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건축기행

  • [팔도건축기행·(21)] 시민의 손길로 되살아난 '70년 역사' 광주 동구 인문학당

    [팔도건축기행·(21)] 시민의 손길로 되살아난 '70년 역사' 광주 동구 인문학당 지면기사

    근대 건축의 멋 품은 문화공간으로 재탄생 삼각지붕 양옥·고풍스런 한옥 하나로 어우러져김난도 서울대 교수 어린시절 보내… 조부 건축2020년 주차장 부지 편입 철거 위기때 시민 한뜻지역 예술인 38명 전등·스테인드 글래스 등 제작인문자원 활용 주민 삶의 질 향상 '대통령상' 수상 '이야기를 품은 모두의 집'.광주의 핫플 동명동에 자리한 '동구 인문학당'(광주시 동구 동계천로 168-5)은 70여년된 근대 가옥과 신축 공간이 어우러진 '일상 속 인문형 복합문화공간'이다. 영화에 등장할 것 같은 삼각지붕의 양옥집과 고풍스런 한옥이 '하나의 집'을 이룬 독특한 건축미의 본채는 세월의 흔적을 최대한 살려 리모델링했으며 정원을 사이에 두고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마당의 붉은 벽돌 굴뚝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두 공간을 이어주는 존재다. ■ 개인의 공간에서 공공의 공간으로인문학당은 근대의 역사를 품고 있는 개인의 공간이 공공의 공간으로 확장된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 집의 주인은 완도 출신 김성채(1906~1987)다. 이리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도청에서 농업기술직으로 일하던 그는 임양금(1911~1987)과 결혼 후 동명동에 둥지를 틀었다. 해방후 구입한 동명동 일대의 땅을 당시 광주여자중학교(광주동명여중으로 개명) 부지로 저렴한 가격에 매도한 후 자금을 확보한 그는 이듬해인 1954년 지금의 자리에 당시에는 보기 어렵던, 한옥과 양옥을 접목한 집을 지었다.건물의 내력을 소개하는 자료가 전시된 본채에 들어서면 낯익은 인물이 쓴 글귀를 만날 수 있다. '트렌드 코리아'의 저자 김난도 서울대 교수다. "이곳은 저희 조부 김성채 옹께서 직접 보와 서까래를 지어올린 유서 깊은 공간입니다. 어린 시절 여기서 아우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습니다. 현대사의 영광과 상처를 묵묵히 견딘 오랜 추억의 터가 인문형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니, 감회와 감사의 마음이 씨와 날로 교차합니다."김성채의 손자인 김 교수는 광주를 찾을 때면 '꼭' 인문학당에서 강의를 한다. 건물은 한

  • [팔도건축기행·(20)] 순교의 순간마저 흔들리지 않던 견고한 아름다움 '서산해미읍성'

    [팔도건축기행·(20)] 순교의 순간마저 흔들리지 않던 견고한 아름다움 '서산해미읍성' 지면기사

    축성 600년 넘어… '서산9경' 중 으뜸 낙안·고창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읍성천주교 박해 현장… '국제성지'로 선포상부 올라갈수록 작은 성돌 쌓아 안정허튼층쌓기에 곳곳 바른층쌓기 흔적도서해안지역은 고려말부터 약탈을 목적으로 한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조선 초기 빈번한 왜구 침략을 막고, 해안 방어 등을 위해 병영성으로 축성된 게 서산해미읍성(충남 서산시 해미면·사적 제116호)이다. 태종 17년(1417년)부터 세종 3년(1421년)까지 석성으로 쌓았다. 성곽 총길이는 1천800m, 높이는 5m, 면적은 20여만㎡다. 해미읍성 안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근무하던 동헌을 비롯, 관아와 객사 등이 있었다.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시설물은 대부분 철거되고, 성안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병영성의 모습은 사라졌다. 1973년 정비에 들어갔고, 1997년부터 발굴이 이뤄져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해미읍성은 서산시가 관광객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서산9경' 중 단연 으뜸이다.■ 조선시대 3대 읍성축성된 지 600년이 넘는 해미읍성은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사적 제302호), 전북 고창군 고창읍성(사적 제145호)과 함께 원형이 잘 보존된 조선시대 3대 읍성으로 손꼽힌다. 병영성답게 적의 접근을 차단할 해자가 있었다. 해자는 성벽 주변에 인공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하천을 이용해 적의 접근을 막는 성곽시설이다. 현재 일부 구간에서 해자 복원이 진행 중이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시가 억센 탱자나무를 심었다. 해미읍성이 탱자성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이유다. 무엇보다 해미읍성이 지금까지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할 수 있었던 데는 고을 책임제의 역할이 컸다. 해미읍성 성벽에는 청주, 공주 등 각각 고을명이 새겨져 있다. 해미읍성을 쌓을 때 각 고을별로 정해진 구간을 맡도록 했는데, 성벽이 무너질 경우 그 구간의 고을이 책임을 졌다. 일종의 부실공사를 막기 위함이다. 그만큼 보다 더 책임감 있게 해미읍성을 쌓은 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충청병마도절제사영1416년

  • 한국인 신부가 건축한 한국형 성당의 이정표

    한국인 신부가 건축한 한국형 성당의 이정표 지면기사

    [팔도건축기행·(19)] 강원도 풍수원 성당 1801년 신유박해때 용인·이천 지역 순교자 유가족 40여명 정착옹기 구워 팔며 생활 꾸리다 박해 계속되자 더 많은 신도들 모여서울 '약현성당' 참고 설계한 정규하 신부, 신도들과 1910년 완성바실리카식 본채·로마네스크식 천장·고딕식 버트레스 등 적용풍수원 성당은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 유현1리 30에 터를 잡았다.해마다 전국에서 1만여명의 천주교인들이 찾는 성체헌양대회에 참여한다. 1920년에 시작해 6·25전쟁 기간 3년을 제외하고 해마다 열리고 있는 성체현양대회는 올해 6월 제101회 대회를 성대하게 치렀다.풍수원 성당은 한국인 신부가 지은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다. 서울 약현성당, 완주 되재성당,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 이어 국내에서 네번째로 오래된 서양식 성당이며, 강원특별자치도 내에 세워진 첫 번째 성당이기도하다. 1982년 1월3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됐다. 풍수원 성당은 갖가지 수식어 만큼 다양한 면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역사=풍수원(豊水院)은 '물이 풍부한 곳에 있는 관청'이란 뜻으로 역원(驛院)이 있던 곳이다. 역(驛)은 고려와 조선 시대 때 말을 갈아 타거나 쉬던 장소이고, 원(院)은 관원들이 공무로 다닐 때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이었다.신유박해 때인 1801년 치신처를 찾아 떠돌던 경기 용인, 이천 지역 순교자 유가족 40여명이 정착했다. 이들은 척박한 땅을 개간해 옹기를 구워 팔며 생활을 꾸렸으며 박해가 계속되자 더 많은 신도들이 풍수원으로 숨어들면서 점점 큰 신앙 공동체가 됐다.풍수원에 머물던 신도들은 신부나 성직자 없이 80여년 동안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1888년 본당을 설립, 초대 르 메르(Le Merre) 신부가 부임했다. 이후 1896년 2대 본당주임 신부가 된 정규하 신부(아오스딩)는 선종때까지 47년 동안 성당을 이끌었다.우리나라를 통틀어 세번째 신부인 정규하 신부는 1896년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강도영·강성삼 신부와 함

  • [팔도건축기행·(18)] 서귀포 본태박물관… 빛과 물, 함께 머물고픈 바람… 회색빛에 담긴 제주의 숨결들

    [팔도건축기행·(18)] 서귀포 본태박물관… 빛과 물, 함께 머물고픈 바람… 회색빛에 담긴 제주의 숨결들 지면기사

    '본래의 형태' 뜻을 빌린 인류 본연의 아름다움 탐구 프리츠커상 수상한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 설계노출 콘크리트와 자연의 조화… 건축 철학이 오롯이한국 전통 기와 돌담길·수벽, 박물관 트레이드마크최근 야외 호수 주변에 '푸른 사과' 영구 설치돼 눈길본태박물관(bonte museum)은 '本態, 본래의 형태'란 뜻을 빌려 인류 본연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기 위해 2012년 서귀포시 안덕면 상천리에 설립됐다.전통과 현대의 공예품을 통해 인류 공통의 아름다움을 탐색하자는 취지에서 계획된 박물관은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1995년)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안도 다다오는 '제주도 대지에 순응하는 전통과 현대'를 고민하며 설계를 진행했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노출 콘크리트에 자연의 숨결과 따뜻한 색감을 지닌 한국 전통공예품을 담아 담백한 목조건물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본태박물관은 노출 콘크리트와 빛 등 자연적 요소를 잘 담아내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 철학이 가장 잘 담긴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건물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동선에 있는 한국 전통 기와 돌담길과 수벽(水壁, 물이 흐르는 벽)도 박물관의 트레이드 마크다.박물관 동선은 입구인 주차장부터 건물 내부까지 짧은 거리를 의도적으로 길게 늘여 구불구불 돌아가도록 설계됐다.안도 다다오는 건물 외부 곳곳에 독립적인 벽체를 사용해 동선을 유도하거나 앞으로 펼쳐질 공간을 의도적으로 단절시키는 등 관람객의 호기심을 유발하도록 했다.전시관 갤러리는 개관 당시 2개에서 지금은 5개로 늘었다.제1관은 1층에서 2층까지 복도 없이 한 공간으로 조성됐다. 박물관 고문인 이행자 여사가 30여 년간 수집한 조선시대 목공예품인 소반을 비롯해 자수, 보자기, 병풍, 도자, 장신구, 가재도구, 전통복식 등 우리나라 전통 공예품이 전시되고 있다.제2관은 깊은 처마 아래로 높은 홀과 주전시실이 연결되는 개방적인 공간으로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페르낭 레제, 백남준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현대미

  • [팔도건축기행·(17)] "정조가 머무는 곳" 수원 '화령전'… 훼손 위기 때마다 지켜온 시민들

    [팔도건축기행·(17)] "정조가 머무는 곳" 수원 '화령전'… 훼손 위기 때마다 지켜온 시민들 지면기사

    정조가 일군 최고의 걸작 수원화성 내에승하한뒤 어진 모시기 위해 세운 건축물역대 임금들도 융건릉 능행차 길 작헌례영전 건축제도 계승하며 고유 특색 갖춰복도각을 사이에 두고 정전·이안청 근접정전 중앙에 합자… 좌우 익실 갖춘 구조일제시대엔 각종 행사장 목적 활용 수난시민들 지킴이 자처, 성금·힘 모아 수리대부분 원형 그대로… 2019년 보물 지정요즘은 수원 밖에서도 유명해진 화성행궁 바로 옆엔 행궁보다 덜 알려졌지만 더 중요한 건축물이 있다. 235년 전 화성행궁을 건립한 정조(조선 22대 임금, 1776~1800년 재위)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화령전(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이다. 어진을 봉안한 전각을 '영전'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전주한옥마을 근처의 경기전(태조 어진 봉안)과 이 화령전만 남았다.현재의 화성행궁과 수원화성이 전국 방문객을 끌어모으고, 수원화성이 정2품(지금의 장·차관 또는 도지사) 유수가 다스리는 유수부의 행정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화령전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에도 순조와 헌종, 철종, 고종 등 융건릉 능행차 길에 오른 조선 임금들이 참배에 그치지 않고 매번 화령전을 찾아가 다시 한번 정조에게 잔과 절을 올린 작헌례(酌獻禮)를 치렀다.화령전에서 운한각과 이안청, 복도각 등 건물 3동은 조선시대 왕실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창건 당시 원형이 대부분 남아 있다는 평가를 받아 5년 전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됐을 만큼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정부 정책에 따라 정조의 어진이 화령전을 떠난 뒤 병원·행사장·사무실 등 엉뚱한 목적에 쓰여 화령전이 낡거나 훼손될 때마다 수원시민들이 십시일반 성금과 힘을 모아 건물을 수리하는 등 화령전 지킴이를 자처한 것도 이 같은 위상 때문이었다.수원시화성사업소 오선화 학예사는 "수원사람들에게 화령전은 곧 정조"라며 "그가 일궈낸 최고의 걸작 수원화성에 정조의 어진이 머물렀고, 지금도 머물고 있는 공간이 화령전이기에 건축물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된다"고 화

  • 대구건축 선구자 김인호… 전통·지역성 품은 실험적 작품 남겼다

    대구건축 선구자 김인호… 전통·지역성 품은 실험적 작품 남겼다 지면기사

    [팔도건축기행·(16)]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시민회관, 경북체육관 문화예술회관, 공사기간 중 작고 '마지막 유작'한국적 주체사상 강박관념… 과도기 건축표현시민회관, 당시 시대의 문화·경제·정치 담겨1975년 개관… 2013년 콘서트 전문홀 재개관경북체육관, 시민모금… 신라 화랑 투구 형상노후화·접근성 문제 등 '재생-철거'의 갈림길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전쟁의 폐허를 지나고서 1960년대 조국 근대화의 시기에 비로소 근대건축을, 80년대 올림픽을 맞아서 우리의 현대건축을 세우게 되었을 것이다. 급변의 시간 속에서 겨우 남겨진 근대건축의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대구건축의 선구자 김인호는 현대건축과 아울러 불국사 조영 계획, 영남제일문, 경주화랑 연수원 등을 설계하며 전통건축 고찰 논문들을 남긴 대학교수(청구대학)였다. 그의 건축에는 전통과 지역성에 대한 실험적 표현들이 내재하며 지나치게 세련되거나 일률적인 설계로 정형화하지 않았다.'한강 이남에서는 대구의 건축 수준이 높고 가장 활동적이었다'라고 회자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바로 후당 김인호 선생(대아건축)이 활동했던 그 시절이었다. 대구의 건축가이면서도 서울 잠실야구장을 비롯, 대전 충무체육관, 원주 치악체육관 등 전국적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즈음에 이곳 시설들을 설계한 별들이 연이어서 떨어졌다. '잠실종합경기장' 설계자 김수근은 86년 6월(55세)에, '올림픽 기념조형물' 설계자 김중업은 88년 5월(66세)에, '잠실야구장' 설계자 김인호는 88년 7월(56세)에 타계하였지만 짧은 생에 굵은 작품들을 남겼다.30여 년을 시민과 함께하고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 증개축하여 '대구 콘서트하우스'로 재탄생한 과거 '대구시민회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사라질지도 모를 '경북체육관(현, 대구체육관)' 건축을 조명해 본다.■ 대구문화예술회관- 30년 세월과 공간의 건축서울 세종문화회관(1978년)을 시작으로 80년대부터 각 지역 도시에 건립된 문화예술회관은 그 도시 위상

  • [팔도건축기행·(15)] 바위산에 수정꽃 피운 김수근… 마산 양덕성당서 노동자 희망의 싹 틔웠다

    [팔도건축기행·(15)] 바위산에 수정꽃 피운 김수근… 마산 양덕성당서 노동자 희망의 싹 틔웠다 지면기사

    1970년대 수출자유지역, 노동자 몰려들어 장시간 노동·저임금·주거 등 문제 떠올라박기홍 신부, 힘든 이들을 위해 손 내밀어'현대 건축 거장' 김수근의 종교 건축 서막꽃봉오리 주변으로 꽃잎 감싸는 형상 눈길마산 양덕성당은 대한민국 현대 건축의 거장 고(故)김수근 건축가의 종교 건축 서막을 연 공간이자 불광동성당, 경동교회와 함께 그의 3대 종교 건축물로 꼽힌다.마산역에서 도보 7분. 잠깐 걷다보면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와 건물 사이 위치해 있는 양덕성당을 발견할 수 있다.마산 양덕성당은 45년여 세월 동안 도민들과 시대를 함께 살아오면서 어떤 이에게는 평안과 위로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종교를 믿거나 믿지 않아도, 가난한 마음일 때도 주저 없이 갈 수 있는 공간, 이곳에서 살아갈 힘을 되뇌인다.다른 누군가에게는 건축학적 미학을 발견하는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안겨준다.■ 45년 지역민 삶과 애환 스민 곳=1970년대 마산은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됐다. 노동집약산업인 섬유, 의류, 봉제, 전자 등 일본기업들을 유치하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마산으로 몰려들었다. 양덕동은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이 가까워 가난한 노동자들이 셋방을 얻거나 기숙시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동네였다. 일에 지친 노동자들을 위한 주거와 복지, 교육 등이 현안 문제로 떠올랐다.당시 박기홍(Josef Platzer) 양덕성당 주임신부는 마산교구로부터 허락을 얻고 고향인 오스트리아 그라츠 교구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가톨릭여성회관을 지었다. 가톨릭여성회관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사문제 상담부터 인간다운 삶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최소한의 복지를 위한 주거지원에 이르기까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산교구가 양덕동에 본당을 신설하기로 하고 박기홍 신부를 본당신부로 임명했다. 그는 임시성당을 가톨릭여성회관 안에 두고 회관 강당에서 미사를 하며 본 성당 설계를 계획했다. 이때 그는 회관 길 건너편에 새 성당 부지를 마련하고 김수근에게 마산자유수출무역지역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한 성당을 지어

  • [팔도건축기행·(14)] 조선왕조 500년 지켜온 전라감영 위엄… 민주주의는 들불처럼 번졌다

    [팔도건축기행·(14)] 조선왕조 500년 지켜온 전라감영 위엄… 민주주의는 들불처럼 번졌다 지면기사

    전주 풍남문 인근에 위치한 '전라도의 심장부' 경상·충청감영과 달리 한 번도 이동하지 않아전라감사가 행정·사법·군사업무 보던 선화당동학농민군과 조선관군이 '전주화약' 맺기도농민운동 좌절됐지만 갑오개혁 이끈 큰 의미전북의 대표 관광지인 전주 한옥마을 인근에 위치한 전주 풍남문은 조선 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출입문으로 성벽이 헐린 후에도 유일하게 남아 있다. 전라감영은 이곳에서 걸어서 7분 거리에 있다.전라도의 심장부였던 전라감영은 경상감영과 충청감영과는 달리 한 번도 이동을 하지 않았고 평양감영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고 한다.■ 전라감사 집무실 선화당과 250년 회화나무전라감영 입구에는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로 진을 옮긴 후 임금께 올리는 장계에 썼던 이 말의 뜻은 전라도는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전라도가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말이다.전라도가 우리나라에서 어떤 지역이었는지 알려주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비석이다.내삼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전라감사가 집무실로 쓰던 선화당이 정면으로 보인다. 선화당이란 왕명을 받들어 교화를 펼친다는 뜻이니 이곳은 전라감영의 심장이자 조정의 파견 관리소였다. 감사는 이곳에서 행정·사법·군사의 업무를 보았다.선화당 앞 섬돌 아래 왼쪽(동편)에는 가석이 있고 오른쪽(서편)에는 폐석이 자리하고 있다. 가석은 죄인들에게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표석이고 폐석은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신문고 역할을 한 표석이다.선화당 오른쪽 방에는 전주 역사박물관에서 고증한 전라감영의 옛 모습이 디지털 영상과 배우의 음성으로 복원돼 있다. 특히 이곳 선화당에는 회화나무가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라감영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 현존하는 유일한 흔적이다. 수령이 250년 된 이 나무는 전라감영의 역사와 함께해 온 덕분에 복원 과정에서 선화당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82년에는 보호수로 지정돼 꾸준히 관리받고 있다.전라감영은 '야경 맛집'으

  • [팔도건축기행·(13)] 강물이 '위로'… 고개를 들어요 '여수 GS칼텍스 예울마루'

    [팔도건축기행·(13)] 강물이 '위로'… 고개를 들어요 '여수 GS칼텍스 예울마루' 지면기사

    GS칼텍스-여수시가 조성한 복합문화예술 공간 땅 재단하는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 설계폭 21m·길이 152m 달하는 푸른 유리지붕 압권망마산 정상서 계곡을 따라 물 흐르는 모습 연상수준 높은 전시·공연 진행… 시민 문화욕구 충족"유리의 강(Glass River)을 만들자."현장을 방문한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는 여수 망마산과 장도를 직접 걷고, 행정선에 올라 바다에서 현장을 바라본 후 떠오른 콘셉트 디자인을 거침없이 그려냈다. 망마산 정상에서 계곡을 따라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폭 21m와 길이 152m에 달하는 푸른 유리지붕(Glass River)은 GS칼텍스 예울마루(이하 예울마루)의 상징이 됐다. 산과 바다와 섬이 만나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그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건축물은 서로 순응하며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낸다.■ 자연과 하나 된 친환경 건축예울마루는 시민 삶의 질 향상과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개최 도시에 걸맞은 문화예술 인프라 구축을 위해 GS칼텍스가 여수시와 함께 여수시 망마산과 장도 일원의 약 70만㎡(21만여 평) 부지 위에 조성한 복합문화예술 공간이다.2007년 여수 시민 대표와 전문가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조성사업은 2021년 망마산 전망대 및 산책로 조성사업이 완료됨에 따라 10여년의 대장정이 마무리돼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1단계인 망마산 기슭의 주공연장은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에 맞춰 개관했고, 예술가들의 창작스튜디오와 전시장, 카페, 교육실 등으로 이루어진 2단계 예술의 섬 장도사업은 2019년 완공됐다.프랑스국립도서관(미테랑 도서관), 독일 베를린올림픽 수영장,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공연장을 설계한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는 '땅을 재단하는 건축가'로 불린다.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디자인을 지향하는 그는 특정 건축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주변환경과 조화를 고려한 독창적인 설계로 이름이 높다. 특히 주요 시설물을 땅속으로 집어넣는 것이 특징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이화여대 이화캠퍼스

  • [팔도건축기행·(12)]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 믿음이 빚은 숭고한 유산, 순례길 첫걸음을 내딛다

    [팔도건축기행·(12)]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 믿음이 빚은 숭고한 유산, 순례길 첫걸음을 내딛다 지면기사

    350년 넘는 국가보호수와 고목 어우러져 풍경 깊이 더해 사계절 아름다운 건축물순교자 32위 모신 성지, 순례길 시작구간드비즈 신부 설계로 1922년 서양식 완공고딕양식 장식 배제한 한국식 벽돌 고딕충남 아산 인주면에 위치한 공세리 성당은 충남도 지정문화재 144호로 12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성당이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아홉 번째, 대전교구에서는 첫 번째로 설립됐다. 사계절 다른 아름다움이 있는 성당은 신도뿐만이 아니라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명소로 주변에는 350년이 넘는 국가보호수 4그루와 그에 버금가는 고목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풍경에 깊이를 더한다.2005년 한국관광공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하며 '미남이시네요', '태극기 휘날리며', '아이리스2' 등 지금까지 약 70여 편이 촬영됐다.■ 공세리 성당의 시작공세리 성당은 18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공세리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Emile Pierre Devise, 1871-1933)가 1897년 다시 공세리로 부임해왔을 때 성당 건립을 위해 대지를 매입한 사실이 '구한국외교문서'의 기록을 통해 확인됐다.드비즈 신부와 프랑스 공사관의 노력을 통해 성당 부지의 소유권을 조선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성당 건립을 시작, 1899년 성당과 사제관, 사랑채를 완공해 합덕 본당의 퀴트리에 신부가 참석한 가운데 낙성식을 개최했다.준공된 성당은 '한옥 성당'으로 성당으로서의 집회 기능을 충족하면서 우리나라 토착 문화를 그대로 전승했다. 사제관과 연결된 'ㅁ'자 평면형으로 흙벽과 기와지붕, 마룻바닥 외관 등 한옥 목조건물 모습으로 알려졌다.드비즈 신부는 이후 기존 본당이 증가한 신자를 수용하기에 협소해지자 새롭게 서양식 성당을 설계하고 공사를 시작해 1922년 10월 8일 충청도 내 최초의 서양식 건물을 완공했다.■ 에밀 드비즈 신부드비즈 신부의 세례명은 에밀리오, 한국 이름은 성일론이다. 1871년 프랑스 남부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