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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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유정수씨 일기 속 국민방위군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6)] 지면기사
눈물도 얼어붙은 행군… 70여년 묻혀있던 참혹한 비극 졸속·급조 동원 민간인들, 영하 기온서식량도 피복도 없이 '남쪽 이동' 강요"해골같은 꼴로 1만명 이상의 장정들 전염병에 학교강당, 사과창고서 숨져"정부 무능·관리부실에 대규모 피해시간 흘러 과거기록 찾기도 쉽지 않아스물 다섯 유정수는 1950년 12월 23일 오전 8시 수원공설운동장에 섰다. 미 공군 기록(USAF)에 따르면 당시 기온은 영하 1도, 한낮 최고기온이 영상 2.4도에 불과했다. 특히 그가 행군을 한 새벽시간은 영하 4도까지 기온이 떨어졌다. 변변치 못한 옷차림에 체감 기온은 훨씬 더 떨어졌을 것이다.유씨는 방위군이었다. 6·25 발발로 급하게 동원된 '국민방위군'이었다.다음 주면 6·25 발생 74년을 맞는다. 비교적 상세한 국군의 행적에 비해 제대로 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국민방위군의 실상은 지난 2020년 경인일보가 발굴한 고 유정수씨의 일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유씨 기록을 제외하곤 '전환시대의 논리'를 쓴 리영희(1929~2010) 교수와 고 정진석(1931~2021) 추기경의 증언이 그나마 알려진 편이다.정 추기경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국민방위군 징집이 종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라고 설명했다. 1950년 12월 말 서울 창경원에 모여 남양주 덕소에서 꽝꽝 언 남한강을 건넜던 일이다. 폭설에 눈 위에 지쳐 쓰러져 있다 겨우 강을 건넜는데 얼음이 깨지며 뒤쪽에 있던 무리가 빠져 죽은 것이다. 하루 10시간 이상 걸으며 주먹밥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 앞선 사람이 지뢰를 밟아 죽는 모습을 보는 고행이었다.리 교수의 증언도 일맥상통한다. 국민방위군이 진주로 남하했는데 해골같은 꼴을 한 만명 이상 장정이 학교강당, 사과창고에서 죽어간 것이다. 감자 한 알, 고구마 한 개로 겨우 남쪽에 다다랐지만 옷은 누더기에 신발은 해어져 맨발이었고 사람이 넘쳐 교실에 수용되지 않은 사람은 밖에서 얼어죽어야 했다.참상이었다. 이 비극의 원인이 된 국민방위군은 무엇인가. 정 추기경, 리 교수, 그리고 유씨는 왜 국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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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치의 미래, 철거냐 보존이냐… 도심 속 '분단 그림자' 평화 꿈꾼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5)] 지면기사
전차 침입 막는 용치, 고양 덕은동·파주 법원읍에도 설치 지역발전 저해·수해 유발 단점 불구 근대문화유산 가치사진전 개최·공원 조성… 지역사회 일부로서 '공존' 모색태양열 발전기 등 제3의 새로운 활용방안 논의 필요 시점고양시 덕양구 덕은동에 위치한 고양쌍굴(4월 30일자 5면 보도=시간 관통한 '고양 쌍굴'… '역사가 들려주는' 조용한 증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 중 하굴 입구에는 2m는 족히 넘어 보이는 콘크리트 돌덩이들이 놓여 있다. 하굴은 폐쇄된 상황에 발목 높이만큼 물이 차 있었고, 사람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이 우거진 풀숲에 뒤덮인 채 벌레들이 날고 있었다.3일 고양시 덕은동에서 발견한 콘크리트 돌덩이는 마치 하굴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굳건했다. 돌덩이는 전쟁의 상흔 중 하나인 용치다.용의 이빨(dragon teeth)을 닮았다고 이름이 붙여진 용치(龍齒)는 적군의 전차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접경지 하천이나 개활지, 얕은 능선에 설치된 대전차 장애물(2023년 2월 7일자 11면 보도)이다. 1968년 김신조 침투사건을 계기로 1970년대부터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다.50여년간 방호벽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용치는 그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다.덕은동에서 나고 자라 식당을 운영하는 정모(56)씨는 "어릴 적에 하굴의 기찻길과 용치에서 친구들과 놀고 데이트도 했기 때문에 추억의 장소"라면서도 "요즘은 용치 자체를 모르는 주민들도 많다"고 말했다.접경지 하천이나 얕은 능선에 설치돼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용치도 있었다. 지난달 31일 파주시 법원읍 직천리 용치를 찾았지만 쉽사리 발견하지 못했다. 도로를 따라 대전차 장애물인 도로 낙석이 설치돼 있는데 용치는 도로 옆 비탈길 풀숲에 숨어 있었다.직천리 용치에 가까이 가기도 쉽지 않았다. 비탈길을 내려가도 목까지 올라오는 작은 나뭇가지들과 덩굴들로 접근할 수 없었다. 대부분 용치들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우거진 수풀에 설치돼 잊히기 십상이다.■ 갈등의 원인은 철거해야 vs 근대문화유산으로 재해석해야용치는 대전차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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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험프리스 지근거리 '선말산·부용산' 방공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4)] 지면기사
용산에서 평택까지 역사, 시민 품으로… 과거·현재를 톺아보자 1942년 일본군 보급용 비행장 건설하며 조성6·25땐 훈련장 활용… 1951년 미군 제공 협정市, 부지일대 공원·박물관 조성 방안 검토주변 유래·가치 알릴 팻말·안내판 등 없어휘황찬란 용산공원 청사진 비교하면 '초라'용산기지 반환이 결정된 건 2003년의 일이다. 한미 정상이 용산기지 평택 이전에 합의했고 2005년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2020년 기지 이전이 상당 부분 진행되며 공원 부지 일부가 개방됐다. 예약제이긴 해도 자유롭게 방문이 가능하다. 버스 투어도 이루어지며 방문객이 이국적인 장교 숙소 앞에서 찍은 사진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단골손님이 됐다.용산기지에 조성될 공원 면적은 300만㎡에 이르고 공원을 둘러싼 역만도 9개에 달한다. 메가시티 중심지에 거대한 공원이 들어서는 건 기념비적인 일이다. 특히 고려말 몽골군 주둔지, 임진왜란 시기 왜군 병참기지,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 이어 해방 후 미군이 기지로 쓴 지역이 시민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렇듯 미군은 용산을 떠나 평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군의 새로운 주둔지 캠프 험프리스가 내다보이는 지근거리엔 일제 강점기 일본이 쓰다 미군이 물려받아 사용한 방공호가 남아 있다. 선말산, 부용산 방공호다. 선말산 방공호는 평택시 팽성읍 함정1리에서 함정2리 방향으로 남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관통한다. 부용산 방공호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모양새다. 함정리 마을은 '서원말', '선말'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조선시대 화포 홍익한을 배향한 '포의서원'이 선말산 동남부 기슭에 있어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의 방공호들은 1942년 일본해군시설대가 안정리와 함정1리 사이에 보급용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조성됐다. 두 곳 방공호의 규모는 비슷하나 공사기법이 거칠고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선말산 방공호가 부용산보다 앞서 건설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부용산 방공호는 일제 패망 직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1951년 한국 정부가 미국과 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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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숨 쉬는 역사' 수원 경기도청 옛 청사·파주 임진각 방공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3)] 지면기사
벚꽃길·관광지 아래 위치한 호국보훈의 상징들 산책길 바로 밑 지하 1969년 조성 2022년까지 사용작년 경기기회마켓 개최·올해 보물찾기 미션 장소지역명소 중심부 군사용품·DMZ 등 내부 전시공간반지하주택 양식 기원… 대피시설 아닌 활용 '고민'■ 내가 걷는 산책로 바로 밑 비밀공간? 경기도 옛 청사 충무시설경기도청 옛 청사는 수원에서 손꼽히는 벚꽃명소 중 하나다. 팔달산 자락에서 매년 흐드러지는 벚꽃놀이를 즐길 수 있는 이곳 지하엔 사실 은밀한 공간이 있다. 산책길 바로 밑 지하공간엔 방공호가 숨어 있다.지난 3일 찾은 구청사 방공호(충무시설) 출입구는 주차장 구석 한쪽 가벽 뒤에 숨겨져 있었다. 방공호를 목적으로 찾아갔음에도 못보고 지나칠 뻔했다. 입구 주변부터 가벽까지 치렁치렁하게 덮고 있던 위장용 그물 덕분인지 더욱 눈에 띄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듯 색이 바랬어도 얼추 나뭇잎같은 모양새를 갖춰 팔달산을 타고 내려오는 이파리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이 방공호는 1969년 조성된 것으로, 을지훈련 때마다 경기도청 공무원들의 비상대피시설로 쓰이다가 지난해 도청이 광교로 이전하면서부터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구청사 방공호는 총 2천231㎡ 규모로, 내부엔 9개의 방이 있다. 돔형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좌우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가는 구조다. 내부에는 습기 제거를 위해 샤워커튼과 제습기를 가동한다.방공호, 지하시설이라고 해서 어두컴컴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공간을 생각했다면 구청사 방공호를 보고 놀랄 수도 있다. 일반 건물의 내부라고 해도 믿을만한 깔끔한 회색 복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도청사가 자리를 옮긴 2022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용하던 공간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구청사 방공호의 굳게 닫힌 출입문과 '제한구역. 공무 외 출입금지'라는 딱딱한 문구만 보고선 내부에 이런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물론 이처럼 일반 도민에게 생소한 미지의 공간에 입장하는 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평상시 구청사 방공호를 걸어 잠그고 있는 자물쇠가 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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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관통한 '고양 쌍굴'… '역사가 들려주는' 조용한 증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 지면기사
경성수색조차장~경의선 연결한 터널 백석 시인, 일제 강제동원 건설 '고난·강압적 지배' 시로 써 남겨통영해저터널·여수 마래터널, 단순 건축물 아닌 삶·희생 결과물미래세대 교훈적 의미 커… '비등록문화재' 보존·인식 노력 필요'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던 낡은 항구의 /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 이름이 많다…' 시인 백석이 쓴 '통영 1'은 이렇게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 저항시인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서정시인인 백석은 통영을 찾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였다.기자가 백석이 찾아간 통영을 방문한 건 2012년 일이다. '남행시초(南行時秒)'라 시인이 이름 붙인 동명의 시 통영엔 이런 구절도 있다.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 열이레 달이 올라서 /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일제가 가져다 놓은 거대한 배를 보러 선착장에 들렀다 만월이 된 바다에 나룻배가 지나가는 광경을 본 시인의 자취를 좇아 통영 밤길을 걸었다. 판데목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수장시킨 그곳이 맞다. 판데목 수면 아래엔 일제 때 뚫린 '통영해저터널'이 있다. 길이 483m의 해저터널은 양쪽 물을 방파제로 막고 바닥을 파서 만들었다. 일본 거주인이 늘어나며 일본인의 필요에 의해 지어진 기반시설인데 공사는 조선인들이 맡았다. 1931년 시작해 1932년 공사가 끝난 해저터널을 걷다보니 품바타령이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저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공사과정에서 죽어갔는지 모르겠으나 어찌됐든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의 위용은 대단했다.통영에서 조금 더 서쪽으로 가면 여수가 나온다. 2019년 여수에선 신기한 터널을 만났다. 1차로 밖에 없어 반대쪽에서 차가 오면 터널에 진입할 수 없는 '마래터널'이었다. 일제가 군량미를 저장하기 위해 뚫은 자연암반 터널이다. 정확히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뚫었다. 중장비 없이 곡괭이와 정으로 만든 굴은 거푸집의 흔적이 없어 마치 자연히 형성된 동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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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을 관통한 잊혀진 방어선, 대전차 방호벽 '용치'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 프롤로그] 지면기사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 프롤로그] 반백년 전 한국전쟁 재발 방지 목적 건설 이제는 기억하는 이 찾아보기 드물어져다양한 문화유산 보존하려는 의식 증가급속한 도시개발 영향 나날이 소실위험경인일보, 道·경기역사문화원과 협력비지정 문화재 발굴·보존 등 꾸준히 노력경기북부와 접한 강원도, 북한과 경계를 맞댄 이곳 논 위로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경기도와 강원도를 가로질러 끝없이 펼쳐진 벽의 정체는 지도엔 나타나지 않았다. 군사시설이기 때문이다.촬영을 하거나 위치를 발설해선 안 되는 군사시설은 구글에 접속해 이 지역 항공사진을 보자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차방호벽이었다. 벽은 시군 경계를 넘어 논과 밭 위로 주욱 뻗어 있었다. 누군가 지도 위에 연필로 그어 놓은듯, 주변 지형지물을 무시하고 산과 강과 들판에 벽이 도열했다.반백년 전에 지어진 대전차방호벽의 정체를 기억하는 주민은 많지 않다. 대전차방호벽은 용의 이빨을 닮아 '용치'라고 불린 콘크리트 구조물, 전쟁 시 폭파해 도로를 막는 용도인 낙석과 더불어 대전차방어선을 구축한다.1970년대 만들어진 대전차방어선은 파주, 연천, 양주, 의정부, 고양, 포천, 동두천 등에 구축됐고 임진강까지 확장해 수도권방어선으로 기획됐다. 강원도 고성, 인제, 양구에서도 관찰되며 멀리는 서해안 강화까지 뻗어 있다. 강원도에서 경기도까지 수십킬로로 연결된 대전차방어벽의 모습은 가히 38도선, 휴전선과 더불어 제3의 휴전선이라고 할만하다.한국전쟁의 경험으로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지만 50여년 이상 단 한 번도 쓰인 적은 없었다. 쓰임을 다하지 못한 대전차장애물은 2000년대 도시개발이 활발해지며 이해관계에 따라 하나 둘 철거되고 있다.지난해 연중 게재된 '전쟁과 분단의 기억'은 바로 이 대전차방어선을 구축하는 대전차장애물 '용치'를 시작으로 근현대 시기에 만들어져 경기도에 소재한 여러 건조물의 현재를 확인했다.용치를 보존해야 하는가, 없애야 하는가. 기사는 이 물음에서 시작했다. 도시의 흉물이며 냉전의 상징이지만 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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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21·끝)] 되짚어 본 전쟁 문화 유산·(下) 지면기사
'역사의 흔적 있어… 기억이 안 난다' 무관심속에 사라져 가는 유산들… 폐허로나마 남아줘 가슴에 간직 파주 장파리에 있던 미군 클럽 럭키바자갈밭으로 이뤄진 주차장만 덩그러니경기도 내 건조물들 열악한 환경 방치불에 그을리고 흉물 상태로 멸실 위기아름답지 않아 잊고 싶은 상처라 해도우리가 기억 안하면 영영 사라질 것들전쟁과 분단의 유산은 사라지고 있다. 지난 8월 찾아간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 348-8. 미군 클럽 럭키바가 있어야 할 자리엔 자갈밭으로 이뤄진 주차장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1960년대 만들어져 근처의 DMZ홀, 라스트찬스와 함께 당시를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지만, 무관심 속에 사라진 날짜도 특정할 수 없게 어느 사이엔가 허물어진 것이다.럭키바, DMZ홀, 라스트찬스는 파주 장파리 미군 클럽의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다. 1960년대 서울 번화가보다 번영했다는 장파리는 미군에 기대어 성장한 당시 미군 기지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한국 대중음악사의 기원이 되는 장소다.사라짐은 비단 럭키바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채 50~70년 가량 시간이 지나면서 경기도 곳곳의 건조물들이 사람들 뇌리에서 잊혔고 지금도 열악한 보존 상태 속에 멸실 위기를 맞았다.이런 상황은 전쟁 문화유산이 대체로 북한과 가까운 접경 지역,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지역에 자리잡았다는 사정과 맞닿아 있다. 피난민의 안식처인 '파주 장곡리 움집', 옛 미군거리 쉼터 '동두천 샬롬하우스', 캠프 스탠리 옛 기지촌 '의정부 뺏벌마을'이 모두 그렇다.1950년대에 움집이라니. 신석기나 구석기 시대가 아니라 피난민들이 전쟁 물자로 얼기설기 엮은 움집 마을이 아직 파주 접경 지역 장곡리에 자리 잡고 있다. 2020년대에 이르러 여전히 그곳에 사람이 산다. 6채 가옥은 50년대 당시 피난 시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다. 동두천 샬롬하우스는 2019년 화재 이후 방치돼 있지만 건물 외관은 온전하다. 화마가 할퀸 실내는 불에 그을린 채로 말이다. 미군들이 버리고 간 고아와 클럽에서 일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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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20)] 되짚어 본 전쟁 문화 유산·(上) 지면기사
지난 2월 연재를 시작한 '전쟁과 분단의 기억'은 매월 2차례씩 19번에 걸쳐 경기도 전역의 미등록 전쟁 문화유산을 찾았다. 정전 70주년, 여전히 분단 상태인 한반도에서 북한과 경계를 접한 경기도엔 한국전쟁의 상흔인 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道-문화재연구원 실태조사… 조사목록 154건 올라소재 파악 어렵거나 이미 소멸된 건조물 44건 달해보도에 앞서 경기도와 경기도문화재연구원은 분단 상황과 관련한 유산을 목록화하는 실태조사를 벌였다. 모두 154건의 유산이 조사목록에 올랐는데 건조물(건축물)이 100건이었고 전쟁과 분단의 기억이 첫 번째로 찾아간 유산, '용치'가 54건이었다. 목록에는 올랐지만 사라진 유산도 여럿이었다. 미군 부대 안에 소재해 일반인 접근이 불가능하거나 이미 사라진 건조물들이 44건에 달했다. 사라짐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지난해 여름 실태조사에선 건재했던 '파주 럭키바'가 올해 들어 사라졌다는 사실(8월 22일자 11면 보도=[전쟁과 분단의 기억·(15)] 파주 옛 미군 위락시설 '럭키바·DMZ홀·문화극장')도 취재 과정에서 확인됐다.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전쟁 문화 유산을 등한시 한다면 또 다른 유산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질지 모른다. 우리 곁 유산을 발견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보전하는데 이르기까지 인식 변화를 촉구하며 연간 진행된 보도를 통해 다시금 전쟁 문화 유산의 현실을 되짚는다. '용치' 한탄강 바라보던 주민 제보로 세상에 드러나장갑차·전차 차단용 콘크리트 구조물… 도내 32곳대북 경계심 고조 1970년대 추정… 최소높이 1.5m전쟁 문화 유산 '용치'와 노르웨이 야전병원 '노르매시'는 우연히 발견됐다. 용치는 어느 날 집 밖의 한탄강을 바라보던 한 주민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대전차 장애물 용치 설치는 정확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용의 이빨(Dragon's Teeth)을 닮았다 해서 지어진 '용치(龍齒)'는 장갑차나 전차가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통로에 설치된 콘크리트 구조물로 경기도엔 32개소(고양 2, 양주 1, 연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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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9)] 동두천 보산동 구시가지 지면기사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 번쩍이는 신호등 /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동두천1·김명인)보산역에서 멎은 기차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떠난 기차를 뒤로하고 역사를 내려가자 기둥에 색색으로 이방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기다랗게 늘어선 좌판 매점은 일률적으로 문을 닫았고 이스탄불이라 쓰인 케밥 집에 아랍계가 모여 마작을 친다.미2사단 캠프 케이시 앞 '보산동관광특구'에 도착했다. 캠프 케이시는 한강 이북에서 가장 큰 미군 주둔지다. 한국전쟁으로 1951년 7월부터 미군이 주둔했는데 1990년대엔 1만2천명 수준에 달했다고 한다. 미군 주둔으로 사라진 '보안리'와 '축산부락'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 보산동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미군 주둔으로 사라진 보안리·축산부락 이름에서 딴 '보산'미2사단 캠프 케이시 앞 무질서하게 건물 들어섰던 60년대2007년 보산역 들어서고 광역교통망 개발로 유동인구 감소주둔병력 나날이 줄고 기지들 폐쇄·반환 잇따라 상권 축소1981년 동두천이 시로 승격했고 1997년 1월 보산동을 중심으로 중앙동, 소요동 일대가 보산동관광특구로 지정됐다. 동두천시 30년사는 "그 이전부터 미 2사단 정문 맞은 편에 위치, 미군 상대 나이트클럽·주점·상가 등의 영업. 내국인보다는 미국이나 외국인 상대. 1960년대부터 무질서하게 들어선 건물로 낙후되어 도시미관 정화와 지역경제, 도시 이미지 제고를 위해 관광특구 지정 개발 시작"이라고 설명한다.1997년 시작한 보산관광특구의 역사는 10년 뒤인 2007년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전철 개통이다. 2007년 지상 3층 규모의 선하역사로 보산역이 들어서면서 일대의 미군들이 이태원이나 용산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광역교통망 개발로 유동인구가 도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전형적인 빨대효과가 나타난 것이다.지난 29일 찾아간 보산동은 쇠락한 흔적이 역력했다. 보산동 구시가지를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3번국도(평화로)변과 신천 동측 구역으로 범위를 한정해 돌아봤다. 보산역 역사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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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8)] 교인들이 힘모아 세운 '수원교회' 본당 지면기사
수원시 팔달구 교동 2-7의 수원교회 본당이 조성된 건 1954년이다. 교회는 1946년 11월 27일 수원의 장로교 신도 12명이 가정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린 것에서 출발했다. 16일 교회 측 관계자는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중심으로 수원에 장로교 교회가 없다는 걸 아쉽게 생각한 교인들이 모인 것이 교회의 시작이었다"고 설명했다. 1956년 미군의 물자 도움으로 준공장로교 교회 필요, 신도들 직접 지어콘크리트 건물 외부 벽돌 감싼 구조1980년대 시국모임 등 거점 활용돼 인근에 '수원시 가족여성회관' 건물"행궁 하천 자재 가져다 썼다" 증언준공년도·육면체 화강암 외벽 비슷수원교회도 하천 돌들 사용 가능성 가족여성회관, 국가등록문화재 지정'뜨거운 역사' 수원교회도 가치 충분이들은 남창동 소재 일본인 불교사원을 빌려 예배처소로 사용해오다 1954년 1월 미 제5공군으로부터 2층의 건물 신축 물자를 받아 1956년 11월 교회를 준공했다. 미 제5공군으로부터 불하받은 건물이지만 미군이 교회 건축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신도가 직접 교회 건축에 참여했다는데 의의가 있다.북측으로 팔달산과 팔달공원과 붙어 있고 수원향교에 인접한 수원교회는 중동사거리·교동사거리 인근 수원 화성 팔달문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수원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교 교회인 수원교회(본관)는 장방향의 평면에 2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장변은 7칸으로 나눠 세로 돌출띠가 보이고 방형의 돌을 조적조(벽돌을 차례로 쌓아 올리는 방식)로 올렸다. 콘크리트 건물에 외부가 조적조 형태로 마감된 것인데 외벽 공사는 교인들이 손수 작업했다. 이런 마감 방식은 이천 양정교회, 화성 남양고등학교 건물과 유사하다.이천 관고동 양정교회(4월 18일자 11면 보도=[전쟁과 분단의 기억·(6)] 폐허 위 쌓아올린 신앙 '오산감리교회·이천 양정교회')도 수원교회와 마찬가지로 1956년 지어졌고 조적조 형태를 하고 있다. 외벽을 돌로 마감해 언뜻 보기에도 수원교회와 많이 닮았다. 수원교회가 교인들이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