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5)] '피란수도' 부산, 1023일의 기록 (上)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5)] '피란수도' 부산, 1023일의 기록 (上) 지면기사

    1023일. 부산이 한국전쟁 중 피란수도로서 역할을 한 기간이다. 첫 번째는 1950년 8월 18일~10월 27일, 두 번째는 1951년 1월 3일~1953년 8월 15일이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던 부산은 피란민 수십만 명을 품는 포용력을 보여줬다.전투 벌어지지 않았던 곳 수십만 명 밀려와남는 방 빌려주며 도움 베풀었지만 역부족창고·교회예배당·공장… 빈공간 전부 개방 마구간·소막사 같은 축사까지 주거지 활용사람들이 꺼리는 묘지도 삶의 터전 탈바꿈화재·위생문제·식수난… 생존 경쟁 내몰려 ■ 80만 피란민 품은 부산부산일보사가 1980년대에 발간한 책 <비화 임시수도 천일>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전 부산 인구는 47만여 명이었다. 1945년 8·15 광복 직후만 해도 28만 명 수준이던 부산 인구는 일본과 중국 만주 등지에서 돌아온 동포 19만 명까지 더해 급증한다. 이어 전쟁이 발발하자 전국 각지에서 피란민이 몰려들어 100만 명을 넘는 사람이 치열한 생존 경쟁에 맞닥뜨리게 된다. 1·4후퇴 이후 부산의 최대 인구는 120만~130만 명 수준으로 추산된다.당장 살 곳을 마련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일부 시민이 남는 방을 빌려주며 도움을 베풀었지만, 피란민 수십만 명을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정부가 마련한 천막이나 수용소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창고와 교회 예배당, 공장, 극장 등 빈 공간이 있는 곳은 모두 피란민에게 개방됐다. '동아일보' 1950년 12월 28일 자 기사에 따르면, '부산시 당국에서는 시내에 들어온 피란민 6만여 명을 각 가정에 분산 수용키로 결정했다. 요정, 여관 등을 일체 개방해 피란민을 수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부산연구원 오재환 부원장은 "부산은 한국전쟁 시기에 직접적인 전투가 없었던 평화 도시, 밀려오는 피란민을 품은 포용의 도시였다"며 "유엔 등으로부터 국제적 지원을 받던 곳에서 이제는 이를 되돌려주는 도시로 성장해 월드엑스포 유치에까지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2020년 3월 25일 <부산일보>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4)] 이승만 정부 '국민보도연맹 경남 민간인' 학살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4)] 이승만 정부 '국민보도연맹 경남 민간인' 학살 지면기사

    "왜 조사도 안 하고 억울하게 잡아가서 민간인을 학살합니까? 시체를 바다에 빠뜨리니 찾지도 못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너무너무 억울하지요. 74살 들어 살면서 아버지 한번 불러보고 싶어도 못 불렀습니다." (김점선씨·통영시 거주)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창원유족회 증언집 발췌-"6살 때 아버지가 마산 괭이바다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돌아가신 뒤 정말 힘들게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빨갱이 자식' 소리 들으며 컸죠. 그때 상처와 서러움은 말도 못 할 정도입니다." (권택근씨·부산 거주)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건 군인들만이 아니다. 수많은 민간인이 본인이 무슨 죄가 있는지도 모른 채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진실화해위 조사가 시작되고, 유족회가 생겨 정부를 상대로 소송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70여년이 흘러도 유족들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국가 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억울함이 자식들에게도 향해지고 있어 정부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다.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승만 정부는 1949년 6월 5일 좌익 계열 전향자들을 대상으로 반공단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실제 취지는 공산주의 정당 남로당을 약화하고 좌익 성향 사람들을 전향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각 경찰서별로 할당된 수를 채우기 위해 공무원들과 경찰은 아무 관계 없는 민간인까지 무분별하게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이후 전쟁이 터지자, 내무부 치안국은 각 도 경찰국에 '요시찰인 전원을 경찰에 구금하고 형무소 경비를 강화하라'는 내용의 비상 통첩을 보냈다. 이후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이들은 예비검속돼 경찰서나 형무소 등에 구금됐다. 이 중 본인이 왜 구금됐는지도 모르는 민간인이 다수였다.북한군 점령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이들이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했다는 보고가 정부에 들어갔다. 그러자 정부는 보도연맹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고, 6월 하순부터 비극적인 학살은 시작된다.전향자 '반공단체' 할당 채우려 무분별 가입전쟁 터지자 이유도 모른채 예비검속 구금북한 점령지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3)] 끝나지 않은 4·3… 제주 예비검속 학살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3)] 끝나지 않은 4·3… 제주 예비검속 학살 지면기사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에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돼 학살당했다. 당시 정부는 '좌익분자'를 색출한다는 미명하에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또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4·3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됐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구금하는 것으로 일제의 악습이었다.한국전쟁 발발하자 또다시 찾아온 비극'범죄를 저지를 것 같다' '비협조적이다'정부 '좌익분자' 색출 명목 무차별 연행전국 형무소 수감 4·3 관련자 즉결처분제주공항·섯알오름 등에 수백구 암매장6년 후 수습할 땐 뒤엉켜 신원확인 불가'빨갱이' 낙인… 유족들, 몰래 제사 지내 ■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불어닥친 '예비검속' 광풍경찰 문서에 따르면 1950년 8월 도내 4개 경찰서(제주·모슬포·성산포·서귀포)에서 예비검속된 도민은 1천120명이다. 경찰은 검속된 자들을 A·B·C·D 네 등급으로 분류했는데, C·D급은 예비검속자 등급별 조사 과정에서 군 송치 대상자로 분류돼 계엄군에 넘겨져서 총살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적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학살한 것이다. 이 중 제주북부(제주읍·조천면·애월면) 예비검속자는 500여명에 달했다.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생존자와 목격자들은 1950년 8월 19~20일 이틀간 제주국제공항(당시 정뜨르비행장)에 끌려간 예비검속자들이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됐다고 증언했다.4·3 당시 최대 학살터였던 제주공항 활주로 밑에는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4·3영혼이 잠들어 있다. 활주로에서는 매일 많은 수의 비행기가 쉼 없이 오르내린다. 당시 제주공항은 넓고 비어있는 곳으로 외부의 눈에 띄지 않아 총살을 집행하기 최적의 장소였다는 증언이 있다.제주4·3평화재단은 제주공항에서 2007~2009년 3년간 유해발굴을 실시했다. 2018년에도 유해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4·3 당시 암매장된 388구의 유해를 발굴했고 유전자 감식으로 90구의 신원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2)] 적군 '기습남하' 제동 건 천안·금강 지연전투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2)] 적군 '기습남하' 제동 건 천안·금강 지연전투 지면기사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한반도에 가장 먼저 투입된 미군이 24사단이다. 전쟁 발발 직후 UN은 '한국 군사원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극동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맥아더는 곧바로 일본에 주둔한 미 8군 제24사단을 한국에 투입했다.윌리엄 딘 24사단장은 제21연대 1대대, 일명 스미스 부대를 한반도로 급파했다. 부산에서 대전을 거쳐 경기도 오산에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1950년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최초 전투를 벌였으나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5전차사단에 참패했다. 스미스 부대는 60명이 전사하고, 82명이 포로로 잡혔다.곧이어 벌어진 전투가 천안전투이다. 앞서 딘 사단장은 스미스 부대 후방으로 제34연대를 보내 안성과 평택에서 북한군을 막도록 했다. 그런데 러브리스 연대장은 전투도 벌이지 않고 남쪽으로 철수하여 천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북한군과 접촉하면서 시간을 끌라는 사단장의 뜻을 어긴 것이다. 북한군은 7월 6일 평택을 점령한 뒤 계속 남하했다.한반도에 급파한 스미스 부대'T-34 전차' 앞세운 北에 참패적군 1만2천명에 맞선 시가전일방적으로 밀리며 진격 허용마틴 연대장, 전차포격에 전사딘 사단장, 대전전투서 포로로전력 오판… 대부분 패했지만15일 끌어줘 전열 확보 재평가천안의 34연대는 사단장의 지시에 따라 7월 7일 1개 중대를 경부국도로 북상시켜 북한군의 움직임을 탐지하고 접촉을 유지했다. 이 부대는 북쪽으로 전진하다가 부대리(현재 천안시 부대동)인근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고 철수하였다.이날 34연대는 연대장이 바뀌었다. 딘 사단장이 안성, 평택의 무단 후퇴 책임을 물어 러브리스 연대장을 해임하고, 로버트 마틴 대령에게 지휘권을 넘긴 것이다. 마틴은 지략과 용맹함을 갖춘 장교로 2차 세계대전 때 딘 사단장과 함께 싸웠으며, 딘 사단장이 극동사령부에 전입을 요청, 하루 전날 일본에서 대전에 도착했다.7월 8일 미 24사단 34연대와 북한 3사단, 105전차사단이 천안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미군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1)] 전주·군산 형무소 재소자 집단 사살 사건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1)] 전주·군산 형무소 재소자 집단 사살 사건 지면기사

    전쟁 발발 전후를 즈음해 한강이남 형무소들에서는 대규모 수용자 학살사건이 벌어졌다.비교적 후방으로 평가받는 호남지역에서도 그 아픔은 존재했다. 그리고 정전 70년을 맞이했지만 상흔들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념 충돌의 희생양은 바로 민간인들이었다. 전북지역에서는 당시 형무소에 수용중인 민간인들의 학살이 군경에 의해 자행됐는데, 대표적인 곳이 바로 전주형무소와 군산형무소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조사보고서에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경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7사단 3연대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밝혔다.전주형무소서 '반동분자'로 규정된 우익인사 1천여명 희생돼황방산 발굴 조사 결과 유해 매장지 3열 등고선 나란히 조성발견된 44개체, 탄피에 인골편 흡착… 잔인하게 처형된 증거당시 군인·경찰 무기체계와 일치… 정부에 의한 계획적 학살군산비행장서도 자행됐지만 미군 사용중이라 발굴조차 못해 "6·25때 내가 16~17살이었는데, 밤에 금상동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서 구덩이를 팠어. 구덩이를 판 자리가 구세군교회(소리개재, 전주 동부지역) 뒤편이야. 밤에 횃불을 붙이고 했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죽였는데, 죽인 후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어. …(이하 생략)" (백모씨·88·전주시 덕진구 산정동)박모(88·전주시 완산구 효자동)씨는 한국전쟁 당시 작은아버지가 전주경찰서에 수감돼 있었지만 전쟁 발발후 어딘가 끌려가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신을 찾기 위해 아버지와 누이가 효자동 황방산 일대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 이후 황방산 일대로 소풍을 오면 고구마 두둑 형태를 이루는 것이 많았는데, 그것이 유해를 매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증언했다.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보고서 발췌(2021, 전주시, 전주대학교박물관)'희생규모를 추정할 수는 없지만 70여명의 희생자 신원을 확인했다. 이들이 끌려가 학살 당한 장소가 당시 진북동에 있던 전주형무소(현재 평화동으로 이전)에서 약 6㎞ 떨어진 황방산이다. 전주형무소 재소자 중에는 여순사건 관련자들도 많았다고 한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0)] 한반도 중앙 최고 요충지 수성 '백마고지 전투'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0)] 한반도 중앙 최고 요충지 수성 '백마고지 전투' 지면기사

    1951년 5월16일부터 22일까지 인제군 현리에서 6·25전쟁기 중 국군의 가장 큰 패배로 일컬어지는 '현리전투'가 벌어졌다. 9사단을 포함한 우리 국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국군은 별다른 교전도 벌이지 못하고 와해되고 동부전선은 위기를 맞는다. 다음해인 1952년 10월초, 현리전투에서 중공군에 패했던 우리 국군은 철원 서쪽의 이름없는 395고지(백마고지)에서 또다시 중공군과 맞선다. 이 때 395고지를 지키고 있던 국군은 9사단. 하지만 395 고지의 9사단은 1년 전 중공군의 공격에 물러선 부대가 아니었다. 중공군 3개 사단과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시종일관 유리하게 전황을 이끌었고 결국 395고지에서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낸다. 백마고지 전투 승리로 국군과 유엔군은 군사 요충지를 확보하고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또 백마고지 전투 승리는 드넓은 평야를 품은 철원지역 일대를 우리 땅으로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었다.별다른 교전도 벌이지 못하고 동부전선 위기 초래한 '현리전투'1년 만에 395고지서 다시 만난 중공군에 시종일관 유리한 전황12차례 쟁탈전… 낙타능선상 전초진지 탈환 끝 전투 신화 창조유엔군 막강한 화력 지원-9사단 지휘관 탁월한 운영 승리 요인 ■ 시작된 휴전회담 그리고 예고된 혈전=유엔군과 공산군은 6·25전쟁이 시작된 후 1년여 만인 1951년 7월부터 전쟁 휴전과 포로교환 등을 위한 회담을 시작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시간은 지나가고 공산군은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마련한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중공군이 주도하는 고지 쟁탈전이었다. 당시 고지 쟁탈전은 중공군이 국군과 유엔군이 장악한 고지를 먼저 공격해 차지하고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이를 다시 되찾는 형태의 전투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1952년 가을께 포로문제에 대해 유엔군과 공산군의 협상이 난항을 겪었고 한반도 중앙의 최고 요충지 '철의 삼각지대'로 관심이 집중됐다. 국군 9사단이 주둔 중인 395고지, 철원평야와 평강고원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한반도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9)] 50만 장병 육성한 제주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9)] 50만 장병 육성한 제주 지면기사

    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빼앗긴 정부는 '1·4후퇴'를 통해 부산으로 피난했다.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정부는 전선에 안정적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장병들을 훈련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 1951년 3월 21일 대구의 제25연대를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로 옮겨 육군 제1훈련소를 설치했다. 이후 육군 제1훈련소는 1956년 문을 닫을 때까지 5년간 50만 장병을 육성, 서울 재탈환을 비롯한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중공군 개입으로 '1·4 후퇴'… 부산 피난후 '일진일퇴'25연대 서귀포시 모슬포로 옮겨 육군 제1훈련소 설치1956년 해체될 때까지 후방 핵심 전략기지 역할 '톡톡'비바람에 병력 수송 차질… 물 부족한 악조건서 단련병사·피난민들 '전쟁의 두려움'… 강병대교회 찾기도 ■ 후방 핵심 전략기지가 된 육군 제1훈련소최초 모슬포에 설치된 육군 제1훈련소는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짓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천막으로 막사를 대신하면서 거대한 천막도시와 같은 모습이었다. 훈련소의 면적은 198만㎡(약 60만평) 규모로 모슬포 남쪽에 본부가 있었고 보성리와 인성리 방면에는 연대들이 자리잡았다. 그 사이에 공병대와 헌병대, 정훈부, 통신대, 하사관학교, 병참대가 들어섰다.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들어선 것은 이 지역이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중국 본토 침공을 위한 중간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1931년부터 군사기지가 설치됐기 때문이다.해방 직후 미군에 의해 일제들의 무기는 해체됐지만 각종 시설들은 그대로 사용되면서 1946년에는 조선경비대의 주둔지가 됐고, 이후 육군 제1훈련소로 사용됐다. 치열해지는 전쟁으로 인해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부족해진 병력을 빠르게 보충하기 위해 당시 제1훈련소의 훈련기간은 12주에서 3주로 단축됐다. 훈련기간이 크게 짧아진 대신 훈련은 더욱 엄하고 혹독하게 진행됐다.다만 모슬포는 땅은 넓었지만 훈련소로 운영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화산섬인 제주의 특성상 빗물이 고이지 않고 모두 지하로 흡수되면서 물이 부족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8)] 인천상륙작전의 빛과 그림자 (下)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8)] 인천상륙작전의 빛과 그림자 (下) 지면기사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 초반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었으나, 인천지역은 피해가 막심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전세를 뒤집기 위해 육·해·공의 병력과 화력을 총동원하면서 상륙지 월미도는 쑥대밭이 됐고, 인천시내가 파괴됐다.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꼽히는 군사 작전의 이면은 지역 차원에서만 간간이 다뤄질 뿐이다.전갑생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Archive Ⅱ)에서 발굴한 <사진 1>을 살펴보자. 인천상륙작전 당일인 1950년 9월15일 인천 월미도 동쪽 마을의 한 민가가 폭격을 맞아 불타고 있고, 소총을 든 유엔군 병사들은 수색 활동을 하는 듯한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사진 1>의 행간을 조금 더 읽어보자. 활활 타오르는 민가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며칠 전 월미도 일대 공습에서 대대적으로 퍼부은 화염 무기 '네이팜(Napalm)탄'의 위력을 보여준다. 집에 난 불을 꺼야 할 집주인이 사진 속에서 보이지 않는 건 폭격으로 인한 희생 또는 피난으로 섬에 살던 주민들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문이 남는다. 정말로 전쟁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을까.상륙직전 3천℃ 불바다 만드는 '네이팜탄' 투하전세 순식간에 뒤집었지만 수많은 민간인 희생인천 피해 막심했는데… 미군 부대 막사는 멀쩡전갑생 연구원 "부수적 희생", 헤이그협약 위반 ■ 단테가 그린 지옥, 월미도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지역 피해에 대해선 정부의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진실'로 규명한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 보고서와 미국, 프랑스 기자들이 쓴 한국전쟁 논픽션들을 종합했다. 상륙작전 닷새 전인 1950년 9월10일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미 해병대항공단 항공기들이 월미도 동쪽 지역에 세 차례에 걸쳐 95개(tank)의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육지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유엔군은 9월13~14일 월미도와 인천항 등 시내 일대 함포사격과 공습을 감행하며 다음날 상륙을 개시한다.월미도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7)] 인천상륙작전의 빛과 그림자 (上)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7)] 인천상륙작전의 빛과 그림자 (上) 지면기사

    인천상륙작전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 버린 한국전쟁 초반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꾼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6일)에 비견될 만큼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질퍽대는 갯벌로 둘러싸인 악조건의 인천으로 대규모 병력이 상륙, 낙동강 전선에 집중한 북한군의 허를 찌른다는 작전 구상은 대담함을 넘어 무모해 보였다. 그 난관을 돌파한 상륙작전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총반격하는 발판이 됐고, 이후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전투이자 신화로서 지위를 굳건히 다졌다.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도 전쟁은 3년 가까이 이어진 후에야 정전에 이르렀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펼쳐진 전황이 한국전쟁을 교착 국면에 빠지게 하면서 상륙작전의 성공을 퇴색시키기도 했다. 상륙작전 전후 민가와 시가지를 향한 대대적 공습으로 월미도와 인천 도심은 만신창이가 됐다. 인천지역의 피해에 대해선 다음 하(下)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한다.조수간만의 차 크고 질퍽대는 갯벌 악조건맥아더 총사령관, 참모들 반대속 인천 고집함대 261척·미군 등 7만5천명 대규모 투입낙동강 전선에 집중한 적군 허찌른 담대함한국·유엔군 북진 - 북한군 퇴로 차단 성과예상보다 더딘 서울 수복으로 빛바랜 성공 ■ 압도적 상륙작전1950년 9월15일 새벽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함대 261척, 미 해병대 1개 사단과 육군 7개 사단을 비롯한 총 7만5천명의 병력이 투입된 육·해·공 입체 작전이었다. 미 해군은 20㎞에 걸친 반원형 대형을 펼쳐 200여척이 넘는 함선을 서서히 전진시켰고, 상륙정(LST)들이 탱크와 해병대를 싣고 일렬로 월미도로 향했다. 프랑스 종군기자 4명의 기록을 묶어 낸 '한국전쟁통신'(2012·눈빛)에 실린 르포기사의 한 장면을 보자."6시 30분, 큰 상륙정들이 섬의 갯벌에 앞문을 들이대고, 적군의 전방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는 것에 다소 당황한 해병대를 토해 냈다.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아홉 대의 불도저 탱크들이 포로의 파인 구덩이 속에서 거대한 벌레처럼 비틀대며 숲으로 포를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6)] '죽느냐, 사느냐' 낙동강전투 (下)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6)] '죽느냐, 사느냐' 낙동강전투 (下) 지면기사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북한군 9월 공세의 목표는 Y선(왜관-다부동-영천-기계-포항)이었다. 이를 위해 8월 31일 X선(왜관-남지-마산)의 마산 정면을 먼저 때렸다. 국군과 유엔군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자 북한군 제2군단은 9월 2일 왜관·다부동, 신령·영천, 안강·포항에서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낙동강 방어선의 붕괴 위기가 또 다시 닥쳤다. 유엔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였고 격렬했다. 이때 북한군 작전방침은 "낙동강 일대에 압축된 국군과 유엔군을 두 개의 강력한 타격집단으로 대구 및 영천 일대에서 포위·소멸하여 최종목표인 부산을 점령한다"였다. 김일성도 8월 22일에 전선사령부를 방문해 '공세준비에 총력을 경주할 것'을 독전했다. 북한군은 9월 중순까지 공세를 계속했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끝내 방어선을 지켜내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발판을 마련했다.북한군, 대구 점령 '총공세'… 미군 하루 새 1245명 손실최악의 상황 속 유엔군 반격 힘입어 낙동강 방어선 사수영천 돌파한 인민군, 후방 깊숙이 침투하다 오히려 포위집요한 공격 막고 마침내 인천상륙작전·반격 발판 마련 ■ 하루 동안 미군 1천245명 손실 악몽의 날왜관·다부동은 미 제1기병사단이 국군 제1사단으로부터 방어지역을 인수받아 대구방어를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3·13사단 등 3개 사단 역시 대구 점령을 위해 총공세를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아 모두가 운명의 전투를 피할 수 없었다.특히 수암산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8월 공세 때와 비슷했다. 8월에는 국군 제1사단이 17일 동안의 혈전으로 방어진지를 지켜냈지만, 화력과 기동장비에 의존하는 미군은 단 3일 만에 진지를 북한군에게 내어 주고 4㎞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제 대구까지 거리는 불과 10㎞였다.미 제8군에게 9월 5일은 악몽의 날이었다. 이날 하루 미군은 전사 및 행방불명 724명, 전상 521명 등 1천245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했다. 제8군사령부는 낙동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할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낙동강 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