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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원효를 만나다·10]에필로그, 효의 본산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학석·전상천·민정주기자]길이 끝나자 또다른 길이 시작된다. 산을 넘으면 저 먼 곳에 또 산이 보인다. 길은 단 한번도 멈추거나 끊어진 적이 없는, 항상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당나라 유학의 길 종착지에서 원효는 평생을 안고 살았던 부처님의 가르침, 그 참 진리를 깨닫고 또다시 길을 떠났다. 모든 부귀영화를 뒤로한 채 민중을 위한 대승불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고난의 길을 간 것이다.취재진은 원효 길 끝에서 서 있는 설총을 만났다. 원효가 요석공주 사이에 낳은 아들인 설총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하지만 설총은 아버지를 끝없이 섬겼다. 설총은 경산 초개사에 있는 아버지를 뵙기 위해 맞은 편 산에서 책을 읽으며, 아버지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표하기도 했다. 또 열반한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아버지가 수행한 분황사에 안치하고 지극한 예를 올렸고, 소상이 원효의 아들 설총을 돌아봤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애틋한 사이였다.불교에서 '효'(孝)란 모든 행복의 근원이다.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는 것은 단지 부모를 잘 봉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참 행복을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의 행복은 곧 나 자신의 행복과 직결되기 때문에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는 게 가르침의 요체다. 원효길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화성 용주사와 융·건릉, 수원 화성행궁은 우리나라 '효의 본산'이다. 효의 도시 '수원·화성'에서 만난 정조, 그의 효심은 원효 트레일 대장정의 끝이 아니라 또다시 찾아나서야 할 '행복'이었다.■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결정체, 용주사개발 찬반 논쟁으로 세간을 시끄럽게 한 화성 태안지구로 들어간 취재진은 우선 용주사로 올라갔다. 경내를 가로질러 효행박물관 앞에 이르자 전국 사찰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길을 따라 전시돼 있다.때마침 용주사는 해마다 열어온 승무제 준비에 한창이었다. 시인 조지훈이 용주사에서 머물며 지은 시가 바로 '승무'다. 용주사는 동네 어른들을 모시고 음식을 대접하는 등 스님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효를 몸소 행하고 있다.용주사는 정조대왕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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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원효를 만나다·9]새로운 세상의 문, 평택과 당성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학석·김종호·전상천·민정주기자]'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고, 마음은 모든 것에 있다'.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는 한 무덤에서 해골 물을 마시고 대오각성했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간밤에 목이 말라 마실 때 그렇게도 달콤했던 물맛이, 뒤늦게 해골에 고인 썩은 빗물임을 알고는 구역질까지 한 자신의 모습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천년 전 당나라 뱃길이 있던, 지금의 평택 포승과 화성 남양 사이 어디선가에서 원효는 다시 발길을 돌려 민중세상의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대승불교를 일으킨 것이다. 대중국 전초기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평택항은 미2함대가 주둔하고, 중국을 비롯해 동아시아로 가는 배들의 정박지다. 예전엔 대진나루로 소금과 쌀을 실은 배들이 오가던 주요 해로가 있던 곳이다. 화성 남양의 당성은 옛 서역 문물이 유입되거나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 등으로 길을 떠나던 당항성이다. 원효가 머물렀을지도 모른다는 학계내 논란은 여전하지만 당시 당나라로 향하던 뱃길이었음은 분명하다. 당나라로 떠나기 전 고국에서의 마지막 밤에 역사를 변화시킬 뜻을 깨달았던 원효의 길, 시작이자 끝이었던 서해 바닷가에 서 본다.■ 오도성지 수도사한국 해군 이전으로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 이주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산으로 올라가면 조우할 수 있는 '수도사'.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득도한 곳으로, 염거가 창건하기 전에도 작은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원효가 이 근처에서 유하다 해골물을 먹고 뒤늦게 일체유심조의 깊은 뜻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했다고 기록됐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겠느냐'(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는 각성에 신라로 돌아간 것.평택시가 원효의 도시임을 주창하는 근거이기도 하다.평택시는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수도사에 참선을 경험할 수 있는 토굴 체험관을 만들 예정이다. 수도사 경내에 한꺼번에 10여명이 앉을 수 있는 토굴 1식을 만들어 일반 중생이 몸소 원효대사의 깨달음을 가상 체험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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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원효를 만나다·8]과거와 현재, 공존의 도시 안성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전상천·민정주기자]길에서 만난 원효는 온 몸으로, 시와 노래로 춤을 춘 이다. 시인 고영섭은 '분황원효'에서 화엄경 십회향품을 주석하던 원효가 시의 연꽃을 피우기 위해 이내 붓을 꺾고 절 문을 뛰쳐 나가 벌판에 법석을 차리게 한 뒤 변문과 탈춤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새벽 문을 열었다고 노래하기도 했다. '예향의 도시 안성은 이젠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예술 기행지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고은 시인과 유명 드라마 작가 김수현, 영화 '왕의 남자'로 유명한 줄타기 예능보유자 김대균씨 등 안성에 머물거나 지나간 유명 예술인들만 줄잡아 400여명에 달한다. 특히 청록파 시인 박두진 기념비와 조병화 기념관 등 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의 문학을 일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안성맞춤'의 도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역사박물관이기도 하다. 도시 곳곳엔 과거와 현재의 삶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신라 석남사와 고려 봉업사지, 일죽산성, 향교 등 1천년의 역사문화재와 구포동성당과 중앙제일교회 등 근대문화 유산, 죽산향교 등이 고스란히 보전돼 있다. 특히 안성은 칠장사 등 삼절이 불교를, 미리내 성지 등이 천주교를, 100년된 중앙제일교회가 기독교를, 죽산향교 등이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상징하며 한국 정신문화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 천년 역사를 복원하라, 봉업사지(奉業寺址)여주에서 이천 장호원을 가로질러 안성 일죽에서 공도 방면으로 나아가면 시대의 흐름을 온 몸으로 느끼며 여행할 수 있다. 하지만 취재진은 '금강산도 식후경'인지라 전국 쌀중 최고로 손꼽히는 이천쌀밥으로 점심 끼니를 때운 뒤 바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성에 첫 발을 디디면서 마주친 것은 고려시대에 나라 창업의 뜻을 받들던 봉업사지. 지난 1966년 공사 도중 유물이 우연히 발견, 그 가치를 재조명받기 시작했지만 정작 황량한 터만 남아있어 위정자들의 무관심이 이내 미워졌다. 고려 오층석탑(보물 435)과 당간지주, 신라말 석불입상(보물 983), 그리고 동으로 만든 징과 북 모양의 반자(飯子:보물 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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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원효를 만나다·7]푸른용이 여의주를 물다 지면기사
[경인일보=글┃박승용·전상천·민정주기자]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깊은 산 작은 샘물에서 발원된 물들이 모여 냇가를, 곳곳에서 모인 작은 물줄기는 강이 되어 흘러간다. 세상의 가장 높은 처소에서 스스로 낮은 곳을 찾아가는 강줄기는 세상의 좋은 것들만 아니라 나쁜 것까지 모두 품어 바다로 모여 너나 없이 하나가 된다.귀족 출신의 원효도 스스로 서민 대중과 고통받는 하층민 등을 끌어 안기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갔다.요석궁의 과부 공주와 짧은 인연을 맺어 아들 설총을 낳고 스스로 승복을 벗어던진 채 소성거사(小姓居士)를 자처한 그는 지방촌락이며, 시장거리와 뒷골목을 승려가 아닌 세속인의 모습으로 내려가 살아갔다. 자신을 한없이 낮춰 민중의 벗이 된 원효는 가난한 사람과 천민, 거지, 어린 아이들까지 염불을 따라 부르며 정토의 바다로 나아갔다.'내륙의 바다'라 불리는 충주호를 끼고 있는 충주 창룡사와 석종사, 남한강이 흐르는 여주 신륵사를 찾았다. 그 곳에는 물의 전설과 함께 사찰을 지키고 가꿔온 사람들이 빚어낸 아름다운 정취가 찰랑거렸다. 특히 도자의 고향 여주에선 백성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함에 '한글' 창제로 사랑을 표하신 세종대왕과 '북벌의 꿈'을 꾼 효종, 그리고 비운의 민비 등을 만나 아픈 역사를 곱씹었다.■ 충주 금봉산의 쌍절, 창룡사와 석종사온천의 도시 충주 수안보에서 하룻밤을 유한 뒤 게으름을 탓하며 내달려 간 곳은 창룡사. 충북 충주 직동에 자리한 이 절은 원효가 신라문무왕(재위 661~681)때 지었다. 수행중 잠이 든 원효는 꿈에서 나타난 푸른 용이 여의주를 물고 가는 것을 하염없이 쫓아가던 도중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아 느티나무 아래 우물가에 서 있는 아름다운 처자를 보았다. 그 처자는 지친 원효에게 표주박으로 물을 떠주면서 "이 곳은 참 좋은 곳입니다. 스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하고 물었다. 꿀처럼 단 물을 마신 뒤 잠에서 깬 원효는 그것이 관음보살의 현몽인 것을 알고 꿈속의 장소를 찾아 충주 금봉산 중턱에 아미타불을 모시게 됐다고 전해진다. 어느 사찰이든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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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원효를 만나다·6]잃어버린 천년길 '하늘재' 지면기사
[경인일보=]길은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면 잊혀진다. 원효의 길이 천년의 시간이 지나 지금 우리네 기억에서 '박제'가 됐듯이, 옛 길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월악산 국립공원을 관통하는 문경의 고갯길 '하늘재'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문헌상 가장 오래된 길로 기록된 하늘재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까지 문경서 충주를 지나 서울, 한양·개성을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할 교통로다. 하지만 조령문, 문경새재 도로가 나기 전까지 사람이 다니던 이 길은 지금, 잃어버린 역사의 길이다.원효가 지란지교(芝蘭之交)인 의상대사와 2차례나 함께 넘었던 문경 하늘재는 우정의 길이다. 불심의 높고 낮음을 경쟁했던 두 사람은 전국을 이분(二分), 천년사찰을 세웠던 평생지기다. 한양길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고갯길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발길을 멈춘채 눈물을 참고, 고향 부모님을 향해 절을 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천년전 이 고갯길을 넘었던 원효·의상의 꿈이, 그 황금같은 우정이 아련하기만 하다.■ 청운의 꿈을 좇는 길, 문경새재문경은 도시 전체가 우리나라 문화지리의 보고이자 박물관이다.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의 소통로로서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불리던 '문경새재'(명승 제32호)가 있다. 또 우리나라 최고(最古, 서기 156년 개척)의 고갯길인 '하늘재'말고도 옛길의 백미(白眉)이자 한국의 차마고도로 일컬을 수 있는 '토끼비리'(명승 제31호) 등 국내의 내로라(?)하는 길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조선 태종 14년(1414)에 개통된 이후로 약 500년 동안 한양과 영남을 잇는 주요 교통로인 문경새재. 당시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고개는 모두 3개로 추풍령과 문경새재, 죽령이 있었으나 문경새잿길이 열나흘 길로 가장 빨랐다 한다. 유독 과거시험 치르 가는 선비들이 '장원급제 길'로 부르며 문경새재로만 한양으로 가기를 고집한 데는 추풍령은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는 점에서 회피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문경새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옛 길에는 이 곳을 지나는 길손들 중 한 개의 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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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원효를 만나다·5]원효, 우리네 가치의 재발견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전상천·민정주기자]압록강에 이어 한국에서 두번째로 긴 낙동강. 유구한 역사를 도도하게 흘러온 이 강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안동 하회마을 등 각종 보고(寶庫)를 껴안고 있다. 원효의 길은 우리 민족의 삶이 스며든 터전과 문화재, 그리고 정신문화유산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의미가 더 크다.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 등을 방문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한국 문화의 가치를 몸소 체험하고 돌아가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비를 피해 유했던 문경 오미자체험마을은 천년을 넘도록 재배해 온 오미자로 와인과 비누를 만드는 등 오미자의 가치를 재발견, 고향을 떠난 젊은이들이 되돌아올 정도로 아름다운 농촌을 일궈가고 있어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정신문화의 원형, 안동 하회마을낙동강 700리가 시작되는 상주 끝에서 취재진은 빗속을 뚫고 25번 국도를 따라 안동에 접어들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씨족마을인 안동의 '하회마을'은 수백년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채 세월 앞에 납작 엎드린채 우리를 반겼다.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하회마을은 안동의 역사를 도란도란 전해줄 것 같은 아름드리 나무와 방문객의 발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 마을 한 쪽의 그네, 절경을 이루는 절벽 앞의 나루터 등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또 구불구불 나있는 골목길들은 사람들이 나란히 걸어갈 때마다, 멀찍이서 마주보고 오는 이들과 마주치거나 뒤엉켜 지나칠 때 보드라운 흙을 바스러뜨리기도 했다.궂은 비를 맞는 여행객들은 으레 마음이 급해진다. 여행을 망치지 않기 위해 처마밑으로 서둘러 비를 피하려 한다. 그러나 하회마을에서 만난 여행자들은 그렇지 않다. 우산을 받쳐 쓰고 고즈넉이 펼쳐진 경치를 감상하며 팔자 걸음을 걷는다. 우산을 펴지 않은 이들도 여유롭게 비를 맞으며 고촌의 정취에 자신을 맡긴채 남쪽으로 물러가는 비구름에 손을 흔들며 그 분위기에 오히려 녹아드는 듯했다. 시야를 가리는 고층 빌딩이 없는 이 곳에서 사람들은 대화와 사색할 여유를 갖게 된다. 발바닥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흙길도 땅을 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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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원효를 만나다·4]천년사찰, 머무름과 깨달음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전상천·민정주기자]길에서 만난 천년사찰은 감히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긴 시간을 이어주는 징검다리로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했다. 사찰 곳곳의 나무와 꽃, 풀, 창공을 날아가는 새들은 여전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오직 옛사람의 자취만 찾을 수 없었다.대구와 구미, 상주 등지에서 만난 신라시대 사찰들은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불교의 숨결을 들려줬다. 대구 팔공산 천년사찰인 '동화사'에서 머문 하룻밤, 템플스테이(Temple Stay)에선 원효의 길, 그 뜻을 쫓겠다던 우리에게 '과욕'은 곧 '실체없음', 의미없는 것임을 깨닫게 해줬다.■ 대구 팔공산 동화사먼동이 트기 전 동화사 대웅전 앞에서 새벽 예불의 시작을 기다리던 새벽 3시30분께. 동자승이 산사를 돌며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 잠들었던 사찰내 곳곳에 불이 밝혀졌다. 선방에서 흘러나온 따스한 불빛들은 팔공산을 뒤덮은 어둠을 조용히 물리치고 있었다.원음각에선 두 명의 스님이 목탁 대신 북채를 잡았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법고를 번갈아 두드렸다. 축생들의 고통을 쉬게하기 위함이다. '둥 둥 탁 탁 둥 둥 탁 탁 둥둥 탁탁 둥둥 탁탁 둥둥탁탁 둥둥탁탁 둥둥탁탁둥두탁탁둥둥탁탁 탁탁탁탁탁탁탁……'20여분간의 계속된 북소리는 세속의 분진으로 때가 탄, 잠들어있던 영혼을 깨웠다. 자신을 잃고 살아온 중생들의 귓가를 타고 들어가 눈을 다시 뜰 것을 재촉하는 듯하다. 지옥중생을 비롯, 일체 중생의 해탈을 위한 범종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수중 중생을 위해 목어, 허공세계에 사는 중생인 날짐승의 해탈을 염원하는 구름 모양이 새겨진 운판의 두드림이 팔공산 자락을 타고 울려 퍼졌다. 온 몸이 땀으로 찬 스님들의 의식 하나하나가 우리를 전율케 했다. 이어 대웅전에서 큰스님이 주관하는 예불을 알리는 스님의 청아한 목소리가 산사를 뒤흔들어 깨웠다. '시방세계에 두루 계시고 과거와 현재, 미래에 항상 존재하는 모든 부처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고, 바다처럼 넓고 깊은 부처님 가르침에 목숨을 다해 귀의하겠다'는 예불소리가 팔공산을 뒤흔들었다. 무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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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원효를 만나다·3]대승불교 만개한 '경주'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전상천·민정주기자]원효의 대승불교가 만개한 경주. 경산에서 시작된 원효의 발길이 민중을 만나 '대승불교'를 꽃피웠던 경주는 '불교'와의 조우를 통해 한국 정신문화의 뿌리가 됐고, 그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다.경주 길가의 기왓장 한 조각에서도 신라 천년의 벅찬 숨결이 느껴지고, 분황사 등 경주 곳곳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귓가에 바람으로 전하는 '무애의 도' 즉, 원효의 정신이 서려있다. 일출이 솟기도 전에 취재진을 뒤흔들어 깨운 원효는 새벽과 한낮의 경주, 그리고 오후의 경주의 맨낯을 보여주며 "왜 '민중'(民衆)에, 그리도 천착했는지를…", "이 시대에 이 길로 우리를 불렀는지"를 끊임없이 속삭였다.■ 민중에게 '해' 처럼 다가선 원효경주 서라벌 도요지에서 첫날 밤을 지낸 취재진이 무거운 눈꺼풀을 걷어낸 것은 8월 24일 새벽 4시 30분. 토함산 새벽 연무를 뚫고 새색시마냥 제모습을 드러낸 일출은 보는 이의 가슴에서 '붉은 심장'이 돼 버렸다. 먼 바다 저편에서 수십여개의 산 봉우리를 넘어서 우리를 뒤덮은 햇살은 그 자체가 희망이고, 열정이 돼 우리의 기억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이어 찾은 불국사는 산사의 다른 절들과 차별화 된 웅장함이 느껴진다. 지금도 수많은 불제자 등이 즐겨 찾는 이 곳은 한번쯤은 학창시절 수학여행이나 MT 등을 통해 찾아본 곳일 게다. 영화 '신라의 달밤'이 공전의 히트를 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곧이어 찾은 곳은 연등이 하늘을 가릴 것 같았던 분황사. 취재진이 찾은 날은 공교롭게도 불가에서 부처의 탄생과 출가, 성도, 열반일을 합한 4대 명절에 더하여 우란분재(盂蘭盆齋·음식을 죽은 자의 영혼에 바쳐 거꾸로 매달려진 고통을 구한다는 뜻)로 섬기는 5대 명절인 '백중'이라 사람들로 크게 붐볐다. 중국 유학을 포기한 원효가 오랫동안 수행한 분황사에는 '혈사'(穴寺)에서 열반한 원효의 유해로 만든 소상이 안치돼 있었다. 고려시대에 화쟁국사(원효를 일컬음)비가 세워진 곳이기도 한 분황사의 석탑은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있는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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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원효를 만나다·2]원효의 고향 '경산' 지면기사
[경인일보=전상천·민정주기자]경산은 원효와 그의 아들 설총,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등 삼성현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특히 원효가 몇몇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열반으로 이끄는 소승불교의 벽을 뛰어넘어 모든 민중, 중생구제를 위해 대승불교를 출발시켜 역사적으로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경인일보 취재팀이 지난 8월23일 찾은 경산 반룡사 등에는 천년전 원효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어 고된 여행길이 즐거움 그 자체였다.■ '대승불교의 발흥지'=취재팀이 먼저 찾은 곳은 초개사. 신라 진덕여왕 2년(648)에 원효가 출가한 뒤 자신의 집을 희사해 창건한 절이다.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와 초개사를 연 뒤 두문불출한 채 수행에 전념했다고 전한다. 이에 설총이 초개사에 있는 아버지를 뵙기 위해 맞은 편 산에서 책을 읽었으나 원효가 외면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5층탑의 하대석 7점이 절터에서 발견됐다.지금은 39㎡ 정도의 아담한 법당을 다시 짓고있다. 12월이면 속세로 뛰어들어 불교를 민중의 곁에 두고자 했던 원효의 뜻을 담은 초개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초개사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설총이 어린시절을 보낸 총지(설총의 아명)사가 있다. 이어 원효가 태어난 밤나무밭에 가봤지만 저수지와 군부대가 덩그러니 차지하고 있어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바티칸 성당에 비유되는 제석사 불화'=400여년전 한 농부가 밭갈이를 하다가 발견한 불상과 탑신을 모신 경산 지인면 북사리의 제석사.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었다고 하나 확실한 고증자료는 남아있지 않다.취재팀이 제석사 법당 내벽에서 발견한 원효의 일대기를 그린 불화 10편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의 일생을 생생하게 보여줘 마치 바티칸 성당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지창조화를 보는 듯했다.원효 불화중 유난히 눈길을 끈 것은 원효가 무애사상을 바탕으로 민중 속에서 활동하는 모습과 백고좌회에서 설법하는 모습. 백고좌회는 당시 신라시대 100명의 고승이 참가하는 인왕경대회이지만 원효는 높은 학식에도 불구, 파격적인 행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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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원효를 만나다·1]프롤로그 '원효 길' 지면기사
[경인일보=전상천·민정주기자]'길'은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대를 연결해 주는 통로다. 수천년 역사의 '흔적'이 도처에 선명하게 남아 '길'을 당대에 다시 걷는 것은 과거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단초를 발견하거나 깨닫게 한다. 때문에 한국의 민족사적 대전환기인 2010년, 나와 우리 가정, 우리 민족이 가야할 길 모색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이에 경인일보는 창간 50주년 기념 탐사기획 '길에서, 원효를 만나다'에서 민족의 새로운 미래의 길을 열었던 원효의 길을 10회에 걸쳐 집중 보도한다. ┃편집자 주 길은 산을 만나면 재가, 물을 만나면 나루(津)가 된다.사람은 길에서 산·강·바람 등 자연과 조우하며 역사를 만든다.타인이 만든 길을 따라 걷는 이도 있지만 어떤 이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 새로운 길을 내기도 한다.햇빛이 들지 않는 깊은 숲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개척하다 자연의 일부로 되돌아가거나 길에서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 한 점의 바람에 실려 사라진다.한국판 '산티아고 순례의 길'(Pilgrim Road to Santiago)로 견줘지고 있는 '원효길'.석가가 길에서 태어났듯, 1천300여년 전 원효는 석가의 가르침이 넘친 불지촌(佛地村)인 경북 경산시 자인면의 한 골짜기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길에서 태어났다.원효는 두 차례에 걸쳐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 '구도의 길'에 올랐다.첫번째는 34살 때인 650년(진덕왕 4)에 8살 연하인 '의상'(義湘·625~702)과 함께 길을 떠났다가 고구려에서 첩자로 오인, 한 달간의 감옥살이로 실패하고 말았다.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에 원효는 660년 백제의 멸망으로 해로가 뚫리자 또다시 2차 유학을 시도했다. 늦은 나이인 45살의 그는 '참된 道'를 깨닫고자 유학길에 나선 것이다.당시 원효와 평생 지기인 의상이 함께 걸은 길만 지금 어림잡아도 697㎞. 경주를 출발한 원효는 대구와 충주, 여주, 평택, 화성 등을 잇는 길 한복판에서 전쟁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민중'의 희로애락을 접하고, 문물의 변화 등을 온 몸으로 체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