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5·끝)한국전쟁 배울 수 있는 콘텐츠 개발 필요]각지서 벌어진 격전, 지자체 함께 발굴해야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5·끝)한국전쟁 배울 수 있는 콘텐츠 개발 필요]각지서 벌어진 격전, 지자체 함께 발굴해야 지면기사

    파주·연천 등 국한된 체험 학습전체적인 상황 이해하기 어려워교과서 서술 내용 확대 목소리도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경인지역 격전지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체험학습 콘텐츠가 개발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현재 교과 과정에서 한국전쟁을 다루는 비중이 적고 초등학교의 경우 학교 자율로 계기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가 한국전쟁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지난해 경기도교육청은 학생이 직접 계획하고 운영하는 '경기도형 체험학습'을 처음 시작했다. 도교육청은 한국전쟁을 통일, 역사, 인성, 예술, 과학, 미래, 자연 분야 중 통일 분야로 편성해 체험학습 장소를 소개하고 있다.하지만 학생들이 접할 수 있는 체험 콘텐츠는 파주 DMZ나 연천 지역에 국한돼 학생들이 경인 지역에서 일어났던 한국전쟁의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상황이다. 교육당국이 지자체와 함께 경기 지역 각지에서 전투가 이뤄졌고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있었던 만큼 체험학습을 위한 콘텐츠 발굴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오는 5일 개장하는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의 경우 올해 1월부터 오산시와 도교육청의 협업이 이뤄졌다. 오산시는 유엔초전기념관을 활용한 학습 콘텐츠들을 만들었고, 도교육청은 교육부와 타시도교육청 담당자, 학교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도교육청 관계자는 "도내 각 지역에서 한국전쟁을 배울 수 있도록 장기적으로 콘텐츠들을 개발해 나갈 계획"이라며 "이를 위해서는 지자체들과의 협력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또 한국전쟁을 다루는 교과서의 서술이 지금보다 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진성민(이천 세무고 교사) 6·25 70주년 국민서포터스 단장은 "한국전쟁은 지금의 분단체제를 만들어 놓은 역사적인 사건 치고는 교과서 서술은 적은 편"이라며 "전쟁의 개괄과 전체적인 의의를 기술하는데 그치지 말고 지역에서 어떤 전투가 일어났는지,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도 함께 교과서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원근기자 lwg33@kyeongin.com

  •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4)유엔군의 희생도 기억해야]머나먼 땅 전우의 헌신, 기억조차 멀어지다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4)유엔군의 희생도 기억해야]머나먼 땅 전우의 헌신, 기억조차 멀어지다 지면기사

    죽미령·김량장 전투 등 활약 21國지자체·국가 차원 추모 행사 불구지역 참전기념비 시민들 '무관심'보훈처 "참전용사 대상 지원 검토"한국전쟁에 있어 유엔군의 참전을 빼놓을 수 없지만 이들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걸음은 끊긴지 오래다. 지자체와 국가 차원에서 추모 행사는 열리고 있지만 시민들은 관심이 없다.수원 파장동 효행공원에 소재한 프랑스군 참전기념비는 지난 1974년 10월 3일 설치된 이후 2013년 프랑스 대사관과 협의를 통해 정비 공사를 마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프랑스군 3천421명 중 262명은 전사했고, 부상을 당한 병사도 1천8명이나 된다.한국전쟁에서 프랑스군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장소로 만들어졌지만 인근 도로는 추모객들의 주차장이 아닌 골퍼들의 무료 주차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인천시 서구 경명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콜롬비아군 참전비도 상황은 비슷하다. 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에 지원군을 보낸 콜롬비아군 5천100여명은 연천 180고지 전투 등에서 격전을 치렀다. 매년 7월 콜롬비아 독립기념일에 대사관이 주최하는 기념 행사가, 25일 한국전쟁 참전을 기리는 헌화행사가 각각 진행되지만, 관심은 이때 뿐이라는 게 서구의 설명이다. 서구 관계자는 "이 기념탑이 만들어진 지 40년이 넘었지만, 서구에 콜롬비아군 참전비가 있는 줄 모르는 시민이 아직 많은 것 같다"며 "더욱 많은 시민들이 이곳을 찾아 참전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UN군에 속한 21개 국가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해 각종 전투에 투입돼 전공을 세웠다. 미24사단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북한군과 맞닥뜨렸던 오산 죽미령 전투(1950년 7월 5일) 이외에도 용인 김량장 전투(1951년 1월 25∼27일)와 양평 지평리 전투(1951년 2월 13∼16일)는 경인 지역에서 유엔군의 활약을 보여주는 전투들이다.김량장 전투는 중공군에 의해 밀리던 연합군이 본격적인 반격작전을 펼치기 위해 시작된 '선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터키여단은 이 전투에서 12명이

  •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3)한국전쟁 아픔 품은 문화유산]무구한 세월 견딘 보물들도 포탄을 피할 수 없었다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3)한국전쟁 아픔 품은 문화유산]무구한 세월 견딘 보물들도 포탄을 피할 수 없었다 지면기사

    남양주 봉선사·고양 벽제관지 등전투로인해 훼손된 수많은 문화재국가기관 피해규모 별도 집계안해'점검·관리 시스템' 구축 지적일어한국 전쟁의 아픔은 경기 지역 문화 유산에도 남아있다. 경기도에서 한국 전쟁의 중요 전투들이 진행됐던 만큼 도내 주요 문화재들도 전쟁의 상흔을 피해갈 수 없었다.남양주 진접읍에 소재한 봉선사는 969년 창건된 이후 1469년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를 추모하기 위해 중창돼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다. 하지만 봉선사는 한국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1951년 당시 폭격으로 대웅전, 어실각, 의향각 등 19동 181칸이 사라졌다. 봉선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조선 왕실에서 제작한 세계 지도 '곤여만국전도'도 이때 소실됐다. 봉선사는 정전 협정 이후 복원 작업이 시작돼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고, 곤여만국전도도 지난 2012년 복원해 봉선사로 돌아왔지만 민족 상잔의 역사도 품게 됐다.조선시대 역관 터로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던 고양시 덕양구의 벽제관지는 한국 전쟁 때 소실됐다.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이곳 벽제관에서 반드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던 만큼 벽제관은 중요한 공공기관이었다. 한국전쟁때 삼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탔고 문도 무너져 터전만 남은 상태로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 파주의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호)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새겨 고려시대 불상 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지만 얼굴과 몸에 파인 흔적들도 보이는데 한국전쟁 때 생긴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이렇듯 적지 않은 문화 유산들이 전쟁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떤 문화재들이 한국전쟁 당시 훼손됐는지에 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어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유실되거나 훼손된 문화재들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보수, 복원 작업이 매년 진행되고는 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문화재의 총수나 복원 현황 등은 문화재청 등 국가기관에서 별도로 집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진성

  •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2)전쟁의 중심에 선 격전지들]역사를 바꾼 전투, 주무대는 '경기·인천'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2)전쟁의 중심에 선 격전지들]역사를 바꾼 전투, 주무대는 '경기·인천' 지면기사

    북한군 남진 10여일 늦춘 '죽미령''원통이 고개전투' 서울 수복 초석군포 '용문산 대첩'등 전세 큰영향한국전쟁이 시작된 전쟁 초기부터 경기·인천 지역은 주요 접전지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북한군의 기습으로 서울과 수원이 연이어 함락된 이후에도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중공군 개입에 따른 1·4 후퇴(1951년 중공군의 공세에 따라 정부가 수도 서울에서 철수한 사건) 당시와 재반격, 고지전, 휴전 협정까지 경인 지역은 한국 전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1950년 7월 4일 북한군이 수원을 점령할 당시, 미 제24사단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경부 국도 죽미령(현재의 오산)에 배치됐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속전속결로 부산까지 진격하려는 북한군과 5일 죽미령에서 만났다.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스미스 부대는 박격포와 기관포로 맞섰고 결국 개전한 지 6시간 15분 만에 퇴각했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죽미령 전투는 미군을 필두로 한 유엔군이 처음으로 북한군의 전력을 가늠해 볼 수 있었던 전투로, 북한군의 남진을 10여 일간 늦출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는다. 서울 탈환을 위한 진격에 나선 미 해병 제1사단은 서울로 향하는 주요 길목이었던 부평 공략에 나섰다. 17일 북한군 전차 6대와 250명 규모의 보병 부대가 원통이 고개(인천 지하철 동수역과 부평삼거리역 일대)로 진입하자 반격에 나선 미 해병대와 국군은 전차 6대를 모두 파괴하고 보병 20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원통이 고개 전투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수복 작전의 디딤돌이 됐다.서울 수복 뒤 북진을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위기를 맞는다. 유엔군과 국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뺏기고 7일에는 수원도 점령당했다. 이때 경기도 각 주요 지역에서의 승전보는 중공군을 북으로 몰아내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대표적인 전투가 군포 모락산과 용문산 전투다. 1월 30

  •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1)가장 치열했던 전장 '수원']미군 오폭 휘말린 장안문… 2층 중층 누각 완전소실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1)가장 치열했던 전장 '수원']미군 오폭 휘말린 장안문… 2층 중층 누각 완전소실 지면기사

    '북한군 엄폐' 판단 성문 공격해서남안문 등 문화유산 크게 훼손가옥도 2천여호 파괴 피해 심각피난민까지 몰려 농촌으로 분산■ 한국전쟁 당시 파괴됐던 문화유산 수원 '화성(華城)'1950년대 수원에서 유행처럼 퍼진 말이 있었다."남문은 남아있고, 서문은 서 있는데, 북문은 부서지고, 동문은 도망갔네."한국과 미국, 북한과 중국군이 수원을 가장 치열한 전쟁터로 삼으면서 도시가 파괴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특히 수원을 상징하는 화성의 피해가 컸다. 화성 성벽의 곳곳이 총탄을 맞아 부서졌다.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수원 화성을 지키는 사대문의 하나인 장안문이 파괴된 것이다. 장안문은 미군의 폭격에 의해 2층 중층 누각이 완전히 소실됐다. 전쟁에서 성곽은 중요한 엄폐도구로 여겨진다. 북한군이 점령했다가 미군의 공격을 받아 철수하는 과정에서 미군은 북한군이 장안문에 엄폐해 있다고 판단, 오인 폭격을 했다. 이때 장안문과 함께 창룡문도 누각이 모두 파괴돼 성문의 반쪽만 남았다. 이밖에도 수원화성은 서남암문의 홍예와 여장이 부서지고 동북노대가 무너지는 고통을 겪었다.■ 고향이 파괴된 수원사람, 고향을 잃은 피난민한국전쟁의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던 수원은 인명피해도 컸다. 1951년 9월 1일 통계에 따르면 수원시 인명피해는 사망자만 480명, 납치자가 40명, 부상자는 55명이다. 행방불명돼 소식을 알 수 없는 이도 289명에 달했다. 재산 피해도 상당했다. 전쟁 전 6천671호였던 가옥이 1천37호가 전소됐고 1천184호가 반소돼 가옥 피해액만 2천182억2천190만환이다. 경인지역에선 인천 다음으로 피해가 컸다.수원역을 끼고 있는 수원은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1953년 1월 수원에는 7만명 이상의 피난민이 집결돼 있었고 1일 평균 30명 이상 북한에서 피난민이 이주하고 있었다. 방화수류정을 중심으로 피난민들이 움막을 짓고 피난민촌을 만들며 살았다. 이들 피난민은 이후 세류동, 연무동 등으로 퍼지며 피난민촌은 확대됐다.밀려드는 피난민에 구호품도 부족현상을 겪었다. 이 때문에 경기도는

  •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1)가장 치열했던 전장 '수원']뺏기고 되찾길 네 번 '포성 끊이지 않은 수원'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1)가장 치열했던 전장 '수원']뺏기고 되찾길 네 번 '포성 끊이지 않은 수원' 지면기사

    수도 역할 대신한 '전략적 요충지' 맥아더 찾아 인천상륙작전 구상도6월이 되면 우리의 마음 한 편에 자리한 서늘함이 고개를 든다. 7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동이 트고,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온 한반도의 평화가 총성과 함께 깨지면서부터다.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채 5년이 지나지 않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경인일보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 현장 그 곳' 시리즈를 통해 전쟁의 상흔을 기록한다. → 편집자 주전쟁이 시작된 다음날인 26일, 의정부가 북한군에 점령됐다. 서둘러 정부와 국회는 '수원'으로 이동했다. 수도 서울이 무너지면 수원은 서울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미국 행정부의 결정에 따라 27일 미극동군사령부가 수원에 전방지휘소 겸 주한연락단(ADCOM)을 설치했다. 전방지휘소는 '수원농업시험장'에 차려졌다. 28일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된 후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으로 피난을 갔고 육군본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KMAG)까지 수원농업시험장으로 본부를 이전했다.수원농업시험장은 한국전쟁 초반, 한미 양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곳에서 한미 양군은 방어작전을 주도했다. 미극동군사령부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전쟁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29일 수원비행장에 도착하자, 대전으로 피난갔던 이승만 대통령도 수원에 올라왔다. 이때 '인천상륙작전' 등 여러 작전들이 구상됐다. 하지만 방어전략은 오래가지 못했다. 30일 수원 상공을 선회하던 미군 정찰기가 한국군 병력을 적으로 오인해 전방지휘소에 "적의 행군종대가 수원 동쪽에서 서진해 현재 수원으로 접근 중"이라는 잘못된 보고를 하면서 전방지휘소 등 한미 양군의 핵심기지가 수원에서 철수, 대전으로 옮겨갔다. 7월 4일, 북한군은 수원을 점령했다. 수원을 잃자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다시 전세가 역전된 후 22일 수원을 수복했다. 특히 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