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기지 반환 구역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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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지 반환 구역을 가다·(5·끝)] 외부 전문가가 본 캠프 마켓 지면기사
80여년 만에 인천 시민 품으로 돌아온 부평 미군기지 '캠프 마켓'을 어떠한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해 미래 세대에 물려줘야 할까. 아직 인천 지역사회에서 캠프 마켓 활용 구상의 밑그림이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다양한 목소리가 서로 부딪치며 갈등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인천시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캠프 마켓 활용에 관한 공론화 작업을 진행할 에 착수할 계획이다.경인일보 취재팀은 이번 기획 시리즈 '미군기지 반환 구역을 가다'를 통해 다른 지역의 반환 미군기지 활용 사례를 살피고, 현지에서 외부 전문가들에게 물어 캠프 마켓 활용 방향을 최대한 객관화한 시선에서 보고자 했다. 인천시, 내년부터 본격 공론화 착수아픈 역사에도 보존 후대 기억 필요 부산 옛 하야리아기지에서 탈바꿈한 부산시민공원 개발 방향을 논의했던 '하야리아공원포럼' 강동진 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지은 건물이나 미군 주둔 등 '과거의 아픈 역사'도 그 실체를 남겨 되새기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강 교수는 "징용의 역사를 담은 캠프 마켓의 옛 일본육군조병창(군수공장) 건물은 실체가 없어지면 기억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며 "인천시가 조병창 건물을 남기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이후 시민사회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이어 "조병창 건물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겠다면 다음 세대를 위해 결정을 유보하는 것도 또 다른 대안이 될 수 있다"며 "어설픈 관점에서 건물 가치를 재단해 헐어버리고 없애는 것은 후손들이 판단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하야리아기지 경우도 공원 조성 과정에서 기존 338개 건축물 가운데 24개만 보존해 활용하고 있는데, 건축물 존치·철거에 관한 갈등이 있었다. 부산시민공원 조성 과정에 참여한 유현 부산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역사성'을 가장 우선으로 고려하면서 '활용성'과 '경제성'을 따져야 한다고 했다. 유 학예관은 "역사성이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고, 어떻게 활용할지, 가령 시민을 위한 공연장이나 학습 공간 등으로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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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지 반환 구역을 가다·(4)] 공공시설 짓는 강원도 캠프 페이지·롱 지면기사
강원도의 반환된 미군기지인 춘천시 캠프 페이지(Page)와 원주시 캠프 롱(Long) 부지에서는 공공시설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현재는 토양 오염 정화작업이 진행 중이다.춘천 캠프 페이지, 편의시설 단장물놀이장 '꿈자람물정원' 대표적토양오염 발견… 운영 중단 상태 춘천시 근화동 일원 캠프 페이지 부지(54만4천㎡)는 한국전쟁 때 유도탄기지, 미군 군사고문단, 제2항공연대 등이 주둔했다. 미군이 주둔하기 전까지 이 지역은 논밭이었다. 캠프 페이지는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병사들을 엄호하다 전사한 존 페이지(John U. D. Page·1904~1950) 대령을 기리고자 붙인 기지명이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함경남도 장진군 일대에서 미 제1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중공군과 치열하게 맞붙은 전투다.캠프 페이지는 비행장이 중심인 기지로 활주로, 헬기 계류장, 관제탑, 주유시설 등이 있었다. 캠프 페이지는 1983년 5월 승객과 승무원 100여 명을 태운 중국 민항기 1대가 기지에 불시착한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지 않았던 때 발생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한중정부의 외교가 시작됐다. 캠프 페이지에는 1996년부터 기지가 폐쇄된 2005년까지 미 2사단 아파치 헬기부대가 주둔해 주로 제12사단의 항공작전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지난 10일 오후 찾은 캠프 페이지는 사람의 출입을 막는 가림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가림막 사이로 보이는 기지 내부는 토양오염정화와 문화재 발굴 조사 등을 위해 파헤친 흙이 2~3m 높이로 쌓여 있었다. 캠프 페이지 땅이 과거 미군기지였음을 나타내는 시설물은 대부분 철거됐다. 대신 춘천시는 미군이 썼던 격납고, 물탱크, 조종사 숙소 등 일부 시설을 보존해 시민 편의시설로 새롭게 단장했다. 이들 시설을 2016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개방했다가 토양오염이 발견돼 잠정 폐쇄한 상태다.캠프 페이지 기존 시설을 재활용한 사례는 물놀이장 '꿈자람물정원'이 대표적이다. 꿈자람물정원은 캠프 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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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지 반환 구역을 가다·(3)] 부산시민공원으로 재탄생한 캠프 하야리아 지면기사
부산 미군기지 캠프 하야리아(Hialeah)는 일제강점기 경마장이었다가 해방 후 곧바로 미군이 주둔하면서 80여 년 동안 부산 시민에게 '타자의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부산시 부산진구 범전동 일원 52만8천278㎡ 규모의 캠프 하야리아는 미군이 1945년 들어왔으며 2006년 기지를 폐쇄했다. 2010년 한미 간 부지 반환 협상이 타결돼 공원 조성이 추진됐고, 2014년 5월 '부산시민공원'으로 재탄생했다. → 표 참조부산시민공원은 도심 심장부에 있다. 평지가 부족한 부산지역에서 부산시민공원처럼 널찍한 땅이 미군기지로 닫혀 있지 않았더라면 오래전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을 것이란 평가가 나올 만큼 좋은 입지다. 부산시민공원 일대는 도로, 철로, 주거지가 꽉 들어찬 구도심이다. 부산시민공원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면적의 사각형 부지인데,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남으면서 몰아치는 도시화의 파도를 빗겨갈 수 있었다.일제 경마장·해방후 미군 주둔지2014년 4만㎡ 규모 휴식처 재탄생 지난 8일 오전 찾은 부산시민공원 내 하야리아 잔디광장에서는 친구끼리 혹은 가족과 함께 온 시민들이 돗자리를 깔고 편안한 자세로 쉬고 있었다. 하야리아 잔디광장은 축구장 6개 규모(4만㎡)의 드넓은 공간이다. 공원을 산책하고 있던 주민 김모(69)씨는 "빌딩과 고층 아파트로 가득 찬 도심 한가운데 탁 트인 공간에서 쉴 수 있다는 것은 시민에게 큰 자산"이라며 "젊은 시절 캠프 하야리아의 한국인 노무자들을 통해 흘러나온 초콜릿과 항생제를 접하면서 기지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항상 궁금했다"고 말했다.부산시민공원은 '기억' '문화' '즐거움' '자연' '참여'라는 5개 주제의 숲으로 구성됐다. 부전천 인근 기억의 숲은 일제강점기와 미군 주둔 시기를 나타내는 건물과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조성했다. 캠프 하야리아에 있던 건물은 338개였다. 부산시는 이 가운데 장교클럽, 퀀셋 막사, 하사관 숙소, 장교·사령관 관사, 학교, 영화관 입구 등 24개 건물을 보존하고, 나머지 건물은 토양 오염 정화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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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지 반환 구역을 가다·(2)] 인천 캠프 마켓의 반환과 쟁점 지면기사
1939년 일본육군조병창(군수공장) 조성으로 출발한 인천 부평미군기지 '캠프 마켓'은 인천시민을 중심으로 시작한 반환 운동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캠프 마켓 전체 부지 44만㎡의 소유권자인 정부나 인천시가 아닌 시민 모두가 이 땅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인천시가 캠프 마켓 활용 계획을 마련하면서 지역사회 공론화 과정을 빈틈없이 거쳐야 하는 이유다.캠프 마켓을 시민에게 반환하라는 목소리는 일제의 조병창 조성 50년이 지난 199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커졌다. 인천 지역 시민단체들은 1996년 캠프 마켓 담장을 둘러싸는 '인간 띠 잇기' 운동을 추진하다 경찰의 해산으로 무산됐으나, 2000년대 초 시민단체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까지 1천500여 명이 참여한 '띠 잇기'에 성공했다. 인천과 부평 지역 34개 시민단체가 연대한 '우리 땅 부평미군기지 되찾기 및 시민공원 조성을 위한 인천시민회의'가 발족해 캠프 마켓 반환 운동이 본격화했다.1990년대 중후반부터 반환 목청 커져2000년대초 1500명 '띠 잇기' 성공단식·퍼포먼스 서명 운동 등 펼쳐2002년 기지 이전 확정… 절차 더뎌전국 미군기지를 이전·재배치하는 한미 연합토지관리계획(LPP)에 캠프 마켓이 제외될 조짐이 보이자 인천 지역사회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캠프 마켓 정문 앞에선 수시로 1인 시위, 단식 농성, 각종 반환 촉구 퍼포먼스가 펼쳐졌으며 서명 운동도 전개해 5만명의 서명을 받았다. 부평미군기지 이전에 관한 주민 투표 조례 제정 청구 운동도 추진됐다. 결국 2002년 3월28일 연합토지관리계획에 캠프 마켓이 포함돼 기지 이전이 확정됐다.경인일보 2002년 3월29일자 19면 보도를 보면, 반환 운동에 참여했던 한 시민운동가는 "처음엔 냉소적이었던 주민들도 갈수록 적극적인 투사로 변해갔다"며 "경적을 울린 뒤 손을 흔들어 격려를 보내는 택시기사, 시장을 다녀오다 과일을 놓고 가거나 저녁에 국수를 삶아오는 주부들도 든든한 후원자였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한미가 캠프 마켓 이전을 결정했지만, 부지 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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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지 반환 구역을 가다·(1)] 80년 만에 시민 품에 안기는 인천 '캠프 마켓' 지면기사
2020년 10월14일, 인천 부평구 도심 한복판 드넓은 땅에 장벽을 치고 80년 세월을 버텼던 미군기지 '캠프 마켓'의 굳게 잠긴 문을 인천시민들이 열었다. 캠프 마켓 전체 44만㎡ 부지 가운데 시민에게 개방된 장소는 야구장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우리 땅임에도 한 번 밟을 수 없던 금단의 땅을 마침내 밟고 들어간다는 희망이 싹을 틔운 날이다. 지난해 11월에는 캠프 마켓을 둘러싼 담장 일부를 철거해 누구나 언제든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캠프 마켓이 인천시민의 것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다.캠프 마켓은 서울 용산 미군기지처럼 일본군 주둔지가 다시 미군기지로 쓰인 사례다. 용산은 조선의 일본군 사령부였다. 부평은 일본 육군이 전쟁을 수행할 무기 등을 제조한 군수공장 '조병창'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엽 부평 조병창과 미쓰비시 등 주변 하청 공장이 거대한 병참기지로 기능했고, 해방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주변 지역은 기지촌이 됐다. 미군 부대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캠프 마켓은 빽빽한 도심에 뻥 뚫린 구멍처럼 방치됐다. A·B구역 토양오염 정화 '막바지'근대 건축물 철거 쟁점 갈등 조짐부산 등 사례 본보기·반면교사로 2000년대 초부터 서서히 진행된 캠프 마켓 반환 절차는 이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크게 4개(A·B·C·D) 구역으로 나뉜 캠프 마켓의 A·B구역은 토양 오염 정화 사업이 막바지다. 전체 부지 중 절반에 달하는 D구역은 내년부터 환경기초조사를 비롯한 반환 절차를 본격적으로 밟는 등 캠프 마켓의 실질적 반환이 머지않았다.그러나 인천시민에게 캠프 마켓이 어떠한 공간으로 다가올지 아직 그 밑그림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 캠프 마켓은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 미군 주둔을 거치며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전쟁 역사가 집약된 공간이다. 노동문화와 기지촌의 생활문화도 품고 있다. 부평 도심에서 부족한 녹지와 생태공간을 채워줄 수 있는 숨구멍 역할을 기대하는 시민들도 있다.캠프 마켓을 어떻게 활용할지 그 방향성을 두고 지역사회에서 갈등의 조짐이 보인다. 역사성이 있는 근대건축물의 철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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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지 반환 구역을 가다·(1)] 일본·미군이 남긴 상흔-주민 생활문화가 합쳐진 '인천의 역사' 지면기사
마침내 부평미군기지 '캠프 마켓' 땅을 인천시민 품으로 돌려받으면서 80년 동안 일본과 미국의 군사기지로 쓰이며 층층이 쌓인 역사성까지 물려받았다. 캠프 마켓은 동아시아 전쟁사의 한복판에 있었다. → 표 참조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한반도를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전락시켰다. 일본은 330만㎡ 규모 부평평야를 한반도 병참기지화 핵심 지역으로 낙점하고, 1939년 공사를 시작해 1941년 5월 초대형 군수공장 일본육군조병창을 개소했다. 부평은 서울과 인천항의 중간 지점이었고 경인철도가 지나 물자 수송에 유리했다. 이 지역은 분지인 데다 안개가 많았다. 공습을 피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일본이 조병창 건설지로 결정했다는 설도 있다.1939년 중일전쟁때 병참기지 활용패망후 자료 불태워… 규모 미확인인근 미쓰비시 줄사택 등 일부 남아 국립민속박물관이 2018년 펴낸 조사보고서 '부평에 새긴 노동의 시간'을 보면 조병창의 월간 생산 목표는 소총 2만정, 경기관총 100정, 중기관총 100정, 총검 2만정, 군도 1천개였다. 조병창 인근에 들어선 일본의 중공업 공장은 미쓰비시제강 인천제작소를 비롯해 20개에 달한다. 논밭이었던 부평 지역은 순식간에 공업도시로 변모했다. 조병창과 주변 하청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 상당수가 강제 동원된 것으로 파악된다. 각종 문헌을 보면 인천에서만 2만4천여 명이 강제 동원됐는데, 성인 남성은 물론 학생과 어린 여성까지 끌려갔다. 부평공원(조병창 터)에 세워진 '징용노동자상'의 소녀는 실제 이야기다.인천시립박물관이 보유한 중국 송·원·명대 철제 범종 3개는 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낸 석남 이경성(1919~2009) 선생이 해방 직후 조병창에서 수습했다.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에서 전쟁이 장기화하자 바다 건너 중국에서 공출한 물자까지 조병창에 투입했다. 일본이 각지에서 공출한 쇠붙이를 녹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련소 건물이 아직 캠프 마켓에 남아있다.안타깝게도 조병창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됐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