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 딸기를 찾아서·(3·끝)] 효율성 높인 쎄슬프라이머스 '스마트팜'

    [수원 딸기를 찾아서·(3·끝)] 효율성 높인 쎄슬프라이머스 '스마트팜' 지면기사

    지나가던 시민들의 발길이 멈춘 자리, 벽 틈새로 빛이 새어나온다. 층층이 심어진 딸기가 빨갛게 영글었다. 알알이 맺힌 딸기 사이로 핀 꽃에 벌이 앉기도 한다. 수원 광교 아브뉴프랑 한복판에 마련된 쎄슬프라이머스의 스마트 팜이다.쎄슬프라이머스는 호반그룹 산하 액셀러레이터 법인 '플랜에이치벤처스'의 1호 투자기업이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2016년에 창업한 이관호 쎄슬프라이머스 대표는 당초 스마트 팜에 필요한 제어 장비와 시설을 개발하기 위해 농업 분야를 공부하다가, 직접 스마트 팜에 뛰어들게 됐다. 충남 아산에서 엽채소를 기르는 스마트 팜을 운영하던 중 딸기에 눈을 돌렸다. 2019년 무렵부터 아산 스마트 팜에서 딸기를 재배하다, 아예 딸기의 주 생산지 중 한 곳인 전남 담양에 컨테이너 형태의 스마트 팜을 만들어 시도해보기도 했다. 광교 내 호반 산하법인 1호 투자기업80㎡ 규모로 일반 500㎡ 규모 수확자동으로 적정량 물 공급·온도 설정이관호 대표, 판교·광명 등도 계획그러다 호반의 손을 잡게 됐다. 호반건설이 만든 아브뉴프랑 광교점에 '스마트한 딸기 농장'이 들어선 이유다. 도심에 이렇게 딸기 스마트 팜이 조성된 것은 국내에서 처음이다.아브뉴프랑 광교점 내 딸기 스마트 팜은 80㎡ 정도다. 1대당 168주가 들어갈 수 있는 재배대가 모두 18개 있다. 3천주 가량의 딸기가 이곳에 심어진 것이다. 하루에 10㎏ 가까이 수확할 수 있는 정도인데, 일반 농장이었으면 땅이 500㎡ 가까이 필요했을 규모다. 80%는 설향, 20%는 홍희라는 대형과를 재배 중이다. 작은 공간 안에는 쎄슬프라이머스만의 기술이 집약돼있다. 특허 출원을 하기도 했다. 딸기는 온도와 습도 등에 민감한 작물이라 농사에 실패할 확률도 높은데, 이곳에선 정해진 시간에 정량의 물이 공급되고 온도도 적정하게 맞춰진다. LED 기기에선 딸기 생육에 적합한 양과 파장대를 맞춰 빛을 공급한다. 농약을 쓰지 않고, 수분을 위해 벌도 함께 키우고 있다. 아직은 사람이 딸기를 수확하지만, 다음 스마트 팜에는 카메라가 딸기 위치를 인지해

  • [수원 딸기를 찾아서·(2)] 대학 1호의 꽃은 저물지 않았다

    [수원 딸기를 찾아서·(2)] 대학 1호의 꽃은 저물지 않았다 지면기사

    '철쭉꽃 딸기꽃이 초원에 피면은 / 타네요 수원처녀 가슴이 타네요.'가수 이미자의 '수원처녀'는 1972년 수원시가 시 노래를 공모했을 때 당선된 곡이다. 노래 첫 소절부터 딸기꽃이 등장한다. 당시 수원이 딸기의 도시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한국의식주생활사전'에선 딸기에 대해 "1960년대에는 서울의 한남동, 불광동, 구파발, 태릉과 경기도 수원 딸기가 유명했다. 국산 품종은 1965년 최초로 '대학1호'가 수원에서 재배됐다" "딸기철이면 딸기밭으로 나들이 가던 '딸기놀이' 풍속은 1960~1970년대에 수원의 푸른지대 같은 딸기밭에서 성행했다. 딸기요리강습회가 열리거나 대학생들의 딸기밭 미팅인 '딸기팅'도 이뤄지고, 주말 레저 붐이 될 정도였다"고 서술하고 있다.1960~1970년대 요리강습회 등 열려푸른지대만 21만여㎡ 이르러 '성황''외래객 15만명' 경인일보 보도도 2012년 수원문화원이 펴낸 책 '수원을 아시나요'는 당시 딸기 농사가 성행했던 수원의 모습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당시 수원이 '딸기의 도시'가 된 것은 서울대 농과대학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낸 딸기 품종인 '대학1호'의 영향이 컸다. '수원을 아시나요'에 따르면 당시 서둔동 일원 푸른지대 밭의 주인이었던 박철준씨는 대학1호 품종을 처음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후 딸기 농사가 확대되면서 당시 푸른지대 딸기 밭만 21만여㎡에 이를 정도였다. 노송지대와 매탄동, 원천동 등을 넘어 안양까지 딸기 농사가 뻗어 나갔다. 지금은 딸기가 겨울 과일이 됐지만, '대학1호'는 5월 중순쯤 출하됐다. 5~6월에는 딸기를 맛보기 위해 주말마다 수원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데이트 장소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1967년 경인일보(당시 인천신문)는 '작년도에 딸기를 즐기려고 찾아온 외래객이 15만명 정도였고, 딸기와 포도의 매상고도 489만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그러다 1980년대 비닐하우스 보급이 증가하면서 딸기는 시설재배로 전환됐다. 생산지가 전국적으

  • [수원 딸기를 찾아서·(1)] '기쁨으로 수확하는' 양재철 행복농원 대표

    [수원 딸기를 찾아서·(1)] '기쁨으로 수확하는' 양재철 행복농원 대표 지면기사

    한때 수원은 딸기의 고장이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수원 노송지대, 푸른지대 일대는 딸기밭 일색이었고 봄철 딸기 맛을 보기 위해 수원을 찾는 발길이 이어졌었다. 첫 국산 딸기 품종인 '대학 1호'가 만들어진 곳도 수원이다. 지금은 '대학 1호'보다 더 달고 단단한 국산 딸기 품종이 다수 탄생했고 주 생산지 역시 충남과 전남, 경남 등으로 옮겨갔다. 딸기 대표 도시라는 명성은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딸기 꽃은 피고 있다. 세 편에 걸쳐 수원 딸기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명한다. → 편집자주수원의 경계를 조금 넘으니 그의 농장이 있었다. 1천155㎡ 남짓한 땅의 상당부분을 비닐하우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하우스에 들어가자 딸기 향이 났다. 베드 시설을 통해 수경재배를 하는 일반 농장들과 달리 딸기는 줄줄이 흙에 심어져 있었다. "이건 금실이고, 이쪽은 고슬이라고 신 품종이에요. 생긴 게 조금 다르죠?" 알알이 맺힌 딸기를 수확하는 양재철(73) 행복농원 대표의 손놀림에 기쁨이 묻어있었다. 양 대표는 "지난해에 딸기 농사가 전반적으로 잘 안 됐었다. 올 초에 딸기 값이 치솟지 않았나. 우리도 3분의2가 죽었었다. 심을 맛이 도저히 안 나더라. 그래서 그만두려고 했었는데, 다시 마음을 잡고 한 게 이 정도"라고 말했다. 지난해 농사 실패에도 마음 다잡아수원농협서 유해충 천적농법 지원 청년 시절 4H 운동 등 농촌 근대화 운동에 매진하기도 했지만, 청춘의 대부분은 기업에서 보냈다. 누구보다 성실한 직장인이었지만 1974년 무렵 수원에 있던 직장 동료 아버지의 딸기밭에 갔던 순간이 왜인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은퇴 후 사회복지사 공부에 전념하다 한국농수산대학을 찾은 것도, 언젠가는 딸기 농사를 짓고 싶다는 젊은 시절 꿈이 한몫을 했다. 농산물 가공, 도·농 교류, 친환경 농법 등 다양한 공부를 거쳐 딸기 부문만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서 보유하고 있던 농장 한쪽에 딸기를 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빨간 딸기가 맺힌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