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

  • [영상+] 서로를 위로한 '마주침'… 남겨진 세월을 위한 변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9·끝)] 일상속 추모

    [영상+] 서로를 위로한 '마주침'… 남겨진 세월을 위한 변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9·끝)] 일상속 추모 지면기사

    안산주민·유가족 목포기행 동행 "공원 반대하지 말걸" 오해 확인인천선 생존자 참여 작품 전시회"도움 보답해야" 봉사활동 지속 2018년 5월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향하는 관광버스 안은 적막감만 감돌았다. 고요한 버스의 탑승자는 안산 고잔동 주민들과 세월호 유가족 등 20여명이다. 이들은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선체를 보기 위해 함께 기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4시간 내내 함께 타고 가면서도 누구 하나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조용히 각자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거나 눈을 감았다.지난해 7월, 5년 전처럼 버스는 안산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달리고 있다.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출발지인 화랑유원지 주차장에서부터 유가족과 주민들은 서로를 반기며 인사를 나눴다. 버스 안에서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물으며 웃었다. 고잔동의 마을행사 일정이나 복지센터 프로그램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다.이들의 버스 여행은 '목포기행'. 주민들과 유가족 사이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 여행을 통해 주민들은 세월호를 두 눈으로 보고, 유가족들의 이야기도 직접 들었다. "봉안시설에는 가족이 아닌 희생학생의 유해만 들어온다"거나 "4·16생명안전공원 부지는 화랑유원지 전체가 아닌 일부에 들어선다"는 설명이다. 주민들은 소문으로 듣고 마음 속에 품었던 의문 대부분이 오해라는 것을 확인했다. 기행에 참가했던 한 주민은 "이런 줄 알았으면 화랑유원지 들어온다고 할 때 반대하지 말 걸 그랬다"라고 뒤늦은 마음을 표했다. 일반인 희생자가 중심인 인천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올해 2월 1일부터 15일까지 부평아트센터 갤러리꽃누리에서는 '그날의 사람들, 오늘의 이야기' 전시회가 열렸다.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이하·추모관)이 주최한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념전시회였다.세월호 생존자인 김병규씨를 포함한 제주시 생존자 7명,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희생자 가족 14명이 만든 작품 63점이 전시됐다.추모관은 개관 이후 지역사회와 호흡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했다. 안전포

  • [영상+] '일상 속 추모' 위해… 걸어가야 할 길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9·끝)]

    [영상+] '일상 속 추모' 위해… 걸어가야 할 길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9·끝)]

    2018년 5월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향하는 관광버스 안은 적막감만 감돌았다. 고요한 버스의 탑승자는 안산 고잔동 주민들과 세월호 유가족 등 20여명이다. 이들은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선체를 보기 위해 함께 기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4시간 내내 함께 타고 가면서도 누구 하나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조용히 각자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거나 눈을 감았다.지난해 7월, 5년 전처럼 버스는 안산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달리고 있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출발지인 화랑유원지 주차장에서부터 유가족과 주민들은 서로를 반기며 인사를 나눴다. 버스 안에서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물으며 웃었다. 고잔동의 마을행사 일정이나 복지센터 프로그램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다. 동네 곳곳에서 이뤄진 유가족과 주민들의 만남 이들의 버스 여행은 ‘목포기행’. 주민들과 유가족 사이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 여행을 통해 주민들은 세월호를 두 눈으로 보고, 유가족들의 이야기도 직접 들었다. ‘봉안시설에는 가족이 아닌 희생당한 아이들의 유해만 들어온다는 것’, ‘4·16생명안전공원 부지는 화랑유원지 전체가 아닌 일부라는 것’. 주민들은 소문으로 듣고 마음 속에 품었던 의문들이 대부분 오해라는 것을 확인했다. 기행에 참가했던 조은정 학생의 엄마 박정화씨는 “생명안전공원을 무조건 반대했던 주민들이 막상 세월호 선체를 보고 대화를 나누면 우리의 심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행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줄 알았으면 화랑유원지 들어온다고 할 때 반대하지 말 걸 그랬다. - 목포기행에 참가했던 한 주민 목포기행을 기획한 건 단원고등학교 정문에서 30m 떨어진 곳에 있는 ‘고잔문화복지센터’다. 센터는 이름을 하나 더 갖고 있다. 힐링센터 0416쉼과힘. 2014년 9월, 명성교회와 연세대 대학원 상담코칭센터, 선부사회복지관이 협업해 문을 열었다. 세 기관이 힘을 합한 데는 이유가 있다. ‘공동체 회복’. 세월호 참사의 가장 가까운 목격자이자 간접적 피해자인 지역 주민을

  • 참사 이후 새로운 시작… 공동체 회복하는 '희망의 마을'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9·끝)] 일상 속 추모

    참사 이후 새로운 시작… 공동체 회복하는 '희망의 마을'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9·끝)] 일상 속 추모 지면기사

    고잔문화복지센터 '목포기행' 기획 명성교회·연세대·선부복지관 협력유가족-주민 안정 프로그램 다양예산문제 어려움에도 필요성 제기목포기행을 기획한 건 단원고등학교 정문에서 30m 떨어진 곳에 있는 '고잔문화복지센터'다. 2014년 9월, 명성교회와 연세대 대학원 상담코칭센터, 선부사회복지관이 협업해 문을 열었다. 세 기관이 힘을 합한 데는 이유가 있다. '공동체 회복'. 세월호 참사의 가장 가까운 목격자이자 간접적 피해자인 지역 주민을 돕기 위해서다. 더 깊게 들어가면, 유가족과 지역주민 사이에 생겨난 갈등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다.이렇게 유가족과 지역주민들 간 접점을 만들려는 움직임은 안산 곳곳서 일어났다. 상록구 반월동에 거주하는 이연우씨는 참사 1년 후 지역아동센터서 열린 유가족 간담회에서 마르고 기력 없는 모습의 유가족을 만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반월동에 사는 '엄마'들과 함께 매달 한번씩 분향소에 밥을 지어 보냈다. 또 마을 축제, 자치회 행사마다 유가족을 위한 부스를 마련했다. 마을에서 공방 수업을 열면 416공방에 부탁해 유가족들을 강사로 초청했다.고잔동에는 마을걷기 프로그램 '같이걷자'가 운영 중이다. 시민들은 마을해설사와 함께 고잔복지센터·원고잔공원·단원고등학교·화랑유원지 등 고잔동 곳곳을 돌며 세월호참사로 인해 달라진 마을에 대해 듣는다. 눈에 띄는 건 마을 해설사다. 참사 직후 단원고에서 6개월 동안 급식봉사를 한 향미씨와 참사로 아이를 잃고 또 아이가 생존한 지인을 모두 아는 용정씨 등 고잔동 주민 6명이 마을해설사로 나섰다.■ 공동체 회복 시급한데 줄어드는 예산유가족과 주민들이 스스로 관계개선에 노력한 건 피해자 보상, 기억교실 이전 등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지역사회의 갈등이 격화되며 공동체 회복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안산시민의 심리안정과 공동체 회복을 국가의 책임으로 의무화한 '세월호피해자지원법'을 제정했고 안산시도 2017년부터 '공동체회복 프로그램(희망마을사업)'을 본격 시행했다.이런 노력 덕에 안산 내 마을공동체 사업은

  • 해외에선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나 - 홀로코스트 기록 '네개의 방'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8)]

    해외에선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나 - 홀로코스트 기록 '네개의 방'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8)] 지면기사

    역사는 반복된다는 서늘한 진실… '끝없는 증언'으로 새겼다 독일 정부 제안, 메모리얼 지하에 정보관바닥엔 희생자 일기·편지 등 이야기 가득4가지 공간 따라가며 공감 "가슴 미어져"애도 방명록에 한글로 "기억하겠습니다"2천710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지하의 정보관은 희생자의 이야기로 메워져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관람객에게 닿아 분노와 슬픔으로 표출되고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다짐이 된다."두세살 남짓 되는 어린 아이들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야외 캠프용 침대에 누워 끊임없이 울고 또 울고 비명을 지른다. '엄마, 엄마, 뭐라도 좀 먹고 싶어요'. 군인들은 끊임없이 총을 쏘고 그 총소리는 잠시나마 아이들을 침묵시킨다.""나는 그 옆에 쓰러졌고 그의 시체는 이미 뒤집혀 있었다. 목에 총을 맞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너도 그렇게 끝날 것이야'. 이제 죽음 속에서도 인내가 피어난다. 진흙과 섞인 피가 흘러 내 귀에서 마르고 있다."지난 14일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정보관을 찾은 관람객은 바닥에 있는 희생자의 일기와 편지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쪼그려 앉곤 했다. 곳곳에선 나지막이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지상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과는 사뭇 다른 무거운 분위기다.정보관은 유대인 학살의 역사를 소상히 서술하는 공간으로 시작해 희생자와 그 가족의 사적인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이어진다.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의 만행과 유대인 학살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관을 지나면, '차원의 방', '가족의 방', '이름의 방' ,'장소의 방'이라고 이름 붙여진 네 개의 방이 차례로 등장한다.관람객은 '차원의 방'의 손글씨 편지와 일기를 통해 희생자의 공포에 공감한다. '가족의 방'에서 소개되는 유대인 15가구의 해산·추방의 기록을 따라가며 안타까움은 극대화된다. '이름의 방'에서는 학대받은 유대인들의 이름·출생연도·사망연도가 동시에 네 개의 벽에 투사되며 그들의 짧은 일생을 내레이

  • 동성애자·집시·장애인 학살 잊지 않기 위해… 자랑스러운 건물옆 '수치 기념비'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8)]

    동성애자·집시·장애인 학살 잊지 않기 위해… 자랑스러운 건물옆 '수치 기념비'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8)] 지면기사

    국회의사당·베를린필·티어가르텐 공원 등일상속 받아들여져… 한국 '님비'와 달라"역사적 사건 대하는 방식 변화 고민해야"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주변에는 또 다른 추모 공간들도 곳곳에 있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길을 건너 국회의사당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학살된 집시를 위한 추모 공간'(사진)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베를린 필하모닉 건물 옆에는 '안락사 학살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가, 시민들이 조깅을 즐기는 티어가르텐 공원 안에는 '박해받은 동성애자를 위한 기념비'가 있다.지난 14일 베를린 곳곳에 있는 추모 공간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만큼 웅장한 규모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아무렇지도 않게 베를린 시민 일상의 공간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지나가다가도 들러 이들의 역사를 마주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있는 곳이다.독일의 추모문화는 한국과 달리 일상과 붙어 있다. 마치 '님비현상'처럼 추모 공간을 기피하는 한국과는 다르다. 독일은 2차대전 전범국가였지만,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반성하는 '기억 문화'가 가장 발달한 국가가 됐다.다만, 지금은 관광지로서도 추모 공간으로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되는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도 건립까지 시행착오가 있었다.우베 노이마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재단 이사는 기념관 건립 15주년 인터뷰에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도 '수치의 기념비'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결국 매년 거의 50만명 이상이 찾는 인기 있는 관광명소가 됐다"며 "이는 우리의 접근 방식이 완전히 틀리진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젊은이들과 미래 세대가 역사적 사건을 대하는 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과 맞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고안할 것이다. 출판물 또는 이벤트를 통해 젊은 세대를 만나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말했듯, 추모 공간의 형태가 국한될 필요는 없다. 세대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추모 공간의 의미가 공유돼야 한다는 것이다.세월호 참사 희생자 지상준군의 엄마 강지은씨는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추

  • "국가는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질문에…  시민의 뜻모아 '기억의 조각' 빚었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7)]

    "국가는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질문에… 시민의 뜻모아 '기억의 조각' 빚었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7)] 지면기사

    설립 과정 민간 주도… 정치권까지 합심10여년 시간 '정치적 논쟁' 좌초 위기도독일에 대한 이해 일부로서 의미 갖게돼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설립 과정에서 시민이 주도적으로 나서고, 정치권에서도 뜻을 모았다는 특징을 가진다.1988년 처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제안한 것은 저널리스트 레아 로쉬였다. 그는 역사가 에버하르트 야켈과 함께 시민단체 '퍼스펙티브 베를린(Perspektive Berlin)'의 요청을 받아 기념비 건립을 제안했다.당초 이들은 베를린 남부의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에 기념비를 건립할 계획이었다. 이후 헬무트 콜 총리가 아돌프 히틀러의 지하벙커가 있던 인근 부지 제공에 동의하면서 지금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베를린 한가운데에 자리잡게 된다.퍼스펙티브 베를린은 지식인과 시민단체의 서명을 모았고, 1999년 독일 연방의회는 기념비와 이를 관리할 재단을 설립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이후 건축 디자인 공모전을 통해 피터 아이젠만이 선정되는 등의 논의를 거쳐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2005년 5월 10일에 문을 열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69주년에 맞춰 개관했으며, 기념비 설립이 제안된 지 17년 만이었다.이 과정에서 눈여겨봐야할 점은 시민사회가 주도한 서명 운동과 시민 발의 결의안이다. 시민사회가 지식인들과 뜻을 모아 의견을 전달한 과정이 있었기에 독일 시민에게도 의미 있는 공간으로 탄생했다.물론,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또한 설립 과정에서 정치적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헬무트 콜 총리는 1994년 개최된 첫 공모전의 당선작을 반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기념비 건립 사업까지 좌초될 위기였다고 한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당시 상황을 두고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순탄치 않은 과정이었지만 시민사회가 합심해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완성됐고, 베를린의 일상에까지 스며들었다.베를린 투로대학(Touro College Berlin)의 유대인 연구 전공 스테판 렌슈테트 교수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의 건립 과정을 볼 때, 거의 모든 경우에 추모와 추모를

  • 독일 수도 한복판 우뚝 서있는 2710개의 비극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7)]

    독일 수도 한복판 우뚝 서있는 2710개의 비극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7)] 지면기사

    해외에선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나-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600만명 유대인 학살 비석 미로처럼 배치도심 위치 조성 일상 속 스며든 휴식공간'희생자 엄숙해야…' 통념 깨고 자유로움독일의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 회색빛 콘크리트 비석 2천710개가 줄을 지어 박혀있다. 파릇파릇한 초록잎과 선선한 봄바람이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 4월의 날씨와 대비되는 회색빛 풍경이다. 지난 14일 찾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주말을 맞아 관광객과 베를린 시민들로 붐볐다. 이들은 회색 비석을 가로질러 들어가며 서로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도, 사색에 잠기며 혼자 걷기도 했다. 미로같은 비석 사이에서 서로를 발견해 놀라는 이도 꽤 많았다. 꺄르르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얼핏 들린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의 비석 높이는 제각각이다. 0.2~4.7m까지 다양하다. 초입에는 성인 기준 종아리 정도밖에 오지 않는 낮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비석은 점점 크고 높아져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하는 정도가 된다. 지형 또한 특이하다. 마치 파도가 치는 듯 땅이 울퉁불퉁하다. 굴곡진 땅 위에서 웅장한 회색 비석에 둘러싸여 있자니, 답답하고 억눌리는 느낌까지 든다. 한 걸음 한 걸음 깊숙이 들어갈수록 마치 지하로 가라앉는 듯하다. 하지만 추모공간이라고 해서 엄숙하기만 한 분위기를 예상했다면 오산이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추모 공간의 통념을 깨고 베를린의 일상에 완벽히 스며들었다. 60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시민과 관광객들은 자유롭게 추모한다. 가장자리의 낮은 비석 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기도, 가족들과 빵과 음료를 나눠 먹기도, 삼삼오오 모여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비석 위에 올라가 뛰어다니는 등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별다른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이다.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베를린의 일상에 섞일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덕분이기도 하다. 베를린 대표 관광지인 브란덴부르크 문과 불과 1.2㎞, 국회의사당과도 1.5

  • 해외에선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나-히로시마의 추도시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6)]

    해외에선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나-히로시마의 추도시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6)] 지면기사

    고요 속의 기도… 참사를 마주할 용기는 평화를 향한 의지 평화기념공원내 추도관 자리잡아중심에는 희생자 추모 연못 조성사망자 상징한 벽돌 14만개 빼곡분위기 경건, 사진촬영조차 조심"온전히 기도할수 있는 공간 필요" 세월호 유족들 염원하는 곳 닮아8시 15분. 큰 부채꼴과 작은 부채꼴이 어긋난 모양의 연못은 원자폭탄이 투하된 시간을 나타낸다. 국립 히로시마 평화기념 희생자 추도관은 1945년 8월 6일 8시 15분에 멈춰있다.중심에 있는 연못은 원자폭탄의 폭심지를 상징하며, 물을 찾다가 죽어간 원폭사망자를 추모하기 위한 연못으로 희생자들에게 물을 바친다는 의미다.지난 12일 찾은 국립 히로시마 평화기념 희생자 추도관은 사진을 촬영하는 소리조차 추모객에게 방해될까 우려할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만 감돌았다.지상 1층에서 추도 공간인 지하로 내려가는 길엔 원폭이 투하된 시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가 상세히 적혀있다. 원폭이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발하면서 지표면 온도가 섭씨 4천도에 이르러 14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처참한 피해 상황과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메시지들이 벽면을 따라 쓰여져 있다.벽에서 천장을 떠받드는 12개의 기둥은 원폭의 희생이 있었던 슬픔과 현재의 연결을 의미한다. 기둥 앞에 나무 의자를 둬서 추모객들은 의자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도를 하거나 생각에 잠기곤 한다.국립 히로시마 평화기념 희생자 추도관은 지난 1994년에 제정된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지원에 관한 법률'에 기초해 조성됐다. 법안은 원자폭탄 투하 후 50년을 맞아 피폭자에 대한 보건, 의료 및 복지에 대한 종합적인 지원 대책을 마련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제정됐다.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원폭사망자 추모 시설을 빠르게 설치하도록 결정하고 피폭자와 사망자의 유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시설이 되도록 추도관을 만들었다. 추도관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설계한 단게 겐조가 설계해 곳곳에 디자인적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연못을 중심으로 벽면에는 피폭 후 거리의 모습이 생생하게 벽

  • '왜 원폭이 투하됐는가'… 자국민 희생시킨 침략국가의 반성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6)]

    '왜 원폭이 투하됐는가'… 자국민 희생시킨 침략국가의 반성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6)] 지면기사

    반핵 의지 담은 평화기념자료관 도시 파괴과정 3D 영상으로 생생히유품에는 피해자·기부자 이름 알려입구에 가장 최근 핵실험 날짜 표기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피해자들의 넋을 기리고 일본 국민들을 진정한 '치유'로 이끈 평화기념공원의 자료관은 원폭의 참상을 적극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지난 12일 방문한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 2층에 마련된 히로시마 원폭 투하 현장 재현 3D 전시관을 관람객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 원자폭탄의 참상2분 정도의 3D 영상에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한가운데 떨어진 원폭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는 과정을 CG로 합성해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영상과 함께 전시관엔 폭발음과 피해자들의 비명들이 섞여 재생돼 그 파괴력과 잔혹함을 더욱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3D 전시관을 빠져나오면 원폭 투하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의 전경이 이어진다. 흑백에 폐허가 된 도시, 오직 철근만 남은 건물, 모두 불타버린 나무들. 이날 이어지는 사진들을 보는 관람객들은 사진을 촬영하거나 잡담을 하는 대신 숨죽이며 그 참상을 지켜봤다. 자료관 곳곳에는 '왜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됐는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 소녀의 유품이 된 자전거와 더불어 누더기가 돼버린 피해자들의 옷가지, 그들이 착용한 장신구 등 원폭이 떨어진 날 일상을 보내던 히로시마 시민들의 실상이 그대로 보였다. 원폭의 피해는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다는 점도 강력히 경고되고 있었다. 3층 전시관에는 원폭 투하 이후 피폭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자료들이 이어졌다. 인체가 방사능에 노출돼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긴 소년, 팔과 다리가 썩어가 온종일 누워 고통 속에 노출된 한 청년. 특히 피폭에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사진 다수가 미성년 어린이들이었기 때문에 관람하는 이들 중 일부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 반성·다짐의 공간으로 활용되는 자료관자료관을 가득 메운 관람객 대부분은 미국, 유럽 등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적대적 관계였던 국적이다. 참사의 원인인 원자폭탄으로 무고하게 희생당한 시민들에 대한

  • [영상+] 폭심지옆 공원서 평온한 일상… 원폭 상흔이 평화의 상징으로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5)]

    [영상+] 폭심지옆 공원서 평온한 일상… 원폭 상흔이 평화의 상징으로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5)] 지면기사

    해외에선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나-일본 히로시마 에도시대부터 번화한 곳, 한순간 폐허정부 '특별법' 만들어 도시부흥 지원잔디밭·느티나무 사이… 시민들 휴식'순령' 희생자 위령비앞 관광객들 추모강제동원 피해자 등 한국인 위령비도기념공원 인근에 참상 알리는 미술관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의 참상을 알리는 원폭돔 너머에 있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엔 평온함만이 맴돌았다.푸른 잔디밭과 느티나무들 사이로 고등학생 무리가 자전거 벨소리를 울리며 달리고, 시민들은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피크닉을 즐긴다.지난 12일 찾은 평화기념공원엔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는 시민들과 희생된 영혼의 평화로운 휴식을 기리는 상징들도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종이학을 두손 높이 들고 있는 어린이 동상. 두 남녀가 아이를 안고 기도하고 있는 기념비.'순령'이라고 적힌 위령비 앞에서도 관광객들은 생수병을 올려두고 두손모아 기도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린다. 원폭이 투하됐을 때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모든 사람들이 물을 찾았다는 이유에서 사람들은 위령비 앞에 생수병을 올려둔다.평화에 깃댄 공원은 시민의 염원, 지자체의 의지, 정부의 지원으로 일상 속의 추모공간이 된 동시에 도시 재건의 발판이 됐다.■ 도시 재건의 상징이 된 평화공원1945년 8월 6일 8시 15분, 지금의 평화기념공원 위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하고 히로시마 일대는 폐허가 됐다. 공원이 있는 자리는 에도 시대부터 1920년대까지 히로시마의 번화가였다.그로부터 4년 뒤인 1949년 8월 6일 일본 정부는 히로시마평화기념도시건설법을 특별법으로 제정해 히로시마의 재건을 위해서 국가 예산을 투입했다. 특별법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주민투표를 무조건 진행해야 하는데 찬성이 90% 이상으로 도시 재건에 온 히로시마 시민의 염원이 담겨있었다.당시 히로시마는 특별법으로 도시 재건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학예사 코야마 료는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에 히로시마시에서 자체적으로 부흥도시계획을 추진했는데 재정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별법 없이는 추진이 안될 정도로 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