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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3]1997년 박철순, 마운드에 입을 맞추다 지면기사
마취제 맞아가며 OB 우승 이끌어심각한 '후유증'으로 십여 년 고통최고령 승리등 박수받으며 마침표 1997년 4월29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의 OB 홈경기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표가 모두 팔려나가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그 뒤로 다시 베어스의 평일 홈경기가 매진되는 데는 무려 12년4개월이 걸릴 만큼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오직 그날 통산 76승을 기록했을 뿐인 '그저 그런' 한 노장투수의 은퇴식이 열린다는 이유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인파였다. 기록으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운, 박철순이라는 특별한 선수였기 때문이다.배명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1년을 보낼 때까지 체격이 좋고 공이 빠른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그래서 전국무대에서 거둔 성적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박철순이 투수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공군 팀 '성무'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독한 근성의 사나이 이종도와 부대끼며 '드디어 야구를 레크리에이션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당대 절정의 기량을 자랑하던 명투수 남우식에게 과외교습을 받으며 '기술'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군대 말년에 출전한 1978년 백호기 결승에서 연세대 최동원과 완투맞대결을 벌여 2-0으로 승리하며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계기로 국가대표로 발탁돼 쿠바전 최초의 승리투수가 되고 다시 미국무대로 진출하는 역사를 만들어가기도 한다.하지만 그가 대중의 기억 속으로 들어온 것은 역시 1982년, 프로야구 원년이었다. 그는 빠른 공을 주무기로 삼는 투수였지만, 간간히 너클볼과 팜볼 같이 생소한 궤적과 속도로 날아가는 신무기를 선보이며 상대 타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 해 팀당 80경기가 치러지는 가운데 그는 22연승을 포함해 24승을 기록했고, 그런 압도적인 활약으로서 팀에 역사적인 첫 우승컵을 안기게 된다.하지만 정작 그의 이름이 야구팬들에게 각별하게 기억된 것은 오히려 그 뒤의 일들 때문이었다. 심각한 허리부상에도 불구하고 국소마취제를 맞아가며 경기에 등판해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후유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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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2]1996년, 괴물신인 박재홍 30-30시대를 열다 지면기사
김종국·홍원기 등 '92학번' 주목개막과 함께 장타 '3경기당 1홈런'30호 아치때 이미 32호 도루 달성한국야구의 걸출한 재목들이 가장 많이 태어난 해로 1973년이 꼽힌다. 그 해에 태어난 선수들 중 염종석, 정민철, 안병원 등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프로에 데뷔한 것이 1992년이었다. 그리고 그들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던 73년생의 핵심멤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무대에 나타난 것은 1996년이었다. 그 해 야수로서 주목받은 '92학번'들은 박재홍과 김종국, 그리고 홍원기였다. 그 중 박재홍이 4억원대, 김종국과 홍원기가 2억원대의 몸값과 그만큼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프로 데뷔 공식경기인 시범경기 개막전에 선두타자로 나선 첫 타석에서 초구 홈런을 날리며 '또 한 명의 이종범'으로 이름을 알린 해태의 김종국과 시범경기 8할 타율을 기록한 한화의 홍원기였다. 반면 박재홍은 파워와 스피드 어느 면에서도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고, '고비용 저효율'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박재홍은 고교시절에는 시속 140킬로미터 이상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파워와 스피드와 수비력을 겸비한 견실한 내야수였기에 어느 면으로든 쓸모를 찾을 수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런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박재홍은 오직 고향 팀이라는 명분과 1차지명이라는 못마땅한 무기의 힘을 빌려 헐값에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는 프로팀의 의도에 순순히 끌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박재홍은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았지만, 자신의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치는 계약조건을 제시받아, 지명을 거부하고 실업팀인 현대 피닉스와 계약을 했다. 그렇게 굴러들어온 복덩이를 잡은 현대는 아직 입단하지도 않은 그에게 최상덕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새로 창단한 프로팀 현대 유니폼을 입히는 수완을 발휘했다. 현대의 창단감독 김재박이 박재홍에게 맡긴 임무는 공격의 첨병이었다. 3루수 자리에는 이미 거구의 3할 타자로 성장한 권준헌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김인호와 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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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1]1995년,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 (下) 지면기사
대학들과 '스카우트 경쟁' 심해져고졸 신인 쏟아져 들어온 프로팀2군 '미래 스타의 산실' 자리잡아병역 문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선수들이 대거 프로 직행을 택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프로직행을 택하는 것은 '소년가장'들이나 하는 일로 여기던 분위기가 있었다. 프로원년, 진흥고와 광주상고를 졸업한 김정수와 장채근이 해태 코치의 꼬임에 넘어가 프로선수가 되겠다고 가출까지 감행했다가 뒤늦게 아버지에게 뒷덜미 잡혀 대학 기숙사에 던져졌던 것은 그런 분위기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비로소 대학과 프로팀이 대등한 위치에서 '스카우트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대학의 문호가 좀 넓어지고 집집마다 살림에 구김살도 좀 펴기 시작하던 1990년대 초반 들어서부터였다. 특히 방위병 출장금지조치가 내려지기 직전이었던 1994년은 프로와 대학의 경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는데, 그 해 고교무대 최고의 타자 김재현과 김동주가 각각 첩보전을 방불케하는 사연 속에 프로와 대학으로 갈라섰던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하지만 '병역과 선수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이상, 대학에서 보내야 하는 4년의 세월은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선수들이 갑자기 머리를 누르기 시작한 2,3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4년간의 대학생활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6년부터 대졸 선수들만을 대상으로 진행해오던 드래프트에 고졸선수들까지 포함시키게 된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또한 방위병 경기출장 금지조치는 그로부터 몇 해 뒤 터져 나오게 되는 대규모 선수 병역비리의 씨앗이 되기도 했고, '합법적 병역 회피수단'인 국제대회 대표 선발과 메달 획득에 대한 열망을 치솟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야구드림팀'의 역사가 시작된 것 역시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좀 더 의미 있는 변화도 있었다. 그렇게 젊은 고졸선수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프로팀 입장에서는 신인 선수들을 '느긋하게 한두 해 가르칠' 시간을 가지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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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0]1995년,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 지면기사
퇴근후 평일 저녁·주말 이용 출전 양준혁 시즌절반 소화 홈런왕경쟁'특권' 불편한 시선 10년 관행 사라져1995년 4월 22일, 부산 사직에서 롯데가 삼성을 불러들여 홈경기를 벌이고 있었다. 롯데의 선발투수는 1989년 부산고등학교를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끌고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리고 1994년 롯데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해 곧장 7승을 올리며 기대를 모은 2년 차 강상수였다. 시즌 두 번째 등판이었던 강상수는 그날도 3회까지 삼성의 강타선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4회 초가 채 끝나기 전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김실과 이정훈을 연속 볼넷으로 내보내기는 했지만 크게 흔들린 것까지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아직 경기 초반이었다. 관중들은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저녁 뉴스를 보면서야 알 수 있었다.그가 갑자기 강판해야 했던 이유는 TV를 통해 경기를 보고 있던 누군가가 경기장으로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강상수는 첫 시즌을 마무리할 즈음 방위병으로 입대한 군인 신분이었고, 주말을 이용해 홈경기에 등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 그 경기를 TV를 통해 보게 된 소속부대 관계자가 경기장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 '중단'을 요구했던 것이다. 10년 이상 불안하게 이어져 온'방위병의 홈경기 출장'이라는 관행은 그렇게 확실히 깨졌고, 그 이후 한국야구의 물줄기는 크게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했다.1982년, 프로야구위원회 초대 총재였던 서종철은 국방부장관을 지낸 인물이었고, 무엇보다도 '프로야구의 성공을 위해 각 부서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런 그의 요구를 국방부가 거절할 수 없었고, '복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에서 방위병의 경기 출장을 허용한다'는 양해가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위수 지역'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홈경기에만 출장하는 조건이었지만, 퇴근 후의 시간인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만 경기가 열린다는 점에서 '시즌의 절반'은 치를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 첫 수혜자는 1984년에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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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9]1994년, 현대의 제2리그 창단 추진과 '피닉스' (下) 지면기사
우수선수 확보위해 경쟁 하던 중현대, 1995년 '태평양' 인수 발표피닉스, 결국 현대 선수공급처로현대는 우선 '피닉스'라는 실업야구팀을 창단하기로 했고, 조만간 뜻을 함께하는 다른 기업들을 규합해 제2의 프로야구리그를 출범시키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그리고 수십억의 현금가방을 들고 예의 저돌적인 기세로 대학야구팀 숙소를 밤낮으로 누비기 시작했다. 1994년 6월 무렵 이미 그 해의 대졸 빅4로 불리던 문동환, 심재학, 안희봉, 위재영을 비롯한 상위랭커 25명이 모두 현대 쪽과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잘 골라서 지명만 해놓으면 선수들로서는 별 수 없이 입단하게끔 되어있었기에 느긋하기만 했던 8개 프로구단에 비상이 걸린 것은 물론이었다. 10월31일까지는 아마추어 팀 소속의 선수와 계약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던 아마와 프로 사이의 합의는 더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몸이 달아오른 프로팀들은 '현대보다 한 장 더 얹어 주겠다'며 달려들었고, 결국 그렇게 한 개의 아마추어 팀과 여덟 개의 프로팀 사이에 치열한 돈 싸움이 시작되었다. 먼저 7월 들어 태평양이 4년 전부터 매달려온 투수 위재영을 2억 이상의 계약금과 4년 전 대학과 이중계약에 휘말렸을 때 깨끗이 물러나고 기다려준 인정에 호소한 끝에 '구두약속'을 받아냈고, 곧 LG 역시 비슷한 액수와 방식으로 타자 심재학을 잡아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단들은 현대와의 돈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고, 그 와중에 전선이 고졸예정자들에게까지 확대되면서 김승관(삼성)과 조현(LG) 등이 각각 억대의 기록적인 계약금을 받으며 프로행을 확정했다. 그 무렵 끝내 대학행으로 결론이 난 고졸 최대어 김건덕에게 건네진 제안은 2억이 넘을 정도였다. 프로팀 사장들은 '한 구단이 한 명씩만 책임지고, 배상금을 지불하고라도 선수를 빼옴으로써 현대를 저지하자'고 서로를 독려해가며 전의를 불태웠고, 그만큼 모든 면에서 지난해보다 배 이상 부풀어 오른 뜨거운 돈싸움이 펼쳐졌다. 애초에 역시 1억 가량의 계약금으로 현대를 택했던 김재걸을 돈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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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8]1994년, 현대의 제2리그 창단 추진과 '피닉스' (上) 지면기사
임직원 사기 올리려 '스포츠 주력'기존 구단들, 수백억 가입금 텃세정회장 '제 2리그' 창설 파격 행보1982년, 대한체육회장을 맡고 있던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올림픽 유치전에 몰두하고 있었고, 동시에 프로야구의 성공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도와 정 회장의 고향인 강원도 지역까지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야구팀을 맡아 달라는 프로야구 추진세력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원년부터 만루홈런이 펑펑 쏟아져 나오고 박철순과 최동원의 투혼이 드라마를 연출해내면서 프로야구가 모두의 예상을 깬 대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을 때도 정주영 회장의 인식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1989년 MBC가 매물로 나왔을 때도 '적자기업은 인수하지 않는다'는 원칙론을 반복해 프로야구무대에 '저렴하게' 입성할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기도 했다. 하지만 1992년에 벌어졌던 갑작스러운 사건들이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놓게 된다. 그 해 봄 정주영 회장은 국민당을 창당해 직접 '정권 접수'에 나서게 되고, 국민당은 불과 창당 한 달여 만에 참가한 14대 총선에서 31석을 확보해 일약 3당으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그해 겨울 대선에서는 '반값아파트'와 '공산당 합법화', 혹은 '사재 2조 원 국가헌납' 등의 파격적인 공약과 안기부가 개입된 '초원복국집'에서의 관권선거공작을 도청해내 폭로할 정도의 정보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파란을 일으키며 김영삼, 김대중과 더불어 '빅3'로 군림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모은 400만 표는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는 3위 낙선이었다. 정권 핵심층의 관권선거공작을 도청할 만큼의 배짱을 부리고도 낙선한 정주영은 곧 정치 이력을 1년 만에 마감하고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가 직면해야 했던 문제는 마치 총수의 사조직처럼 움직였던 현대그룹 임직원들의 사기 저하, 그리고 국민당의 외곽조직 혹은 패잔병조직 정도로 전락한 대외적인 그룹의 이미지였다.정주영 회장은 경영에 복귀해 처음으로 가진 사장단 회의에서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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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7]1993년 재건에 나선 LG와 태평양(下) 지면기사
LG, 1년간의 시험 끝에 전력 완성막강 마운드·타선, 압도적인 우승태평양도 10승대 투수 4명등 배출LG 못지 않게 반복되는 무리와 몸살의 악순환을 고민하던 팀은 태평양이었다. 태평양은 1989년,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만년꼴찌에서 3위까지 수직 상승하는 경이로운 돌풍을 연출했던 팀이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떠난 그 이듬해부터 곧장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 그리고 정민태와 김홍집까지 돌아가며 부상으로 이탈, 단 한 번도 최상의 투수전력을 운용하지 못하는 유령선 같은 팀이 되어 있었다. 그 악몽의 절정은 1993년이었다. 그 해 돌핀스는 공교롭게도 모든 주전급 투수들이 동시에 드러눕는 불운 속에 신생팀 쌍방울에게마저 멀찍이 따돌려진 채 선두 해태와 무려 43.5경기차로 벌어진 압도적인 꼴찌로 내팽개쳐지는 대참사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정동진 감독은 선수들에게 무조건 재활 우선의 사인을 보냈고, 감독 생명 연장을 위한 무리를 과감히 포기했다. 그래서 많게는 7승, 적게는 3승을 올렸을 뿐인 투수 여섯 명이 고르게 한 경기씩을 책임지고 가는 여유로운 운영을 이어갔고, 정명원과 박정현과 정민태 등이 통째로 한 해를 쉬며 느긋하게 몸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물론 그렇게 급할수록 돌아가는 운영의 대가는 한 해 뒤에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94년, LG는 1년간의 시험가동 끝에 완성된 신무기를 내놓을 수 있었고, 태평양은 1년간의 넉넉한 시간 동안 충분히 고치고 날을 세운 칼을 쥐고 나설 수 있었다. 1994년, LG의 마운드는 18(이상훈)-16(김태원)-15승(정삼흠)의 막강 선발 삼각편대로 시작해 김기범, 차명석, 차동철, 전일수로 두터워진 계투진을 거쳐 35세이브포인트의 마무리 김용수로 이어지는 완벽한 포메이션을 완성했다. 타선에서 터져 나온 유지현-김재현-서용빈 트리오의 폭발력과 만나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우승 중 한 장면을 일궈낼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그에 견주기에 너무나 초라하지만, 태평양 역시 팀타율 최하위라는 악재 속에서도 네 명의 10승대 선발투수와 40세이브 신기록의 마무리투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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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6]1993년 재건에 나선 LG와 태평양(中) 지면기사
선발-계투-마무리 '투수 분업'김용수 뒷문 단속, 역전패 불허정규리그 4위, 플레이오프 진출이광환 감독이 처음 지휘봉을 잡은 것은 서울 라이벌 OB에서였다. 프로원년 김영덕 감독 아래서 코치로 프로지도자의 이력을 시작한 그는 1988년 시즌을 마친 뒤 OB의 2대 사령탑이던 김성근 감독이 구단과의 불화 끝에 자진해서 물러난 자리를 물려받았고, 그곳에서 미국 유학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자율야구'의 기치를 올렸다. 자율야구란 선수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각자의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채워가도록 유도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평생 엄하고 험한 규율 속에서만 자라고 살아온 선수들이 자율을 이해하고 움직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반면 구단이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전임자를 밀어내고 이광환 감독에게 기회를 준 이유는 당장 우승을 해 보이라는 단순한 요구 때문이었다. 1989년에 일찌감치 하위권으로 밀려난 채 5위로 시즌을 마감한 데 이어 1990년에는 시즌 초반부터 연패를 반복했고, 결국 10연패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11연패에 빠져버렸던 6월19일에 그는 전격 해임당하는 쓴맛을 봐야 했다. 그래서 잠시 공백을 거친 뒤, 이번에는 백인천 감독이 자존심 싸움을 벌이다가 털고 일어선 빈자리를 물려받은 LG에서 그는 무작정 각자에게 과정을 맡기는 대신 각자의 책임감을 끌어낼 수 있는 '구조'를 고민했고, 그 결과 1993년에 세상에 내놓은 것이 이른바 그가 명명한 '스타시스템'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선발 로테이션의 고정, 그리고 계투와 마무리로 이어지는 확실한 투수 분업 시스템이었다. 1993년 LG는 선발진에 김태원과 정삼흠을 축으로 삼아 김기범과 차명석, 그리고 신인 이상훈을 배치했고 8년차 베테랑 우완 차동철과 신인 좌완 강봉수를 필승계투요원으로, 김용수를 마무리로 고정했다. 그리고 선발투수에게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기든 지든 6이닝 이상을 맡겼고, 화급한 사정이 없는 한 마무리 투수에게 2이닝 이상은 맡기지 않았다. 물론 결과가 아주 신통한 것은 아니었다. 선발진의 에이스 정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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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5]1993년 재건에 나선 LG와 태평양(上) 지면기사
단단했던 투수진 부상·부진 연속임기응변 마운드 운용도 '독으로'1992년 이광환 감독 부임 안정화 1993년의 프로야구는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문희수, 선동열, 송유석을 홀로 상대하며 181개의 공을 던진 라이온즈 박충식의 투혼과, 하지만 투혼 따위로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라는 듯 소리 없이 진군해 일곱 번째 왕좌에 오른 해태의 능숙한 세리머니 속에서 저물었다. 선동열이 부상으로 이탈했던 1992년 정상 고지에서 내려서야 했던 해태는, 이번에는 마무리투수로 재기해 0.73이라는 역대 최저 평균자책점 기록을 세운 선동열의 힘으로 다시 정상을 탈환했다. 선동열이 완벽하게 뒷문을 틀어막자 온기가 선발진으로까지 번지며 다승왕 조계현을 필두로 송유석, 김정수, 이강철, 이대진까지 무려 다섯 명의 10승 대 투수가 배출됐다(선동열 자신까지 모두 여섯 명이 10승 이상을 기록). 그런 압도적인 마운드 아래서는 팀 타율이 2할5푼에 턱걸이한 물 방망이도 큰 장애요인이 될 수 없었다. 우승은 늘 그런 압도적인 위력의 에이스가 가져다주는 선물이었다.원년 OB는 우승의 제단에 박철순의 허리를 내놓았고, 1984년 롯데는 최동원의 어깨를 바쳤다. 그리고 1986년부터 해태의 왕조시대가 시작된 이래 잠시나마 그 숨 막히는 행군을 멈춰 세운 것은 한 편으로는 선동열의 부상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LG와 롯데에 내려진 김태원과 김용수, 염종석과 박동희 같은 '벼락같은' 축복이었다. 하지만 1993년의 진정한 의미는, 그런 축복과 동떨어진 침침한 변두리에서 묵묵히 전진했던 이들에 의해 또 다른 길이 개척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이듬해 패권의 주인공이 되는 LG,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대항마가 되는 태평양 돌핀스에 관한 이야기다.1990년에 창단하자마자 해태의 5년 연속 우승을 저지하며 왕좌에 올랐던 트윈스는 1991년 6위, 1992년에는 7위로 전락하며 바닥을 기어야 했다. 선수단의 명단은 1990년 우승 당시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김재박과 이광은이 1991년을 끝으로 각각 팀을 떠나면서 내야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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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4]연습생 출신 홈런왕 신화(下) 지면기사
1992년 41개 3경기당 1개 담 넘겨타격 순간 양팀 응원석 탄성 교차데뷔 5년만에 '완벽한 타자' 등극한국 프로야구 역시 홈런의 열매를 따먹으며 태어났고 자라왔다. 프로원년, 역사적인 개막전 연장 10회 말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과 그 해의 패권을 가른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초 김유동의 만루홈런은 당대 자타공인 최고의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묶여있던 공백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가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만수와 김봉연의 영호남 홈런대결은 1980년대 내내 야구장을 끓어오르게 만든 최고의 연료였다. 하지만 1982년 80경기에서 22개의 홈런을 기록한 김봉연으로부터 1988년에 108경기에서 30홈런을 때려낸 김성한에 이르기까지, 날고 긴다던 홈런왕들이 기록한 홈런은 경기당 0.27개를 넘지 못했다. 1986년의 김봉연은 경기당 0.2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108경기 21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었다. 말하자면 4, 5경기쯤 연달아 관전해야만 그 선수가 홈런을 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셈이었던 것인데, 경기당 0.4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베이브 루스가 '베이브 루스가 홈런 치는 걸 보기 위해 야구장에 가는' 풍경을 만들었던 것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것이었다.장종훈이 1992년에 기록한 홈런 41개는 시즌 경기당 0.325개에 해당했고 대략 세 번 경기장을 찾으면 한 번 정도는 '장종훈의 홈런'을 구경할 수 있는 빈도였다. 90년대 초반 서울과 부산의 '빅 마켓 팀'들의 강세와 더불어 장종훈의 홈런쇼는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모으는 가장 확실한 이벤트였다. 그렇게 한국프로야구는 300만 시대를 넘어 400만 시대의 코앞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그 해 그가 홈런을 때리는 순간 상대팀 응원석에서마저 탄성이 흘러나오는가 하면 그저 평범한 안타로 끝나는 순간에는 이글스 팬들마저 야유를 터뜨리는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입장료를 '안타가 아닌 홈런을 보는 값'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1992년 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남겨둔 채 39홈런을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