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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8] 우제찬 前 경인일보 사장 지면기사
1969년 신문사 첫 발 유신 검열·통폐합등 오롯이 겪어관보형태 ‘계도지’ 시절 관 비판못해 언론 스스로의 암흑기땅투기 실태기사 외압 심했지만 ‘경인일보’ 알려외환위기때 사장 취임 ‘情’으로 뭉쳐 위기 극복공개채용등 인재 키워내는게 ‘경영의 핵심’처음 본 북한사람들 모습에 충격을 받았죠.김정일 위원장 빼고는 전부 로봇 같았어요.시키는 것만 하는거죠. 그래서는 발전할 수 없어요.자기가 찾아서 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언론이 건강해집니다.영화나 드라마에 기자가 등장하는 일이 많아졌다. 화면 속의 기자들은 수습기자를 막 대하거나 특종을 맹종한다. 이런 모습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더러운 유착과 권력화의 한 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매체에 등장하는 기자의 이런 면모를 대중은 ‘어떻게 기자가 저럴수가!’ 라는 놀라움 없이 받아들인다. 험하고 부패한 기자의 이미지가 대중성을 획득한 것이다. 실제로도 기레기라는 말이 대명사처럼 쓰이고, 기사가 조롱거리로 회자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때에, 경인지역 언론계 원로와 만났다. 경인일보와 경기방송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한 우제찬(74) 전 사장이다. 그와 나눈 이야기는 언론계 안팎의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듯 싶다. 한 분야에서 40년 세월을 바친 우직함 때문에 그렇고, 퇴직한 뒤로도 굳건하게 지니고 있는 기자 정신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그는 오래되어도 변함없이 중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의 현역시절 별명은 ‘우보태’였다. 기자라면 사회에 보탬이 돼야 한다고 늘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그에게 주위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스스로도 그 별명을, 기자라는 직함만큼이나 아꼈다. 1969년 신문사에 입사했다. 당시 사명은 연합신문이었다. 본사는 인천에 있었고, 주재기자를 다 합쳐도 50명 정도였다고 그는 기억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 중 언론인으로 퇴직한 이는 손으로 꼽아볼 것도 없이 드물다. 기자가 교수도 되고 정치도 하고 사업가로 방향을 트는 경우는 지금도 부지기수다. 언론인으로 42년, 그의 인생 굴곡은 경인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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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7] 정기철 경기도체육인회 회장 지면기사
81년 경기도 분리때 체육회 초대 사무국장3개월만에 전종목 팀 꾸려 ‘체전 7위’ 성과비인기·기초종목 시·군 실업팀 이끌어내 경기체고 설립등 道체육발전 디딤돌 역할선수·지도자 은퇴후 ‘막막’ 미래 관심 필요언론 ‘엘리트·생활체육 통합’ 대안 제시를붓을 제대로 굴려라. 언론이 정곡을 제대로 짚어주길 바란다.의기소침하지 않고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그런 기사가 요즘 체육인들에게 필요하다“언론의 힘은 정직한 붓에 있다.”경기도 체육의 기반을 다져온 장본인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경기체육이 전국체전에서 통산 28번째 우승컵과 세계 글로벌스타를 배출해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경기체육의 초석을 다져준 원로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가운데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젊은이들 못지 않게 경기체육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하는 원로가 있다. 주인공은 경기도체육인회 정기철(81) 회장이다.지난달 29일 수원 경기도체육회관 임원실에서 정 회장을 만났다. 그에게 지나온 경기체육에 대해 묻자 대뜸 이런 얘기부터 꺼냈다. “언론의 힘은 정직한 붓에 있는 거야. 똑바로 써야 체육이 바로 서는 거야. 지금 (엘리트-생활체육)통합체육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언론은 뭐하는 거야”라고 말이다.정 회장은 1981년 경기도와 인천시가 분리된 후 경기도체육회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16년 동안 도체육회를 이끌었고, 도체육회 부회장으로 5년간 봉사하는 등 20여년을 경기체육의 발전에 기여해왔다. 또 2008년부터 경기도체육인회 회장을 맡아 경기체육의 자문역할을 해주고 있다.우선 경기체육에 대해 그는 “1981년 인천시가 광역시로 승격돼 경기도가 분리되자 무척 난감했다. 그해 7월13일 도체육회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걱정이 앞섰다”면서 “당시 도체육회가 인천으로부터 받은 것은 달랑 체육회기 한 개가 전부였고 가맹단체라고는 조정협회만 있었다. 직원이나 서류도 없이 체육회를 만들어야 했고, 3개월 뒤 열리는 전국체전 출전 선수는 30%도 안돼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회상했다.그러나 그는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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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6] 이귀복 인천항발전협의회 회장 지면기사
내·외항에 남·북항… 해외 경쟁요건 갖춰 신항 ‘원양항로’ 유치위해 수심 증심 시급 배후단지 ‘자유무역지대’로 경쟁력 높여야 크루즈 거점항 전략·해양대학 유치도 필요 ‘통일대비’ 北에 인프라 제공 교류 넓히길 부산은 주민과 국회의원·항만관계자 등이 똘똘 뭉쳐 해양특별법 제정 등 항만을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이다. 인천은 이런 부분이 조금 아쉽다. 또 부산이나 목포와 비교했을 때 인천에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해양대학. 해양대학 유치로 인천항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40여년 전 인천은 항구도시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지만 화물선이 접안할 수 있는 부두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화물선이 인천항으로 들어오면 외항에 닻을 내리고 화물을 작은 배로 하역했다. 그 사이에 제물포 등에서 출발한 통선들이 화물선에 붙어서 선원들을 옮겨 태우고 육지로 올려보냈다. 화물선 한 척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이 변변치 못했던 인천이 지금은 내항을 비롯 북항과 남항, 올해 초에는 신항까지 개장했다. 명실공히 인천항이 내·외항 시대를 열면서 국내의 주요 수출입항만으로 자리잡았다. 이귀복 인천항발전협의회 회장은 인천항이 발전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지켜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화물선을 타고 20년 동안 세계의 다양한 항만을 방문했다. 배에서 내린 뒤에는 인천항의 도선사로서 20년 간 근무했다. 이 회장은 인천항이 세계적인 항만으로 발돋움해 나갔으면 좋겠다는 애정으로 인천항에 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배를 타면서 20년, 도선사로서 20년 등 40년 이상을 인천항만 바라봤습니다. 해외의 다른 항만을 보면서 인천항을 세계적인 항만으로 발전시켜나가고 싶었습니다. 40여년 간 바다에서 근무했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인천항 발전을 위해 나서고 있는데 나의 경험과 지식이 인천항 발전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만족합니다.” - 인천항을 40년 가까이 지켜봤다. 부두시설 조차 변변치 않았던 인천항이 지금은 명실공히 내·외항시대를 열고 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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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5] ‘광복군’ 김우전 선생 지면기사
1944년 강제징집 日軍 탈출 독립군 투신 광복후 백범선생과 정부수립에 ‘한평생’광복군 국내진격 불발 통일안돼 ‘아쉬움’과거 기억·순국선열 존경이 ‘애국의 시작’요즘 日행태 ‘착잡’ 일제때보다 험한시대강대국에 민족성 자신감 갖고 상대하길김 동지!힘이 제일 센때가 20대적이야.20대에 독립운동을 못하는 자는 사내가 아니고, 20대에 나라에 목숨을 내놓지 못하는 자는 독립투사가 아니야-김우전 저 ‘김구선생의 삶을 따라서’ 중任命狀(임명장)右 同志를 本 主席 辦公室 機要秘書로 任命함.(위 동지를 본 주석 판공실 기요비서로 임명함)大韓民國臨時政府 主席 金九(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大韓民國 二十七年 三月(대한민국 27년 3월)1945년 4월 어느날 이른 아침이었다. 갑작스런 부름을 받고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청사 백범 선생의 방으로 갔다. 백범 선생이 하얀 명주천에 쓴 임명장을 주셨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가 찼던 시계를 보이며, “윤 의사가 거사를 하기 전 내 시계와 바꾸자고 했었는데, 나는 이것을 조선으로 들어가는 날 윤 의사의 아들을 찾아서 돌려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김 동지! 힘이 제일 센때가 20대적이야. 20대에 독립운동을 못하는 자는 사내가 아니고, 20대에 나라에 목숨을 내놓지 못하는 자는 독립투사가 아니야”라고 말씀하셨다.이 말을 들으며 나의 젊은 투지는 또 한번 불탔다.(김우전 저 ‘김구선생의 삶을 따라서’ 中)1944년 8월 강제 징집된 일본군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독립군에 투신한 김우전 선생이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백범 선생에게 직접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와의 연계뿐 아니라 국내 조직 또는 개인간 연결을 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였다. 생명을 담보로 활동해야 하는 임무이니 만큼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는 백범 선생과 당시 주석판공실장(비서실장) 민필호 선생 등 3명만이 자리했다.백범 선생은 숨조차 쉴수 없는 엄숙함 속에 임명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덤덤히 임무를 설명했다. “지금 중국 중경에 있는 독립운동가는 모두 임시정부에 집결되었고 의열단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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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4] 한국전쟁 참전용사 서재송옹 지면기사
대학시절 미군에 징병돼 상륙작전 참여“전사자들 유해발굴 등 명예 세워줘야”휴전후 고향 덕적도서 이장·서기등 지내신부님 권유로 혼혈아등 1천여명 보살펴美 신자들에 수천통 편지 양부모 찾아줘“아이들 성인된후도 연락·초청방문도…경제 좋아졌지만 미혼모등에 고아 여전”한국전쟁으로 민족 간에 쓰라린 일을 겪고, 고아들이 생기면서 그들을 보살피고 입양시키는 일을 시작했습니다.대한민국이 부유해지면서 입양갈 아이들도 없어질 것으로 생각했고요. 하지만 여전히 미혼모와 이혼 등의 문제로 고아들이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65년 전 미군복을 입고 상륙작전에 참여한 스무 살 청년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고향(인천) 땅을 밟았다. 휴전 후 40여년 간 전쟁 고아를 비롯해 미군 아버지와 한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돌보며 입양을 주선했던 참전 용사는 고향에 핵폐기장이 설치된다는 정부의 결정에 70대의 나이에 공동 대표로서 전면에 나서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시민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6월 말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의 자택에서 만난 서재송(86)씨는 한국전쟁 참전에서부터 최근까지 60여년 간의 과정을 세 시간에 걸쳐 들려줬다. “얼마나 폭격이 심했는지, 땅을 내딛는데 무릎까지 빠졌어요. 상륙한 곳은 내항으로, 지금 인천우체국이 있는 부근입니다. 주민들은 한 명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사단(미 7사단)은 바로 숭의동 공설운동장으로 이동했습니다. 경기도 시흥 쪽 수수밭·콩밭에서 잤는데, 다음 날 일어나서 보니 인민군 시체가 즐비했어요.”전쟁이 터졌을 때 서씨는 국립 부산수산대학교(현 부경대) 1학년이었다. 6월 25일 전쟁 발발 후 학교는 휴교했으며, 집에서 하숙비도 안 오는 상황에서 하숙집 주인도 “우리 가족들 살기도 벅차니 나가달라”고 하는 바람에 먹고 지내기 막막한 상황이었다. 호구지책으로 부산 국제시장에서 풀빵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튿날 미군에 징병됐다. 서씨는 “‘여기 있어도 고생인데, 젊은 사람으로서 나가서 싸우자’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이후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로 이동한 서씨는 1주일 동안 밤낮으로 상륙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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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3] 문병대 삼성전자 前대표이사 지면기사
1969년 수원 삼성디지털시티 건설시작68년 입사 17년간 수원근무 ‘제2의 고향’‘혁신적 투자·공정인사·투명경영’ 핵심日 소니 제치고 韓 ‘반도체 신화’ 이끌어中 무서운 추격 경기도 첨단기술기지돼야‘수도권 발전=나라 발전’ 규제는 시대역행‘정직’이 가장 좋은 처세술 불변의 진리역사를 보면 기술이 우수한 나라가 세계를 제패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인재들이 전부 의대 법대 같은, 자격증 따는 데로 가죠. 하지만 앞으로는 창조적인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될 거예요. 사회 전체가 창의력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아직 너무 권위적입니다.‘가장 빨리 가난을 벗어 던진 나라’. 세계는 우리나라를 이렇게 기억한다. 또한 이 사실은 우리의 자부심이고, 이를 토대로 민주주의와 교육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원로에게 듣는 이야기의 두 번째 주제는 경제다. 문병대 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대표이사는 삼성에 뿌리를 두고 수원을 토대로 경기도 경제발전의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본 인물이다. 42년 동안 삼성그룹에서 일하면서 그가 직접 체험한 기업과 국가의 성장기를 들려주었다.기업활동이 서울에 집약돼 있던 1960년대 말, 수원에 현재의 삼성디지털시티 건설이 시작됐다. 1969년의 일이다. 문병대 전 대표는 그보다 1년 앞선 68년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50여년이 지났지만, 푸르던 청년시절의 상황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전쟁과 5·16군사정변에 대한 기억과 상처가 가시지 않은 때죠. 경제와 정치계가 ‘재건’에 몰두하고 있을 때고요. 한일합섬, 선경직물 등의 섬유회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어요. 선경직물은 수원의 평동에서 조그맣게 사업을 시작했죠. 수원에는 그 말고는 딱히 산업이랄게 없었고, 농업인구가 대부분인 시골마을이었어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요.”삼성이 시골마을 수원에 당시로서는 최첨단 산업이던 전자분야 사업의 터를 닦은 것은 한 정치인의 애향심과 고(故)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1963년 국회의원이 된 고(故) 이병희 전 의원은 수원의 발전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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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2] 백선엽 장군 지면기사
1950년 대구 방어 ‘다부동 전투’ 못잊어방어선 뚫리면 미군 철수할까 두려움 커총 잘 못쏘면서 기적 바라며 앞장서 지켜독립 70년만에 피·땀으로 ‘눈부신 성장’우리 목표는 ‘평화’ 주변국 모두와 협력을비상사태 대비 군사력 강화·군 신뢰 필요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우리가 밀리면 미군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 중“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1950년 8월, 다부동에서 백선엽 장군이 후퇴하는 부대원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지금까지 정말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에 미군들이 있다. 우리가 밀리면 저들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 중)6·25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백선엽 장군이 창간 70년을 맞은 경인일보사를 방문했다.올해 95세의 노 장군은 지팡이를 의지했지만 목소리 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혈기가 넘쳤다. 백선엽 장군은 직접 쓴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이라는 책을 전달하면서 70여 년의 세월을 회고했다.-벌써 광복 70주년이 됐다. 70여년 전, 나라를 찾은 기쁨도 잠시, 우리는 동족상잔의 잔혹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당시를 회고해 달라.“1945년 독립은 목숨 바쳐 일제에 항거한 선조들의 피와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얻은 소중한 희생의 결과였다.하지만 불행하게도 한반도 중심의 38선을 두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들어왔다. 우리 남쪽은 미군이 주둔, 미 군정이 실시 됐고, 북쪽은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점령한 상태였다. 전쟁의 서막은 이때부터 시작됐다.당시 남·북의 군사력은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이북에는 전차 300대, 대포 1천200문, 폭격기 200대 등 소련의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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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1]목요상 대한민국 헌정회장 지면기사
과거 日정권 2차대전 자성과 '대조' 북한 김정은 통일에 신념있는지 의문 정치권 리더십 부재… 양보·대화없어 국가·민족위한 '통큰타협' 풍토 되찾길 대통령 '계파지양' 與野와 자주 협의를 대한민국 부정·국가기강 문란 안돼'국익차원'서 진보·보수 이념 전개해야경인일보는 새해 광복 70년을 맞아 연중 기획 인터뷰 '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를 매월 연재합니다. 을미 신년은 한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은지 70년이 됩니다. 또한 미소 군정으로 한반도가 분단된 지도 70년 되는 해입니다. 근대가 일제에 유린당했다면 현대는 외세와 이념과 전쟁으로 분단의 고통에 시달려왔습니다. 이처럼 굴곡진 광복70년을 온 몸으로 겪어낸 경기, 인천지역 각계 원로들에게 우리가 걸어온 70년을 묻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미래를 탐문함으로써 시대를 관통하는 혜안을 얻고자 합니다. 올해 창간 70주년을 맞는 광복둥이 경인일보가 기획한 광복70년 맞이 원로와의 대담, 많이 기대해주십시오. ┃편집자 주목요상(80) 대한민국 헌정회장은 광복 70주년을 맞은 새해, 제일 먼저 일본 '아베 정권'의 역사 왜곡과 엔저 정책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새해 벽두에 우리의 수출 길을 막고 있는 엔저 정책의 근간인 '아베노믹스'가 못내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는 "우리 정부는 국민들의 마음을 사지 못하고 있고, 정치권은 리더십 부재로 대화와 타협을 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하면서 여야 정치권에 통큰 정치를 주문했다. 지난 2일 여의도 헌정회 사무실에서 연중기획 '광복70, 원로에게 듣다' 첫 대담에서, 대한민국의 대표적 원로정치인 중 한명인 그를 만나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과 지역·세대·이념 갈등을 짚어 보고 진정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가기 위한 제언을 들었다. 정치원로 몇 분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 정치팀 정의종 부장이 1시간여 동안 대담했다.- 광복 70주년이 주는 의미와 되새겨야 할 점은 무엇인가.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를 거쳐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경제 선진화 문턱에 들어선 나라이지만 한일 관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