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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8]에필로그-철쭉꽃이 피면 파시가 서고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파시가 끝난 바다는 매립되고세종실록 지리지에 파시라는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파시(波市)의 역사는 길다."토산은 … 조기인데 군의 서쪽 파시평(波市坪)에서 난다. 봄, 여름 사이에 여러 곳의 어선이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데 관청에서 그 세금을 받아서 국용에 이바지한다."(세종실록지리지 나주목 영광군 편)나그네는 '파시' 연재를 마무리하며 이 땅에서 파시가 처음으로 시작됐던 영광 법성포를 찾았다. 파시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연평도와는 달리 법성포는 아직도 조기의 음덕으로 살아가는 땅이다. 법성포 앞바다는 매립 공사의 기계음으로 소란스럽다. 조기잡이 배들이 들어와 정박하던 호수같이 아늑한 바다는 간 곳이 없다. 원형을 잃은 바다, 몇 척의 소형 어선만 묶여 있는 포구는 쓸쓸하고 적막하다. 바다를 매립해 만든 땅에는 대규모 굴비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옛날 연평도로 올라오던 조기떼는 칠산 어장을 지났다. 이 무렵 부안의 위도와 함께 법성포에도 파시가 섰다. 들고나는 조기 배들과 운반선들, 조기를 사고파는 사람들로 포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밤새 장작불을 피워 말리던 덕장굴비의 탄생지이기도 한 법성포. 법성포 파시는 해마다 3월 초부터 4월 말까지 이어졌다. 법성포 파시는 철쭉꽃이 필 때 절정을 이루었다. 그때 칠산어장의 조기들은 대부분 법성포로 실려와 굴비로 만들어졌다. 생조기는 며칠간 소금에 절여진 뒤 덕장에서 말라갔다. 긴 소나무들을 엮어서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건조대를 만들어 세운 것이 덕장이다. 덕장 한가운데에 구덩이를 파고 숯불을 피웠다. 인부들은 조기를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밤새 덕장을 지켰다. 낮에는 햇빛과 해풍에 마르고 밤에는 숯불의 열기에 말라갔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2~3개월이 걸리는 지난한 작업. 햇빛과 바람과 밤이슬까지 맞으며 조기는 굴비로 거듭 났고 조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맛을 가지게 됐다.지금 법성포에 적을 두고 드나드는 조기잡이 유자망 어선은 4~5척에 불과하다. 40여 년 전 연평도 앞바다에서 조기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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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7]소래포구 대동굿은 사라지고 교회에서 출어예배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축제마당의 호객꾼이 된 슬픈 토착 신들소래포구에도 오랫동안 풍어굿이 있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은 소래포구에서 풍어굿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과학기술의 위력 앞에서는 어업의 신인 임경업 장군이나 용왕도 기를 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들을 찾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토착신들이 화려하게 귀환했다. 신들을 부른 것은 풍랑의 위협이 아니었다. 관광산업. 섬이나 어촌으로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토착 신들도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소래포구 축제에 풍어굿이 포함되면서 소래의 신들도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풍어굿의 제물을 받아먹는 신이지만 이제 더 이상 어업의 신이 아니다. 관광의 신이다. 풍랑을 잠재우거나 풍어의 능력을 상실한 신들. 축제 마당의 배우가 된 신들. 포구의 신들은 축제 때만 잠깐 관광객을 부르는 호객꾼으로 전락했다. # 안음전 만신, 선주 집 며느리에서 무교의 사제로오랜 세월 소래포구 풍어굿을 주관했던 사람은 안음전(81) 만신이다. 만신은 황해도 연백에서 시집살이를 하던 중 22살에 첫 신 내림을 경험했다. 한국전쟁 때 피란 내려와 소래에 정착한 새댁은 노량진의 우주옥 선생을 신어미로 모시고 내림굿을 한 뒤 만신이 됐다. 만신은 신당에 연평바다 임경업 장군을 주신으로 삼고 일월성신, 단군님, 옥황상제님, 만성수, 아미타부처님, 관음보살님 등의 신을 함께 모셨다.만신 집안에서 배를 부리면서 만신은 정초가 되면 뱃고사를 올렸다. 그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뱃고사를 부탁해 왔다. 그 후로 마을 대동굿도 모시게 됐다. 나중에는 선착장 한 가운데서 굿을 했다. 만신 집안의 배에서 굿을 할 때는 앉은굿을 했지만 대동굿을 하면서는 선굿을 했다. 일어나서 하는 큰 굿판을 벌이게 된 것이다. 작두도 타고 공수도 내렸다. 소래의 산만이 아니라 천하명산의 신령님네를 다 불러서 축원을 드렸다. 징, 상장구, 북, 피리 등 5명의 재비와 신딸들을 데리고 굿을 했다. 황해도 굿은 본디 24 거리 굿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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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6]월동대비 살오른 가을 꽃게도 일품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새우나 주꾸미와 함께 소래를 포구답게 하는 대표어족은 꽃게다. 인천을 비롯 수도권 사람들은 싱싱하고 값싼 꽃게를 사러 소래포구를 찾는다. 꽃게는 알배기 봄 꽃게를 일미로 치지만 산란을 끝내고 월동에 대비해 살을 찌우기 시작한 가을 꽃게도 일품이다. 덕적도 인근 어장에서 조업을 마친 꽃게 배가 들어오는 시간이면 소래포구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인다.# 또 하나의 소래 명물 꽃게수심 20~40m의 바다 속에 사는 꽃게는 야행성이다. 밤이 되면 활동을 시작해 조개나 가재, 새우 등을 잡아먹고 산다. 15℃ 이상 되는 바다 속에서 산란한다. 10℃ 이하로 떨어지면 동면에 든다. 그래서 과거에는 꽃게를 동면시켜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덕적도 인근은 최대의 꽃게 어장이었다. 지금도 소래의 어선들은 덕적도 근해로 꽃게잡이를 나간다. 1980년대 덕적도 도우(濤 ) 포구 앞바다는 꽃게잡이 선단의 전진기지였다. 어선들이 꽃게를 잡아오면 모선에서는 꽃게를 포장했다. 최상품 꽃게는 모두 일본으로 수출됐다. 산 꽃게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꽃게를 '마취'시켜야 했다. 얼음물 탱크에 산 꽃게를 넣고 15~20분 정도 지나면 꽃게들의 몸이 마비되어 발을 웅크리고 몸이 굳어졌다. 톱밥을 깐 상자에 동면에 든 꽃게를 쌓고 다시 톱밥을 뿌리고 꽃게를 쌓았다. 상자는 테이프로 봉인했다. 비행기를 통해 일본으로 운송된 꽃게는 포장을 뜯으면 다시 살아났다. 이동 중에 온도가 올라가 동면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산 꽃게보다 냉장 꽃게가 더 맛있어요"옛날 양반가 중,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등의 가문에서는 꽃게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정도를 가지 않고 옆으로 걷는 걸음걸이나 속 창자가 없는 게의 생리를 금기시한 때문이었다.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오늘날 그런 이유로 꽃게를 먹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없어서 못 먹는다.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에 서민들은 쉽게 먹기 어려운 귀물. 하지만 꽃게 철, 소래포구에서는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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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5]포구 삼키는 신도시…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아파트 단지 건축으로 소래포구 정취 사라져갈 위기광성횟집 이원섭(70) 사장은 황해도 장연군 해안면 순계리 출신이다. 장산곶이나 몽금포가 지척이었다. 그도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와 전국 각지를 전전하다 인천 송월동에 정착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황해도 고향사람을 연줄로 소래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그는 직장을 다니며 사업도 벌여 보았으나 여의치 않자 1970년 무렵 아버지를 찾아 소래로 옮겨왔다. 아버지로부터 광성호라는 작은 발동선을 물려받았다. 그가 이주해 왔을 때는 소래포구에 30가구 남짓 살고 있었다. 석탄을 때는 협궤열차가 연기를 뿜으며 마을 앞으로 지나다녔다. 포구는 황해도, 평안도 사람 등 피란 나온 이북 사람들의 새로운 터전이 돼 주었다. 이 사장은 새 광성호로 11년간 조업을 했다. 그러다 배를 팔고 다시 인천으로 나가 백석동에서 양돈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하고 결국 소래로 돌아왔다. 그때가 1980년이었다. 지금 자리에서 횟집을 시작했다. 그 사이 건물도 새로 짓고 3번 정도 개축을 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가 운영하는 광성횟집도 곧 헐리게 된다. 소래포구 해안가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그의 집터에 도로가 날 예정이다. 보상이야 받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크다. 어시장 옆으로 큰 도로가 나게 되면 소래포구가 어촌의 정취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촌의 모습이 살아있고 어선들이 드나드니 사람들이 소래로 찾아오지 그런 것들이 사라진다면 굳이 누가 소래까지 올지 우려스럽단다. 그는 개발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래 앞바다에 물고기가 버글버글 했었어"포구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변에 천막을 치고 바지락이랑 굴을 까는 사람들이 있다. 노부부와 딸은 상점에서 주문을 받아 작업한다. 어패류는 소래 갯벌에서 나는 것이 없다. 굴은 남쪽에서 올라오고 바지락은 영흥도 쪽 섬들에서 온다. 조부영(83) 노인의 가족도 피란민이었다. 전쟁 전 노인은 황해도 옹진의 '무도'란 섬에 살았다. 열여덟 살 때부터 고깃배를 탔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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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4]목숨 걸고 새우를 잡던 시절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배 새로 짓고 일주 만에 비용 다 뽑아옛 소래역에서 포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건어물 상점이 몇 곳 있다. 그 중 한 집인 결성건어물 장영수 사장은 소래포구의 산증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황해도 옹진에서 온 피란민이다.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1969년부터 소래에서 배를 탔다. 장 사장은 아버지의 작은 목선을 물려받았다. 지금은 육지가 된 오이도 앞 바다에 나가 새우와 꽃게, 농어, 숭어, 망둥이, 주꾸미 등을 잡았다. 장 사장은 소래포구에서 최초로 기계배를 직접 건조한 세 명 중 한 사람이다. 그때가 1970년대 초였다. 장순호, 임사열씨가 함께 배를 건조했다. 그때도 동력선이 몇 척 있었지만 외부에서 들여온 배들이었다.목재는 일본에서 수입된 삼나무를 세 사람이 공동으로 사왔고 한 척 당 배 목수 2명씩이 붙어서 한 달 만에 배를 지었다. 엔진도 국산을 썼다. 장 사장의 배는 3.19t, 다른 두 사람의 배는 5t짜리였다. 장 사장은 결성 장씨인 자신의 본을 따 결성호라 이름 붙였다. 장 사장이 새로 건조한 배로 다시 시작한 조업의 결과는 대박이었다. 쌀 한 가마니에 6천원하던 시절, 배를 새로 짓는데 146만원이 들었다. 그런데 그 비용을 1주일 만에 다 뽑았다. 송도 앞바다에 숭어 그물을 쳤는데 거기서 1주일 동안 매일같이 만선이었다. 하루에 보통 열 서너 박스씩 건져 올렸다. 날이 추워지면 숭어들은 월동을 위해 갯벌을 떠나 더 깊은 바다로 이동을 시작한다. 그때는 바다에 막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 12월 24일, 25일 무렵이었다."갯고랑에 살얼음질 때 숭어는 반쯤 동면 상태로 떠내려가요. 거기에 그물을 뒤집어 씌웠으니. 그저 쓸어 담은 셈이었지요."그 무렵부터 소래포구의 어선들도 규모가 커지고 노를 젓던 전마선들도 동력선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오이도 앞바다 정도까지만 가던 배들이 차츰 팔미도, 초치도, 덕적도, 문갑도, 선갑도, 굴업도, 연평도까지 어장을 넓혀 나갔다. 당시 45마력의 배로 덕적도까지 5시간이 걸렸다. 850마력 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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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3]"총각은 새우를 먹지 마라"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은 새우를 먹지 말라'한국에서 젓새우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은 임자도와 낙월도 등 신안의 바다다. 이 지역에서 전국 젓새우의 60% 이상이 산출된다. 중국산이 아닌 국산의 경우 소래나 광천 토굴젓 등 이름난 새우젓들도 대부분 여기서 난 젓새우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젓새우는 배에서 잡는 즉시 소금에 절여진다. 새우 양의 15~40%에 해당하는 소금을 넣고 절인 새우는 대개 유명한 새우젓 산지로 가서 숙성 과정을 거친 뒤 시장에 나온다. 더운 한여름에 잡히는 육젓은 김장철까지 오래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소금을 많이 넣지만 가을에 잡히는 추젓은 소금의 비율을 낮게 잡는다. 보통 굴이나 창고 등의 서늘한 곳에서 2~3개월 정도 발효시키면 새우젓이 탄생한다.임자도 전장포, 소래 포구, 강경, 광천, 마포 등이 예부터 새우젓 시장으로 유명했다. 젓새우는 잡히는 시기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다. 음력 3~4월의 새우는 춘젓, 5월에 잡히는 것은 오젓 혹은 오사리젓이라고도 한다. 산란기인 6월에 잡히는 육젓이 최상품이다. 다른 새우보다 살이 통통해 값은 비싸지만 김장용으로 선호된다. 7~8월은 자젓, 9~10월은 추젓, 추젓은 주로 요리에 사용된다. 1~2월 한겨울의 새우는 동백하젓, 2~3월 깊은 바다에서 잡히는 가장 작은 새우로는 곤쟁이젓을 담는다. 그 밖에도 자하젓, 차젓, 풋젓, 동젓, 닷대기 젓 등 새우젓의 수는 많기도 하다. 민물새우로 만든 것은 토하젓이다. 새우 극상의 맛은 옛날 궁중 진상품으로 올리던 새우 알젓이다. 새우는 흔히 강장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은 새우를 먹지 말라'거나 '총각은 새우를 먹지 말라'는 등의 식담이 생겨났다. 새우의 영양분은 머리에 가장 많다. 가재 등 다른 갑각류와 달리 새우만이 머리에 알을 싣고, 뇌와 정소, 간장 등에는 단백질이 풍부하다. 그래서 '머리가 붙어 있지 않은 새우는 먹지 말라'는 식담도 생겼을 것이다. 음식은 성질이나 영양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평성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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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2]피란민들이 소래포구 어업 발달 이끌어 지면기사
# 소래 포구의 산증인, 어촌계[경인일보=]1935년 일제는 화약의 원료가 되는 천일염 반출을 위해 수인선 철도를 건설했다. 철도와 함께 소래포구의 역사도 시작됐다. 철도 건설 초기에는 건설 노동자들과 염전의 염부들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가 포구를 드나들었고 차츰 포구에 정착한 몇몇 주민들도 전마선(노를 젓는 작은 배)으로 어업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하에서 소래포구는 크게 번성하지 못했다. 소래포구 도약의 계기는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정착이다. 어로 경험이 있는 피란민들이 소래의 어업을 주도했다. 1963년 2월, 어촌계원 23명이 모여 임민선씨를 초대 어촌계장으로 추대하고 소래 어촌계를 탄생시켰다. 1970년대 초에는 어선들의 어획물을 육상에 하역할 수 있는 공간인 '물양장'이 조성됐고, 소래포구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에는 어선 수도 150여척으로 급증했다. 1980년대들어 소래포구는 더 크게 번성했다. 1982년 인천항에 소형 어선의 출입이 금지되면서 인천의 어선들이 소래포구로 대거 몰려 온 것도 계기가 됐다. 그 해 어촌계원은 200명으로 늘어났다.포구의 번성과 함께 횟집들도 증가했다. 1983년 정부는 오랫동안 무허가로 운영되던 횟집들을 양성화시켰다. 이때 지역 주민 32명이 허가를 얻었다. 1983~86년 사이 소래포구는 최전성기를 누렸다. 1984년 11월 한 달 동안 소래포구를 다녀간 사람은 18만명이 넘었다. 그때는 관광버스가 하루 평균 100대씩 밀려들었다. 김장철이면 새우젓 산지로 신문, 잡지, 방송 등에 소개되고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으로 빈번히 등장하면서 소래포구는 전국적 유명세를 탔다. 처음에는 새우젓과 생새우를 사려는 사람들이 주로 찾아왔지만 점차 소래에 가면 갓 잡아온 활어 회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수도권 인근에는 소래포구처럼 옛 정취를 간직한 포구가 남아있지 않은 것도 사람들을 몰리게 만든 이유였다. 소래 어촌계도 홍보에 적극적이었다. 1981년부터 새우를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 소래 어촌계 전화번호가 새겨진 봉투를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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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플루 감염 태국인 도시축전 관람 지면기사
[경인일보=목동훈·김명래기자]'인천세계도시축전' 관람객들이 신종플루 감염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종플루 보균자가 도시축전을 관람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10일 인천시와 질병관리본부 등에 따르면 인천에서 열린 '제12회 걸스카우트 국제야영대회'에 참석한 태국인 2명이 신종플루에 감염된 것으로 지난 8~9일 확인됐다. 이들은 지난 7일 도시축전을 관람한 것으로 드러나 2차 감염의 우려가 있다.태국인 K대원은 지난 8일 오후 2시께 발열증세를 보였다. 한국걸스카우트연맹은 K대원과 텐트를 함께 사용한 대원 3명 등 총 4명에 대한 역학조사를 보건당국에 의뢰했다.K대원은 이날 오후 9시30분께 신종플루 확진환자로 밝혀졌다. K대원과 역학조사를 함께 의뢰했던 대원 3명 중 1명은 다음날(9일) 신종플루 확진환자로 판명됐다.K대원 등 걸스카우트 대원들은 지난 7일 도시축전을 관람했다. 7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 국내외 인사 등 5만여명이 도시축전 주행사장을 찾았다. K대원 등 태국인 2명은 신종플루 잠복기 상태에서 도시축전을 관람한 것으로 추측된다.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신종플루 전염기는 증상 발생 하루 전 날부터 소멸 때까지다"며 "이때 다른 사람에게 (신종플루를) 옮길 수 있다"고 했다. 7일 도시축전 행사장에서 이들 태국인과 접촉한 관람객들은 신종플루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도시축전 주행사장에는 '신종플루 상황실'이 마련돼 있다. 그러나 10일 오후 4시 확인한 결과, 상황실 직원들은 신종플루 확진환자 발생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시 보건정책과 관계자는 "걸스카우트 신종플루 확진환자 문제는 아동청소년과에서 담당하고 있다. 우리는 노코멘트다"고 했다. 보건정책과는 인천지역 신종플루 확진환자 수도 공개하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암암리에 16개 시·도가 환자 수를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됐다"며 "지역경제와 행사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비공개를) 이해해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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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1]소래포구, 저무는 부둣가에 파시가 서면… 지면기사
#어시장 풍경들[경인일보=]포구 시장 골목, 간장 게장을 파는 여자는 같은 자리에서 30년 동안이나 노점을 했다. 꽃게 철에는 주로 간장 게장을 담가 팔면서 낙지젓과 생굴 무침도 함께 판다. 꽃게가 나지 않는 철에는 말린 생선 장사로 생업을 이어간다. "이 시장에서는 한 가지만 고집해서는 장사가 안 된다." 지금도 시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데 여자는 옛날에 오히려 장사가 더 잘 됐다고 회상한다. "그때는 많이 사다가 냉동 해놓고 먹으니까 장사가 잘 됐어요. 지금은 다들 외식을 많이 하니까 장사가 잘 안돼요. 반찬거리도 잘 안사가고. 지금이야 김장철이라 새우 사러온 사람이 많지만 이 때 뿐이에요. 횟집도 옛날 보다 안돼요.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여자는 게장은 그날 담근 것을 판다. 그래야 집에 가면 맞춤하게 익은 게장을 먹을 수 있다. 여기서 익은 것 사가면 "쩔어서 물이 안 좋다." 간장 게장 암 꽃게는 5~6마리 한통에 2만원. 시내의 게장 정식 집에서는 저런 꽃게 한 마리 올려놓고 2만원도 받고 3만원도 받는다. 충북 양념집 앞에서부터 물양장 좌판 골목이 시작된다. 과거에는 젓갈전, 생선전, 조개전, 활어전들의 구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마른 생선 좌판 옆에 조개좌판이 있고, 그 옆에 활어집도 있다. 좌판의 주인들이 바뀌면서 자꾸 더 잘 되는 품목으로 바꾸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래도 여전한 것은 중간의 젓갈 좌판과 바닷가 쪽으로 난 활어난전 정도다. 그쪽이 그래도 손님도 안정적이고 꾸준한 까닭이다. 시장 들머리에 대하를 파는 왕새우 좌판이 있다. 대하는 두 종류다. 태국산은 1kg에 1만5천원. 사우디산은 1kg에 1만8천원이다. 상인은 사우디아라비아산이 더 맛있다고 권한다. 보기에도 때깔이 좋아 보인다. 사막의 나라에서 웬 해산물인가 싶지만 시장에는 의외로 사우디 산 수산물들이 많다. 대하는 대부분이 냉동이다. 수입산 냉동새우를 해동해 판다. 왕새우 좌판 주인여자는 "소래는 전부 외국산 대하"라고 단언한다. 국산은 가격도 비싸고 물량도 많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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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0]도시의 섬, 추억을 파는 소래 포구 지면기사
# 꼬마기차"색소폰 소리보다 더 깊은 폐부에서 울려오는 듯한 경적 소리, 잘가락 잘가락 밟히는 바퀴 소리, 그리고 갓 출가하여 여대생 티가 가시지 않은 채 팔뚝에 연비자국이 아직 아물지 않은 수해 스님을 태워 보내기 위해 어느 날 새벽 별을 보며 배웅 나갔던 여섯시 반의 이른 새벽 열차…."윤후명의 소설 '협궤열차' 속에서 그려지는 열차의 모습은 애잔하다. 1970년대 말쯤이었다. 송도역에서 협궤열차를 타고 소래에 처음 가 본 것이. 열차는 장난감 열차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작은 열차를 '꼬마기차'라 불렀다. 그때는 송도에서 수원까지 46.9㎞의 노선만 살아 있었다. 송도에서 출발한 기차는 남동, 소래, 달월, 군자, 원곡, 고잔, 일리, 사리, 야목, 어천을 거쳐 종착역인 수원역에 도착했다. 협궤 열차가 사라지기 전, 인천에 살았던 사람 중 꼬마 기차에 대한 추억 하나쯤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수인선 철도는 일반 철길 폭의 절반 밖에 안 되는 폭 72.6㎝의 협궤 철로였다. 마주 앉은 승객의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객차 안은 좁았다. 협궤열차는 문학과 방송, 영화 등의 무대로 활용되면서 유명세를 탔고 덩달아 소래포구의 명성을 높이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바람이 제법 거세다. 이제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소래철교에는 난간이 설치되었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건너다닌다. 철로가 있던 자리에는 포장마차와 식당과 난전이 들어섰다. 거기서 사람들은 한 잔에 천 원짜리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고, 전어 구이를 먹고, 호떡과 국화빵, 마른 새우와 멸치를 사간다. 생굴무침과 바지락을 팔러 나온 행상들, 텃밭에서 기른 호박과 시금치, 고추, 알타리무를 들고 나온 할머니들도 있다. 철로에서 마시는 막걸리 맛은 각별하지만 나는 여전히 협궤열차가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다. 소래포구는 협궤열차 때문에 생긴 포구였다. 소래포구가 생기기 전에는 대부분의 배들이 시흥시 포동의 새우개포구로 드나들었다. 1907년 일제는 주안에 시험용 염전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바닷물을 끓여서 만드는 전통 자염(煮鹽) 생산지였던 주안, 남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