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추억 그리고 '보람채 아파트' 40년전 구로공단 청년노동자들닭장집·기숙사 등 좁은 곳 생활철산리에 생긴 아파트 들어가자한 집 5~6명 지내도 '여유' 생겨보금자리 마련 기반 돼 준 공간 꽤 오랫동안 우리 마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마을과는 선이 그어져 정체조차 알 수 없었던 공간들이 경기도 곳곳에 있다. 국유지이거나 서울시가 소유한 땅들인데, 이들의 기능은 오로지 국가, 서울시민을 위한 것들이다. 워낙 오랫동안 그래와서 그러려니하며 살았다. 그렇게 서울 변방, '위성도시'로 태어난 숙명을 안고 참아왔지만, 세월이 흐른 만큼 도시와 시민은 성장했다. 이제 경기도의 도시들은 독립된 자치권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확립했고 주도적인 도시개발이 가능해졌다. 경기도 도시들이 빼앗긴 '도시개발의 자치권'은 그래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 → 편집자 주일당 3천300원, 월급 9만9천원. 아침 8시30분에 출근해 밤 10시는 넘어야 끝이 나는 근무. 40여년 전 그때를 생각하면, 오정애씨는 참 고되고 힘들었어서, 이보다 못할 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현재'를 산다고 했다. 정애씨는 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로 이름과 모습을 바꾼, '구로공단'에서 일했다. 1986년, 스무살을 막 넘긴 즈음부터 8년여간 구로공단에서 청춘을 보냈던 그는 우리가 한번쯤 들어 본, 이른바 '여공'으로 불린 청년노동자다. 그리고 가진 것 없던 그 시절, 나아질 것이라 희망을 쥐어준 것이 3년간 살았던 광명 보람채 아파트였다. "구로공단에는 주로 전자회사, 봉제공장들이 많아서 거의 여공들이 일을 했어요. 인건비가 워낙 싸니까. 가리봉 시장 쪽에 가면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아주 좁은 방들이 늘어서 있는데, 화장실도 없고 몸 하나 뉘일 공간 정도…. 화장실은 보통 1층 공용화장실 하나로 같이 쓰는데, 그렇게 열악한데도 월세 아끼겠다고 2~3명씩 같이 살았어요." 이런 집들을 '닭장집'이라고 했고 또 가장 열악했다. 회사·구로공단에서 제공하는 기숙사들도 간혹 있었지만, 수준은 거의 마찬가지였다. 정애씨도 한때 공단 기숙사에 기거한 적이 있지만, 그때를 회상하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한방에 8~10명까지도 살았어요. 천으로 된 옷장 하나 놓고 누우면 끝나는 게 유일한 내 공간이었죠. 입사하고 한 6개월쯤 살았는데, 도저히 못살겠더라고. 그런데 철산리쪽에 아파트가 생긴다는 거예요. 구로공단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고. 입주자를 30명 뽑는데, 100명이 넘게 왔어요. 경쟁이 엄청 치열했는데, 제비뽑기로 뽑혀서 운좋게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렇게 보람채 아파트 첫 입주자가 됐어요." 보람채도 46.2~49.5㎡(14~15평) 정도의 좁은 공간이었다. 그래도 방 2개·싱크대 있는 주방·화장실까지 있었다. 머리 뉘일 곳밖에 없던 이전 숙소에 비하면 대궐 같은 곳이라고 여기며 만족했다. 물론 이 곳에서도 한 집당 보통 5~6명이 살았는데, 정애씨는 5명이 함께 살았다고 했다. 좁은 화장실을 다 같이 써야 해서 아침이면 출근전쟁을 벌여야 했지만, 퇴근하면 도란도란 모여서 국수도 삶아먹고 빨래도 널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 행복했다.그러나 공단에서의 근무는, 어린 나이의 여성청년이 감당하기엔, 많이 고되고 서글펐다. 오후 6시라는 퇴근시간은 서류상의 시간일 뿐이었다.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근무는 선택권조차 없었다. 몸이 아프고 힘들어 쉬고 싶어도 그런 걸 말할 수 있는 분위기조차 되지 못했다.공장 관리자들은 어린 여공들을 이름 대신 "야"라고 하대하며 욕하고,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일쑤였다. 또 대부분의 이들은 워낙 낮은 임금을 만회하려 야간근무를 해야만 하는 상황들에 놓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울로 실려오다시피 온 공장노동자 상당수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오빠 혹은 남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거나 딸린 동생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사연들이었고, 이들이 '닭장집'과 '철야근무'를 견뎌야 하는 이유들이었다.그렇게 혈혈단신 서울로 상경해 안정적인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데 기반이 돼 준 것이 보람채였다."그렇게 고생했어도 인생을 돌아봤을 때 그 시간은 참 값어치가 있었습니다. 보람채의 3년이 우리들의 기반이 돼줬고 또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하면서 조금씩 서로 나아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힘이 됐던 것 같습니다."→ 관련기사 (청년의 꿈 머물렀던 안식처 '보람채'… 이제는 방치된 '도심 속 섬') /공지영·김성주·이시은기자 jyg@kyeongin.com과거 구로공단(현 가산디지털단지)에 근무하는 여성 청년노동자들을 위한 숙소였던 보람채 아파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수많은 서울시내 미혼 근로여성들에게 보금자리가 돼 주었지만, 지난 2015년 폐쇄됐다. 철문이 굳게 닫힌 채 9년째 방치된 이 아파트는 곳곳에 수풀이 우거져 마치 도심 속 섬을 연상케 했다. 2024.6.23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과거 구로공단(현 가산디지털단지)에 근무하는 여성 청년노동자들을 위한 숙소였던 보람채 아파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수많은 서울시내 미혼 근로여성들에게 보금자리가 돼 주었지만, 지난 2015년 폐쇄됐다. 철문이 굳게 닫힌 채 9년째 방치된 이 아파트는 곳곳에 수풀이 우거져 마치 도심 속 섬을 연상케 했다. 2024.6.23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과거 구로공단(현 가산디지털단지)에 근무하는 여성 청년노동자들을 위한 숙소였던 보람채 아파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수많은 서울시내 미혼 근로여성들에게 보금자리가 돼 주었지만, 지난 2015년 폐쇄됐다. 철문이 굳게 닫힌 채 9년째 방치된 이 아파트는 곳곳에 수풀이 우거져 마치 도심 속 섬을 연상케 했다. 2024.6.23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경기도교육청과 지자체간 학교급식 경비 분담에 따른 논란(6월21일자 3면 보도=시·군, 일정비율만 부담 모델 염두… 예산분담구조 체계화를 [애들 밥값은 누가 내야할까·(下)]) 속에, 학생들에게 피해가 없어야 된다는 지적이 나왔다.경기도의회에 따르면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이하 예결위) 이석균 의원(국·남양주1)은 23회계연도 경기도교육청 결산 심사에서 도 교육청과 지자체간 학교급식 경비의 원활한 분담을 당부했다. 이석균 의원은 "'학교급식법'에 따르면 도내 시·군에서 학교급식 예산을 지원하는 것은 의무는 아니다"라며 "다만 교육복지 차원에서 교육청과 지자체가 '무상급식'에 합의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건강한 먹거리가 제공되고 있지만, 올해 지자체가 겪는 재정난과 학교 급식 경비 분담이 밀접하게 연관된 만큼 원활한 협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이어 "도교육청과 각 시·군간 분담금을 놓고 입장차가 이어진다면 원가 절감 등으로 인한 급식의 질 저하 등 그 피해는 다음 세대인 아이들에게 향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17일 자율선택급식을 시행하는 화성시 동탄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삼겹살오븐구이 허브맛과 고추장맛 중에서 원하는 메뉴를 고르고 있다. 2024.7.17 /목은수기자 wood@kyeongin.com
아트몬스터 맥주를 만난 것은 지난 4월 군포 철쭉축제 때였다. 축제 현장엔 여러 부스가 있었는데 유독 줄이 긴 부스가 있었다. 군포시 유일 수제맥주 브루어리인 아트몬스터였다. 호기심에 계절성 이벤트로 출시한 제품이라는 '스프링 브리즈'를 구매했다. 맥주에서 말차 프라푸치노 같은 맛이 난다는 관계자의 설명에 반신반의했다. 어떻게 맥주에서 그런 맛이 날 수 있지. 의심은 맥주를 마시는 순간 사라졌다. 진짜 말차 프라푸치노 같은 맛이 났으니까. 내가 만난 첫 아트몬스터 맥주였다. #“괜히 '월드챔피언'을 붙일 수 있는 게 아니죠" 아트몬스터 브루어리는 군포시 금정동 공업단지에 있다. 한 눈에 봐도 남다른 벽돌 건물이라 먼 발치에서 봐도 아트몬스터 브루어리임을 알 수 있다. 건물에 들어서면 각종 상장들이 벽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다. 전세계 유명 주류 대회에서 300개 이상의 수상 실적을 거둔 아트몬스터 브루어리 박진호 대표의 발자취 그 자체다. 대기업에서, 월가 금융업계에서 일하던 박진호 대표가 맥주를 만들고,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 무렵부터다. 미국 시벨 공과대학과 독일 3대 맥주 양조교육기관인 되멘스 아카데미가 협업해 운영하는 맥주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브루마스터 자격을 취득했고, 독일 양조 현장에서 실무를 익히는 데 진땀을 뺐다. 동시에 국내 1세대 수제맥주 브루어리를 모두 살피며 우리나라 맥주 시장을 면밀히 분석하기도 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고, 맛있는 맥주를 만들어냈다. 브루어리를 설립하기 전부터 크고 작은 주류 대회에서 수상을 휩쓰는 등 두각을 나타냈던 박 대표는 2017년에 군포에 브루어리를 만들었다. 다른 수제맥주 브루어리와 달랐던 점은 맥주를 제조하는 시설에 더해, 맥주를 일반 소비자들에게 판매하기 위한 음식점도 함께 연 것이다. 손수 만든 맥주를 소비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알리고 오래도록 선보이고 싶어서였다. 이 때문에 수도권 접근성이 뛰어난 곳에 브루어리를 설립해야 했다. 군포를 선택한 이유다. 여러 정수장의 물을 살펴본 결과 군포의 물이 맥주를 만드는데 적합하다는 판단도 한몫을 했다. 시작은 비엔나 라거인 '청담동며느리', 헤페바이젠 에일 '이태원 프리덤', 아메리칸 페일에일 '수다스폰서', 다크 라거인 '몽크 푸드' 4가지 제품이었다. 모두 국내·외 유명 주류 대회에서 많게는 25관왕을 차지한 제품들이다. 해당 제품들에 더해 아트몬스터는 연간 10여개의 제품을 선보이는데 수상 실적이 없으면 정식 출시하지 않는다는 철칙이 있다. 이 때문에 정식 라인업에 포함된 모든 맥주들은 모두 전세계 내로라하는 대회에서 메달을 건 이력이 있다. 현재 정식 라인업은 초창기부터 아트몬스터를 지켜온 4개 제품 외에 헤이지 IPA '넘사벽', 스트롱 에일 '핵존심', 필스너 라거 '운짱', 밀맥주 '첫사랑의 향기', 특유의 신 맛을 자랑하는 에일 '창세기'. 포터 에일 '사랑범벅', 얼그레이 티 페일에일 '금사빠' 등 7개가 있다. 박 대표는 “수상은 어쨌든 전문가에게 인정받는 것이니 새 맥주를 만들 때부터 그런 목표를 두고 제조하고 있다"며 “괜히 아트몬스터가 '월드 챔피언'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말 국내·외 메이저 대회에서 수상으로 품질을 입증한 '월드 챔피언' 맥주들만 선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밝혔다. '스프링 브리즈'와 같은 시즈널 제품도 남다르긴 마찬가지다. 이번 봄 메뉴로 출시한 스프링 브리즈는 이미 일본 등에선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말차 맥주를 참고했다. 다만 기존 제품 그대로 만드는 게 아닌, 아트몬스터만의 연구와 해석을 더해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만들었다. 기존 말차 맥주는 특유의 쓴 맛이 있는데, 이를 한국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말차 프라푸치노와 같은 맛으로 전혀 색다른 제품을 선보인 것이다. 아트몬스터 맥주의 가장 큰 특징을 물으니 박 대표는 단번에 “맛있다"고 답했다. “일관되게 맛있는 맥주를 만드는 게 중요한데, 이걸 위해 좀 힘들어도 타협하지 않고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예를 들면 시트러스한 맛과 향을 내기 위한 오렌지 껍질과 고수를 직수입해와서 양조하는 날 새벽에 간다. 또 멸균 처리를 하지 않아서 효모가 살아있다. 그게 진짜 '수제' 아니겠나. 그러니까 풍부하고 살아있고 맛있을 수밖에 없다"는 게 그가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다. #아트몬스터 맥주, 직접 마셔봤는데요 아트몬스터는 브루어리에서 제조한 맥주를 판매하는 음식점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맥주는 수제맥주 중에서도 단연 프리미엄이고, 함께 판매하는 피자나 치킨에도 공을 많이 들였다는 게 박 대표 설명이다. 맥주 뿐 아니라 음식도 아트몬스터에서 직접 만들고 있다. 이를 위해 군포 브루어리 건물 일부는 피자 반죽을 만들고 닭을 염하는 식품 공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박 대표는 “합리적인 가격에 높은 품질을 계속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그래서 맥주는 물론, 음식도 대부분의 공정을 직접 담당한다. 맥주는 정말 최고이고, 음식도 웬만한 프랜차이즈 제품의 품질 이상이라고 자부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일 동료 기자 6명과 함께 아트몬스터 매장 한 곳에서 맥주를 곁들여 식사를 했다. 해당 매장은 오래된 건물 2층에 위치해있었는데 좁은 계단을 올라 작은 문을 여니 밖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다소 어두운 가운데 네온사인이 켜져 더욱 감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브루어리의 벽을 가득 메웠던 300여개의 상장은 매장에서도 어김없이 볼 수 있었다. 총 7명의 기자들이 정식 라인업 맥주 11개를 저마다 주문해 마셔봤다. '첫사랑의 향기'에선 시트러스한 향과 맛 사이로 고수 맛이 아주 미세하게 느껴졌다. 전세계에서 아트몬스터만 유일하게 구현한 맛인 '사랑범벅'은 흑맥주에서 묵직함 속 초콜릿의 풍미가 가득 느껴졌다. 11개 맥주 중 주문서에 가장 많이 적힌 제품은 '운짱'이었다. 운짱은 독일 노블홉을 사용한 필스너 라거인데, 라이트하고 탄산이 적절해 부드럽게 마시기 좋은 맥주다. 한국인들의 '라거 사랑'이 이날 주문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 듯 했다. 박 대표가 자신감 있게 말했던 것처럼 피자와 치킨 역시 가성비가 뛰어났다. 아트몬스터는 맥주 '핵존심'을 설명하면서 이같이 밝힌다. “맛 없는 맥주는 팔지 않는다는 게 아트몬스터의 자부심입니다." 박 대표도 말한다. “소비자들이 '좋은 맥주'를 마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스스로 수제 맥주에선 정말 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좋은 맥주를 계속 제공하는 게 저희 목표에요. 정말 좋은 맥주를 활발하게 즐기는 주류 문화가 안착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군포/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큰 틀 논의 시작해야 '무상급식 예산 갈등' 지자체-교육청 '뜨거운 감자' 해법 모색도교육청 "현행 문제 없다" 미온적 걸림돌… 숙의 공론장 필요 교육 현장에서 자리잡은 무상급식이 안정적으로 시행되기 위해선 예산 분담 구조를 체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제라도 합리적인 재원 조달 방안을 논의하자는 움직임이 기초지자체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가운데, 실제 변화로 이어질지 주목된다.20일 경기도내 지자체들에 따르면 각 시·군은 학교급식경비 분담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공동 대책 마련을 위한 협의를 진행 중이다. 오는 8월께 2025학년도 학교급식경비 분담금 확정이 가까워질수록 이런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최근 의정부시가 도내 지자체를 대상으로 비공식 조사를 벌인 결과, 답변서를 제출한 23개 시·군 중 22곳이 학교급식경비 분담 절차가 적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 중 19곳은 분담률 하향 조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파악됐다.익명을 요청한 한 지자체 관계자는 "교육청은 매년 국세의 20.79%를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받지만 지자체는 경기에 따라 세수의 변동폭이 크고 특히 올해 같은 경우 재정적으로 압박을 많이 받는 상황"이라며 "이런 재정 여건이 반영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급식경비를 부담하게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했다.시·군들은 학교급식경비를 식품비에 한해 일정 비율만 부담하는 경기도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다. 도는 2021년 학교급식경비 분담금에 포함된 조리실무사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학생들이 먹는 급식의 질이 떨어졌던 일을 계기로 도의회, 도교육청과 3자 합의를 이뤄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시·군의 이런 바람이 현실화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교육당국의 미온적인 태도다. 시·군 분담금이 줄어든다면, 그만큼을 다른 데서 충당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문제다.도교육청은 현행 시스템에 법적인 문제가 없으며, 추후 학생 수가 감소하면 지자체들의 어려움도 해결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교육부 또한 '각 지역 교육청과 지자체가 협의해 풀어야 할 문제'라며 한 발 뗐다. 교육부 관계자는 "무상급식은 광역자치단체별로 교육청과 지자체가 합의해 도입한 일"이라며 "법적 의무사항도 아니고 지원범위, 재원, 여건 등 상황을 고려해 진행하고 있는 지방사무"라고 말했다.전문가들은 예산 갈등을 넘어 무상급식의 본질을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학생 및 학부모를 포함한 숙의의 공론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윤상호 한국지방세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방정부 입장에선 예산이 부족할 때 강제성이 없는 조항을 먼저 찾아보지 않겠나"라며 "지금의 교육재정 방식은 80년대 인구가 급속 증가할 당시 교육비 확보를 위해 만들었던 재원조달 방안인데, 이것이 지금에도 합리적인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무상급식은 정치적 합의다. 지자체가 관련 지출을 안 하는 것이 법적 문제는 아니"라며 "그러나 정치적 합의를 깰 때의 책임은 감내해야 한다. 시민들에게 충분한 공감을 구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조우경 다음세대를위한학부모연합·경기도학부모단체연합 대표는 "교육청이 각종 현안에 대해 학부모들의 의견을 듣지 않는 일들이 그동안 많았다"며 "급식 문제는 학생과 매우 밀접하고 중요한 만큼 당사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목소리도 정책에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도란·장태복기자 doran@kyeongin.com무상급식의 안정적 시행을 위해선 예산 분담 구조 체계화가 필요하다. 사진은 도내 무상급식 학교 모습. /경인일보DB
어차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데 공부마저 이 시대의 것을 하기는 싫었어요. 저의 오랜 취미 중 하나가 SF 영화를 보는 겁니다. 아임프롬인천 이번 호 주인공은 서양 고전 연구가인 이태수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다. 이태수 교수는 해방직전인 1944년 율목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인천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낯선 것에 자극받고 근원을 탐구하는 것에 끌렸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 고전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이가 없을 때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스 사람도 모르는 그대 그리스어를 마치 골목길을 헤매듯 한 글자 한 글자 단어의 원형을 찾아가며 익혔다. 동네 언덕에 올라 인천항을 드나드는 거대한 외항선을 바라보며 마도로스를 꿈꾼 시기도 있었다. 그의 기억 속 율목동은 흐릿했다. 하지만 철학자 이태수를 설명하는데 율목동이 어쩌면 훌륭한 나침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 율목동에서 태어났어요. 제가 좀 머리가 커지고 난 뒤에 생가를 찾아갔어요. 중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생가도 거리도 모조리 바뀌어서 도저히 그 지역을 찾아낼 수가 없었어요. 집 근처에 일본 사람들 공동묘지가 있었고요. 나중에 어린이 놀이터가 생기기도 했고 그런데 다 없어졌죠. 아쉬워요. 없어지는 건 다 아까워요." 이태수 교수가 태어난 율목동은 옛 부촌(富村)이다. 지금도 한옥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우리말로 밤나무골 혹은 밤나무굴로 불린 마을이다. 의사이면서 향토사학자 신태범(1912~2001)의 '인천한세기'는 율목동에 대해 “야산에 밤나무가 많았던 언덕이 바로 현재 율목동이 자리하고 있는 일대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천을 개척한 선대는 서슴지 않고 이곳을 밤나무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관가에서는 유식하게 한자로 율목리라고 했음직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향 율목동의 골목 풍경은 이태수 교수의 기억 속 아스라이 남아있다. 그럴싸한 장난감이나 놀이터가 따로 없던 시절, 골목에 생긴 조그만 자투리 공간, 무너진 집터는 꼬마들의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다. “자연 발생적인 골목이 많았어요. 행정이 계획을 가지고 기획력을 발휘해 가지고 정비한 구역은 아주 적었던 시기였겠지요. 인프라 구축을 할 수 있는 경제적 힘도 없었을 것이고, 너도나도 도시로 몰려들면서 행정력이 제대로 완비가 안 됐을 때 집을 짓고, 자연스럽게 골목이 생길 수밖에 없었죠. 그 골목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발생한 골목이니 자연스레 쓰레기도 쌓이고, 술 취해 지나가던 사람이 밤에 거기 엎어지기도 하고 토사물도 뱉어내고, 아주 지저분한 곳이지만, 그곳이 꼬마들의 길, 말하자면 우리들의 모임 장소였어요. 반대로 큰길을 우리는 '행길'이라고 불렀는데, 행길은 어른들의 길이었던 것 같아요. 행길에 나가서 노는 거는 위험한 일이었고 어른들한테 야단도 맞았죠." 이태수 교수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지난 13일 율목동을 찾아가 이 동네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언덕 위에는 율목도서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도서관의 간단한 이력을 설명하는 표지판이 보였다. 율목도서관 일대는 인천항 개항 이후 해관 통역관으로 일하던 중국인 우리탕(吾禮堂)의 과수원 부지였다. 정미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사업가 리키다케가 인수해 자신의 주택 겸 별장을 신축했다. 이곳은 '역무별장'이라고도 불렸다. 광복 후 미군이 숙소로 사용했다. 일제강점기 인천부립도서관을 이곳으로 옮겨와 1946년 12월 2일 시립도서관으로 개관했다. 시립도서관은 2008년 10월까지 운영되다가 구월동으로 신축 이전해 2009년 6월23일 미추홀도서관으로 명칭을 변경해 개관했다. 시립도서관이 떠난 이곳은 기존 건물을 고쳐 2011년 7월8일 율목도서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리키다케 별장은 퍽 큰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 도서관 범위를 훨씬 넘어서 주변 주택이나 교회 등을 아우를 정도였다고 한다. 권세가의 별장터여서 인지 인천항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풍광이 퍽 좋았다. 실제로 도서관 주변에는 정원을 장식하는 데 썼던 것으로 보이는 석등이나 조각, 정원석 등이 상당수 남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서관에서 조근 내려가면 체육공원과 농구장, 어린이 공원이 나타난다. 공원 벤치에 앉아 삼삼오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어르신들에게서 이곳이 옛날에는 '풀장'이었고, 훨씬 이전에는 일본인 묘지가 있었다는 설명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공원 한 켠에는 '율목어린이 공원 준공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는데, 기념비에도 비슷한 설명이 쓰여있다. 어르신들의 설명이 아니었다면 지금 공원의 모습에서 풀장의 흔적이나 묘지를 떠올리기는 힘들어 보였다. 공원 아래쪽은 흔히 '빌라'라고 부르는 주택들이 밀집해있다. 이태수 교수가 언급한 어린이들만 뛰어 놀 수 있던 차도 다니지 못하던 작은 골목의 차 한대만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로 남아있었다. '경축, 재개발 후보지역 확정' '도로정비공사' 현수막으로 현재 마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태수 교수는 충남 논산 출신 이강우씨와 어머니 구숙희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두 분 모두 교사였다. 어머니는 1919년생으로 인천 태생이었고, 아버지는 충남 논산 출신으로 어머니보다 2~3세 많은 연배였다. 아버지는 중등교사 어머님은 초등교사로 일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 아버님은 폐결핵으로 돌아가셨고, 그 이후 어머니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남매를 돌봤다. 수예점을 운영했는데, 자수를 놓은 손수건 등이 주요 물품이었다. 미군이 주요 고객이었다. 가내수공업 형태로 직원을 제법 여럿 두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1·4후퇴 직후 신흥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창영초나 신흥초에는 그나마 생활 형편이 괜찮은 학생들이 다녔고, 인근 송림초에는 피란민 가족 아이들이 많았다고 그는 기억했다. 그는 신흥초를 다녔지만 중·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그와 가깝게 지낸 친구들은 신흥이나 창영이 아닌 실향민이 많았던 송림초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한 학급에 학생이 100명이 넘는 게 보통이었어요. 전쟁 직후 교사도 제때 공급이 안 됐고, 교사를 양성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거든요. 교사 중에 상이군인 출신들도 있었고요. 한 반에 피난민, 전쟁고아 등도 많았어요. 그때 뭐 제대로 통계 조사를 할 수 있었던 때도 아니니 내 짐작으로는 반은 훨씬 넘었을 것 같아요." 이태수 교수는 일반화하기 힘든 얘기라면서도 인천 출신보다 피란민 출신이 더 치열하게 살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인천중학교 제물포고가 인천에서 들어가기 힘든 학교였는데 창영·신흥 졸업생 가운데 한 학급이 넘는 학생이 진학했고, 그리고 송림에서는 그 절반도 안 될 정도의 인원이 입학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서울대 들어가고 보니까 대부분 송림 출신이더라고요.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 보다 더 센 거였죠. 어른들 세계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피란민으로 내려와 생활을 전투처럼 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더 잘 살게 돼. 인천의 원래 본토에서 유복한 정도의 살림을 꾸린 사람들보다는 그 타지에 와서 애써 가지고 집안을 읽은 사람들이 더 크게 성공을 했다 는 걸로 읽힐 수가 있어요" 이태수 교수가 서울대 철학과 진학한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 받은 영향이 컸다고 한다. “이게 철학과라는 데가 또 이게 이게 심상치 않은 학과 아니겠어요. 그렇게 즐겨 가는 학과가 아니잖아요. 문화적 깊이도 있고 잘 사는 유럽을 고교 시절 꽤 동경했어요. 프랑스나 독일에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어요. 또 많이 읽었던 작가가 독일 작가였어요. 그때 실존주의 철학이나 문학 이런 게 유행하던 시기였고 프랑스 문학도 읽고 그랬더랬죠. 그리고 고등학교 때 독일어를 가리키던 선생님 두 분이 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들이었어요." 이태수 교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평생 사귈 친구를 모두 사귄 거 같다고 말했다. 특히 고교 시절 인연을 맺은 친구들과 오래 만남을 이어갔다고 한다. 유병우 전 외무부 아주국장, 유필우 국회의원이 그의 절친이다. 인천대 시립화 주역인 고 김승묵 변호사는 이태수 교수의 여동생과 결혼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모임 이름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동아리처럼 같이 그룹을 이루고 지냈다. 음악도 듣고 같이 책도 읽고 이야기도 하고 그렇게 지냈다.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는 새 책을 빌려주는 대여점이 있었다. 몇 푼 안 내고 책을 빌려보는 것으로, 말하자면 정신적 영양 공급을 받았다고 했다. 지금 지금 고등학생들보다는 독서를 참 많이 했던 시절일 거라고 했다. 당시 볼거리, 즐길 거리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T.V도 없었고 라디오도 모든 집에 있던 시절이 아니었고, 프로그램도 풍성하지가 않았었던 시절이었다. 성장기 학생이 지적인 호기심을 달래주는 수단은 사실상 책이 유일한 통로였다. “지금은 뭐 이제 책 안 읽어도 재미있는 게 젊은 애들 유혹할 수 있는 게 얼마든지 많아요. 그 시절은 정말 책이 다른 세계로 나가보는,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옹색한 현실 바깥으로 나가보는 유일한 통로였어요. 닥치는 대로 책을 많이 읽었어요" 고교 시절 친구들과는 서울대에 입학한 이후에도 만남을 이어갔다. 기차로 통학했는데, 학교를 마치고 서울역에서 만나서 함께 기차로 하교했다. 기차를 타고 동인천역에 내리면서부터 술집 찾아다녔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고 했다. 동인천역 일대 저렴한 술집이 친구들과의 만남의 장소였다. 동인천역 주변이나 부둣가나 해변에서 '카바이트'로 숙성시킨 막걸리와 소주를 마셨어요. 지금 보면 다 악주(惡酒)였네요. 어엿한 간판 달린 술집이 아니었다. 포장마차 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까. 주전자 1개 이상씩은 마신 것 같다고 기억했다. 딱 봐도 단백질이 별로 없는 조악한 안주였다. 부두에서는 이름도 모를 생선으로 생선들이 잔뜩 들어있는 잡어탕을 주로 안주 삼았다. 저렴한 중식당도 많이 찾아갔다. 짜장면 안주에 '빼갈'도 자주 마셨다. 이태수 교수가 서울대 철학과 학생으로 공부한 시기는 1963년부터 1967년까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의 후폭풍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이태수는 대학 재학시절 한 번도 학기가 제대로 온전히 끝난 적이 없다고 기억했다. '데모' 때문이었다. 매년 5월 말부터는 학교를 거의 못 나갔다. 2학년부터 4학년까지 매번 학교가 폐쇄됐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1960년대 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내내 충실하게 강의를 할 수 있는 교수진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서울대도 마찬가지였지요. 그 시절 '교수님들' 세대는 사실은 일제 때 공부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학술 서적도 원문의 언어가 아닌 일본어로 읽는 것을 편하게 여겼던 분들이었죠. 학문을 직접 만나고 수용하는 기회는 갖지 못했던 분들이 많았어요. 일본 사람이 전해준 걸 가지고 학문적 '중탕'을 하는 분들이었죠. 영어로 쓰인 책을 직접 번역하는 것보다는 일본 사람이 일본어로 번역한 책을 번역해서 사용하고 그랬던 시절입니다." 이태수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다니면서 “평생의 스승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평생의 스승은 철학과의 고(故) 박홍규 교수였다. 이태수는 고대 철학을 공부하려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같은 책을 읽어도 전혀 감흥이 없었다. 고전을 공부하게 된 것은 박홍규 교수의 역할이 컸다. 이태수도 “가르치는 선생님이 또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 사실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한다"고 했다. 박홍규 교수 강의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차츰차츰 동화됐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공부를 하고 그때 이제 라틴어, 그리스어 교재를 도서관에서 빌려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가 아닌 교수님 댁에서 '강독' 공부를 했다. 제자처럼 공부했다. “교수님이 특명을 주셨어요. 너는 외국에 가면 철학은 물론 한국에서 할 수 없는 고전 문헌학 공부를 해 가지고 와라. 한국에서도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게끔 터를 닦는 게 네가 평생 교수하면서 할 일이다 라고요" 스승의 권유로 1973년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가난한 시절, 갑부가 아니면 외국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야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이태수는 'DAAD'라는 독일 정부가 주는 국가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고대 철학을 공부한 학생이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육을 받은 기록이 없다는 사실에 학교 측이 의문을 가졌다. 그가 선생님 댁에서 이어간 공부는 정규 교육이 아니었기에 기록에 남지 않았던 것인데 학교 측은 수업이 가능할지 확인을 요구한 것이다. 다른 학생보다 빨리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육을 받은 그는 철학과 고전문헌학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철학과에 적을 두었지만 고전문헌학과에 서 살다시피 했다. 한국에서 공부해 온 경험이 있어 현지 학생들을 빠른 시간에 따라잡았다. 유학생 신분이었지만 그는 독일의 선진적인 복지제도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독일에서의 대학교 대학원 생활이 한국의 대기업 직원의 생활보다 더 좋을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복지제도가 촘촘했다. 독일 유학길에 아내와 첫째 자녀가 함께 동행했는데, 유학생 가족이 마음껏 생활해도 부족함이 없을 방이 4개인 기숙사가 주어졌다. 기숙사 비용은 장학금 일부를면 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태수 교수는 한 선배의 이야기라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당시 독일에 유학하려면 흉부 엑스레이 사진이 필수였다고 한다. 폐질환 환자의 독일 입국을 찾아내겠다는 의도였는데, 폐결핵이 있던 선배가 다른 사람의 엑스레이 사진을 위조해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다. 독일은 1년에 두 차례씩 유학생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엑스레이 검진을 하는데, 입국 후 폐결핵이 발견됐다. 멀쩡한 학생이 학교에 다니다 폐결핵에 걸리니 학교와 보건당국은 비상에 걸렸다. 역학조사에 들어갔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해당 지자체는 기숙사가 위치한 곳의 찬바람 때문에 폐결핵에 걸린 것으로 의심된다면서 더 좋은 환경의 집을 구해줬다고 한다. 독일 유학을 통해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돈을 쓴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을 하지 못한 우리 또래는 '태극기 부대'가 되고 말았죠. “그때 처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개인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국민의 권리가 있다고. 우린 전후 세대였기 때문에 개인은 국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 놔야 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초등학교 시절 아침 조회에 '우리의 맹세'라는 걸 하기도 했거든요. 지금 복지가 부족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국가가 그런 일을 해주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더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전쟁 이후 우리 세대에게 '영웅'은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 미담이 우리가 아는 전부였어요. 우리 세대가 지금 젊은 세대하고 같은 세상을 살지만 바탕이 다른 겁니다. 저는 독일 유학을 통해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돈을 쓴다'는 걸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을 해보지 못한 우리 또래는 '태극기 부대'가 되고 말았죠. 이러다 나라 살림 망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모교 스승의 부름을 받고 1981년 귀국, 이때부터 서울대 교수로 강단에 섰다. 1989년에는 교무부처장이라는 학교 내 보직을 맡기도 했다. 1994년 그러던 중 교육부 고등교육 정책을 담당하는 대학정책실장을 맡으며 공직자로도 일한다. 이태수 교수가 대학정책실장 직을 처음 제안받은 것은 1993년이다. 문민정부 초기 어느 날 오병문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장관은 전화로 대뜸 “교육부 장관입니다. 할 얘기가 있고 한데 장관실에 놀러 오시죠"라고 했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1급 공무원으로 오라는 얘기였다. 이태수 교수는 “제가 할 수 있는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이후 또 제안이 왔다. 김숙희 장관 시절이었다. 학교 측을 통해 연락이 왔고, 학교를 휴직하고 딱 1년만 파견하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2008년 서울대에서 명예퇴직하고 인제대 교수 겸 인간환경미래연구원장으로 일하며 연구에 매진했다. 이태수 교수는 언제나 낯선 것에 이끌렸고 호기심을 자극받았다고 한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진로를 선택해야 할 시기에도 경영대학이나 법대에는 관심이 가질 않았다. 한때 마도로스가 되어 태평양을 횡단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낯선 시간에도 이끌렸다. 현재가 아닌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과거나 먼 미래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누구는 절 더러 '투어리스트'처럼 인생을 산다고 해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왜 꼭 현실에 갇혀서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하고 살까요. “어차피 현재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데, 공부마저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것을 하기는 싫었어요. 저의 오랜 취미 중 하나가 SF 영화를 보는 겁니다. 현실 얘기는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해요. 아주 먼 미래 얘기나 아주 오래 지난 과거의 얘기, 상상력을 동원해야 그림이 그려지는 그런 것들 나는 지금도 그런 거에 이끌려요. 고전을 공부하면서도 그랬어요. 고전기를 넘어서 문자 이전의 시대, 더 거슬러 올라가고, 자꾸 자꾸 거슬러 올라가는 게 제 관심사 입니다. 누구는 절 더러 '투어리스트'처럼 인생을 산다고 해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런 마음을 갖고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꼭 현실에 갇혀서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하고 살까요. 스스로를 가둬놓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머릿속에는 우주의 시작부터 끝까지 담아낼 수 있는 크기의 호기심이 있어요. 견강부회고 억지인 것 같지만 항구가 있던 도시 인천에서 자란 것이 나의 성향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현행법과 다른 복잡한 계산 논란 학교급식법엔 식품비 보호자 부담현실은 걷지 않고 지자체가 떠안아공공기관 갈등 부추기는 정산 방식행정력 낭비·돌발변수 취약한 구조 국가적 차원의 정책 결정 없이 지자체 현장에서부터 도입된 무상급식은 실행과정에서 다양한 오류를 낳는다. 현행법을 겉돌며 복잡하게 운용되는 탓에 행정력 낭비는 물론 여러 돌발변수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18일 경기도교육청과 도내 시·군에 따르면 현행 학교급식법은 급식에 필요한 경비를 크게 세가지로 구분한다. 급식시설·설비비, 운영비(연료·인건비 등), 식품비 등이다. 이 중 시설·설비비는 부담주체가 교육청이지만 국가나 지자체가 지원할 수 있다. 운영비는 교육청 부담을 원칙으로 하되 보호자가 일부를 부담할 수 있고, 식품비는 보호자가 내는 것이 원칙이다. → 그래픽 참조그러나 현실에선 보호자에게 급식비를 걷지 않는다. 교육복지 차원에서 교육청과 지자체가 '무상'급식에 합의했기 때문이다.도교육청과 각 지자체는 학교급식법 제8조 4항과 제9조를 근거로 무상급식을 시행중이다. 이들 조항에는 '지자체가 보호자가 부담할 경비와 학교급식에 필요한 식품비 등을 지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현행법상 각 시·군은 언제든 지원을 끊을 수 있다. 급식비를 지원하는 것이 법상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미 교육현장에 안착한 무상급식을 폐지할 경우 따르는 정치적 리스크 등은 지자체장이 쉽사리 결단을 내릴 수 없게 만든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에 반대하다 주민투표 끝에 사퇴하고, 2015년 홍준표 지사 재임시절 경남도에서 무상급식이 중단됐다가 다시 시행된 사례 등은 한국사회에서 '애들 밥값'이 주는 정치적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계산하기도, 정산하기도 매우 복잡한 무상급식 예산은 현장에서 적잖은 논란을 발생시킨다. 대응투자 형식의 예산 분담은 공공기관 간 갈등의 소지로도 작용하는 모양새다.학교급식경비 마련은 도교육청이 전담해 예산을 짜는 일에서 시작한다. 필요한 금액이 나오면 경기도는 도교육청에 예산을 전달하고, 이는 도교육청 예산과 함께 지원금 형태로 각 학교에 전달된다. 그러나 시·군의 예산은 다르다. 각 학교가 보조금 신청서를 내 교부받는 별도의 절차를 거친다.이 과정에서 각 학교는 식품비와 운영비, 조리실무사의 인건비 항목으로 보조금을 받고도, 지출은 식품비에만 하는 일이 벌어진다. 학교 행정업무 경감을 위한 조치라고는 하나, 정산받는 입장에선 보조금의 변칙처리로도 해석할 수 있는 일이다.시·군에선 이런 번거로운 일을 14년간 반복하면서 쌓인 불만이 상당하다.특히 업무 담당자 회의로만 매년 수백억원대의 예산을 확정하는 관행과 도교육청이 재정자립도를 근거로 분담률을 설정하는 기준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모든 시·군의 공통적인 주장이다.그밖에 '조리실무사 인건비 보조는 보조금관리법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의정부·안양·시흥)', '매년 도교육청이 통보하는 금액과 학교 신청금액이 다르다(양평)', '경비 산출파일이 너무 복잡하다(안산)', '회계연도에 맞지 않는 배정액 산정은 회계연도의 독립 원칙에 어긋난다(여주)' 등 다양한 의견이 산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실정이다.도교육청 관계자는 "학교급식 예산을 편성할 때마다 모든 지자체에 성실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데,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면서 "예산의 분담 구조를 개선하는 것은 중장기적으로 필요한 일이지만, 당장 변화를 가져오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김도란·장태복기자 doran@kyeongin.com현행법과 다른 지자체서 도입한 무상급식은 수많은 오류를 발생시키고 있다. 사진은 도내 고등학교내 식당. /경인일보DB
눈물도 얼어붙은 행군… 70여년 묻혀있던 참혹한 비극 졸속·급조 동원 민간인들, 영하 기온서식량도 피복도 없이 '남쪽 이동' 강요"해골같은 꼴로 1만명 이상의 장정들 전염병에 학교강당, 사과창고서 숨져"정부 무능·관리부실에 대규모 피해시간 흘러 과거기록 찾기도 쉽지 않아스물 다섯 유정수는 1950년 12월 23일 오전 8시 수원공설운동장에 섰다. 미 공군 기록(USAF)에 따르면 당시 기온은 영하 1도, 한낮 최고기온이 영상 2.4도에 불과했다. 특히 그가 행군을 한 새벽시간은 영하 4도까지 기온이 떨어졌다. 변변치 못한 옷차림에 체감 기온은 훨씬 더 떨어졌을 것이다.유씨는 방위군이었다. 6·25 발발로 급하게 동원된 '국민방위군'이었다.다음 주면 6·25 발생 74년을 맞는다. 비교적 상세한 국군의 행적에 비해 제대로 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국민방위군의 실상은 지난 2020년 경인일보가 발굴한 고 유정수씨의 일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유씨 기록을 제외하곤 '전환시대의 논리'를 쓴 리영희(1929~2010) 교수와 고 정진석(1931~2021) 추기경의 증언이 그나마 알려진 편이다.정 추기경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국민방위군 징집이 종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라고 설명했다. 1950년 12월 말 서울 창경원에 모여 남양주 덕소에서 꽝꽝 언 남한강을 건넜던 일이다. 폭설에 눈 위에 지쳐 쓰러져 있다 겨우 강을 건넜는데 얼음이 깨지며 뒤쪽에 있던 무리가 빠져 죽은 것이다. 하루 10시간 이상 걸으며 주먹밥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 앞선 사람이 지뢰를 밟아 죽는 모습을 보는 고행이었다.리 교수의 증언도 일맥상통한다. 국민방위군이 진주로 남하했는데 해골같은 꼴을 한 만명 이상 장정이 학교강당, 사과창고에서 죽어간 것이다. 감자 한 알, 고구마 한 개로 겨우 남쪽에 다다랐지만 옷은 누더기에 신발은 해어져 맨발이었고 사람이 넘쳐 교실에 수용되지 않은 사람은 밖에서 얼어죽어야 했다.참상이었다. 이 비극의 원인이 된 국민방위군은 무엇인가. 정 추기경, 리 교수, 그리고 유씨는 왜 국민방위군에 편입됐던 걸까.1950년 말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한 것이 계기다. 전선이 밀리기 시작하자 당시 정부는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 장정들은 제2국민병에 편입시킨다', '제2국민병 가운데 학생을 제외한 자는 지원을 받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킨다', '육군참모총장은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받아 국민방위군을 지휘 감독한다'는 원칙으로 국민방위군 부대를 편성했다.한 마디로 모든 절차가 졸속이었다. 엉겁결에 징집된 민간인들은 육군참모총장도 국방부 장관의 지시도 받지 못했다. 군대라면 보급이 있어야 했을 테지만 피복도 식량도 없었다. '남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뿐이었고 이 명령은 곧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라는 명령이었다. 전선이 아니라 길에서 교실에서 강당에서 창고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6~2010년 활동)는 "정부는 미처 관리대책 등을 마련하기도 전에 중공군의 남침으로 인하여 급속히 수십만에 달하는 국민방위군을 남쪽으로 무리하게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워낙 급작스런 이동작전이었으므로 피복, 식량, 의약품, 수용시설 등 모든 면에서 준비가 부족하여 대규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하였다"고 기록했다. 7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정확한 징집 규모는 물론 피해 규모도 밝혀지지 않은 국민방위군 사건의 전모는 유씨 일기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국가의 부름을 받고 징집에 응한 유씨는 고향 화성에서 또래 남자 몇몇과 함께 수원공설운동장으로 향한다. 현재 수원공설운동장 자리에는 구 경기도청사가 있다. 팔달산 아래 구청사 운동장이 바로 수원공설운동장, 집결지 위치다. 유씨 기록엔 수원공설운동장에 족히 만 명이 되는 사내들이 집결한 것으로 나온다.서울(창덕궁), 경기북부(안산초등학교·아현초등학교), 경기남부(수원공설운동장), 인천(축현초등학교·동산중학교) 등에 모인 국민방위군은 각기 남쪽으로 향한다. 유씨는 용인, 장호원, 문경, 상주, 의성, 영천을 거쳐 청도에 도착했다.12월 23일 출발해 1월 4일까지 이어진 행군이었다. 이들은 당시 전쟁포로보다 적은 양의 밥을 먹으며 한겨울 행군에 나섰다. 유씨 일기에는 하루 배식이 '백미1일4홉반'이라는 기록이 있다. 전쟁포로는 이보다 많은 1일5홉5작의 식량이 주어졌다. 1되는 곡식을 두 손으로 움켜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을 뜻하고 10홉이 1되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한줌 식량으로 버틴 셈이다. 충청북도 괴산과 경상북도 문경의 경계를 이루는 이화령을 고생 끝에 넘은 이야기, 그 과정에서 동사자가 속출한 전언 등이 일기에 담겼다. 도착해서도 문제였다. 앞서 리 교수 증언처럼 교육대 생활도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약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거나와 100명 이상이 한 교실에 몰려 자고 찬 바닥에 가마니 두어장으로 냉골을 견뎌야 했다. 소금도 없는 주먹밥을 배식하고 끝내 배식은 '1홉1작'으로 줄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은 전염병 피해로 이어졌다. 급성열병 질환 '발진티푸스'였다.경인일보는 유씨 일기에 이어 강화도에서 부산으로 행군한 류기안씨의 수기를 추가로 입수해 지난 2020년 이같은 사실을 증명했다. 류씨의 수기에는 "아침 햇볕이 솟아 따뜻해질 무렵에 가마니 방바닥을 디려다(들여다) 보면 움질거리는 것이 모두 이였습니다. 이런 고생은 호사하고 어찌도 복합한 곳에 인원이 많은지 이루 말할 여지조차 없었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부산 경험을 서술한 대목인데 발진티푸스는 바로 이(louse)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이다. 비위생적이며 다수가 밀접한 환경은 발진티푸스의 발현을 촉진했다. 1951년 발진티푸스로 숨졌다고 기록된 사례만 5천667명으로 전해(1950년 2천523명)와 이듬해(1952년 923건)에 비해 높다. 기록되지 않고 그저 열을 앓다 숨진 국민방위군이 얼마나 될지는 가늠할 수가 없다.보급품 미비로 얼어 죽고 전염병을 앓다 죽은 국민방위군은 당시 정부가 얼마나 무능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74년이 흘러 다시 6·25다. 장터가 열릴 준비가 한창인 구경기도청사 운동장, 카페가 즐비한 남양주 덕소에서 과거 일어난 비극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풍경은 바뀌었고 국민방위군 피해자는 세상을 떠났다. 남은 것은 기록이며 기록을 읽고 기억하는 자다.경인일보 홈페이지에는 국민방위군 유정수씨의 일기 전문이 공개돼 있다. 일독을 권한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국민방위군 고 유정수씨 유품, 일기장, 신분증. /경인일보DB국민방위군 고 유정수씨 유품, 일기장, 신분증. /경인일보DB일기 전문 온라인
무상급식 경비에 허리 휘는 지자체들 각 지자체, 평균 34.5% 비용 분담수원·고양·부천 등 7곳 적게 편성단가·인건비 인상… 재정난 악화도교육청 산정 분담금 문제 지적 2010년 농어촌 지역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2019년 경기도 모든 유·초·중·고에 도입된 무상급식. 학부모들에게 이제 급식비는 '당연히 안내는 비용'이라는 인식이 생길 정도로 현장에서 자리잡았다.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170만명 학생에게 제공되는 급식을 위해 학부모와 학생의 부담을 대신 짊어진 교육청과 지자체들 사이에선 지금 누가 얼마를 분담할지를 두고 줄다리기가 팽팽하다.무상급식 예산을 두고 총성 없는 전쟁을 시작한 경기도내 지자체들과 경기도교육청의 갈등을 3회에 걸쳐 들여다보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애들 밥값'에 대한 물음을 던져본다. → 편집자 주무상급식에 필요한 예산 부담을 두고 경기도 각 시·군과 도교육청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역대급 재정난 속에서 학교급식경비 분담금이 큰 부담이 된다는 지자체와 무상급식의 취지와 역사성을 강조하는 도교육청의 입장 차가 상당하다.16일 도내 지자체와 도교육청 등에 따르면 무상급식 경비는 지역별 학생수와 재정자립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도교육청이 51.3%, 경기도가 14.2%, 각 지자체가 34.5%씩을 분담한다.무상급식 예산은 도교육청이 매년 8월마다 내년에 필요한 금액을 계산한 뒤 시·군에 요청하는 절차를 밟는다. 이듬해 각 시·군이 예산을 준비하면 각 학교들이 신청해 지자체 보조금을 받는 식이다.그런데 올해 본예산에 학교급식경비를 필요액보다 적게 세운 지자체가 적지 않다. 수원과 고양, 부천, 안산, 시흥, 의정부, 하남 등 7곳이 도교육청이 산정한 금액보다 적은 돈을 본예산에 편성했다.이 중 안산과 하남은 1차 추경을 통해 부족분을 채운 상태지만, 나머지 지자체는 재정 상황을 고려해 하반기에 추가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여기에 화성, 평택, 포천도 인구 변동에 따른 부족분이 생길 수 있어 하반기 추경 예산을 염두에 두고 있다.만약 이 지자체들 중 학교급식 예산을 모두 확보하지 못하는 곳이 생기면, 그 지역 학교에선 무상급식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지자체들이 학교급식 경비를 모두 확보하지 않은 이유는 복합적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재정난이지만, 분담 비율 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도 상당히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올해 학교급식 분담금 444억원 중 250억원만 본예산에 편성한 고양시의 경우, 무상급식도 다른 국도비 사업과 같이 기초지자체 분담비율을 전체 필요 예산의 20% 수준에 맞춰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이같이 편성했다고 설명했다.고양시 전체 유·초·중·고 무상급식에 필요한 예산은 1천204억원인데, 도교육청이 산정해 통보한 지자체 분담금 444억원(약 36%)은 지나치게 많다는 게 고양시의 주장이다.고양시는 올해 무상급식을 중단할 수는 없기에 추경으로 나머지 부족분을 확보하기로 했지만, 비용 분담에 대한 문제제기는 계속해 나가겠다는 계획이다.역대급 재정난을 겪는 의정부시는 사정이 더 심각하다. 도교육청이 정한 2024학년도 분담금 149억원 중 본예산에 식품비 105억원만 편성한 의정부시는 추경을 감안하더라도 학교급식 보조금에 120억원 이상 지출하긴 어렵다는 입장이다.의정부시 관계자는 "재정 위기를 계기로 무상급식 분담금을 검토한 결과, 그동안 학교들에 지급했던 보조금 일부(운영비와 인건비) 항목이 지방보조금법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얻었다"며 "올해부턴 식품비 항목만 보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그밖에 올해 예산을 다 확보한 시군조차도 "급식 단가와 인건비가 매년 오르면서 해마다 큰 부담이 되고 있다. 내년에는 시 재정이 더 악화될 것으로 보여 하향 조정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도교육청 관계자는 "지자체들의 어려운 사정은 이해하지만, 이미 지난해 확정한 무상급식 예산에 갑자기 구멍이 나면 피해는 학생과 학부모가 볼 수 있다"면서 "각 시·군과 소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무상급식 분담률 조정… 지자체 따로, 또같이 '하향' 외친다 [애들 밥값은 누가 내야할까·(上)]) /김도란·장태복기자 doran@kyeongin.com경기도내 무상급식 비용을 일부 지자체에서 재정난 등을 이유로 분담금을 필요 수준 이하로 예산에 편성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무상급식 운영에 차질이 우려되고 있다. 사진은 무상급식을 시행 중인 경기도내 한 초등학교 급식실. 2024.5.30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각 지자체들 시스템 개선 요구 하남시, 도·시군정책협에 건의안의정부시, 결정 참여 협의체 결집예산 방도없는 도교육청은 '난감' 무상급식에 들어가는 예산 부담이 커짐에 따라 경기도내 각 지자체들이 경기도와 경기도교육청에 시스템 개선을 공식 요청하는 일이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하남시는 올 초 도교육청에 학교급식경비 분담률 완화를 검토 요청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오는 25일 열리는 경기도-시군간 정책협의회 안건으로 '학교급식경비 분담률 조정 건의안'을 냈다.하남시는 '물가 상승 여파로 학교급식에 들어가는 비용은 점점 늘어나는 반면 경기침체로 기초지자체 세수는 부족하다'면서 분담률 조정을 주장하고 있다.고양시는 지난해 8월 경기북부시장군수협의회에 분담률 하향 조정 안건을 제출한 데 이어 같은해 8월과 10월 도교육청에 2차례 공문을 보내 개선을 요청했다.그러나 공식 답변 대신 유선으로만 도교육청으로부터 '예산 상황이 좋지 않으니, 사업의 연속성을 고려해 현행 방식을 유지해달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고양시는 밝혔다.의정부시는 매년 반복되는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2025학년도 학교급식경비 분담금 결정 과정에 참여할 시·군 협의체 구성을 검토한다는 방침이다.실제 의정부시가 경기도 30개 시·군에 공문을 보내 협의체 참여 의사를 물었더니 18개 지자체가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파악됐다.무상급식 사업을 이끌어가고 있는 도교육청은 지자체들의 이런 움직임이 난감하다는 입장이다.지자체 주도로 무상급식이 도입되면서 천차만별이었던 지역별 상황을 다듬으면서 14년간 흘러왔는데, 맥락을 갑작스럽게 바꾸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또 지금까지 매년 지자체별로 각각 협의해 분담률을 정하고, 동의를 받았는데 갑자기 시·군이 재정상황을 이유로 태도를 바꾸면 이미 현장에서 이뤄지는 무상급식을 어떻게 해야하냐는 한탄 섞인 반응도 나온다.도교육청 관계자는 "그동안 매년 지자체와 상호 합의를 통해 학교급식 경비를 분담해왔다. 교육복지를 위한 아름다운 역사로 평가한다"면서 "자체 수익이 없는 도교육청으로선 당장 예산을 충당할 곳이 없는데, 이런 여건을 고려하지 않는 지자체들의 주장이 아쉬울 따름"이라고 했다. /김도란·장태복기자 doran@kyeongin.com무상급식에 대한 예산부담으로 인해 지자체들이 경기도와 도교육청에 시스템 개선을 요청하고 있다. 사진은 무상급식 시행중인 도내 고등학교. /경인일보DB
실패 경험 토대 활성화 방안 찾자 연수구 '쿠키' 공간 제약공급업체 수익 악화 철수송도 제한 사업도 폐지 가능성'따릉이' 서울시 전역 이용4천만회… 시민 호응 뜨거워"市 차원 운영해야 효율적""단돈 1천원 정도면 탈 수 있는 공공자전거 '쿠키'가 사라져서 아쉽습니다."직장인 배승환(29·연수구)씨는 "카카오 바이크는 10분 정도만 타도 2천원이나 든다"며 이렇게 말했다.인천 10개 군·구 중에서 연수구는 자전거 활성화 정책으로 '공공자전거'를 도입해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실험은 실패했다. 연수구 공공자전거는 지역 내에서만 이용할 수 있었다. 공간적인 제약에 구민 만족도는 떨어졌다. 연수구와 계약을 맺고 자전거를 공급한 민간 업체는 수익성 악화로 결국 철수했다.다만 연수구 공공자전거 사업이 실패한 원인을 들여다보면 인천 자전거 활성화 정책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연수구는 2018년 삼천리자전거와 협약을 체결하고, 약 1천여대의 공공자전거인 '쿠키'를 인천에서 처음 운영했다. 삼천리자전거가 철수한 뒤 2021년 7월엔 (주)옴니시스템과 협약을 맺고 공공자전거 '타조' 1천500여대를 배치하기도 했다. 연수구가 공공자전거를 도입한 이유는 구민들이 자전거로 주거지와 버스정류장, 지하철 역사 등을 편리하게 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취지였다.연수구 공공자전거 '쿠키'와 '타조'는 서울시가 2015년 도입한 '따릉이' 공공자전거 사업과 비슷한 구조다. 따릉이는 '시민들의 발'로 자리잡은 반면, 연수구의 '쿠키'와 '타조'가 정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연수구 공공자전거 운영 업체들이 철수한 이유로는 공간 제약과 낮은 사업성이 꼽힌다. 인천시민은 누구나 공공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반납 장소가 연수구로 제한돼 있다 보니 남동구, 미추홀구 등 인접 지역의 구민들에게는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업체는 서울 '따릉이'에 비해 시간당 400원 정도 비싼 요금을 받았는데도 운영하면 할수록 적자가 늘어나면서 사업을 포기했다.연수구 관계자는 "아무리 공공성을 위한 사업이지만 수익 자체가 나지 않으니 협약을 맺은 업체들이 모두 사업을 포기했다"며 "더군다나 연수구에서만 이 자전거를 탈 수 있다 보니 구민들의 이용에도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이제 연수구 구민들은 카카오, 쏘카 등이 운영 중인 공유자전거(2천900여대)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쿠키', '타조'는 대여료가 1시간에 1천500원이었는데, 공유자전거는 시간당 평균 6천원에 달한다.그나마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연수구 내 송도국제도시에서 제한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공공자전거 사업도 폐지될 가능성이 크다. 인천경제청은 기부채납 방식으로 받은 100여대의 자전거를 2013년부터 무료 대여하는 방식으로 공공자전거를 운영했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신분증을 맡기면 무료로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이용 건수가 47건, 올해 들어선 8건에 그치고 있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송도국제도시 내에서만 이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어 이용률이 저조하다"며 "공공자전거 취지를 살리려면 지자체가 아닌 인천시 차원에서 운영하는 게 사업 효용성을 늘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서울시는 매년 350여억원 예산을 투입해 공공자전거 '따릉이'를 4만5천여 대 운영 중이다. 서울 25개 자치구 전역에서 따릉이를 이용할 수 있어 시민들의 호응이 좋다. 지난해 이용건수만 4천490만5천313회에 이른다. 올해 서울시가 출시한 기후동행카드 월 정액권(6만5천원)을 사용하면 따릉이를 무제한으로 탈 수도 있어 앞으로 이용량은 더 증가할 전망이다.서울시 도시교통실 관계자는 "시민들의 교통 편의성과 환경보호 측면에서 도입한 공공사업인 만큼 따릉이의 이용률 증가는 고무적"이라며 "공공자전거 외에도 자전거 이용을 늘리기 위해 인프라 확충 방안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 관련기사 (안전성 확보·인프라 확충… 인천시, 광역단위 공공자전거 도입해야 [길 잃은 인천 자전거 정책·(下)]) /이상우기자 beewoo@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2018년 인천 연수구에서 운영했던 공공자전거 쿠키. /경인일보DB10일 오후 인천시내 민간 플랫폼 업체에서 운영하는 공유 자전거들이 놓여있다. 자전거 활성화 정책으로 연수구가 추진했던 공공자전거사업은 '반납 장소 부족'과 '수익성 악화' 등의 이유로 실패하고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은 민간 플랫폼 업체의 공유 자전거가 그 자리를 꿰찼다. 2024.6.10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