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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과 서해를 뱃길로 연결하려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각 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운송하던 조운(漕運) 항로인 염하는 폭이 좁은 데다 만조 때만 운항이 가능했고, 손돌목은 '배들의 무덤'이라 불릴 만큼 험했다. 안전한 조운항로가 필요했을 법하다. 고려 고종 때 인천 가좌동 부근 해안~원통현~굴포천~한강을 연결하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운하를 시도했다. 하지만 ...
강희
2024-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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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와 조선왕조실록, 훈몽자회, 호구총수, 조선지지자료 등을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번 책을 펴냈다고 설명했다.특히 계양산이 '계수나무와 회양나무가 많아 생긴 이름'이라거나 손돌목이 '손돌이라는 이름을 가진 뱃사공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식의 여러 잘못된 통설을 바로 잡았다고 강조했다. 이 책은 협의회 사무실에서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 협의회 홈페이지에도 게재될 ...
이현준
202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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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국란 때에도 인천은 항상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인천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략해 강화도를 점령·약탈한 병인양요(1866년)와 조선과 미군 간 강화도 손돌목 전투로 시작된 신미양요(1871년)가 치러졌던 공간입니다.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904년) 또한 인천이 핵심 지역이었습니다.한국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1950년)은 인천의 팔미도 ...
이현준
202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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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구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점도 걸림돌로 작용해 백지화됐다.이후 김포시는 휴전 이래 한 번도 민간선박이 드나든 적 없는 염하수로 항행을 통일부에 역제안했다. 이곳도 급류와 관련된 설화가 얽힌 손돌목 구간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70년간 사례가 없던 '강화대교 북상' 자체가 모험으로 받아들여져 행사를 확정하기까지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실제로 지난 13일 이인영 통일부 장관과 정하영 ...
김우성
20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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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미도 사이에 있는 물치도는 '강화해협의 거센 조류를 치받는 섬'이라고 해 지어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신미양요 때 미국 군함 5척이 물치도 앞에 정박한 뒤 조류가 세기로 유명한 강화 '손돌목'을 지나 강화도를 공격하기도 했다.해방 이후 물치도는 여러 차례 소유권 이전을 거치면서 유원지 개발이 추진됐으나 모두 무산됐다. 최근까지 진성토건 소유였다가 지난 2월 법원 경매를 통해 (주)굿프렌드가 ...
김민재
2020-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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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의 대외 요충지였다. 조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1690~1756)이 쓴 '택리지' 경기도 강화부 편에는 "우리 왕조에 들어서는 삼남의 조세를 실은 배들이 모두 손돌목을 지나서 서울로 올라오므로, 바닷길의 요충이라며 유수관을 두어 지키게 했다. 또 (강화도) 동남쪽 건너편에 있는 영종도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고 첨사를 두어 지키게 했다"고 나와 ...
김민재
20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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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보관은 "설화의 예술·역사적 가치가 높아지도록 더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관리해 나가겠다"고 말했다.김포/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김포시가 지역 설화를 주제로 한 온라인 사진전을 마련했다. 사진은 김포와 강화 사이에 좁은 물목인 '손돌목' 지명의 유래가 된 손돌공을 기리고자 대곶면 덕포진에 위치한 묘소에서 거행되고 있는 진혼제. /김포시 제공
김우성
201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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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령·약탈한 병인양요가 있었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 조선이 서구 열강과 한반도에서 대결한 첫 전쟁이다. 1871년에는 조선과 미군이 강화도 앞바다에서 역사상 첫 교전을 벌인 강화도 손돌목 전투로 시작된 신미양요가 있었다.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 또한 인천이 핵심 지역이었다. 특히 러일전쟁 당시에는 러시아 함대와 일본 함대가 인천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였다.1950년 ...
김성호
2018-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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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그때 목적을 달리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마다 한반도의 운명은 춤을 추었다.미군의 첫 한반도 상륙의 목적은 '침략'이었다. 1871년 4월 14일(음력)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손돌목 해역으로 들어온 미군 함대와 조선군이 교전을 벌였다. 열흘 뒤인 4월 23일, 미군은 군함과 최정예 해병대를 이끌고 초지진 상륙을 시도했고, 덕진진과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했다. 미군이 강화도에 ...
박경호
201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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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안했다.인천시는 개항기 문화유산, 인천 인물, 관광 명소 등에 대한 스토리텔링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홍보 목적으로 책자를 발행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김 연구위원은 '손돌목 이야기' '임경업 장군 전설' 등 역사적 사실이나 설화를 조사해 스토리텔링하고, 이를 장소와 연계해 문화 콘텐츠로 개발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특히 인천은 섬·해양에 관련된 이야기 ...
목동훈
201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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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혜'라는 두 글자였다. 비문을 훼손한 이는 도대체 무슨 의도였을까.광성보의 외곽 초소 겸 포대인 용두돈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선 조선군과 미 함대의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손돌목' 해역이 한눈에 펼쳐진다. 광성보 앞바다는 물살이 거세고 암초가 많기로 유명하다. 고려 시대 뱃사공인 손돌이 강화도로 피난을 오는 임금을 배에 태우고 바다를 건너가다 거센 물살 때문에 임금을 ...
임승재
201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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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포진의 특별한 지형으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뱃사공 손돌의 넋을 기리기 위해 김포문화원이 매년 음력 10월20일 개최한다.김포 초지대교 인근 굽이를 돌며 물살이 빨라지는 여울목인 '손돌목'은 손돌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곳은 음력 10월 20일을 전후해 바람이 거세게 불고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데 '손돌바람' '손돌추위'라고 한다. 손돌의 억울한 죽음과 연관시켜 민중들이 ...
김환기
201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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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류교역 루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해저 유물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기만은 고대로부터 왕래가 빈번한 것 외에 전쟁과 전투가 일어났던 전장이었으며, 해로가 강화도의 손돌목이라든가 백령도 인당수와 같은 거센 물살이 흐르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해저유물 발굴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정부가 2015년에 태안에 서해수중유물박물관과 해양문화재연구소 분소 설치를 추진하고 ...
경인일보
201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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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뤄지며 부평구청 사거리로 출발점이 바뀌었다.이어 부평구~부천시~경기도 김포시 신곡동으로 물길이 이어지고 있다.굴포천은 조선 중종 때 삼남 지방에서 곡물을 싣고 바다로 이동하는 배가 강화 손돌목에서 뒤집히는 경우가 많아, 이 보다 안전한 운반로를 찾기 위해 만든 하천이다.더불어 조세 운송수단인 해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굴착 작업이 시도됐지만 기술 한계로 완공되지는 못했다.인천에서 가장 ...
박석진
2013-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