 기억의 밀도도 줄어들고, 그 자리는 그것을 피상적으로 접한 사람들로 채워지기 때문에.1950년대~1980년대 역사 정리5·3항쟁·동일방직 사건 재조명시대별 분류 후 지역사와 매칭 195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인천의 민주화운동 역사를 정리한 이 책은 저자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첩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짧게는 30년, 길게는 한 세기 가까이 이어진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개인의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고 더는 휘발되지 않도록 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수도'와 '정치'라는 역사 서술의 오랜 틀에서 벗어나서 지역을 대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역사를 다시 보는 근래의 흐름에 부합한다는 것이다.1부에서 4부까지는 시대별로 분류하여 민주화운동사를 지역사로 끌어들인다. 인천이 국가사에 중요한 무대로 등장한 5·3 항쟁과 동일방직 사건과 같은 시점 이외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대부분의 시간을 채운 사건과 사람들을 재조명한다. 5부에서는 노동, 학생, 여성, 문화, 교육, 빈민, 종교, 재야전선운동으로 구분해, 1부에서 4부까지의 통사를 각 부문의 역사로 다시 정리한다. 기나긴 세월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다 담는 것은 불가능하겠으나,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인천 민주화운동의 큰 맥락이 온전히 구축되고, 많은 분야의 사람과 사건들이 재조명된다. 20세기를 관통하는 한 지역의 민주화운동 역사를 집대성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집필의 목적을 충실히

  •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9)] 양진채 소설가-이원규의 '조봉암 평전-잃어버린 진보의 꿈'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9)] 양진채 소설가-이원규의 '조봉암 평전-잃어버린 진보의 꿈' 지면기사

    이원규 소설가는 인천의 대표적 원로작가이다. 인천 출신이면서 인천을 무대로 분단 문제에 천착한 작품으로 문단에 독보적 입지를 세웠는데, 인천이 북한과 접경지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인천이라는 장소성과 분단이라는 주제가 얼마큼 밀접한지 짐작이 가리라.그의 작품은 인천과 서해를 배경으로 분단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 장편소설 '황해'는 일제 강점기를 관통하는 서준혁이란 인물이 민중의 한 사람으로 어떻게 성장하고 불의에 앞장서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소래포구를 중심으로 분단의 아픔을 그린 단편소설 '포구의 황혼'에서 바다 한가운데서 이북의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려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 절규하면서도 끝내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던 아들의 모습은 몇 번을 읽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게다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은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런 작가가 십여 년 전부터 평전을 쓰기 시작했다.이원규 소설가는 방대한 자료와 고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소설적 요소를 더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평전을 써서 평전작가로서도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조봉암 평전' 역시 그런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무엇보다 인천에 대한 애정이 많은 작가가 인천 강화 출신의, 죽산 조봉암 선생의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깊은 애정을 가지고 다룬 작품이라 그 의미가 더 크다.강화 출신의 조봉암 일대기 다뤄방대한 자료·고증에 소설적 요소300여개 주석·100여장 귀한 사진 조봉암 선생이 한때 공산주의자였다는 이유로, 법원은 그가 주장한 '평화통일'에 간첩죄를 씌워 사형을 언도했다. 이름도 같이 땅속 깊이 묻혔다. 그의 이름이 다시 세상에 나온 건 2011년 초. 가족, 종친회, 인천 시민사회 등의 노력으로 대법원의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이후였다. 판결문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조봉암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건국에 참여했고 국회의원, 국회 부의장,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우리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임에도 잘못된 판결로 사형이 집행됐다. 재심 판결로 그 잘못을 바

  •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8)] 이설야 시인-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8)] 이설야 시인-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지면기사

    시 '눈물은 왜 짠가'와 동명의 산문집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함민복 시인은 강화도에 산다. 그는 1996년 우연히 강화도 마니산에 놀러 갔다가, 동막리 한 폐가를 월세 10만원에 얻어 살기 시작했다. 시멘트가 사방 벽이 되어 높이 올라가는 도시에서 떠나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흙'이 길을 내는 뻘밭을 품은 강화도에서 26년째 살고 있다.시인 함민복은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지독하게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월성의 원자력발전소에 취직해 4년 동안 근무했는데 이때 우울증을 얻었다고 한다. 문학청년의 꿈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1987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인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고, 1989년 7월 '21세기 전망' 동인 결성에 참여했다.이 시기 다양한 동인이 활동했는데. '한국 동인시 총서'(도서출판 둥지)가 나오기 시작한 것을 보더라도 그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1983년 '무크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이듬해 1984년 결성된 '시힘' 동인과 1989년 결성된 '21세기 전망' 동인은 서로 꾸준하게 교류해왔다. '시힘'은 시의 서정성을 구체적 일상이나 사회문제로 확장시켜 나갔다면, '21세기 전망'은 대중문화와 시의 결합을 실험했다. 두 동인은 각기 다양한 개성을 가졌지만, 지향점이나 정체성이 서로 스며들기도 했다. 함민복 시인의 동인 활동은 첫 시집 '우울氏의 一日'(1990, 세계사)과 두 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1993, 세계사)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함민복 시인은 세 번째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1996, 창비)를 출간할 즈음 강화로 왔는데, 삶의 거처를 옮긴 이후 시 세계가 '시힘' 동인의 정체성에 더 가깝게 변모했다고 볼 수 있다.이 세 번째 시집을 경계로 이전의 시는 초기시로, 이후의 시는 중기시(아직 진행형이지만)로 나눠볼 수 있겠다. 초기 시집 '우울氏의 一日'과 '자본

  •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7)] 왕지윤 인천보건고 교사-김중미 장편소설 '곁에 있다는 것'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7)] 왕지윤 인천보건고 교사-김중미 장편소설 '곁에 있다는 것' 지면기사

    인천 동구 만석동 마을 돌봄 공동체인 공부방 '기찻길옆작은학교' 아이들이, 8월에 개최된 춘천인형극제에서 아마추어 부문 대상을 받았다는 경인일보 기사(9월1일자 6면 보도=[현장르포] 춘천인형극제 대상 '기찻길옆작은학교' 만석동 아이들)를 최근 읽었다. 코로나19로 인해 2년 동안 운영이 중단된 상황에서 아이들이 느꼈던 답답했던 심정과 공연을 준비하며 삼촌이나 이모로 불리는 공부방 선생님들의 심정이 먹먹하게 전해져 왔다.김중미 장편소설 '곁에 있다는 것'은 2021년 3월 출간됐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1978년 조세희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기계도시 은강에서 빌려 왔다. 인천 동구 서쪽 바다를 바라보는 만석동이 중심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2000년에 출간된 작가의 대표작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떠올릴 수 있으나, 달라진 주제 의식을 담아내기 위해 분명한 거리 두기를 유지한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구도심 재생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오래된 서민들의 주거지가 상품으로 전시되는 현실을 개탄하고 여성노동자 운동의 산실이었던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의 힘겨운 투쟁을 소설적으로 복원한다.'은강'… 배경 동구 만석동 중심에서민들 주거지 상품·전시화 개탄동일방직 노동자 투쟁 소설적 복원 총 4부로 구성된 이야기에서 일인칭 시점의 목소리를 내는 중심인물은, 2016년에 열아홉 살이 된 여고 3학년 '지우' '강이' '여울'이다. 은강에서 나고 자란 배꼽 친구들이지만 오랫동안 살아온 동네와 곁에 있는 친구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어긋나 있다. 빌라에 사는 지우가 함께 어울리는 타인의 삶에 호기심이 많다면, 판자촌에서 사는 강이는 할머니와 외로이 지내며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아파트에 입주한 여울이는 빈곤한 동네를 내려다보며 수치심을 느낀다. 외할머니와 이모할머니의 삶을 소설로 쓰려는 지우가 변하지 않는 거리와 골목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면, 어릴 적 엄마를 잃은 강이는 남을 돕는 일로 상처받은 마음을 보상받고 싶어 하고, 교육대학교에 입학하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