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큰기획-가장 보통의 사람, 퀴어·(下)] 지방에도 무지개는 뜬다

    [통큰기획-가장 보통의 사람, 퀴어·(下)] 지방에도 무지개는 뜬다 지면기사

    22년 전 그날도 비가 왔다. 2000년 시작된 퀴어문화축제(이하 퀴어축제) 참가 인원은 50명이었다. 2000년 9월 쏟아지는 빗속에 무지개 색깔로 '퀴어문화축제'라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던 퀴어축제는 20년의 세월이 지나 13만5천명이 참여하는 행사로 변화했다. 최초 퀴어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개 '이반'(二般)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단체명을 사용했다. 일반(一般)과 달리 평범하지 않은 사람, 일(一) 아닌 이(二)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담은 이 단어는 확장된 축제 참여 숫자만큼이나 큰 변화를 맞았다.'이상한·기이한'이란 의미의 퀴어(queer)는 본디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뜻으로 쓰였지만, 이제는 게이·레즈비언·트랜스섹슈얼·바이섹슈얼 등 제도에서 소외된 다양한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긍정 단어로 변모했다. 축제 위상 변화도 극적이다. 지난 16일 열린 행사에는 주한미대사가 참여해 공개 지지 발언을 했다.퀴어, 비하 → 긍정 단어 극적 변모주한미대사 공개지지 등 위상 변화 이제 퀴어축제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개최를 모색하는 단계다. 이미 2018년부터 열리고 있는 인천에 이어 경기도퀴어축제가 준비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지난해 11월 경기도퀴어축제 개최 준비를 공식화한 경기도퀴어문화축제준비위원회는 지난 5~6월 사이 준비위원 모집을 거쳐 올해 안에 경기도에서 퀴어 축제를 열기 위한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지난 16일 서울광장에는 22년 전처럼 비가 쏟아졌다. 오후 5시 30분께 세차게 내리는 폭우가 익숙해질 때쯤 서울광장 인근을 지나던 행진 대열에서는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라는 가사의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다. 대열에 함께한 이들은 차별에 맞서 '연대하겠다'는 다짐을 노래로 표현했다. 이들은 10m가량 펼쳐진 빗물 물웅덩이를 보란 듯이 첨벙첨벙 뚫고 나아갔다.이날 이른 시각부터 서울광장 곳곳에는 활기가 넘쳤다. 이곳에서 만난 경희대학교 국제 캠퍼스 '아쿠아' 회장 B씨는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퀴어문화축제는 대학 축제와

  • [통큰기획-가장 보통의 사람, 퀴어·(下)] 최소한의 법적 보호수단

    [통큰기획-가장 보통의 사람, 퀴어·(下)] 최소한의 법적 보호수단 지면기사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1항. 사람은 저마다 나이, 직업, 터전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가지각색 정체성이 비합리적인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헌법은 '평등권'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퀴어는 '평등권'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곤 한다. 퀴어 정체성을 드러내는 순간,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차별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일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을 보호해 줄 최소한의 법적 수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예림(활동명·21)씨는 지난 5월 있었던 일만 떠올리면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우리는 평등으로 간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누군가로부터 난도질당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이다. 퀴어 동아리 '외행성'이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 캠퍼스 기숙사 근방에 걸어놨던 현수막이다.퀴어인 A(20대)씨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에 빗대어 퀴어 동아리에 얽힌 이야기를 털어놨다. "너희는 무슨 동아리에서 만났어?"라는 비(非)퀴어 친구의 질문에 차마 '퀴어'라는 두 글자를 말할 수 없어 순간적으로 "우리 '제철 과일 먹기' 동아리에서 만났어"라고 실언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정체성 드러내는 순간 차별 경험자신도 모르는 새 행동 검열·위축 퀴어가 마주하는 일상 곳곳엔 차별과 혐오가 서려 있다. 이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동 하나하나를 검열하고 위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혐오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이들 존재를 위협한다. 대학생 익명커뮤니티 애플리케이션 '에브리타임'에는 익명을 무기로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게시글과 댓글이 종종 올라온다.경희대학교 국제 캠퍼스 퀴어 동아리 아쿠아 회장 B(22)씨는 "인권주간 같은 행사가 있는 기간에는 악성 댓글이 더 많아진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동아리 홍보글을 올린 뒤에는 아예 에브리타임에 안 들어가고 그랬어요. 이젠 너무 익숙해져서 '너희는 너희 대로 살아라…' 이런 느낌으로 덤덤해진 면이 있죠." B씨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 [통큰기획-가장 보통의 사람, 퀴어·(上)] 경기도에서 어떻게 살아가나

    [통큰기획-가장 보통의 사람, 퀴어·(上)] 경기도에서 어떻게 살아가나 지면기사

    경기도에 퀴어가 산다. '이상한·기이한'이란 의미의 단어 퀴어(queer)는 게이·레즈비언·트랜스섹슈얼·바이섹슈얼과 같은 다양한 성소수자를 아우르는 말이다.경기도에 사는 퀴어들은 다르면서도 같은, 같으면서도 다른 삶을 산다. 사람을 만날 장소가 필요하고, 사랑을 나눌 기회를 찾아다닌다는 점에서 퀴어는 비(非)퀴어와 다르지 않다.그러나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 법과 조례 울타리에 들어갈 수 없고 나날이 설 자리가 좁아진다는 면에서는 사뭇 다르다. 특히 다름을 인정해 줄 것을 목소리 높여 외치고 투쟁해야 권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게 다르다.퀴어는 단어의 의미와 달리 보통의 사람이다. 때론 싸우고 때론 울며 자주 웃으며 매일 마음 나눌 사람을 찾아 나서는 우리 곁 퀴어를 만나본다. → 편집자 주 '퀴어 동아리' 가입한 대학생들비슷한 성향 친구들 만남 기회"그냥 일반 동아리와 똑같아요"사람 만나서 친목 다지려고요그냥 일반 동아리랑 똑같은 거죠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외행성' 회장 예림(활동명·21)씨는 '퀴어 동아리에 가입한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는 질문에 핵심을 짚었다. 여느 동아리처럼 또래를 만나 웃고 떠들고 고민을 나누는 모임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대학생에게 동아리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희로애락을 나누는 공간이다. 퀴어 동아리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나 누구한테 까였어(차였어). 이게 친구들끼리 술 마시면서 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인데, (퀴어 동아리에서) 스스럼없이 꺼내서 말할 수 있는 거죠."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하이퀴어' 회장 A씨는 연애사를 회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대학교 합격 통지를 받은 뒤 이들은 퀴어 동아리부터 찾아봤다고 한다.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아쿠아' 회장 B씨는 "대학교에 가면 퀴어 동아리를 꼭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퀴어 정체성을 깨달았다. 퀴어가 아닌 친구들 사이에서 소속감을 느끼기 어려웠던 적이 많았다. 대학에 가면 퀴어 친구들이랑 만나서 놀고 얘기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고

  • [통큰기획-가장 보통의 사람, 퀴어] 화성 공감의원 이혜연 원장

    [통큰기획-가장 보통의 사람, 퀴어] 화성 공감의원 이혜연 원장 지면기사

    '퀴어 인프라'가 서울에 편재된 것은 사실이지만 변화의 바람도 조금씩 불고 있다. 화성 향남 공감의원 산부인과는 경기 남부권에서 트랜스젠더 호르몬 치료를 할 수 있는 병원이다. 지난해 7월 개원해 올해 1주년을 맞은 공감의원 산부인과 이혜연 원장을 만나 한국 사회 성소수자 의료 서비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이 원장은 트랜스젠더 환자 진료에 대해 "특이할 게 없다"고 이야기했다. 처방하는 약물에 차이만 있을 뿐 트랜스젠더 환자라고 해서 특별히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공감의원 산부인과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성별 구분 없는 1인 화장실'이 눈에 띈다. 성중립 화장실*은 아직 한국 사회에서 낯선 풍경이다. 이 원장은 성중립 화장실에 대해 오직 트랜스젠더만을 타깃으로 삼지는 않았다는 점을 드러냈다. "의도를 가지고 한 거죠. 만약 환자 수가 똑같다고 가정하면 항상 여자 화장실 회전율이 더 떨어지잖아요." 산부인과 특성상 여성 환자 비율이 월등히 많기에 성중립화장실을 두는 게 일석이조일 수 있다는 것이다.진료를 받으러 오는 트랜스젠더 환자 비율은 얼마나 될까. 이 원장은 "아직은 한 손에 꼽는 정도의 숫자"라며 "어쨌듯 아우팅 위험이 있기 때문에 퀴어 커뮤니티 내에서 '믿을 만하다'는 식의 평판이 생겨야 환자가 늘어난다"고 했다. 퀴어프렌들리한 병원일지라도 트랜스젠더 환자에게는 병원에 오는 것 자체가 이미 아우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병원에서 처음 접수할 때 신분증을 확인하거나 주민등록번호를 적는 과정을 거치잖아요. 겉모습으로 봐서 생물학적 여성인지 남성인지 모르겠는 경우에 힐끔거리는 시선도 있고, 아예 진료접수를 거부하는 곳도 있고요. 그래서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에 가지 않는 거죠." 트랜스젠더들이 감기에 걸려도 병원에 가지 않는 이유도 같다.트랜스젠더 개개인의 몸 상태에 맞는 적확한 처방을 내려줄 의료진도 부족하다. 이 원장은 "성소수자가 문자 그대로 소수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현대 의학이 주류, 다수 중심으로 발전해 왔어요. 백인 남성 중심에서 남

  • [통큰기획-가장 보통의 사람, 퀴어·(上)] 행사·의료까지 중앙 집중… "지방은 무지개 안보여" 볼멘소리

    [통큰기획-가장 보통의 사람, 퀴어·(上)] 행사·의료까지 중앙 집중… "지방은 무지개 안보여" 볼멘소리 지면기사

    퀴어 동아리 회장 3인이 쏟아낸 말 가운데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서울'이다. 실제 퀴어관련 축제나 행사, 심지어 의료 서비스까지 대개 서울에 포진해 있다. 경기도는 물론이거니와 지방에 사는 퀴어가 볼멘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다. MTF*로 정체화한 뒤 꾸준히 퀴어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내온 류세아 정의당 경기도당 성소수자위원회 위원장은 경기도에도 퀴어가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조성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냈다. 서울로 가야지만 퀴어문화에 합류할 수 있다'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란 속담은 비단 비(非)퀴어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퀴어도 서울에 살아야만 문화, 교육, 의료 등에서 퀴어 정체성을 수월하게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류 위원장은 "퀴어문화축제도 서울에서 활발하게 하고 있다. 아무래도 퀴어는 서울로 가는 경향이 많다. 경기도는 퀴어와 관련해서는 구심점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퀴어 청년들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을 토로했다.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퀴어동아리 '아쿠아' 회장 B씨는 "퀴어관련 행사라든가 모임이 거의 서울에 집중돼 있다"면서 20대 퀴어에게 사실상 커뮤니티 역할을 하는 퀴어동아리도 "서울에 비하면 많지 않다"고 털어놨다. 커뮤니티 모임 등 인프라 서울 쏠림도내 대학 퀴어 동아리 소멸 '씁쓸' 위태롭게 명맥을 이어온 퀴어 동아리는 설 자리마저 잃고 있다. 도내 대학교 중 퀴어 동아리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B씨는 "물론 코로나19를 지나면서 위기를 겪은 건 퀴어 동아리뿐만은 아니다"면서도 "퀴어 동아리 소멸은 그 자체로 퀴어 커뮤니티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에 특별히 더 문제가 된다"고 이야기했다. "2020년부터 동아리 임원진을 맡으며 함께 교류하던 단체들이 하나둘씩 사려지는 것을 목격했어요. 그만큼 각 학교의 퀴어 커뮤니티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씁쓸했죠." 이들 동아리 중 학교 지원을 받는 중앙동아리로 승격된 사례는 없다. 보통 비퀴어인 임원진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승격이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