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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 심포지엄에서 토론자로 나선 최태육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장은 지역 피해를 정리했다.
최 소장은 “1950년 8월18일 이후 덕적도와 영흥도에 이르는 섬의 거주민 학살, 월미도 네이팜탄 투하, 월미도·송현동·송림동 등 인천 일대 무차별 포격 등 적어도 인천상륙작전은 인천 인근 섬과 시내 주민들에게는 공포와 상처였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월미도 주민들은 터전을 잃고 현재까지도 ...
박경호
202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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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하기 쉽고, 화순 모후산, 곡성 통명산 등으로 이동하기에도 용이했다.
또한 화순은 화순 탄광 노동자들로 조직된 좌익 세력이 강했으며, 1946년 화순 탄광 노동자 봉기 이후 미 군정의 ... 1951년 11월에서 1952년 2월 사이에는 미군 폭격기를 동원해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네이팜탄(소이탄)을 투하해 백아산 일대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빨치산은 폭격기 1대를 추락시킬 ...
유연재
2023-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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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묻고, 더 늦기 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월미도 실향민 상당수는 80대 이상 고령이다.
미군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닷새 전부터 상륙지점인 월미도에 네이팜탄 등 폭격을 퍼부었다. 이 과정에서 100명 이상의 월미도 주민이 희생됐다. 섬에서 도망쳐 살아남은 주민들은 월미도에 미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1971년 미군 부대가 ...
박경호
202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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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가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며칠 전 월미도 일대 공습에서 대대적으로 퍼부은 화염 무기 '네이팜(Napalm)탄'의 위력을 보여준다. 집에 난 불을 꺼야 할 집주인이 사진 속에서 보이지 않는 ...
전쟁역사가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는 '폭격의 역사'(2015·어문학사)에서 “도시 소이탄(네이팜탄) 공격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전시 생산을 지탱하는 노동력 그 자체의 직접적인 파괴”라며 ...
박경호
202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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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으로 인한 민간인들의 사망과 부상, 실종은 99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유엔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인천 월미도 일대에서 희생된 100여명의 마을 주민은 인천상륙작전의 기념비적 승전에 ... 소위가 백암산 계곡에서 봤던 돌무덤과 이끼 낀 나무비(碑)를 떠올리며 만든 가곡 '비목'의 탄생지이다.
백암산은 1953년 6월부터 정전협정이 이뤄진 7월 사이에 벌어진 금성 전투의 핵심 ...
박경호
202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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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하고 달래주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렸다”며 “매듭을 푸는 과정이 시작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한국전쟁 초반 전세를 역전한 인천상륙작전 닷새 전 미군은 사전 정지작업을 위해 상륙지 월미도에 네이팜탄을 퍼부었다. 주민 100여 명이 희생됐고, 마을과 숲이 완전히 파괴됐다.
이후 월미도가 군사기지가 되면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고향까지 잃었다. 주민들이 말한 '매듭 풀기'는 진실화해위원회가 ...
박경호
202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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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유공자 추서는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
인천상륙작전을 닷새 앞둔 1950년 9월10일 미군은 상륙 전 사전 정지작업을 위해 월미도 일대를 대량 살상 무기인 '네이팜탄'으로 폭격했다. 월미도 주민 100여명이 미군 폭격으로 희생됐고, 이후 월미도가 군사기지로 쓰이면서 원주민들은 고향을 잃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이 사건을 진실로 규명하고 ...
박경호
202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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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한다는 목적도 있다.
미군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닷새 앞두고 상륙 전 사전정지작업을 위해 월미도 일대를 폭격했다. 이때 대량 살상 무기인 '네이팜탄'으로 월미도 주민 100여명이 희생됐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이면에 가려졌던 월미도 폭격 피해는 2008년 정부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상을 규명하면서 비로소 알려지게 됐다. ...
박경호
202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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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13일 새벽 5시, 월미도 상공에 굉음과 함께 유엔군의 공군기 1개 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하늘에서 기름통과 네이팜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어떤 이는 새벽잠에 빠져 있다가 고스란히 타죽었고 잠에서 깬 이들은 속옷 차림으로 도망갈 곳을 찾았다. 비행기가 사람만 보이면 기총사격을 해대는 통에 갯벌에서 ...
임성훈
2019-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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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 보수진영 규탄 회견
시의회, 내일 본회의서 결론
인천상륙작전 때 미군 폭격으로 집을 잃은 인천 월미도 원주민에게 생활안정자금을 주도록 한 인천시 조례가 이념 논쟁(3월 25일자 ... 무고한 희생을 입은 사람이 참 많이 있지만, 월미도 사건은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네이팜탄을 퍼붓고 피난민에게 기총소사까지 벌인 잔혹한 사건으로 본질이 다르다”며 “이후 미군이 집터를 ...
김민재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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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8년 조사결과를 보면, 1950년 9월 10일 월미도 마을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으로 주민들이 집단 희생되었다. 폭격에 나선 것은 미 해병 항공기들이었다. 항공기들은 95개의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 지역에 투하하고 기총소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섬 동쪽의 건물, 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희생자가 1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
경인일보
2019-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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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세를 역전했다. 구국의 상륙작전 성공에는 인천의 희생이 뒤따랐다.
아군과 적군의 포격전으로 인천 도심은 초토화됐다. 미군이 상륙 전 사전정지작업을 위해 월미도에 퍼부은 대량살상무기인 '네이팜탄'으로 월미도 주민 100여 명이 숨지거나 크게 다쳤다. 인천항 등 주요 도시기반시설과 수많은 민가가 폭격을 맞아 박살이 났고, 산은 깎이고 벌거숭이가 됐다.
/박경호기자 pkhh@...
박경호
2017-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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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도 모자이크 처리 없이 날것 그대로 담긴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진에는 “1965. 10. 28. 수색중대 전방 10m까지 전급하여 사살된 베트콩 2명”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또 네이팜(Napalm)탄의 공중폭격으로 정글과 마을이 불타는 장면, 헐벗은 전쟁 난민들의 사진은 전쟁의 참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밖에 1960년대 전쟁 속 베트남의 일상과 문화를 엿볼 ...
김민재
201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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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다. 중구 자유공원에는 '보혁 갈등의 상징'인 맥아더 동상이 있다.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강행하기 며칠 전부터 인천 월미도 일대에 네이팜탄 등으로 맹폭을 가했다. 이때의 폭격으로 월미도에 살던 주민 100여 명이 희생됐고, 상당수 주민이 터전을 잃기도 했다. 당시 월미산의 높이가 낮아질 정도로 월미도는 쑥대밭이 됐는데, 그 ...
박경호
2017-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