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용
이세정 경기도 철도물류과장
나는 남한의 끝자락 연천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당시 낮에는 빈번히 오가는 군부대 차량으로 흙먼지가 날리고 밤에는 멀리서 울려오는 훈련 포성이 적막을 깨는 최전방 지역이었으며, 교육·문화적 여건 또한 열악했다. 1968년 1월, 30여명의 북한 무장공비들이 연천, 파주를 거쳐 서울로 침투한 사건이 발생한 다음부터 국내 안보 위기감이 급속히 고조됐다. 접경지역인 경기북부 주민들은 더 큰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남북 상호간 적대심이 커지고 통일의 꿈은 멀어져 갔다.

이런 상황에도 경원선 철마는 쉼 없이 서울과 연천을 오가며 북부 주민들과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희망을 함께 나누었다. 동두천까지 전철 1호선이 연장되었지만, 동두천~백마고지 구간(41km)은 아직도 디젤 열차가 대신하고 있다.

지난해 8월 동료직원 두 명과 함께 경원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운행을 시작한 DMZ 관광열차를 탔다. 지금의 전철 1호선 노선이 아니라 원래의 경원선 노선을 따라 굽이굽이 가는 기차를 타는 특별한 체험이었다. 물론 전기가 아닌 오래된 디젤동력차이고 오래된 열차라서 속도는 느렸지만 정취와 여유가 있어 더 좋았다. ‘곰돌이 푸’의 저자 AA 밀른이 ‘열차는 행복해지기에 아주 이상적인 곳’이라고 했던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듯이 설레었고 세 명의 여승무원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윽고 즐겁게 물놀이하던 한탄강의 다리를 지난다. 북한 평강지역에서 발원하여 장고한 세월을 흐르는 큰 여울이며 6·25 때는 격렬한 격전지였다.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가는 독립군 같은 마음이 들면서 저절로 한 시 구절이 떠올랐다. ‘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오늘밤도/너의 가슴을 밟는 뭇 슬픔이 목마르고/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이용악,‘두만강 우리의 강아’)

종착역인 백마고지 역에 내려 철원 땅을 밟았다. DMZ 지역 같지 않게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하늘은 비취처럼 푸르고 공기는 꿀처럼 달콤했다. 경원선 철도 중단지점, 곡식이 무르익어 가는 넓은 철원평야, 금강산 전기철도가 다녔던 철교, 27만년 된 주상절리에서 무슨 소리가 울려왔다. 아픔의 절규가 아니라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처럼 들렸다.

달포가 지나 15명의 경기도 대학생 기자단원들과 함께 다시 이 열차를 타고 연천을 갔다. 학생들은 통일의 꿈을 품고 돌아와 각자의 SNS와 블로그에 실었다. 그것들은 민들레 홀씨처럼 사이버 공간에서 멀리 퍼져갔을 것이다. 지난 8월 5일엔 남북 분단 70주년을 맞아 경원선 단절구간 중 남측 구간 백마고지~DMZ 월정리간 (9.3km) 복원사업 착공식이 있었다. 북측 구간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북한지역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데 우리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 이제 분단과 안보이슈의 중심에서 고난을 감내하면서 통일의 꿈을 잃지 않고 살아온 연천과 인근 주민들에게 밝은 미래가 보이는 듯하다.

최근 ‘통일과 나눔 재단’이 주관하는 경원선 복원사업 ‘침목나눔운동’에 한 계좌를 가입했다. 1만5천개의 침목 중 한 개에 내 이름이 새겨진다고 한다. ‘나는 듯한 철마’가 내 침목을 딛고 원산까지 달려갈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올겨울에는 눈 덮인 대지와 산하를 보기 위해 철원을 가야겠다. 오다가 연천역에서 요것조것 물건도 사고.

/이세정 경기도 철도물류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