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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산둥 그리고 세계의 자장면·27]연재를 마치면서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유중하 연세대 중문학과 교수]지난 4월10일 자장면 세 곱빼기를 먹은 이야기로부터 첫 회를 출발한 자장면의 뿌리를 찾는 여행,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8개월여의 일정을 마무리할 때가 온 듯하다. 세 차례의 중국 여행을 통해 베이징, 상하이, 옌타이, 웨이하이, 지난, 린칭, 취푸, 린이, 소우광, 웨이산 등 적지 않은 도시를 떠돌던 어느 날 로밍(roaming)해간 핸드폰을 통해 한국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서 로밍이라는 말을 되새겼다. 로밍은 사전의 뜻풀이에 의하면 정처 없이 떠돈다는 뜻이지만 그냥 내 식으로 '싸'돌아다닌다고 풀이하면 그만이다. 그러면서 문득 눈앞에 어른거리는 전경 하나. 선추안(深玔)에서 시작된 중국의 개방은 연안을 따라 북상한다. 상하이를 거쳤고 앞으로 칭다오와 웨이하이와 옌타이를 지나게 될 것이다. 그 동선을 따라 도시의 1인당 가처분 소득 1만달러 시대가 북상 중이다. 아울러 싸돌아다닌 산둥도 성 전체가 1인당 1만달러 시대에 불원간 진입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구 1억에 한반도의 덩치만한 땅 덩어리를 가진 산둥은 모르긴 몰라도 아마 한반도 경제의 덩치와 맞먹게 되지 않겠는가. 그런 날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다고 보면 그리 틀리지 않다. 현금의 인천으로부터 뱃길로 하루 거리, 인천공항에서 한 시간 거리인 이곳은 앞으로 더욱 당겨질 것이며, 황해 바다를 잇는 카페리는 물론 근자에 신문지상을 장식한 '한중해저터널'도 어쩌면 공상으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이어지는 두 번째 전경이 어른거린 것은 인천대교를 지나면서다. 인천의 랜드마크인 인천대교는 송도와 영종도를 잇는 다리다. 그런데 이 다리보다 더욱 거대한 다리가 인천에 있다. 그것은 인천에 사는 산둥 출신의 화교다. 그들로 하여금 한반도와 산둥반도를 잇게 한다면…. 20세기 내내 한국에서는 이국인으로, 대만에서는 한국인으로, 대륙에서는 대만인으로 찬밥 신세 취급을 당해온 그들의 처지는 그야말로 기구하다는 말 그 자체이다. 산둥에서 건너와 일제와 6·25를 겪고 분단된 나라에 사는 동안, 그들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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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산둥 그리고 세계의 자장면·26]산둥을 떠나면서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유중하 연세대 중문학과 교수]상하이 훙차오(虹橋) 공항에서 출발하여 김포로 향하는 에어셔틀 비행기 안에서 나는 셔틀이란 이 영어 단어의 본래의 의미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노트북을 꺼내 사전에서 뜻을 검색해보니 직조기를 오가며 옷감을 짜는 북이란다. 훙차오와 김포 그리고 하네다를 잇는 이 셔틀은 그렇다면 동북아 일대를 덮는 천을 짜는 북인가. 이 셔틀을 타고 움직이는 인간과 물자가 옷감을 짜는 실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짜는 이 옷감에 새겨진 무늬는 무슨 무늬인가.어제 상하이로 향하는 열차 식당에서 만두와 함께 먹은 '빠오차오솽화'(爆炒雙花)에 재료로 들어간 돼지의 간과 오징어에 칼집으로 새겨진 화문(花紋 - 꽃무늬). 화문을 새긴 그 칼은 예사로운 칼이 아니다. 며칠 전 강태공 공원에 새로 세워진 그 솥과 같다. 창칼을 녹여 만든 솥. 그 솥에 쪄먹는 만두. 혹은 그 창칼로 녹인 프라이팬(궈[鍋]라고 부른다)에 칼 아닌 칼로 꽃무늬 모양을 만들어 먹는 음식. 배낭에서 다시 중국요리사전을 펼친다. 요리를 위해 칼로 새기는 꽃무늬로는 국화나 매화가 있고 열매로는 밀 이삭이나 여지 혹은 호두 모양도 있어 이른바 도공(刀工 - 칼을 다루는 기법)도 부지기수다. 중국은 이런 식으로 국력을 소진하다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했고, 청일전쟁에서는 일본에 패했다. 영국과 일본 두 나라는 모두 섬나라다. 결론적으로 칼을 칼답게 벼리지 못하고 무(武)를 포기함으로써 문약(文弱)에 이른 것. 하지만 이제 세상은 달라지고 있고 앞으로 더욱 달라질 것이다. 문약의 시대로부터 '문강(文强)'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징후는 뚜렷하다. 文이 힘이 되는 시대다. '소프트 파워'로의 이동은 이미 자명하다. '문류'(文流)가 물류(物流)에 앞서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둘이 함께 가는 세기가 바로 21세기다. 이렇게 文과 物이 함께 가거나 文과 武의 자리가 바뀌는 걸 짚지 못하는 지도자는 한물 간 늙다리에 속한다. 이런 지도자를 둔 국가는 향후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다. 아울러 먹을 줄 모르는 지도자, 손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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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산둥 그리고 세계의 자장면·25]'웨이산 현' 으로 가는 길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유중하 연세대 중문학과 교수]이튿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다. 손 회장, 왕뽀 그리고 나 일행 세 사람은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린이 시내의 '싸'(삼)를 파는 집을 찾았다. '싸'는 우리로 치면, 쇠고기를 넣고 곤 국물에 다시 쌀가루를 풀어 끓인 탕 종류. 겉보기에는 설렁탕 국물과 흡사한데 쌀의 전분이 녹아 있으니 약간 뻑뻑한 맛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마치 아프리카의 토인에게 얼음을 설명하는 듯 요령부득인데 번뜩 스쳐가는 묘안이 있다. 숭늉으로 설렁탕을 끓인 것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하다가 그래도 마뜩치가 않다. 요는 먹어봐야 아는 것이다. '싸'는 린이 사람들이 즐겨 먹는 아침 해장국이라는 것이 왕뽀 씨의 설명인데, 고기 건더기가 들어간 국물은 한 그릇에 인민폐 5위안, 고기가 들어가지 않고 계란을 푼 것은 2위안이다. 거기에 기름에 튀긴 요우탸오(油條) 1원어치를 사면 두세 명이 먹을 분량이다.린이 사투리로 '싸'라 부르는 이 삼이라는 음식은 연조가 아주 오래된 음식이다. 공자가 때를 못 만나 천하를 떠돌 때 나물국에 쌀가루도 풀지 못할 만큼 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본디 삼은 이었는데 훗날 삼으로 된 데는 어떤 연유가 감추어져 있는가. 이런 의문을 품은 것은 본디 중국인들이 장수 식품으로 밝히는 해삼이 본디 토육(土肉)이거나 사손(沙巽)이라고 부르다가 그 효능이 인삼에 필적한다고 해서 바다 인삼, 곧 해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예전에 소개한 그 문구가 떠오른 게다.아침을 먹고 나니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날 일정은 린이의 서쪽인 웨이산(微山) 현 방문. 손 회장이 진작부터 거기를 같이 가보자고 해온 터에 이번 길에 여정을 합친 것이다. 웨이산 현에서 한국 사무소로 파견한 왕이(王毅)라는 젊은 친구가 웨이산 현에서 차로 마중을 와주었다. 웨이산 가는 길에 들러야 할 곳이 창산(倉山), 마늘로 유명한 곳이다. 장치우(章丘) 대파와 창산 마늘이 산둥 요리를 이루는 주된 양념 재료요 풍미특색이다. 하지만 한국 음식도 마찬가지다. 고기나 야채 혹은 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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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산둥 그리고 세계의 자장면·24]'만두 본고장' 이난·강태공 사당기행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유중하 연세대 중문학과 교수]제갈량고리기념관을 뒤로 하고 먼지를 피우며 다시 시골길을 달려 되돌아 나가는데 손 회장이 차를 세운다. "어이, 왕뽀. 차 좀 세워봐. 저거를 찍어야겠네"하면서 가리키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길가에 서 있는 연자방아다. 차에서 내려 디카에 담는데 곡물 가루가 방아 위에 묻어있는 폼이 지금도 사용하는 연자방아인 게다. 옳다. 제갈량 고향의 연자방아. 그거 말이 되지 않는가. 자장면의 麵이라는 한자가 무슨 뜻인가. 麵은 麥+面이지만 그 面의 본 한자는 실은 이다. 그리고 그 은 다시 +人, 곧 사람의 얼굴을 가린다는 뜻이다. 우리가 밀가루라고 할때 그 본 한자는 면이다. 그 면이 麵으로 되었다가 다시 간체자로 面이 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밀을 빻아 가루를 내서 만들어내는 국수는 미엔탸오(面條)라 부르고 국수와 만두 등 밀가루 음식을 통틀어 면식(面食) 혹은 그냥 면(面)으로 표기한다.연자방아를 담은 한 장의 사진으로 만두 이야기의 위안을 삼고 진짜로 본바닥 만두를 먹기 위해 찾은 곳은 이난(沂南)의 한 식당. 점심때를 약간 넘긴 시각인데도 홀 안은 제법 손님들로 왁자한 걸로 미루어 음식 맛은 그럴 듯한가 보다. 화장실에 들러 볼 일을 보고 손을 씻고 나오니 왕뽀 씨가 이미 바이지우(白酒·고량주)의 병마개를 따놓았다. 말 그대로 '대낮부터 시작'이다. '량차이'(凉菜·찬 요리, 곧 우리 식으로 하면 마른안주)가 두어 접시 식탁에 올라온다. 무청을 말린 것을 두부와 섞어 양념으로 무친, 말하자면 그 동네 향토 량차이는 맛이 그야말로 '부추오'(不錯·정말 괜찮다). 입에 한 젓가락 넣고 맛을 보면서 내가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자, 식당을 잘 골랐다고 손 회장이 아우인 왕뽀를 칭찬한다.다시 상 위로 '러차이'(熱菜·량차이의 반대로 불로 요리한 요리)가 층층이 쌓여 올려진다. 상 위로 린이의 자오파이차이(招牌菜·유명 메뉴)인 차오지(炒鷄·닭볶음)가 올라오자 '신차이 라이러, 짜이이뻬이'(새 요리가 올라왔으니 다시 한 잔). 이렇게 두 잔 째로 넘어가는데 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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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산둥 그리고 세계의 자장면·23]린이에서 제갈량의 고향 '이난' 까지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유중하 연세대 중문학과 교수]산둥의 칭저우(靑州)에서 린이(臨沂)로 향하는 시외버스는 제법 이른 시각이었음에도 만석을 넘어 정원 초과였을 뿐아니라, 손님들이 가지고 가는 짐들이 버스 아래의 짐칸을 메우고도 모자라 버스안의 좌석 옆 통로에도 짐을 실은 위로 승객들이 앉아가는 그런 버스였다. 도합 5시간이나 걸리는 이동 시간 동안, 중간에 한 번 5분여를 쉬면서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담배 한 대를 피운 시간 이외에는, 노트북 등속을 넣은 배낭을 무릎 위에 껴안은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앉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내게는 마냥 고역의 시간이 아니라 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지고한 시간이었으니, 그것은 화교와 자장면으로 이야기를 꾸민다면 하고 궁리를 하다가 문득 소우광의 채소 도매시장 앞에서 사진기에 담은 커다란 배추의 조각상으로부터 배추같은 인물 혹은 여인네의 캐릭터 비슷한 것이 눈앞에 어른거려왔기 때문이다. 배추같은 여인이라….소우광의 온실 앞에 심어진 배추는 햇볕을 듬뿍 받아 푸르다 못해 시퍼렜다. 그 시퍼런 배춧잎, 그 잎이야말로 싱싱함의 표상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기가 펄펄 살아 있는 화교 여인이라…. 말이 되겠는걸….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중국의 한 요리책의 서문에서 '그 사람이 먹은 것을 보여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맞히겠다'고 한 구절이 생각난 때문일까. 말하자면 먹을거리와 사람 됨됨이가 서로 떨어져서 따로 놀지 않으리라는 계산은 제법 그럴듯한 발상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는데 버스가 초행길인 린이 시내로 접어든다.적이 놀라마지 않았던 것은, 지도에서 이름을 살폈을 뿐인 이 도시의 규모가 우선 큰 것이 첫 번째요, 두 번째는 필시 이하(沂河) 강물에 임하여 앉혀진 이 도시의 정갈함에, 세 번째는 도시의 구획과 정비의 세련됨이 산둥의 칭다오니 옌타이니 혹은 웨이하이같은 해안 도시에 비해 결코 밑가지 않는다는 인상 때문이었다. 시외버스에서 내려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기사에게 린이의 주요 산업이 뭐냐고 묻자 기사의 대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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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산둥 그리고 세계의 자장면·22]산둥 길목 '야채 생산 본고장' 소우광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유중하 연세대 중문학과 교수]10월도 이미 반 넘어 하순으로 접어든 어느 날 산둥의 가을 하늘도 한반도의 그것처럼 맑고 푸르다. 강태공 공원을 뒤로 하고 다시 린쯔의 고속도로 바로 북쪽에 자리잡은 제나라 역사박물관을 향하는데, 동네 어귀에 커다란 입간판이 택시를 세우게 한다. 이름하여 제도진(齊都鎭). 제나라의 옛 도읍이 있던 마을이다. 사진기에 담은 다음, 이미 대여섯 차례는 좋이 들렀던 박물관에서 새로운 것이 있나 눈요기를 대강 하고 나서 다시 택시로 방향을 잡은 것은 소우광(壽光)시. 이번 산둥 행에서 찍어야 할 중요한 점이다. 산둥에서 건너온 화교들 가운데 상당수가 중화요식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은 상식 비슷한 사실이지만, 한국의 화교들이 요식업에 종사하는 데 결락시킬 수 없는 요소가 식자재라는 점을 짚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식자재 가운데 채소의 공급을 맡아 사시사철 양파나 오이 혹은 배추 따위의 야채를 중국 음식점에 대준 이들 역시 화교라는 점은 제법 의미심장하다. 이른바 화농(華農·화교농사꾼)이라고 해서 산둥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로 건너온 이들이 지은 농사는 기존의 한반도의 농사꾼들이 짓던 농사와는 성격이 달랐다. 화농들은 이른바 영농(營農)을 한 것이다. 집 앞 텃밭에 씨를 뿌려 때맞추어 거두어 가내의 식용으로 충당하다가 남은 것은 장날에 내다팔던 식의 자급자족 농사가 아니라 영리와 장사를 염두에 둔, 말하자면 상행위를 염두에 둔 농사였다.지난 호에 언급한 바 있듯이 제나라의 도읍 린쯔 일대는 곡창지대인데다가 린쯔 바로 옆의 소우광시는 오랜 야채의 생산지다. 그리고 산둥의 채소 재배 기술은 적어도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엽까지, 다시 말해 일본의 신식 영농 기술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한반도보다 선진지역이었다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산둥 화교들이 한반도로 건너와 '청요리집'을 내면서 요리에 들어가는 식재료 가운데 주요한 일부를 차지하는 야채를 바로 이들 화농들이 맡았다. 게다가 산둥에서는 19세기 말 무렵 한해 걸러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찾아들면서 소우광 일대의 농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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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산둥 그리고 세계의 자장면·21]제나라 그리고 강태공의 생선요리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유중하 연세대 중문학과 교수]10월 중순을 넘긴 무렵, 중간고사 기간을 이용하여 자장면의 뿌리를 찾아나서는 세번째 산둥행 길에 오른 것은 옛적 제나라로 접속하기 위해서다. 린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늘 그렇듯이 한자 뜻풀이를 하고 있었다. 물고기(魚)가 달다(甘)는 뜻으로부터 노(魯)라는 나라 이름이 말미암았음은 본 연재가 시작될 무렵에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와, 이른바 산둥 땅을 이루는 제로(齊魯)라는 두 나라 이름 가운데 제나라의 이름자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齊)라는 한자는 '벼와 보리의 이삭이 위에서 보면 평평하다'(象禾麥穗上平之形)는 뜻이다. 말하자면 제나라는 곡창지대라는 뜻으로 풀이하면 그리 어긋난 해석이 아닌 게다. 산둥요리가 바로 이 곡창지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풀이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제나라의 옛 도읍인 린쯔(臨淄)는 무슨 뜻인가. 쯔(淄)도 그럴 듯하다. + 川 + 田 = 淄'라는 등식에는 물이 많이 흐르는 곳에 밭이 있다는 뜻이니 곡식이 풍부하리라는 암시를 받는 것은 억지가 아니다.택시 안에서 배낭에 있는 산둥 지도책을 펼쳐 든다. 지난 4월 첫 산둥행에서 들른 린칭(臨淸)을 떠올리며, 산둥의 지형을 그린 페이지를 돋보기 너머로 훑는다. 지도에는 린쯔, 린칭 이외에 린이(臨沂)와 린무(臨沐)라는 지명이 '나를 봐주세요' 하면서 별처럼 소곤거린다. 청(淸), 치(淄), 기(沂), 목(沐) 등 임(臨) 옆에 붙은 기호에는 하나같이 물 수(水)가 붙어 있다. 강물을 끼고 있는 도시라는 코드인 것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했을 때, 그 '임'은 물을 위에서 굽어본다는 뜻이기도 하다.린쯔는 '오악지수'(五嶽之首-중국에서 높은 다섯 산 가운데 으뜸)로 일컬어지는 태산(泰山) 자락 북쪽에 위치한 도시. 임수의 수는 물론 쯔허 강물이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태산 자락으로 북면하여 앉혀진 린쯔 앞으로는 또 하나의 강물이 흐른다. 그것은 황허(黃河) 본류다. 황허 본류가 하베이와 산둥의 평원을 이루는 것이다. 그 일대에서 주로 밀농사가 이루어졌음은 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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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산둥 그리고 세계의 자장면·20]베이징 퉁허쥐에서 맛본 산부잔(三不粘)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유중하 연세대 중문학과 교수]8월17일 오후 2시. 베이징의 또 다른 푸산(福山) 출신 음식점 퉁허쥐(同和居)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한 개의 한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라오베이징자장면'(老北京炸醬麵)의 라오(老), 라오바이싱(老百姓-일반 시민)의 라오, 역사가 오랜 유명 브랜드를 뜻하는 라오즈하오(老字號)의 라오, 이들 라오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면 좋을까. '늙을 로'로 훈을 달아 뜻을 풀이하는 이 라오라는 글자를 단순히 늙어서 한물간 그 무엇으로 취급하면 그건 틀린 대답이 되는데….오후 2시30분 무렵. 퉁허쥐가 들어서 있는 산리허(三里河) 일대의 거리는 한산했다. 택시에서 내리니 길 건너편에 동화거(同和居)라는 간판이 보인다. 길을 건너기 전에 우선 사진 한 방을 찍고, 길을 건너서 간판을 올려다 본다. 제자(題字)를 한 푸지에(溥杰)는 우리에게는 영화 '마지막 황제'로 알려진 청나라 황제 푸이(溥儀)의 아우이다. 1911년 청나라가 망하면서 민국이 들어섰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뒤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면서 일본은 푸이를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로 앉혔다.일본 육사를 졸업한 푸지에는 일본 천황 가문의 피가 섞인 귀족 집안의 치가히로(嵯峨浩)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조선의 영친왕이 일본 여인 이방자 여사와 결혼을 한 것처럼 다분히 강제성을 띤 양국의 정략결혼이었다. 졸지에 만주국 황실 가문에 편입된 치가히로를 만주로 떠나보내면서 일본의 천황비가 한 말이 "중국 황실의 음식을 배워 일본 황실에 전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충고였다. 만주국 수도인 신경(新京 지금의 長春)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그녀에게 청나라 시절 어선방의 주방장인 상롱(尙榮)이 1주일에 한두 차례 요리 가정교사로 청나라 황실의 요리를 전수했다. 일본이 패전하면서 푸이는 전범이 되었고, 만주국 황제의 근위대에서 근무하던 푸지에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푸지에가 전범이 되어 중국의 감옥에 갇히면서 부부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부부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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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산둥 그리고 세계의 자장면·19]베이징 후이펑탕의 푸산요리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유중하 연세대 중문학과 교수]베이징에서 아직도 푸산(福山) 출신 요리사들이 세를 과시하고 있는 라오즈하오(老字號-우리가 쓰는 말로는 老鋪)인 후이펑탕(惠豊堂)은 꿍주펀(公主墳) 근처의 한 백화점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로 치면 신촌 로터리쯤 될까. 도착한 시각은 오전 11시30분경. 안내하는 복무원 아가씨가 예의 그 인사말 "환잉꽝린"(歡迎光臨)하고 소리를 치고는 "닌 지웨이아"(몇 분입니까)라고 묻는다.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며 "이거"(한 사람)라고 하자 잠시 기다리란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안쪽으로 힐끗 둘러보니 홀 안은 이미 북적거리고 있다. 손님이 많으니 한 시간쯤 있다가 다시 오겠다고 하자 지배인 복장을 한 아가씨가 반색을 한다.밖으로 나와 건물 외관 사진을 한 장 찍고 나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는 식당 맞은편 벤치에 앉아 후이펑탕의 옛날이야기를 떠올린다. 후이펑탕(惠豊堂)이라는 휘호(揮毫)는 청말 중국을 쥐락펴락하던 여걸 서태후의 솜씨. 악명 높은 서태후건만 글씨체 하나만은 단아하기 이를 데 없다. 후이펑탕과 서태후는 어떤 관계이기에 당대 최고 권력자인 그녀가 음식점의 간판을 써주었는가.서태후의 음식상은 호사를 극한 것이었다. 상위에 올린 요리는 기본 백 가지 이상이었고, 하루 음식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일반 백성의 몇년치에 해당되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1900년 서양의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여 시안(西安)으로 피신하면서도 어용 기차의 임시 주방 안에 조리를 하는 화덕만도 50개였단다. 그녀의 옆에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리리엔잉(李蓮英)이라는 내시가 있었다. 본디 치엔먼(前門) 앞의 건달이었는데 서태후가 머리치장을 하고 사진 찍기를 즐겨한다는 점을 알고 여인네의 머리 매무새 만지는 기술을 익힌 다음 서태후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했고 내시로서는 최고 관등인 종5품을 넘어 정3품에 이르렀다. 그에게는 리지량(李季良)이라는 양자가 있었다. 당대의 권력가를 양아버지로 두었으니 그야말로 무소불위였을 테고.당시 자금성 안에는 서태후를 위한 서선방(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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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산둥 그리고 세계의 자장면·18]베이징 京味齋老北京炸醬面의 자장면 맛기행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유중하 연세대 중문학과 교수]본바닥 베이징 자장면(老北京炸醬面·노북경작장면)을 먹으러 어디로 가나. 기실 베이징에 오기 전 한국에서 인터넷을 통해 베이징 자장면이 어디가 맛이 있는지에 대해 검색을 한 차례 한 바 있기는 하지만, '번쩍번쩍'한 간판을 내건 집보다는 일반 라오바이싱(시민)들이 길을 가다가 아무렇게나 들르는집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 택시 안에서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택시기사와 말을 주고 받으며 현지의 물정과 인심을 살피는데, 우선 자장면을 자주 먹느냐고 물은즉슨, 자주 먹긴 먹는데 집에서 해먹는단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자장면은 쟈창차이(家常菜-집에서 늘 해먹는 메뉴)라는 거다. 쟈창차이라! 그래도 가끔 외식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으니 가끔 가는 집이 바로 저기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덧붙이기를, 택시기사들이 잘 가는 집이란다. 옳거니. 한국에서도 기사식당이라고 하면 음식 맛이 대체로 그럴듯하지 않은가. 기사가 차를 세운 곳 앞에는 과연 택시 몇 대가 서 있었고, 식사를 마친 기사는 담배를 피워 문 채 잠깐의 휴식을 즐기고 있는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택시요금을 내면서 간판을 올려다보니 '京味齋老北京炸醬面(경미재로북경작장면)'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京味齋(경미재)라! 京味(경미)라면 베이징의 맛이라는 뜻일 테고, 齋(재)라면 이 음식점에는 목욕재계를 하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택시기사가 일러주어 내리기는 했지만 간판에 적힌 齋(재)라는 글자가 눈에 걸린다. 아취(雅趣)를 내거나 멋을 부리려면 제대로 부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런 볼멘 생각도 잠시인 것은 우리 김지하 시인이 '밥이 하늘'이라고 한 시 구절이 생각난 까닭이다. 중국의 사마천도 '사기'에 적기를 '民以食爲天'(민이식위천·백성은 먹을거리를 하늘로 여긴다)이라 했으니, 음식을 대함에 경건한 태도로 먹는 게 도리에 맞다. 하지만 이런 이름을 둘러싼 시비를 가릴 계제가 아닌 것이 이미 오후 세시. 배에서는 연거푸 빨리 자장면을 인풋하라는 신호가 들리는 걸.식당 안으로 들어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