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14·끝]에필로그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14·끝]에필로그 지면기사

    대중일보는 혼란하기만 했던 해방공간의 숨 가쁜 하루하루를 꼼꼼히 기록했다. 전국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새로운 문물과 신지식을 찾아 항구 도시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인천은 개항 때부터 해외의 신문물이 조선으로 들어오던 관문이었다. 다양한 사상과 사람이 뒤엉켰고, 이는 인천을 더욱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다양한 정치세력이 부대낀 곳도 인천이었다. 대중일보는 그렇게 인천에서 첨예하게 대립한 좌익과 우익 진영 간 대립과 갈등을 담아냈다.대중일보가 남긴 지면 속 시민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고, 불안한 치안상황에서 각종 범죄도 잦았다. 집을 구하는 일도 절대 만만치 않았다. 도시민들이 쌀을 구할 수 있는 공식 창구였던 양곡 배급소는 저울 눈을 조작해 실제보다 적은 양의 쌀을 나눠주고 남은 쌀을 암시장에 팔아 잇속을 챙기기 일쑤였다. 높은 실업률과 끊이지 않는 강력범죄, 주택난, 공적 기관의 비위행위 등은 지금도 여전하다. 대중일보는 과감한 사회 비판에도 적극적이었다. 거리에 많아지고 있는 '카페'에서 덮어놓고 술이나 마시고 취하는 사람이 많은 현실은 건국도정을 좀먹는 일이라며 "삼가라"고 했다.(1945년 12월 14일) 또 송림동·송현동 등지에 대규모 도박장이 공공연히 열려 수많은 도박꾼이 활개를 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경찰을 비판(1947년 4월 3일)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왜색(倭色)을 걱정했고, 국회의원 총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천으로 밀려드는 궁핍한 처지의 전재 동포를 돕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중일보는 당시 시민의 소소한 일상을 지면에 담았다. 옹진군 부포항을 찾아 조기잡이 상황을 르포(1948년 5월 21일)로 전하기도 했으며, 자신과 다투다 기절한 며느리가 죽은 줄 알고 경찰에서 "내가 죽였다"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노인의 모습(1948년 5월 13일)을 담기도 했다. 대중일보의 해방 후 첫 새해의 각오는 남달랐다. 고주철 대중일보 사장은 해방 후 첫해인 1946년 1월 1일 신년호

  •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13]70년전 신년호에 담긴 메시지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13]70년전 신년호에 담긴 메시지 지면기사

    김구 등 주요 인사 연두사 실어'왜말 말살' 특별좌담회 게재도혼란한 해방공간에서 발행되던 신문의 신년호는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하듯 건국을 위한 우리 국민의 단결과 민족통일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았다. 대중일보는 해방 후 첫해인 1946년 1월 1일 신년호에 '사수하자 조국 단결하라 삼천만'이라는 제목의 고주철 대중일보 사장 연두사를 비롯, 임홍재 인천시장, 조경승 인천법원검사 등 기관장의 연두사를 실었다. 조경승 인천법원검사는 "연합군의 선봉으로 해방은 됐지만, 대원군 시대와 다름없이 중대한 능욕을 당하고 있는 처지임을 생각해야 한다"며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생물적 신념에서 한걸음 나아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건국의 예망(譽望)을 갖고 삼천만이 모두 조선에 충실한 일꾼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대중일보는 해를 거듭하면서 신년호의 외연을 넓힌다. 1947년부터 신년호 발행 면수를 2개 면에서 4개 면으로 늘려 발행했다. 또 이승만, 김구 등 사회 지도층은 물론, 인천시장, 인천 군정장관, 인천 우편국장,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판사, 인천 경찰서장, 인천 세무서장, 인천 박물관장 등 인천지역 기관장의 연두사를 1면 등 주요 면에 배치했다. 제헌 국회의원 선출을 위한 5·10 총선거를 앞둔 1948년 신년호에선 투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백범 김구의 글도 볼 수 있다. 그는 "농민은 농촌에서, 노동자는 공장에서 생(生)을 찾아 신음하고 도시 세궁민(細窮民)과 소시민은 물가의 광등(狂騰)과 식량난에 울고 있지만, 탐관(貪官)과 모리배의 간행(奸行)은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여하한 환경 중에 있을지라도 절대 자유의사에 의하여 우리가 믿는 양심분자를 우리의 대표로 선출해야 한다"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우리의 비애는 의연히 소멸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중일보는 신년호에서 '말살하자 왜말, 바로잡자 우리말', '무자 신춘의 향토 건설' 등을 주제로 한 전문가 특별 좌담회를 열어 해법을 모색했고, 예술계, 언론계 등의 지난 1년을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

  •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12]광고로 본 해방공간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12]광고로 본 해방공간 지면기사

    제조업체 경제사정 좋지않아'의료·약·술·극장'등 대부분신문 광고의 유형과 내용·방식 등을 살피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상의 흐름을 읽는 데 있어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 당시 사람들의 관심과 생활양식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인천에서 발행된 대중일보에 실린 광고란을 보면 당시 대중일보 배포권역의 사회상이 그대로 노출된다. 대중일보 발간 초기엔 정치 집단의 광고가 많았다. 고려청년당 인천지부,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준비회 인천지부, 인천지구 노동조합, 인천노동자실업대책위원회, 조선건국준비회 인천지부, 한민당 인천지부 등이 대중일보 창간호에 광고를 냈다.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시기, 다양한 지향점을 가진 정치세력이 많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인천시청,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인천검찰청, 인천경찰서, 인천세무서, 인천항무청, 인천우편국 등 관공서는 신년 '하정(賀正)' 광고와 창간기념 광고 등을 냈다. 인천물산주식회사, 가구전문제조 '화성상회' 등의 광고도 일부 있었지만 주로 냉면 전문점 '경인식당' 등 음식점 광고와 병·의원, 약방 광고가 많았다. 인천 궁정 11번지에 있던 '다이야빠', 상인천역전 고급 사교장 '신라', 애관극장 등 영화관 광고도 실렸다.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당시는 의료·약 및 술 광고, 극장 광고 등이 대부분이었다"며 "일제 말 공장 등 산업시설들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조업체 광고는 많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경제 사정이 광고를 제작해 신문에 실을 만큼 좋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해방 직후 복간한 동아일보의 경우 1940년 8월 폐간 직전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광고 비중이 45%에 달했지만, 복간 직후엔 20% 수준에 불과했다. 동아일보 복간과 함께 재입사해 광고업무를 맡은 김승문씨는 해방 직후 광고상황에 대해 "그 혼란 통에 광고는 개무(皆無·전혀 없는) 상태였다"고 '한국광고발달사'에서 밝히고 있다. 대중일보 지면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고, 화려해 졌다. 직원과 학생 등 모집광고가 실리고, 조선

  •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11]부족한 식량… '야로' 기승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11]부족한 식량… '야로' 기승 지면기사

    동회와 결탁 비위행위 만연미군정, 자유화 → 식량통제정치·경제적으로 혼란했던 해방공간, 시민들은 여전히 배고픔에 허덕여야 했다. 일제의 식량 통제정책으로 굶주려야 했던 현실을 해방은 바꿔놓지 못했다. 쌀 배급을 담당하던 양곡 배급소의 사기 행각은 시민들의 이런 고통을 더욱 키웠다. 1948년 9월 인천 인현동의 한 양곡배급소가 당국에 적발됐다. 이 배급소에선 배급 때마다 상습적으로 저울 눈을 조작해 실제보다 적은 양의 쌀을 배급했다. 대중일보는 "이 양곡배급소에서 배급받은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수량이 부족했다"며 "그중 심한 것은 기준보다 2㎏이나 부족한 경우도 있었다"고 보도(1948년 9월 16일자)했다. 대중일보는 이곳을 "시민들의 고혈(膏血)을 착취한" "악질배급소" 등의 표현으로 비판했다. 쌀 배급과정에서의 비위행위는 상당기간 지속됐던 것으로 보인다. 대중일보는 이 보도 1년여 전 "일부 양곡배급소에선 시청에서 배급받은 좋은 쌀을 비싼 가격에 팔아 폭리를 남기고 시민에겐 돌이 섞인 나쁜 쌀을 싸게 사 배급하는 사실이 있다"고 했다. 이어 "양곡을 배급할 때 저울을 속여서 양곡을 부정 점취(占取)하는 등 소위 '야로'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1947년 9월 18일자) 미군정은 남한지역 점령 초기 일제때 식량 통제정책을 폐지하고 미곡시장을 자유화했다. 그러나 이를 관리감독할 수 있는 행정력은 취약했고, 쌀은 투기의 대상이 됐다. 지속해서 유입되는 월남민, 전재동포 등으로 인한 인천의 인구증가는 식량부족 문제를 가중시켰다. 미군정은 곧 자유화 방침을 철회하고 식량통제정책으로 복귀했다. 농민에게 '공정가격'으로 쌀 등을 사들여 도시민에게 저렴한 가격에 배급하는 형태였다. 양곡 배급소는 도시민들이 쌀을 구할 수 있는 공식 창구였다. 양곡배급소는 지금의 동사무소 격인 '동회'(洞會)의 관리감독을 받았는데, 동회와 배급소 간 결탁에 의한 비위행위가 많았다고 한다. 배급을 받을 수 있는 '식량 배급통장'을 허위로 발급해 실제 배급대상자 수보다 많은 식량을

  •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10]불안한 치안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10]불안한 치안 지면기사

    총·칼로 무장한 떼강도 '활보'숨진미군 발견 범인수색 소동잇단 사건에 주민 두려움 떨어해방공간에서는 좌우 대립만 극심했던 게 아니라 강력 범죄도 기승을 부렸다. 지금은 흔치 않은 총기 범죄도 잦았다. 살인·강도 등 강력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접하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치안이 불안했다.1947년 2월 부천군 영종면 운서리 김달현 씨 집에 3명의 떼강도가 난입했다. 이들은 권총과 칼을 갖고 집주인을 위협해 현금 5천500원, 5만원 상당의 귀금속 등을 훔쳐 달아났다.한국은행에 따르면 당시 5만원은 쌀 8천가마(한가마 80㎏)를 살 수 있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지금 화폐가치는 당시보다 2만5천배 정도가 증가했다.당시 5만원은 지금으로 따지면 12억원이 넘는 액수다.인천경찰서는 범행 한달 만에 인천 시내 모처에서 김재득(40)씨 등 범인 일당을 체포했다. 대중일보(1947년 3월 12일)는 범인 일당이 체포 당시 "유흥에 날뛰고 있었다"고 표현했다.1948년 5월엔 '인천 관상대' 숙직실에 난데없이 총탄이 날아와 벽에 박힌 사건도 있었다.대중일보(1948년 5월 6일)는 당시 관상대 내부에 있었던 남노(당)계 숙청사건에 반발하던 사람들이 벌인 일 아니냐고 지목했다. 인천 송림동에선 대동청년단 감찰원 최봉길(20)군이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도 있었다. 대중일보(1948년 7월 14일)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지난 3월 이래 인천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진범을 체포하지 못해 부민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중일보는 비슷한 시기 수원 광교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도 보도했다. 무덤 이장 문제로 소를 끌고 광교산으로 간 신봉균(50)씨가 돌과 곤봉에 난타된 시체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수원경찰서는 끌고 갔던 소가 없어지고 현장에서 발견된 피묻은 곤봉과 돌덩이를 볼 때 계획된 살인강도 범행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인천 선학동에선 미군이 숨진 채 발견되는 사건도 있었다. 대중일보(1947년 11월 26일)는 "아연실색한 인천 경찰이 100여 명을 동원해 불철주야 수사를 계속했다"며 "

  •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9]대중일보 속 시(詩)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9]대중일보 속 시(詩) 지면기사

    열악한 생활·분단 현실 읊어해방의 '진정한 의미' 묻기도요즘 국내 주요 신문들은 유행처럼 '시(詩)'를 게재하고 있다. 신문에 실린 시는 바쁜 일상과 딱딱한 세상사에 찌든 독자들에게 청량제 역할을 한다. 신문을 가득 메운 건조한 기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한다. 짧은 시 한 구절이 백 마디 말보다 더 진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시는 그래서 언어로 표현한 순수의 결정체라고도 불린다.70년 전 해방공간의 독자들도 대중일보를 읽으며 시를 만끽했다. 대중일보에 담긴 시들은 당시 혼란한 정치 상황을 드러내고, 해방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것들이 많았다. 국민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그리거나 남과 북이 분단된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박영욱은 '38도선'이란 시(1946년 2월 14일)에서 미·소 군정에 의해 남과 북이 분단된 우리나라의 현실을 '공중에 뜬 풍선(風船)'에 비유했다. 38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소련 군정이 점령한 우리 현실을 자신의 의지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점을 빗댔다. 그는 이 시에서 '민족은 도탄 중에서 헤매이고 있는데/ 골육상쟁은 이 무슨 추태일고'라며 민중의 어려운 삶과는 상관없이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좌·우익의 다툼을 비판했다. 이어 '우리 민족이 한마음으로 얽힌다면/ 봄철에 어름처럼 쉽사리 풀리렸만'이라며 남북화합을 염원하기도 했다. 작가를 밝히지 않은 '독립'이라는 제목의 시(1948년 7월 11일)는 해방의 진정한 의미를 시민 입장에서 묻고 있다. '길가에/ 방공호가 하나 남아 있었다./ 집 없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거적을 쓰고 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아이 하나가/ 제비 새끼처럼 내다보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독립은 언제 되나요.'' 주민들의 신산하고도 고달픈 삶과 해방이 됐지만 또 다른 점령군에 시달리는 세태를 꼬집었다.지은이가 일석(一石)으로 돼 있는 '실화(失花)'라는 제목의 시(1948년 8월 14일)는 분단된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일석은 국어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이희승 박사의 호다.당시 신문들은 신진작가 발굴,

  •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8]미군범죄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8]미군범죄 지면기사

    美軍, 민간인 총격사살·성범죄…비판없이 사건개요·내용기록뿐죄익진영 기자 대거이탈로 심화대중일보는 왜 미군정과 유착했을까.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해방공간 인천에 발을 디딘 미군은 곧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했다. 남한주둔 미군의 규모는 한때 7만여 명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그 미군들은 범죄도 많이 저질렀다.대중일보는 1947년 3월 12일 '논스톱은 위험'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한다. 화수동에 사는 명해철(21)씨가 대낮에 신생동 상호의원 노상에서 미군이 발사한 총에 숨진 사건이다. 미군이 검문을 위해 명 씨에게 멈추라고 요구했는데, 그가 그대로 도망치자 미군이 총을 쏴 사살했다. 그런데 대중일보의 보도에는 미군 총격으로 백주에 참극을 당한 청년의 안타까움도 미군에 대한 비판도 담기지 않았다. 오히려 검문에 응해야 한다는 미군 입장을 대변했다. 대중일보는 "명 씨가 미군용 의복감으로 웃옷을 지어 입은 것을 발견하고 조사키 위해 멈추라고 했지만, 도적은 제발 저리다고 겁을 먹고 도주하다가 참화를 입은 것"이라고 했다. 이어 "누구든지 미군이 서라 할 때에 복종치 않으면 이러한 꼴을 면할 수 없게 될 터이니 일반은 이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우익지로 평가되는 동아일보조차 '전대미문의 만행', '천인이 공노할' 등으로 강하게 표현한 호남선 열차 미군 강간사건(동아일보 1947년 1월 11일)도 대중일보는 사건 개요와 내용위주 보도로 비판의 수위가 낮았다.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은 비판적인 논조로 비중있게 후속 보도를 이어갔지만, 대중일보는 공판개최 등의 간단한 사실만 다뤘다.인천역에서 휘발유를 훔치던 미군을 체포하려다 오히려 그 미군이 난사한 총에 맞아 숨진 만석동파출소 임완철(23) 순경 사건(47년 1월 23일), 강무칠(7) 군이 서당에 다녀오는 길에 숭의동 경찰파출소 앞 로터리를 건너다 미군 트럭에 치여 숨진 사건(48년 4월 28일) 등도 마찬가지였다. 미군정은 주둔 직후 '정당한 의미의 치안을 방해하는 언론'에 대해선 통제할 것임을 분

  •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7]한민당과 대중일보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7]한민당과 대중일보 지면기사

    고학력·지식층 한민당 연관 추정좌익 성향 기자들 반발 부딪힌 듯"본지는 당초 '한민일보(韓民日報)'의 제호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형편에 의하여 본 제호로 개제하였으니 양해하소서."대중일보 1945년 10월 7일 창간호에 실린 사고(社告)다. 대중일보가 애초에 왜 제호를 한민일보로 하려 했고, 이를 또 어떤 이유에서 대중일보로 바꿨는지 구체적으로 전해진 것은 없다. 전문가들은 대중일보 창간 한 달 전인 1945년 9월 창당한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과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민당은 건국준비위원회 등 좌익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우익세력이 모여 만든 정당이다. 이승만과 김구·서재필 등이 한민당 영수(領袖)를 맡았다. 해방공간 대표적인 우익 인사로 손꼽히는 송진우도 수석총무로 참여했다. 한민당을 중심으로 우익 정치세력의 대단합을 도모하고자 했다. 한민당 구성원들은 당시 전문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고학력 지식계층이었다. 지주·자본가·기업경영자·사회단체 간부 출신이 많았다. 사회 경제적으로 기득권이 있던 전문가·엘리트 중심의 정당이었다는 평가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일제에 협력한 인물들도 한민당에 많았다고 한다. 대중일보 창간 당시 편집국은 엄흥섭 편집국장 등 좌익 성향 기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한민일보라는 제호를 바꾸자고 경영진에게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중일보 관련 박사학위 논문을 쓴 김영환 한겨레신문 기자는 논문에서 "좌익성향이 강한 편집국 기자들은 자칫 친미 보수정당인 한민당의 기관지로 오인될 우려가 있는 한민일보를 신문 제호로 정하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어 "신문 제호를 놓고 내부의 고민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대중(大衆)'은 엘리트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당시 좌익 진영에선 대중을 교화 또는 계몽의 대상으로 봤다. 김창수 인천발전연구원 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은 "'인민'에 비해서는 온건하고 우익 진영이 지향하는 '민족'과도 구별되는 대중을 새로운

  •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6]5·10 총선거-(2) 혼란속 마무리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6]5·10 총선거-(2) 혼란속 마무리 지면기사

    대중일보, 보수쪽 소식 편중좌익 선거방해 '우회적 비판'해방 후 우리나라 첫 국회의원 선거인 5·10 총선거는 좌익과 우익, 진보와 보수진영 간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치러졌다. 우익 쪽에서는 미군정하 국제연합(UN)의 감시 아래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거를 인정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통일정부 수립을 외치던 좌익 쪽에서는 이를 반대했다. 당시 대중일보에서는 인천 을선거구 한국민주당 하상훈 후보와 관련한 소식이 유난히 많다. 한국민주당은 해방 후 보수세력이 결집해 만든 정당이다. 자산가들이 주축을 이뤘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지지했다. 대중일보는 1948년 4월 21일 "인천에서 처음으로 선거운동원이 괴한에 피습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을선거구 하상훈 후보의 선거사무원 이태영(44) 씨가 귀가하던 중 송현동 함내과 뒷골목에서 괴한 4명에게 폭행당했다는 사건이다. 대중일보는 "이 씨가 간신히 생명을 보존한 불상사가 있었다"며 "이마 등에 큰 타박상과 가슴에 중상을 입고 치료 중인데, 범인은 남노(남조선노동당)계열 극악분자로 보인다"고 했다. 하상훈 후보 선거사무소 앞에선 40~50명의 '폭도'들이 투표반대 전단(삐라)을 뿌리면서 '입후보자를 박살하라'고 외친 일도 있었다. 대중일보는 같은 해 5월 4일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조국의 운명을 좌우할 총선거가 박두함에 따라 적색 분자들의 반대 행동도 나날이 무성해지고 있다"며 "경찰청에선 폭동혐의자 4~5명을 검거해 취조 중이라 한다"고 했다. 같은 선거구 무소속 조봉암 후보 선전대가 4월 30일 부평에서 정체불명의 단체원에게 테러를 당하는 일(경향신문 48년 5월 5일자 보도)도 있었다. 그런데 대중일보에서는 이 소식을 찾을 수 없다. 조봉암은 훗날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간첩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한 진보 정치인이다. 보수진영의 하상훈 후보 관련 소식은 자세히 보도하면서도 진보진영의 조봉암 후보 관련 소식은 다루지 않은 셈이다. 대중일보는 사법당국의 선거사범 엄정대응 입장을 상세히 보도한다. 대중일보는 "조국의

  •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6]5·10 총선거-(1)한표가 '건국 초석'

    [다시 읽는 경인일보 다시 보는 해방공간·6]5·10 총선거-(1)한표가 '건국 초석' 지면기사

    UN 감시 하 첫 국회의원 선출대중일보, 후보자 상세히 보도'귀하의 한 표가 건국의 초석'.대중일보가 우리나라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내건 표어다. 70년 전에도 유권자들의 선거 참여는 중요한 화두였다. 대중일보는 선거 하루 전인 1948년 5월 9일 "명일(내일)은 깨끗하고 성스러운 한 표 한 표를 던지려 환희의 가슴을 안고 투표장으로 총진군을 시작할 날"이라며 "민족의 행복과 자손만대에 영락을 누리게 할 호기를 잃지 말고 피 끓는 애국의 정열을 피력하여야 된다"고 했다.우리나라 첫 국회의원선거는 1948년 5월 10일 미군정하에서 국제연합(UN)의 감시 아래 치러졌다. 당시 인천은 선거구가 '경기'지역으로 구분됐다. 경기 선거구 29곳 중 2곳이 인천이었다. 인천부 갑선거구는 중앙동·신흥동·도원동·숭의동·용현동·옥련동 일대였고, 을선거구는 만석동·화평동·송림동과 부평지역 일대였다. 강화와 옹진은 선거구가 각각 따로 있었다. 특히 옹진은 인천처럼 갑과 을로 선거구가 나뉘었다.대중일보는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공약과 약력, 유세활동 등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했다. 인천 2개 선거구에 출마한 후보자 11명의 본적지는 인천, 평안남·북도, 황해도, 경상남·북도, 경기도 강화·양평 등 전국에 퍼져 있었다. 공약은 남북통일, 부패척결, 토지개혁 등을 내세웠다. 44세의 나이에 갑선거구에 출마한 이순희 독촉애국부인회 인천지부장은 남존여비 타파, 탁아소 창설, 여성교육기관 확충 등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공약을 내걸어 이색적이었다. 후보자들의 유세장소는 초등학교 교정이 주로 활용됐다. 인천신문기자연맹 주최 후보자 정견발표대회도 열렸다. 미군정은 선거일과 선거일 하루 전 술을 못 팔게 하고 정당, 사회·청년단체 시위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야간통행 금지 조치도 강화했다. 경기지역 투표율은 90%에 달했다고 대중일보는 보도했다. 개표는 갑선거구의 경우 11일, 을선거구는 12일 이뤄졌다. 투표가 끝난 직후 개표가 시작되는 지금과는 달랐다. 갑선거구에선 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