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공화국내 유일한 한글 신문인 고려일보의 김성조 부주필은 창간 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한국기자단에게 문득 '고려인'이란 명칭을 화두로 던졌다.

그들이 자신들을 '조선인'도, '한국인'도 아닌 '고려인'으로 부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전히 갈라진 채 총칼을 마주하고 있는 조국 때문이다.
 
그들도 분명 동포이건만 우리는 그동안 편협적 세계화에 안주해 이들의 고뇌와 존재 자체를 잊고 살아 온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본다. 지난 상편에 이어 하편에는 민족성을 지켜온 고려일보 80년 역사와 고려인의 조국에 대한 기대 등을 싣는다. 〈편집자주〉

#재러고려인의 요람 고려일보

러시아 원동(연해주 지역)에 조선사람이 처음 나타난 때는 1863년이다. 당시 굶주림과 가난을 피해 13가구가 치진헤 강변지대로 이주해 왔고 그후 이주가 계속돼 1872년에는 사마르카 강변지대에 '블라고슬로벤노예'라는 커다란 조선인 마을이 처음으로 생겼다.

일제 식민지시대 연해주 한인들 가운데 진보적 사상가의 중심지는 블라디보스토크였다. 당시 이곳에는 5천여명의 한인들이 살았고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이 창간됐다. 이 신문의 발행인은 당시 유명 언론인이었던 정순만씨와 '시일야방성대곡'의 위암 장지연 선생이었다.

근로대중의 문화, 정치계몽활동에서 정기간행물의 역할은 대단히 컸다. 1923년경 연해주지역에서 6개의 잡지와 '아반가르드(선봉)' '문화' '적선' '새 세계' '노동자' '로동신문' '동아 공산신문' 등 7개의 신문이 한글로 발간됐다.

이 중 가장 대중적인 신문이 현 고려일보의 전신인 '선봉'으로 1923년 3월1일 3·1독립만세운동 4주년을 기념해 창간호가 발간됐으며 1932년에는 일간신문이 되어 발행부수가 1만부에 달했다.

'선봉'신문은 1939년 '레닌기치'란 새 이름으로 개칭되어 한달 15회, 6천부의 부수로 발간됐고 1978년에는 지금의 알마티 시로 이전해 전 소련 공화국간 신문으로 격상됐다. 또 독자층 확대의 필요성에 따라 한글과 함께 러시아어로 신문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1991년 '레닌기치'는 고려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주 3회 발행에 CIS(독립국가연합)내 한인들의 소식을 전달하는 국제신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창간 80주년 고려일보의 오늘

지난달 28일 카자흐스탄의 최대도시인 알마티시 한국어교육원 대극장에서는 한국언론재단 박기정 이사장과 한국기자협회 이상기 회장, 한국기자 방문단, 고려인 등 500여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고려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식'이 성대히 열렸다.

창간 행사에 앞서 우리는 한반도로부터 5천㎞ 이상 떨어진 카자흐스탄 땅에 우리 글 신문이, 그것도 한 세기가 다 되도록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고려일보에 대한 보다 생생한 역사를 듣기 위해 원로 고려인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정상진(85·전 고려일보기자)옹을 비롯 윤 세르게이(80·학그룹 부회장), 박이완(73·고려인과학기술협회장), 이 루드밀라(70·독립운동가 이동휘 손녀), 최 엘리자베떼(69·독립운동가 최재형 손녀) 등 12명의 원로 고려인들이 참석해 이민 80년 역사의 산 증인이자 지금은 존폐의 위기까지 몰리고 있는 고려일보의 실상에 대해 언급했다.

현 고려일보의 최대 위기는 초창기 이주세대와 달리 2세, 3세 젊은층으로 가면서 우리 말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는 현실인식에 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카자흐스탄은 고려인의 조국, 조선은 역사적 조국'이란 인식이 고착화되고 있으며 러시아어와 카자흐스탄어와 달리 우리 말이 실생활에 전혀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최고령자인 정상진 옹은 “한글을 아는 후배 기자들이 뒤를 잇지 않아 고려일보 한글판을 양원식(70) 고문과 김성조 부주필이 만들고 있으며 이들 두사람이 은퇴하면 더 이상 한글 신문을 만들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며 “러시아어로만 신문이 나오면 조선 정신이 사라지게 된다”고 탄식했다.

#조국에 바라는 고려인의 기대

카자흐스탄공화국내 고려인들의 주업은 농업이다. 강제이주 초기 척박한 황무지에 내버려진 고려인들은 노인, 부녀자, 아이 가릴 것 없이 모두 나서 새벽부터 밤까지 농사를 짓기 위한 수로를 팠다.

우슈토베 가라타우구역 고려인협회에서 만난 고려인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타고난 근면성과 부지런함으로 극복하고 지금은 수천평의 땅에 쌀과 보리, 양파, 수박 등을 재배하는 대농으로 성장했다.

지금 이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비록 대규모 영농을 하고는 있지만 파종과 수확을 전적으로 수작업에만 의존해 일손 구하기가 갈수록 여의치 않을뿐 아니라 생산성 또한 현저히 떨어진다는데 있다.

쌀 전문가인 박 니콜라이(67) 박사는 “최근 일부 러시아제 농기계가 사용되고 있으나 물량이 많지 않은데다 가격이 비싸 한국의 중고 농기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