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과 서해를 뱃길로 연결하려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각 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운송하던 조운(漕運) 항로인 염하는 폭이 좁은 데다 만조 때만 운항이 가능했고, 손돌목은 '배들의 무덤'이라 불릴 만큼 험했다. 안전한 조운항로가 필요했을 법하다. 고려 고종 때 인천 가좌동 부근 해안~원통현~굴포천~한강을 연결하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운하를 시도했다. 하지만 ...
강희 2024-09-27
... 삼국사기와 조선왕조실록, 훈몽자회, 호구총수, 조선지지자료 등을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번 책을 펴냈다고 설명했다.특히 계양산이 '계수나무와 회양나무가 많아 생긴 이름'이라거나 손돌목이 '손돌이라는 이름을 가진 뱃사공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식의 여러 잘못된 통설을 바로 잡았다고 강조했다. 이 책은 협의회 사무실에서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 협의회 홈페이지에도 게재될 ...
이현준 2021-12-01
... 등 국란 때에도 인천은 항상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인천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략해 강화도를 점령·약탈한 병인양요(1866년)와 조선과 미군 간 강화도 손돌목 전투로 시작된 신미양요(1871년)가 치러졌던 공간입니다.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904년) 또한 인천이 핵심 지역이었습니다.한국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1950년)은 인천의 팔미도 ...
이현준 2021-10-23
... 포구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점도 걸림돌로 작용해 백지화됐다.이후 김포시는 휴전 이래 한 번도 민간선박이 드나든 적 없는 염하수로 항행을 통일부에 역제안했다. 이곳도 급류와 관련된 설화가 얽힌 손돌목 구간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70년간 사례가 없던 '강화대교 북상' 자체가 모험으로 받아들여져 행사를 확정하기까지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실제로 지난 13일 이인영 통일부 장관과 정하영 ...
김우성 2021-10-15
... 월미도 사이에 있는 물치도는 '강화해협의 거센 조류를 치받는 섬'이라고 해 지어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신미양요 때 미국 군함 5척이 물치도 앞에 정박한 뒤 조류가 세기로 유명한 강화 '손돌목'을 지나 강화도를 공격하기도 했다.해방 이후 물치도는 여러 차례 소유권 이전을 거치면서 유원지 개발이 추진됐으나 모두 무산됐다. 최근까지 진성토건 소유였다가 지난 2월 법원 경매를 통해 (주)굿프렌드가 ...
김민재 2020-05-22
...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의 대외 요충지였다. 조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1690~1756)이 쓴 '택리지' 경기도 강화부 편에는 "우리 왕조에 들어서는 삼남의 조세를 실은 배들이 모두 손돌목을 지나서 서울로 올라오므로, 바닷길의 요충이라며 유수관을 두어 지키게 했다. 또 (강화도) 동남쪽 건너편에 있는 영종도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고 첨사를 두어 지키게 했다"고 나와 ...
김민재 2020-03-05
2024-09-27 14면
2021-12-01 11면
2021-10-15 06면
2020-05-22 03면
2020-03-05 12면
여의도·김포 거쳐 영종도로… 대한민국 백년 관문공항 역사 소박한 촌부들의 섬에서 꽃피워
기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