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 [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이방인 아닌 이웃·(下)] 이웃으로 함께 하려면…

    [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이방인 아닌 이웃·(下)] 이웃으로 함께 하려면… 지면기사

    화교가 한국사회에 정착해 살아온 시간은 140년 가까이 된다. 화교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구성원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해 왔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화교를 우리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다고 자신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 구성원으로 온전히 품지 못하고 '외국인'과 '국민' 사이 어딘가 애매한 위치에 두고 있다. 전문가들은 화교를 '사회통합' 관점에서 다시 주목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는 "생존을 위해 '귀화'를 선택해야 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거주 재일한국인과 비교한국 화교의 지위가 훨씬 낮아더 나은건 지방참정권 정도뿐" 화교의 위치는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한국인과 비교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 교수는 "일본에 있는 재일한국인보다 한국 화교의 지위가 훨씬 낮다"고 했다. 재일한국인은 공립학교 교사도 될 수 있고, 제한적 범위이지만 공무원으로 일하고 변호사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별영주권'을 얻은 재일조선인은 일본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한국 화교가 재일한국인보다 나은 건 '지방참정권' 정도라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김희신 상명대 교수(역사콘텐츠 전공)도 "'귀화'라는 결론보다는 한국 사회가 용인하는 다양성을 확대하고 화교를 수용하는 방향에서 답을 찾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귀화는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를 제거하고 동화를 강요하는 것인데 그게 아니라 공존과 조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적으로는 화교를 끌어안기 위해 국적법을 개정하거나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국민'을 전제로 한 '동화'를 사회통합의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어 문제라고 지적했다.'사회통합'이란 이주민이 거주국 공동체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갖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또 원주민은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 이주민을 포섭하는 과정까지를 포함한다. 소수집단의 주류 사회로의 일방적 편

  • [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이방인 아닌 이웃·(下)] '한국과 대만 국적 사이' 고민하는 젊은 화교들

    [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이방인 아닌 이웃·(下)] '한국과 대만 국적 사이' 고민하는 젊은 화교들 지면기사

    화교에 대한 정책이 조금씩 개선됐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3·4세대 젊은 화교들은 대만 국적을 유지하면서 한국 생활을 하는 데 많은 불편함을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차별과 배척은 많이 개선됐으나, 한국에서 일하고 일상을 보내면서 마주하는 '장벽'이 젊은 화교들에게는 또 다른 차별로 다가오는 것이다.서울에서 중식당을 운영하는 화교 여민(30)씨는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가장이다. 전통적인 중화사상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강한 가정에서 자란 여씨는 그동안 한국 귀화를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가정을 꾸린 뒤로는 귀화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씨는 "호텔 중식 요리사로 일하다가 사표를 내고 가게를 차리기 위해 은행을 찾았는데, 화교를 비롯한 외국인들은 신용대출을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감했었다"며 "일반 외국인들이야 대출이 필요하면 자국에서 받을 수 있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지금껏 경제활동을 해오고 있는 화교들은 돈을 빌릴 방법이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신용대출·간편송금앱도 이용 못해경제 자립시기 취업 제약에 속앓이 화교에게는 인터넷 금융거래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모(24)씨는 한국 젊은이들이 쉽게 쓰는 간편송금 앱도 이용하지 못한다. 한국 국적자만 가입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변 한국 친구들은 모임통장을 만들어 돈을 주고받는데 이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니 돈을 따로 보내줘야 한다"면서 "친구들이 눈치를 주지는 않지만 매번 신경이 쓰인다"고 말했다.이처럼 젊은 화교들이 귀화를 고민할 정도로 '차별·불편'은 여전하다. 취업에 제약이 많은 것도 젊은 화교들이 한국 귀화를 고민하는 이유 중 하나다. 대학에서 항공서비스업을 전공한 하씨는 "한국 항공사의 채용 공고를 보면 '한국 국적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을 아예 채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과 중국 관계가 나빠지면서 이마저도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 [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이방인 아닌 이웃·(中)] 차별과 혐오 역사 140년

    [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이방인 아닌 이웃·(中)] 차별과 혐오 역사 140년 지면기사

    140년 전 한반도에 터를 잡은 화교들의 삶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 '화교'라는 호칭보다는 다른 경멸의 호칭으로 더 자주 불렸다. 이 땅의 엄연한 정주자임에도 한국사회의 배척 대상이 되곤 했다. 일제의 농간에 억울한 희생양이 되며 '화교배척사건'을 겪었다. 해방 이후에는 토지 소유권을 제한받았고, 매번 거주 허가도 받아야 했다. 납세 등의 의무는 대한민국 '국민'과 같았지만 '국민'이 누리는 복지 등의 혜택에서는 소외됐다. 차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화교는 무역, 농업, 공업 등 20세기 초 조선에서 다양한 영역에 걸쳐 경제 활동을 했다. 임금이 적어도 조선인이나 일본인보다 성실하게 일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조선에서 상당한 경제적 세력을 형성했다."중국서 조선농민 다수 경찰 피살"경제력 약화시키려는 일제 기만술1931년 '화교배척사건' 비극 발생그런 화교들에게 1931년 커다란 비극이 닥쳤다. 그해 7월 중국 길림성에서 조선인 농민 다수가 중국 경찰에게 피살당했다는 국내 언론의 오보가 전해지면서 인천에서 중국인 배척운동, 이른바 화교배척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인천부 용강정(현 인천 중구 인현동) 중화요리점을 시작으로, 이 일대 화교가 경영하는 각종 상점과 가옥이 조선인 수천 명의 공격을 받았다. 인천뿐 아니라 서울과 평양 등 전국적으로 조선인들이 화교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 표 참조화교의 피해는 컸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피해 현황을 보면 전국에서 119명의 화교가 숨지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인천에서는 7명이 숨지거나 다치고 방화와 기물 파손 등 24건의 물질적 피해가 있었다. 다른 지역보다 피해 규모가 작았지만, 이 사건으로 많은 화교가 조선을 떠났다.화교배척사건 발생 1년 전이었던 1930년 10월 일제의 국세조사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 중인 화교는 9만1천783명이다. 조선 내 외국인 가운데 일본인 다음으로 숫자가 많았다. 1931년 사건 발생 이후 화교 수는 전년도의 40% 수준인 3만6천778명까지 급감했다.화교배척사건은 이보다 4년 앞선 19

  • [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이방인 아닌 이웃·(中)] 복지 사각지대 놓인 취약계층

    [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이방인 아닌 이웃·(中)] 복지 사각지대 놓인 취약계층 지면기사

    #인천 중구 북성동에 사는 60대 화교 A씨는 지적장애가 있는 남편과 딸을 대신해 가정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허리가 굽어 절룩거리면서도 식당에서 설거지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러나 최근 남편의 가정폭력에 이어 일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아져 A씨는 식당 일을 나가지 못하고 있다.올해 초에는 통신요금을 내지 못해 가족의 휴대폰이 모두 끊겼고, 지난 7월부터는 월세도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주변 지인들이 동 행정복지센터 등을 방문해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화교는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없다"였다.#인천 중구 선린동에 거주하는 30대 화교 B씨는 간질(뇌전증)을 앓고 있다. B씨는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생계를 온전히 홀로 책임지고 있다. 일하며 먹고 살아야 하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는 발작증세 때문에 직장에서 잘리기 부지기수였다.현재 B씨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폐지를 줍거나 교회 교인들이 제공한 단기 일자리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 B씨 역시 구청과 행정복지센터 등을 찾아가 봤지만 기초생활수급자 등록 등 그 어떤 지원도 받지 못했다. A씨와 B씨 소득 수준을 보면 기초생활수급자가 돼야 할 정도로 극빈층이다. 하지만 이들이 누릴 수 있는 복지제도는 사실상 전무하다.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 이곳을 벗어나 본 적이 없지만, 외국인으로 분류되는 대만 국적 화교(華僑)이기 때문이다.기초생활수급·아동수당 등 제외거주비자로 장애인 등록도 막혀 한국 화교들의 국적은 대만이지만 정작 대만에서는 이들에게 '신분증 번호'(한국의 주민등록번호)도 발급하지 않는다. 대만에 호적이 없고, 국방 등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인도, 대만인도 아닌 한국 화교는 한국에서 범죄를 저질러 추방을 당하면 갈 곳이 없다. '정치적 고아'인 셈이다.외국인 신분인 화교는 저소득층에 생계급여와 의료·주거 급여 등을 제공하는 기초생활보장제 적용 대상이 아니어서 아무리 가난해도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아동수당, 기초연금, 장애인연금 역시 해당하지

  • [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이방인 아닌 이웃·(上)] 한반도 격동의 시기 함께한 '이웃사촌'

    [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이방인 아닌 이웃·(上)] 한반도 격동의 시기 함께한 '이웃사촌' 지면기사

    화교(華僑)가 한반도에 정착해 살아온 시간은 140년이나 된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격동의 한반도 역사를 그들도 함께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펼쳤고 한국전쟁을 겪는 과정에서는 이 땅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나섰다. 중공군과 싸우기도 했다.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의 아픔을 겪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화교가 겪은 역사적 경험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화교는 언제든 떠나고 마는 외국인이 아니라 정주자였다. 우리가 그들을 '이웃'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다.한국 화교 역사를 살펴보면 1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있는 역사가 140년이란 얘기다.두만·압록강 경계 자연스러운 이주1882년 조·청무역장정 맺고 상업활동인천·서울 등 거주 폭발적으로 증가 조선과 중국은 두만강·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있다. 중국인의 조선 이주와 조선인의 중국 이주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한반도에 지금과 같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활발한 무역활동을 벌인 것은 1882년 10월 당시 조선과 청나라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은 이후다. 이 장정은 중국인의 조선 이주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이 개항장에서 거주하며 상업활동을 할 수 있게끔 했다. 그리고 조선 이주 중국인 보호를 위해 청국 공관을 설치하고 관원을 파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장정을 맺은 이후 조선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해 화교사회가 형성된다.인천에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차이나타운이 생겼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이후 후속 조치로 1884년 인천구화상지계장정이 맺어졌는데, 이를 근거로 인천에 청국 조계지가 설치됐다. 이후 부산과 원산 등에도 조계지가 설치된다. 이로써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화상(화교 상인)들은 조계지에 정식으로 거주하며 무역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화교들은 거대 자본을 갖춘 상인, 즉 화상(華商)이 있었고 중국보다 높은 임금 때문에 한국을 찾은 노동자(화공·華工)와 농민(화농·華農)도 있었다.조선내 화교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1883년 166명인 화교 인구는 10년 뒤인

  • [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이방인 아닌 이웃·(上)] 가장 오래된 인천시민의 한 구성원

    [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이방인 아닌 이웃·(上)] 가장 오래된 인천시민의 한 구성원 지면기사

    저희는 인천시민의 한 구성원입니다인천 남동구 구월동에 사는 주희풍(47)씨는 화교다. 공작원이었던 그의 할아버지가 1930년대 항일운동을 위해 대만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그의 아버지는 1948년 인천에서 출생했고, 1975년 주희풍씨가 태어났다. 친누나와 친형의 아이들까지 치면 4대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 관련기사 3면 ([가장 오래된 이주민 화교, 이방인 아닌 이웃·(上)] 한반도 격동의 시기 함께한 '이웃사촌') "선린동, 눈감고도 다 찾아다닐정도"김치에 태어날때부터 한글 이름똑같은 생활·말투에 국적만 달라 인천화교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주씨는 "인천 중구 선린동은 눈 감고도 다 찾아다닐 정도"라며 "웬만한 인천시민보다 인천에 대해 빠삭하게 아는 '인천 토박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인천 중구에 있는 인천화교학교를 졸업한 뒤 국내 대학에 진학했다. 이후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주씨는 "어머니께서는 늘 김치를 담가 드신다"며 "저희(화교)는 한국인과 생활 습관, 식습관, 언어, 말투, 뉘앙스 모두 다 똑같다"고 했다. 이어 "태어날 때부터 한글 이름을 갖고 살았다"며 "저희한테 외지인이라고 하는 얘기를 들으면 섭섭하다"고 덧붙였다.인천에서 결혼하고 26살 딸과 19살 아들을 둔 강수생(56)씨도 화교다. 4대째 인천에서 살고 있다는 그의 가족은 여느 한국인 가정과 다를 게 없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강씨는 15년 전 방송 소품 납품 관련 업종에서 일하다 7년 전부터는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에서 중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딸과 아들은 모두 인천화교학교를 다녔다. 아들은 현재 대만에서 유학 중이고, 딸은 국내 대학을 나와 서울에 있는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인천시민과 유일하게 다른 건 '국적'뿐이라는 강씨는 "저를 포함한 많은 화교가 여기 인천에서 태어나 여느 시민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하고 있다"며 "저희는 한국에서 같이 살아가는 동반자이자 이웃"이라고 말했다.지역내 3천명 거주… 4대째 살기도 인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