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없는 의사는 ‘무의미’
내게 주어진 인술의 사명을
베풀수 있어 감사할 따름…
같은 태양아래 기쁘건 슬프건
힘든 인생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지하는 사이이기에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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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국양 가천대 의학전문대학 원장
수술을 주업으로 하는 외과의사라 나는 월요일부터 수요일은 수술을 주로 하고 목·금요일은 외래방문환자를 보는데 만나는 환자분들은 하루에 30~50명 정도이다. 요즘은 지원자도 거의 없고 인기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되어 한숨도 말라버린 흉부외과지만 그래도 어려운 심장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한 생명을 보고 있노라면 히말라야를 정복한 것만큼 뿌듯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외래는 수술상담을 하러 처음 오는 환자 분들도 있고 수술 후에 정기적으로 약을 타러 오시는 분들도 있는데 나는 특성상 환자분이 어디 사는데 자녀가 몇이 있고 올 때 사소한 선물이라도 사오면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 진료기록에 꼼꼼히 적는 편이어서 다음 방문할 때는 그 기록을 보고 항상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다. 혹여 올 때가 된 환자가 오지 않으면 전화번호를 찾아서 집으로 전화하기도 하는데 가족으로부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몇 십 년 동안 나누었던 정 때문에 허전해지면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월을 느끼기도 한다. 전문의가 된 지 30년이 넘었으니 오랫동안 보는 환자들은 어쩌면 가족처럼 정도 들어서 진료실에서 헤어질 때조차 아쉬운데 하물며 이제는 영영 볼 수 없을 때에랴. 그래서 나이가 드신 분일수록 손도 잡아주고 살포시 안아주기도 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서로 아쉬워하고 나면 어느새 하루해가 짙은 노을을 남기고 낙엽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스러져 간다. 오늘 하루 나는 얼마나 의사로서 환자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는가를 돌아보면서 그만큼 존재가치를 되돌아보기도 한다. 의사는 환자 때문에 사는 것이다.

“잘 지내셨지요? 무슨 증상이 새로 생기거나 약 부작용은 없으시지요? ” 종일 매번 같은 말을 물어보면서 오후 늦은 시간이 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힘들기도 하지만 환자가 없는 의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에게 주어진 인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음을 감사할 따름이다. 명절 때 선물을 사오지 못해 미안하다고 어쩔 줄 몰라하는 환자에게는 “무슨 말이세요. 제가 환자분의 속을 제일 깊이 들여다본 사람입니다.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이 저에게 가장 큰 선물이지요”라고 말하는 재치도 늘었다. 우리나라는 현재 심장사의 법률로는 수술할 때마다 살인자(?)가 되기도 하지만 사람의 가슴을 열고 심장을 멈춘 뒤에 심장 속의 피를 빼내고 심장을 수술하는 나 말고 누가 그 사람의 속을 더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 있을 것인가?

최근에 85세 된 할머니 한 분이 외래를 찾아오셨다. 관상동맥이식술이라는 어려운 수술을 받고 10년째 외래에서 약을 타러 다니시는 분인데 오실 때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죽어야 하는데… 억지로 죽을 수도 없고…’ 하는 분이었다. 이 할머니는 아들이 둘이 있는데 남편은 일찍 여의고 한 아들은 간암으로 죽고 다른 아들은 정신병원에 있었다. 어쩌면 살아있는 것이 죄송하고 미안해서 동내 노인정에도 안 다닌다고 한다. 병원에 올 때마다 조용히 한숨만 쉬면서 인생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외래에 방문할 때면 아무리 바빠도 그동안 사는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다. 서러운 한풀이 이야기가 끝나면 두 손을 벌려 안아주곤 하였는데 등을 돌리고 쓸쓸히 돌아서는 그 할머니를 보면서 내가 처방해주는 약보다는 그분의 인생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더 필요한 처방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같은 태양 아래서 기쁘건 슬프건 인생의 힘든 부분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지하는 의사와 환자의 숙명이리라.

때로는 그렇게 힘든 심장수술, 중환자실의 호흡기 치료를 견디고 퇴원한 후에 자살하는 분들도 보는데 ‘수술만 잘해주면 뭐하나. 환자가 살아있어야지… 수술보다 중요한 것이 또 있구나’하고 속상해하기도 한다. 아침이면 ‘오늘 환자를 볼 때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가장 행복한 웃음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신체와 정신을 같이 치료하게 하소서’ 기도하기도 하고 절대 힘든 표정을 짓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한다. 환자가 없는 의사가 무슨 의미인가?

나의 인생을 바꾸어준 멘토 중의 한 분은 가천길재단의 이길여 회장님이다. 추운 겨울날 산모의 가슴을 열고 진찰을 할 때 혹시 놀랄까 봐 미리 가슴속에 청진기를 품고 있었다는 ‘따뜻한 청진기’는 잘 알려진 환자 사랑의 표현이다. 이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하루가 즐거워지는 가슴 따뜻한 스토리이다. 그분의 환자에 대한 열정은 어머니의 사랑처럼 무의식 속에서도 나를 이끌어준다. 의사는 환자 때문에 사는 것이다.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는 날 나는 의사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박국양 가천대 의학전문대학 원장