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에서 뿌리를 찾다·15·끝]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길에서 뿌리를 찾다·15·끝]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지면기사

    조선 22대 정조(正祖·1776~1800년 재위)는 역대 누구보다도 궁궐 밖 행차가 많은 임금이었다. 이 가운데 아버지 사도세자가 모셔진 현륭원(顯隆園) 참배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정조는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모두 13번에 걸쳐 화성을 방문했다. 정조의 능행 거둥길(임금이 나들이 가는 길)은 초기에 남태령과 과천을 지나 안양의 인덕원을 지나는 과천로를 이용하다가 1795년 6차 원행부터는 시흥과 안양의 석수동을 거쳐 구 군포사거리를 지나는 시흥로(현 만안로)를 이용했다.정조의 시흥로 개설은 과천길에 부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있는 김약로의 무덤이 있어 노정을 바꿨다는 야사도 전해지나 근본적으로는 남태령이라는 높은 고개와 과천로에 비해 길이 편한 새로운 거둥길의 개설이었다.# 정조의 정신이 깃든 시흥로정조는 조선의 27대 왕 중 조선 전기의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개혁군주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세종대왕이 추구했던 시대적 사상, 배경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세종대왕은 국왕과 신하가 한 몸이 돼 정국을 쇄신하고 국가를 안정화하는 데 있어 일체적인 국정 체제를 갖췄다면, 정조는 탕평책과 같은 균등정책, 적극적인 애민사상의 백성관 등의 철학으로 국정을 이끌었다.이 같은 정조의 철학은 현 안양의 명칭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안양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됐으나 한자의 뜻은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가설한 만안교의 안(安)자와 함께, 양(養)자는 후세사람에게 인륜의 근본인 효의 뜻을 살리기 위해 쓰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또한 시흥로의 개설과 만안교 건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시흥로는 단순한 원행길이 아닌 조선시대의 교육과 경제·과학·예술 등을 안양에 전파하는 통신사의 역할을 했고, 만안교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만년동안 편안하게 건널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보호시설이다.정조는 만안교 건립 당시 안양지역 백성들의 안전을 걱정해 다리의 재료를 나무가 아닌 돌을 사용했다. 조선 후기만 해도 왕의

  • [길에서 뿌리를 찾다·14]광주 쌍령리 고갯길

    [길에서 뿌리를 찾다·14]광주 쌍령리 고갯길 지면기사

    우리 역사상 최악의 패전중에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 쌍령전투.병자호란으로 청나라 군사의 기세에 눌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 고립돼 있는 상황.20여일 동안 남한산성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 임금을 구하기 위해 충청과 강원지역 등 전국 각지에서 근왕병이 출동하기 시작했다.특히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연이 이끄는 남부지방 근왕병은 4만의 대군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며 1635년 12월 30일 쌍령리고갯길(현 3번(경충)국도 인근)에 도착, 전열을 가다듬었다.하지만 나흘 뒤인 1636년 1월 3일 4만 대군은 총포로 무장하고 수적으로 상당히 우세했으며, 성공적인 방어를 할 수 있었지만 제대로 된 전투 한번 벌이지 못한채 청군 300여명의 기마병에게 대패하면서 비굴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더욱이 쌍령전투의 패배로 조선군의 사기는 급격하게 저하됐고, 그로 부터 한달이 채 되지않은 1월 30일, 인조는 청에 항복하고 한민족 최대 굴욕 중 하나인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광주문화원 자료중에서 # 유래와 위치쌍령이라는 말은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에 위치한 고개로 고개 두개가 연속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큰 고개는 대쌍령, 작은고개는 소쌍령으로 명명되고 있으며 이들 고개를 합해 쌍령리고갯길로 불리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쌍령(大雙嶺)은 주 동쪽 40리, 소쌍령(小雙嶺)은 주 동쪽 45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어 과거부터 쌍령이라는 이름이 사용돼 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쌍령리 고갯길은 인근 쌍령리 마을을 가로질러 곤지암천과 백마산 줄기가 뻗어있어 배산임수형태의 마을에 진입할 수 있는 곳으로 지리적으로 수려함을 자랑한다.현재는 경상남도 남해군 초전삼거리와 북한의 평안북도 초산군을 잇는 국도로 총연장 1천96㎞에 달하는 3번 국도(경충국도)로 불려지고 있다. 아파트가 들어서 인구가 증가해 4개의 행정리로 갈라지게 됐으며 3번 국도를 중심으로 국도 남쪽이 대쌍령1리이고, 북쪽이 2리이며, 곤지암천을 건너 남촌 수영장이 있는 마을을 3리, 그리고 용수

  • [길에서 뿌리를 찾다·13] 의정부 1호 아스팔트도로 '롸우니로'

    [길에서 뿌리를 찾다·13] 의정부 1호 아스팔트도로 '롸우니로' 지면기사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한 지 60여년. 결코 짧지 않은 그 시간은 우리에게 득과 실이 교차하는 굴곡의 시간이었다. 한국전쟁 종전 후 남은 것이라고는 기근과 폐허뿐이었던 우리나라에 미군은 양식을 제공하고 도시기반을 세워줬던 반면, 전례 없던 범죄와 사고로 우리에게 아픈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한 공간에서 우리는 낯선 미군들과 반세기가 넘도록 뒤엉켜 살아왔다. 특히 미군기지가 대거 주둔했던 의정부는 매일 그들과 부대껴 살아가며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때론 웃고 때론 울며 그들과 함께 성숙해갔다. 1970년대는 의정부가 미군을 기반으로 경제적 성장을 하던 시대였다. 그 중에서도 70년대의 서막을 여는 시기, 잊지못할 한 사건이 있었다. 1970년 가을무렵 의정부 시민들은 도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 공사에 온통 관심이 쏠렸다. 생전 처음 보는 기계와 장비들이 나타나 진흙펄을 걷어내더니 모래와 자갈을 깔고 그 위에 아스팔트를 씌우고 있었다. 이 진기한 광경을 보기 위해 공사현장에는 매일같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게다가 공사를 벌이는 이들이 벽안의 군인들이었기에 더욱 신기했다. 어떤 이들은 팔을 괴고 공사가 끝날 때까지 하루종일 앉아 구경했다. 당시에는 분명 놓치기 아까운 구경거리임에 틀림없었다. 미군들은 구경나온 주민들에게 초콜릿과 일명 '씨레이션'이라 불리던 전투식량을 나눠주며 친근함을 나타내기도 했다.이 공사에는 미 제1군단 미 36공병단이 투입됐다. 일종의 미군 대민지원 사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의정부에는 변변한 도로 하나 없었다. 대부분이 차가 다니기 힘든 자갈과 진흙길이었다. 자동차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공사가 끝나자 일자로 곧게 뻗은 왕복 2차선 도로는 '롸우니로'로 명명됐다. 당시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던 미1군단 에드워드 엘 롸우니 군단장의 이름을 땄다. 지금의 가능동 '가능로'로, 의정부 1호 아스팔트 도로다.구불구불한 옛 도로를 따라 희미하게 나뉘었던 가능2동과 의정부2동의 구분도 도로가 똑바르게 나면서 명확해졌다. 지금도 가능동에는 당시 세웠던 '롸우니로 기념비

  • [길에서 뿌리를 찾다·12]광주-성남 잇는 '이배재길'

    [길에서 뿌리를 찾다·12]광주-성남 잇는 '이배재길' 지면기사

    검단산에서 이배재 고개까지, 이배재 고개에서 갈마치 고개를 지나 판교까지,은선 아래로 이어져 있다는 길도 겹친 산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마음의 길을 마음 밖으로 밀어내어 세상의 길과 맞닿게 해서마음과 세상이 한 줄로 이어지는 자리에서 삶의 길은 열리는 것이므로…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197쪽 중에서이름이 좀 알려진 험난한 고갯길을 보면, 다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있다. 마치 이 길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닌 겹겹이 쌓인 수많은 세월과 사연이 길을 만들었다는 듯 말이다. 굴곡지고 험준한 길이 얘깃거리와 어우러지면 그것은 단순한 길이 아닌 그 지역의 역사이고, 유서깊은 곳이 된다.그 무수한 얘깃거리를 간직한 곳이 바로 광주시의 목현동과 성남시 상대원동을 잇는 '이배재고갯길'이다.# 광주와 성남을 잇는 이배재고개광주시와 성남시 중원구의 경계를 이루는 청량산·검단산 산줄기를 넘는 이배재고개는 해발 300m에 이르는 고도를 자랑하는(?) 수도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가파른 고개다.성남을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산성동을 거쳐야 광주시로 넘어갈 수 있고, 남쪽으로는 갈마치고개·새마을고개·태재고개 등의 고개가 두 도시를 연결한다면 이배재고재는 동쪽의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길이라 말할 수 있겠다.국지도 338호선이 이 고개를 지나 광주시와 성남시 중원구의 성남공단 지역과 연결된다.처음 이 고개를 접하는 사람들이 으레 하는 말이 있다. "우와!". 단순한 이 말속에는 중의적 뜻이 포함된다.수도권에 아직까지 급커브와 급경사로 이뤄져 있는 난코스의 도로가 있나해서 놀라는 말이기도 하고, 도심에 이토록 계절별 풍광이 색다른 운치가 있는 도로가 있을까 해 감탄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놀라움과 감탄이 교차하는 고갯길이라고 할 수 있다.그래서일까. 평소 교통량은 일정하지만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이배재고갯길을 온 몸으로 느끼려는 라이딩족들로 길은 생기가 넘쳐난다. 멀리 가지 않고도 사계절의 멋스러움을 드러내는 자연경관을 느낄 수 있는데다 순탄치 않은 경사와 커브가 묘한 스릴감과 도전정

  • [길에서 뿌리를 찾다·11]남양주 마재마을 '다산길'

    [길에서 뿌리를 찾다·11]남양주 마재마을 '다산길' 지면기사

    2012년은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이 태어난 지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 정조때 문신으로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였던 다산은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여유당집(與猶堂集)'을 남겼고 한자 문화 이래로 가장 많은 개인 저술을 남긴 사람 중 한 분이다. '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과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을 결합해 실학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남양주시 마재는 정약용 선생의 고향 마을. 이곳에는 정약용 선생이 가장 아끼던 산책로 '다산길'이 있다.#정약용 선생이 즐기던 산책로 '다산길'남양주 시민이면 누구나 한번은 가본 길이 있다. 바로 다산유적지가 있는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현 능내리)의 다산길이다.다산길은 조선 말의 위대한 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실학정신이 깃들어 있다. 다산길은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묘가 있는 능내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곳은 한강이 넘실거리는 강변이라 새벽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풍경은 신선의 세계, 바로 속세와 단절된 듯하면서도 소통을 갖고 있는 곳이어서 주말이면 나들이객들로 붐빈다.마재(마현)는 팔당호 주변 다산유적지의 한적한 마을로 정약용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다. 다산유적지 입구에서 한강변으로 이어지는 다산길은 정약용 선생이 가장 아끼던 산책로로 경치가 아름답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바로 밑에 있다. 교통은 좀 불편하지만 풍류가들이 손꼽는 한강의 풍치 중 한양의 제1관문이라고 전해지는 곳이 바로 정약용 선생의 생가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다산길이다.초천(苕川)은 정약용 선생의 생가 앞을 흐르는 한강의 실개천으로 이 천을 따라 정약용 선생은 배를 타고 한양과 운길산, 수종사, 천진암을 노닐거나 한강에서 낚시를 즐기고는 했다. 지금은 다산유적지와 실학박물관을 잇는 길이다. 다산길에는 아주 중요한 곳이 있다. 정약용 형제들이 천주교를 접했던 마재성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모진 박해와 탄압속에서도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이 가솔을 데리고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성지로 지정된 이곳은 여느 성지보다는 규모

  • [길에서 뿌리를 찾다·10]의정부3동 '월남촌'

    [길에서 뿌리를 찾다·10]의정부3동 '월남촌' 지면기사

    허름한 건물과 주택들이 뒤엉켜 있는 의정부시 의정부3동. 전형적인 구 도심 동네의 모습이다.구 도심 대부분이 그렇듯 골목이 유난히 많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골목 중에서도 우체국 뒷골목은 여느 골목과 다른 점이 있다. 이 골목에는 반세기 세월의 때가 묻은 한옥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1960년대 이 골목이 온통 한옥촌을 이룬 의정부 최고의 부자촌이라고 하면 아마 믿기 힘들 것이다. 당시 골목은 으리으리한 청기와 한옥이 즐비한 고급 주택가였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 이곳은 의정부의 별천지나 다름없었다.농촌마을 의정부가 미군부대 주둔으로 갓 시가 됐던 시기였다.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별안간 들어온 미군부대에 땅을 내주고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때이기도 하다.그러나 이 골목은 달랐다.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이 이곳에 부자를 양산했다. 파병군인들이 많았던 이곳 주민들은 꼬박꼬박 송금되는 급여를 저축했다. 먹고 살길이 없어 택했던 파병 지원이 뜻밖의 부를 안겨준 것이다.돈을 모은 이곳 주민들은 새집부터 장만했다. 당시 부의 상징이던 한옥을 번듯하게 지었다. 이곳이 일명 '월남촌'이라 불리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풍요로운 이 골목은 뭐든 남달랐다.이른 아침이면 골목길 집집의 대문마다 우유병이 놓여 있었다. 배달 우유를 처음 본 이웃동네 아이들은 호기심에 몰래 뚜껑을 따서 맛보고는 줄행랑을 쳤다. 또 대문에 달린 초인종이 신기했던 아이들은 초인종을 누르고 달아나는 장난을 쳤다. 이런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 때문에 집주인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대문을 들락거리는 홍역을 치러야 했다. 겨울이면 밤마다 어김없이 골목 어귀에 "찹싸알~떡! 메미일~묵!"이라 외치는 떡장수들이 나타난다.50여년간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는 한 상점 주인(78)은 "부자동네라 소문이 나서 그런지 떡장수들이 유별나게 많았다"고 회상했다. 그 중에서도 청미래덩굴 잎사귀로 싸서 먹는 '망개떡'은 동네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다. 다른 동네에서는 비싸 구경하기도 힘든 떡이었다고 한다.이 골목에는 떡장수뿐 아니라 각종 노점상들도 하루가 멀다하고

  • [길에서 뿌리를 찾다·9]가평 국도 46호선

    [길에서 뿌리를 찾다·9]가평 국도 46호선 지면기사

    # 600여년을 이어오고 있는 소통의 경춘로한양과 춘천으로 향하던 조선시대 가평의 중심 교통로인 대로(大路)는 현재 국도 제46번 도로의 일부인 경춘로와 거의 일치한다고 전해진다. 6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지금까지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며 소통의 통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조선시대 가평중심대로는 가평동헌을 중심으로 서쪽로는 한양, 동쪽로는 춘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헌이 위치한 군내면을 지나 한양 방향인 서쪽 대로를 향해 발길을 옮기면 먼저 내서면의 중심지인 현재의 하색리에 다다른다.내서면 사창(社倉)이 설치된 이곳은 고려원수 이방실(李芳實) 장군의 묘를 비롯해 조선조 시절의 문필가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의 묘, 1896년 을미의병운동 당시 가평의 의병대장이던 이충응(李忠應)묘 등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하색리를 지나면 한양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첫 번째 고개를 맞이하게 된다. 한양 방향으로는 첫 번째이지만 가평 방향으론 마지막 고개가 바로 색현(色峴)인 것이다.색현은 한자 뜻 그대로 빛고개라고 불리며 현재도 그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고갯길은 경춘도로가 확포장되면서 옛길과 현재 길 국도 46호선이 공존하고 있다.옛길 색현은 곧고 완만한 지금의 국도 46호선과는 달리 산 좌측 방향으로 산허리를 감싸며 여러 번을 굽이치며 다소 거칠게 길이 나 있다.색현을 넘으면 감천역(甘泉驛)이다. 색현을 넘자 양쪽에 위치한 산들 아래 길게 뻗은 개울과 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지형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만든 도로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감천역은 조선시대의 도로 중 평구도(平丘道)에 속하는 역이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경기도에는 평구도를 포함한 6개의 역도가 있었으며 평구도에는 가평지역의 감천·연동역을 포함한 11개의 역이 소속돼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감천역은 조선시대까지도 현 상천역 부근에 설치돼 서울이나 지방관서를 왕래하는 관리들의 침식을 제공하는 곳으로 운영됐으며 점막이라고 불리는 여관도 들어서 성행했었다고 전해진다. 교통수단이 제대로 발달되지 못해 수도로 통하는 지역 곳곳에 역

  • [길에서 뿌리를 찾다·8]양평 국도 6호선-평해로

    [길에서 뿌리를 찾다·8]양평 국도 6호선-평해로 지면기사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정유년(1597)에 이르러 왜적의 재침이 일어나자 선조는 힘겨웠던 의주로의 피란을 떠올리며 조정의 중신을 모아 방비대책을 논의했다. 지금의 경부선에 해당하는 수원 방면은 독산성에서 결전을 치르는 것으로 무리 없이 합의됐다. 이제 또 하나의 대로(大路)이자 우리나라 교통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국도의 하나인 평해로, 일명 관동대로이자 지금의 양평지역 국도6호선에 대한 방비책 마련이 시작됐다.애초 믿었던 신립이 충주에서 패하면서 왜적이 한달음에 서울까지 진격했던 아픔을 알고 있던 터였다. 한음 이덕형을 비롯해 훗날 병조판서가 되는 군사전략가 노직 등 대신들이 제각각 지역의 자연지세를 고려한 방비책에 대해 상주했다. 양평은 서울 동쪽을 방어하는데 있어 마지막 보루로 평해로를 따라 줄지어 있는 양평의 성곽과 진지를 십분활용하는데 의견이 모아졌다.용문산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뻗어나간 지맥 속에는 동쪽에서부터 각각 함왕성, 남산, 부용성 등의 산악진지가 구축되어 있고, 북한강을 건너 서울로 통하는 최후의 방어선에는 용진(龍津, 지금의 양수리)이 있었다. 선조는 함왕성에 백성을 피란시켜 적을 위협하고, 남산과 부용성 등에서 적을 기습하며, 용진에 배수의 진을 쳐 서울을 지키라고 파발마를 급히 띄웠다.이처럼 양평의 국도6호선은 예로부터 국가의 기간 도로로서 조선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시켜준 중추도로 역할을 한 대로였다. 이는 18세기 후반, 실학자로서 지리학의 대가였던 여암 신경준(1712~1781)이 저술한 '도로고(道路考)'에 잘 기록돼 있다. 신경준은 조선의 간선도로망을 6대로로 분류했다. 중국으로 통한 가장 중요한 길을 제1로로 명하고 시계방향으로 6로까지 정리하는데 평해로는 제3대 대로였다.20세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히 교통혁명이라 불릴 만큼 교통수단의 변화는 물론이고 교통기반과 지세의 변동이 극심했다. 옛길이 부분적으로 폐쇄된 곳도 있고 기능이 약해진 구간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수 백 년간 평해로가 구축해 놓은 인프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발달됐음을 알 수 있

  • [길에서 뿌리를 찾다·7]가평-국도 37번도로

    [길에서 뿌리를 찾다·7]가평-국도 37번도로 지면기사

    가평군은 동쪽으로는 강원도 춘천시와 홍천군, 서쪽으로는 남양주시, 남쪽으로는 양평군, 북쪽으로는 포천군· 강원도 화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가평은 강원도와 인접한 지리적인 여건과 각 시대마다의 사회환경 등에 따라 신라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강원도와 경기도를 오가며 예속되는 등 행정구역에 많은 변화를 보여왔다. 교통로 역시 그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오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가평지역을 중심으로 한 과거의 교통망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시대마다 수도를 중심으로 교통망이 형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경과 영서·영동을 이어주던 중요한 교통로인 춘주도 일부의 역(驛)이 가평에 속해 있었다. 춘주도 중에서 가평지역에 속한 역은 감천(현재 청평면 상천리)과 연동(상면 연하리) 등 두곳이다. 조종-가평-춘주(춘천) 등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당시 수도 개경에서 북한강 중·상류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었으며 개경과 강원도를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길이었다고 전해진다.현재의 국도 46, 37번 도로의 뿌리인 셈이다. 이 도로들은 오늘날 가평군을 횡 또는 종으로 관통하며 인접 시·군을 이어주고 있다.# 그 옛날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향하던 상경길 국도 37번 도로가평군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조선이 건국될 즈음부터 독립된 행정단위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교통로의 형성은 고려시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평의 지형은 산이 많아 기본적인 도로는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옛길을 뿌리에 두고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가평에서 37번도로를 이용하려면 서울방향으로 가다 청평검문소로 우회전하면 비로소 시작된다. 길은 조종천과 함께 장고의 시간을 함께 하며 과거와의 소통을 위해 그자리에서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포천으로 향하는 길(수도 개경으로의 교통로)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조종천과 37번 도로를 따라 형성됐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가평지역에서 개경으로의 교통로는 국도 46번 도로의 청평면 상천리 감천역을 지나

  • [길에서 뿌리를 찾다·6]  포천시 양문리-38선길

    [길에서 뿌리를 찾다·6] 포천시 양문리-38선길 지면기사

    고즈넉하기만한 이 길이 헤어진 형제를 만나기 위해, 때론 가족의 끼니를 해결하기위해 오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군인의 총칼에 쓰러진 피맺힌 사연을 간직한 길이란 걸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양문리의 슬픈 역사는 이 길과 함께 하고 있다.'38선'.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해방될 시기에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미군이, 북쪽으로는 소련군이 들어와 군사경계로 삼은 선이다. 6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포천시 양문리의 38선은 아픔과 슬픔을 간직한 채 아직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서울에서 의정부를 지나 포천 영중면 양문리에 다다르면 38선 표지석과 함께 오른쪽에 옛 조정의 중신들이 머리에 쓰던 관모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관모봉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한때 '585고지'라 불리기도 했다. 폭은 좁고 울퉁불퉁 구불구불 이어진 흙길인 38선을 따라 관모봉을 오르면 양문리의 목가적인 풍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지금은 주로 등산로로 이용되는 이 길은 우리 민족의 슬픔과 아픔이 서려있는 유서 깊은 길이다. 조선시대에는 포천에서 강원도와 관북지방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1945년 9월 어느 날 마을에는 선이 하나 그어졌다. 그것이 '38선'이라는 걸 마을 사람들은 까맣게 몰랐다.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기쁨에 젖어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올리 없었다. 그러나 그 선 북쪽에 소련군이, 남쪽에 미군이 보초를 서자 그제서야 불안이 엄습했다. 당시 이 마을 가구 수는 100여가구. 60여가구는 남쪽에, 40여가구는 북쪽에 살고 있었다.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마을 주민들은 선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자와 민주주의자로 갈렸다. 그로부터 마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이웃마을 성동리에서 만난 권중흥(80)씨는 그때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권씨는 당시 13살 초등학생이었다. 해방되던 날 어른들은 기르던 소를 잡아 마을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온 동네 사람들은 그동안 억눌려 살아왔던 응어리를 잔치로 풀었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였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국과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